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22-23; 요 18:37-38)
2009년 4월 10일(고난주간 [성] 금요일 총신 채플)
I
봄이 왔습니다.
계절에 따라서 우리의 몸도 기지개를 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계절에 따라서 옷을 벗기도 하고 껴입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계절에 끼여 사는 것 같습니다.
대학교 때 즐겨 읽었던 황지우 시인의 시집 이름이 생각납니다. [겨울-나무로부터-봄 나무에로]. 봄이 나무의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꽃이 봄을 부른다 생각해 봅니다. 제 마음은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꽃을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밤새 선물 같이 꽃이 피었고, 그래서 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II
봄에는 진리를 생각합니다. 뭔가 겨울은 흩어져 나부껴도 될 것 같았는데, 봄은 눈부시게 진실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저는 꽃이 필 때마다 진리를 생각합니다. 진리가 아니고서야 꽃이 필 수 없습니다.
거짓으로 물을 먹고, 거짓으로 빛을 쏘인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닙니다. 꼭 어김없는 진리 덩어리로 꽃이 피었습니다.
어느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습니다. “거짓은 가라. 그저 그림자나 드리우며 몸을 끄는 거짓은 가라. 죽어 썩지도 못하는 거짓은 가라. 부활의 동산에서 죽음도 못되는 거짓은 가라. 모두 가라.”
III
자주 법정은 진리 혹은 정의의 장이라고 말해지지만, 법정의 재판관이 그저 진실 된 것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모르나 법정에서 판단하니 진리가 됩니다. 아무도 스스로 진리가 될 수 없으되,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는 앞 다투어 서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재판을 주재했으나, 스스로 진리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재판 받는 자리에 있는 죄인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6).
아무도 스스로 진리이면서 진리를 말하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만은 진리이자 진리를 증거하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요 18:37).
스스로 진리이신 분이 진리를 몰라 묻고 있는 질문자에게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묻고 있는 자는 “그 진리 자체이신 분을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고 기고만장했습니다(요 19:10).
주님께서는 진리로서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제 자신의 영을 하나님 우편에서 부어주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다(요14:17).
2)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 16:13).
IV
우리도 빌라도와 동일한 던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주님 자신께서 진리시며, 그 분께서는 무죄하시다.
1)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빌라도. 눅 23:4; 요 18:38; 19:6)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마 27:24).
2) 가룟 유다:"무죄한 피“
3) 빌라도의 아내: “저 옳은 사람”
4) 예수를 향해 섰던 백부장의 고백: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
5) 결론적으로, 빌라도가 확신했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시기로” 예수를 넘겼다(마 27:18).
그러나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힘이었으며 상황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1)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요 19:10). 2) 민란이 날까 두려워 예수를 죽음에 넘김(마 27:24)
V
그렇다면 주님에게 있어서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 주님 자신께서 진리라는 사실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님 자신께서 진리이심은 그가 곧 길이요, 생명이 됨과 함께 이해된다.
주님께서 진리이심은, 오직 그 분만이 생명에 이르는 “양의 문”이심을 뜻한다(요 10:7). 그것은 그 분께서 빛이심과 같다. 빛에는 열이 있듯이, 예수님의 진리에는 생명이 있다. 곧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2) 주님의 진리되심은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 . .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주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이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진리이심을 전하고 계시다.
IV
주님에게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그 자체인가?
사실 그 자체는 주님께서 죄가 없으심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 없으심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의 방관자십니까?
1) 이 재판은 예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재판이다. 그는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했다(마 26:6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며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했다(마 27:11). 그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라는 말을 부인하시지도 않았다(마 26:61).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며 “유대인의 왕”이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저 기적이나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헤롯은 이적을 보기를 원했다: 눅 23:8), 세상 왕국의 왕으로서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의 심문에 의하면 예수의 참람죄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하나님을 사칭하는 것이요, 하나는 왕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침묵했다.
2) 예수님께서는 비진리 앞에서 침묵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주님께서는 진리를 항변하지 않고 그저 수용하는 비겁자였는가?
3)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그의 무죄가 진리인가? 그의 유죄가 진리인가?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2). 주님께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을 베드로의 고백 후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변형을 보여 주신 후 예언하셨다(마 16:21; 17:23).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오르시기 전에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다(마 20:19).
이것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것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의 입을 통하여서 울려 퍼졌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그것은 수동명령형이 지니고 있는 당위를 내포하였다.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그 분의 무죄함으로 인한 방면인가? 아니면 그 분의 무죄함 가운데서의 죽음인가?
4) 주님께서는 무죄하나 유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지나가는 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다(마 27:40).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고 한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도 희롱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하라는 것이다.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맡은 백성이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 받으실 일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내려오라.”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들의 말은 마귀가 시험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마 4:3, 6)는 유혹과 다르지 않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구원받지 못할 사지로 몰아 넣으셨다.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자리에 까지 서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그 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셨다.
사람들은 그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의 형벌이 마땅한 참람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진리는 무엇인가? 그 분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셔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이 아닌가?
오직 사람으로서는 죽음을 이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닌가?
VII
다시 빌라도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빌라도의 재판에 있는가? 아니다.
진리는 사실 자체에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사실 자체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예수의 유죄도 진리가 아니며, 예수의 무죄도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예수께서 죄 없이 죄인으로서 죽으심이다.
진리는 좌우편에 달린 강도도 아니며, 금관을 쓴 빌라도도 아닌. 왕으로서 어색한 홍포를 입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갈대 홀을 오른 손에 든 잠잠한 그 분 자신이다(마 27:28-29).
VIII
주님 자신께서 진리시다. Egw eimi avlhqeia.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이는 세속주의의 참람함이며 적그리스도의 제일 유혹이다.
