개혁교회와 개혁신학
개혁교회와 개혁신학
http://blog.daum.net/kkho1105/2417
오늘날은 개혁이란 말을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는 없고 개혁만을 부르짖다 보니 심지어 ‘개혁 피곤증’이란 신조어가 생겨질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시대의 개혁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생각에 서글픔을 더한다.
개혁(改革)이란 말의 한글사전은 ‘새롭게 뜯어 고친다’는 의미로 혁신(革新)이란 뜻과 비슷한 개념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개혁이란 용어의 출발은 개혁 교회,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란 말에서다. 1560년에 공식적으로 대륙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의미는 프로테스탄트, 또는 복음적(evangelical)이란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여 졌다.
개혁신학의 형성 역시 교회의 타락에서 그 기원을 생각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이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교권주의로 기울어졌다. 그 후 교회의 생명적 신앙은 깊은 수면에 빠지게 되었다. 동시에 헬라파 철학과 동방종교 및 이방종교의 영향으로 교회는 그 본질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 이상 교회를 교회라 일컬을 수 없을 만큼 타락했던 중세시대, 깊은 타락의 늪으로부터 교회를 구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외침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개혁신학이다.
정원태 박사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색을 ‘하나님의 절대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성경주의(Sola Scriptura),’ ‘절대 예정교리(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로 정의했다. 이는 그 시대 개혁자들이 가졌던 신학사상을 가장 잘 대변한 표현이란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개혁신학’이란 의미를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개혁신학’이란 개혁자들이 그들 시대에 행했던 제도와 관습을 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앵무새처럼 되 뇌이며 답습해 가는 것이 개혁신학은 아닌 것이다. 특히 개혁자들이 깨닫고 주장했던 신학의 틀 안에 성경을 묶어두려고 하는 시도는 심히 염려스러운 문제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이나 깨달음이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적극 동의하며 크게 감사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을 성경보다 우선순위에 둘 수는 없다. 모든 신학의 궁극적 답은 오직 성경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개혁자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밝히거나 거기에서 추론되는 진리가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교회가 거기에 매이기를 원치 않았다. 때문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교회에 지운 멍에들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권위에만 그들의 양심이 매이기를 소원했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개혁교회와 신학교에서 조차 ‘경배와 찬양’ ‘셀 목회’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등 인본주의와 물량주의가 만들어낸 잘못된 방법론들이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경우들이 횡횡하고 있다. 이는 심히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혁신학에는 ‘오직 성경’이란 대 전제(前提)가 있다. 아울러 모든 신학은 그것이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을 밝히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때문에 필자는 어떤 신학적 저서나 논문이든 가장 많이 인용(引用)되고 인유(引喩)되어야 할 각주(脚註)역시 성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 성경을 주(註)로 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치해 보이고 신학자들의 이름을 꿰며 그들의 신학사상을 유창하게 언급하는 것이 훨씬 유식하고 멋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오늘 이 시대야 말로 종교개혁시대와 같이 가장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가 아닐지? 개혁의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자신과 우리들의 교회가 아닐지를 깊이 헤아려야 할 때란 생각이 든다.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은 오직 끊임없는 자아(自我)의 개혁으로부터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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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개혁이란 말을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는 없고 개혁만을 부르짖다 보니 심지어 ‘개혁 피곤증’이란 신조어가 생겨질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시대의 개혁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생각에 서글픔을 더한다.
개혁(改革)이란 말의 한글사전은 ‘새롭게 뜯어 고친다’는 의미로 혁신(革新)이란 뜻과 비슷한 개념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개혁이란 용어의 출발은 개혁 교회,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란 말에서다. 1560년에 공식적으로 대륙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의미는 프로테스탄트, 또는 복음적(evangelical)이란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여 졌다.
개혁신학의 형성 역시 교회의 타락에서 그 기원을 생각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이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교권주의로 기울어졌다. 그 후 교회의 생명적 신앙은 깊은 수면에 빠지게 되었다. 동시에 헬라파 철학과 동방종교 및 이방종교의 영향으로 교회는 그 본질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 이상 교회를 교회라 일컬을 수 없을 만큼 타락했던 중세시대, 깊은 타락의 늪으로부터 교회를 구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외침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개혁신학이다.
정원태 박사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색을 ‘하나님의 절대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성경주의(Sola Scriptura),’ ‘절대 예정교리(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로 정의했다. 이는 그 시대 개혁자들이 가졌던 신학사상을 가장 잘 대변한 표현이란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개혁신학’이란 의미를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개혁신학’이란 개혁자들이 그들 시대에 행했던 제도와 관습을 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앵무새처럼 되 뇌이며 답습해 가는 것이 개혁신학은 아닌 것이다. 특히 개혁자들이 깨닫고 주장했던 신학의 틀 안에 성경을 묶어두려고 하는 시도는 심히 염려스러운 문제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이나 깨달음이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적극 동의하며 크게 감사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을 성경보다 우선순위에 둘 수는 없다. 모든 신학의 궁극적 답은 오직 성경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개혁자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밝히거나 거기에서 추론되는 진리가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교회가 거기에 매이기를 원치 않았다. 때문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교회에 지운 멍에들을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권위에만 그들의 양심이 매이기를 소원했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개혁교회와 신학교에서 조차 ‘경배와 찬양’ ‘셀 목회’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등 인본주의와 물량주의가 만들어낸 잘못된 방법론들이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경우들이 횡횡하고 있다. 이는 심히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혁신학에는 ‘오직 성경’이란 대 전제(前提)가 있다. 아울러 모든 신학은 그것이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을 밝히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때문에 필자는 어떤 신학적 저서나 논문이든 가장 많이 인용(引用)되고 인유(引喩)되어야 할 각주(脚註)역시 성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 성경을 주(註)로 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치해 보이고 신학자들의 이름을 꿰며 그들의 신학사상을 유창하게 언급하는 것이 훨씬 유식하고 멋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오늘 이 시대야 말로 종교개혁시대와 같이 가장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가 아닐지? 개혁의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자신과 우리들의 교회가 아닐지를 깊이 헤아려야 할 때란 생각이 든다.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은 오직 끊임없는 자아(自我)의 개혁으로부터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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