잔리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다. 아멘
http://blog.daum.net/kkho1105/2191
(마 27:22-23; 요 18:37-38)
2009년 4월 10일(고난주간 [성] 금요일 총신 채플)
I
봄이 왔습니다.
계절에 따라서 우리의 몸도 기지개를 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계절에 따라서 옷을 벗기도 하고 껴입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계절에 끼여 사는 것 같습니다.
대학교 때 즐겨 읽었던 황지우 시인의 시집 이름이 생각납니다. [겨울-나무로부터-봄 나무에로]. 봄이 나무의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꽃이 봄을 부른다 생각해 봅니다. 제 마음은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꽃을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밤새 선물 같이 꽃이 피었고, 그래서 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II
봄에는 진리를 생각합니다. 뭔가 겨울은 흩어져 나부껴도 될 것 같았는데, 봄은 눈부시게 진실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저는 꽃이 필 때마다 진리를 생각합니다. 진리가 아니고서야 꽃이 필 수 없습니다.
거짓으로 물을 먹고, 거짓으로 빛을 쏘인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닙니다. 꼭 어김없는 진리 덩어리로 꽃이 피었습니다.
어느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습니다. “거짓은 가라. 그저 그림자나 드리우며 몸을 끄는 거짓은 가라. 죽어 썩지도 못하는 거짓은 가라. 부활의 동산에서 죽음도 못되는 거짓은 가라. 모두 가라.”
III
자주 법정은 진리 혹은 정의의 장이라고 말해지지만, 법정의 재판관이 그저 진실 된 것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모르나 법정에서 판단하니 진리가 됩니다. 아무도 스스로 진리가 될 수 없으되,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는 앞 다투어 서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재판을 주재했으나, 스스로 진리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재판 받는 자리에 있는 죄인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6).
아무도 스스로 진리이면서 진리를 말하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만은 진리이자 진리를 증거하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요 18:37).
스스로 진리이신 분이 진리를 몰라 묻고 있는 질문자에게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묻고 있는 자는 “그 진리 자체이신 분을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고 기고만장했습니다(요 19:10).
주님께서는 진리로서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제 자신의 영을 하나님 우편에서 부어주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다(요14:17).
2)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 16:13).
IV
우리도 빌라도와 동일한 던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주님 자신께서 진리시며, 그 분께서는 무죄하시다.
1)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빌라도. 눅 23:4; 요 18:38; 19:6)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마 27:24).
2) 가룟 유다:"무죄한 피“
3) 빌라도의 아내: “저 옳은 사람”
4) 예수를 향해 섰던 백부장의 고백: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
5) 결론적으로, 빌라도가 확신했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시기로” 예수를 넘겼다(마 27:18).
그러나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힘이었으며 상황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1)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요 19:10). 2) 민란이 날까 두려워 예수를 죽음에 넘김(마 27:24)
V
그렇다면 주님에게 있어서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 주님 자신께서 진리라는 사실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님 자신께서 진리이심은 그가 곧 길이요, 생명이 됨과 함께 이해된다.
주님께서 진리이심은, 오직 그 분만이 생명에 이르는 “양의 문”이심을 뜻한다(요 10:7). 그것은 그 분께서 빛이심과 같다. 빛에는 열이 있듯이, 예수님의 진리에는 생명이 있다. 곧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2) 주님의 진리되심은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 . .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주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이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진리이심을 전하고 계시다.
IV
주님에게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그 자체인가?
사실 그 자체는 주님께서 죄가 없으심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 없으심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의 방관자십니까?
1) 이 재판은 예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재판이다. 그는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했다(마 26:6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며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했다(마 27:11). 그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라는 말을 부인하시지도 않았다(마 26:61).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며 “유대인의 왕”이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저 기적이나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헤롯은 이적을 보기를 원했다: 눅 23:8), 세상 왕국의 왕으로서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의 심문에 의하면 예수의 참람죄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하나님을 사칭하는 것이요, 하나는 왕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침묵했다.
2) 예수님께서는 비진리 앞에서 침묵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주님께서는 진리를 항변하지 않고 그저 수용하는 비겁자였는가?
3)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그의 무죄가 진리인가? 그의 유죄가 진리인가?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2). 주님께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을 베드로의 고백 후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변형을 보여 주신 후 예언하셨다(마 16:21; 17:23).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오르시기 전에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다(마 20:19).
이것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것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의 입을 통하여서 울려 퍼졌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그것은 수동명령형이 지니고 있는 당위를 내포하였다.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그 분의 무죄함으로 인한 방면인가? 아니면 그 분의 무죄함 가운데서의 죽음인가?
4) 주님께서는 무죄하나 유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지나가는 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다(마 27:40).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고 한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도 희롱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하라는 것이다.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맡은 백성이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 받으실 일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내려오라.”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들의 말은 마귀가 시험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마 4:3, 6)는 유혹과 다르지 않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구원받지 못할 사지로 몰아 넣으셨다.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자리에 까지 서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그 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셨다.
사람들은 그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의 형벌이 마땅한 참람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진리는 무엇인가? 그 분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셔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이 아닌가?
오직 사람으로서는 죽음을 이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닌가?
VII
다시 빌라도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빌라도의 재판에 있는가? 아니다.
진리는 사실 자체에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사실 자체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예수의 유죄도 진리가 아니며, 예수의 무죄도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예수께서 죄 없이 죄인으로서 죽으심이다.
진리는 좌우편에 달린 강도도 아니며, 금관을 쓴 빌라도도 아닌. 왕으로서 어색한 홍포를 입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갈대 홀을 오른 손에 든 잠잠한 그 분 자신이다(마 27:28-29).
VIII
주님 자신께서 진리시다. Egw eimi avlhqeia.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이는 세속주의의 참람함이며 적그리스도의 제일 유혹이다.
잔리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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