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학교에서 배우자!
주님의 학교에서 배우자!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약 백 년 전에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라는 제하의 논문을 집필하여 동시대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혹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으며, 혹은 케노시스 이론을 내세워 하나님이심을 자제하거나 포기한 ‘한 사람’ 예수의 낮아지심에 천착했으며, 혹은 리츨식의 윤리주의에 빠져서 공동체의 주관의 합은 곧 객관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헤겔과 슐라이엘마허의 충실한 후예들이었다. 헤겔은 성경의 신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며 그 실체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절대이성으로서 파악된다고 보았다. 헤겔의 신은 사람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정되는 만큼 되어져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모든 신적 현상들을 주관적 체험으로 돌렸다. 신은 신적체험의 주체이다. 그런데 신적체험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고 보았다.
헤겔과 슐라이엘마허에 의하면 하나님은 단지 상징이거나 주관에 맞서는 대자(對自)에 불과하다. 모두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에 동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려지고, 규정될 뿐이다. 하나님은 생경한 사실로(bare facts) 우리 앞에 그냥 계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리이실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쳐, 마틴 캘러, 그리고 불트만은 성경 가운데서 정황적 케리그마를 읽어 내려고 했다.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사람의 선포가 되어버렸다. 칼 발트는 이러한 관점을 변증법적으로 더욱 교묘하게 추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듯이 우리도 그러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므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한다고 보았다. 발트의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의 신격과 사람의 신격을 동일시함으로써 종국적으로 모든 신격을 부인하는데 이른다. 발트에게 있어서 신은 순간 실존적으로 체험될 뿐이다.
현대 신학의 동향을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하나님을 사람의 이성에 가두는 우상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 케노시스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고통에 동참함을 신화(神化)의 길로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소위 성육신 신학(incarnational theology)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사람에게의 체화(體化)에 모든 상위 가체를 두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포스터 모더니즘의 해체주의 조차 해체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는 해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해체를 고착화 하려고 한다. 그리스도는 많은 길 중의 하나, 진리의 한 가능태, 완전한 생명의 한 전형(典型)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펼친 바알세불 논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 시대 개혁주의 신학은 더욱 말씀의 진리에 부착하려고 노력한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의 원전들이 다시금 연구된다. 진정 이 시대는 “ad fontes(원전으로)!”를 단지 옛 구호로만 여기지 않는다. “성경으로 돌아가자(ad Scripturam Sacram)!” 라는 옛 구호는 영원한 구호가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요 1:1).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 없으며(마 11:27)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본 자 없다(요 6:45). 아들은 아버지의 “위격의 형상(karakthr thj u`postasewj)”이시다(히 1:3). 이는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와 진리”가 됨을 의미한다(요 1:14). 진리(avlhqeia)라 함은 드러내심을, 은혜(carij)라 함은 이루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드러내신 대로 다 이루신다. 그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성령” 곧 자녀의 영을 부어 주셨다(행 2:33). 이 영을 받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돌보”신다(시 8:4).
개혁신학은 칼빈의 신학에 정초해 있다. 칼빈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의를 다 이루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심을 신학함의 중심으로 부각시켰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 분의 것(“auvtou”)이 되어서(롬 8:9)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함께 상속자가 되어(sugklhronomoj)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sumpascw) 함께 고난을(sundoxazw) 받는 자리에 선다(롬 8:17).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한다. 주님의 멍에는 독수리의 날개와 같아서 성도를 하늘 높이 날게 한다. 간혹 그 날개는 우리가 땅위를 걷거나 뛸 때에도 피곤치도 고단치도 않게 우리를 들어 올린다(사 40:30-31).
그러므로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께 배우자.
주님의 학교에서 배우자(Discamus schola Christi)!
http://blog.daum.net/kkho1105/2192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약 백 년 전에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라는 제하의 논문을 집필하여 동시대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혹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서 예수의 역사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으며, 혹은 케노시스 이론을 내세워 하나님이심을 자제하거나 포기한 ‘한 사람’ 예수의 낮아지심에 천착했으며, 혹은 리츨식의 윤리주의에 빠져서 공동체의 주관의 합은 곧 객관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헤겔과 슐라이엘마허의 충실한 후예들이었다. 헤겔은 성경의 신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며 그 실체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절대이성으로서 파악된다고 보았다. 헤겔의 신은 사람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정되는 만큼 되어져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모든 신적 현상들을 주관적 체험으로 돌렸다. 신은 신적체험의 주체이다. 그런데 신적체험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고 보았다.
헤겔과 슐라이엘마허에 의하면 하나님은 단지 상징이거나 주관에 맞서는 대자(對自)에 불과하다. 모두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에 동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려지고, 규정될 뿐이다. 하나님은 생경한 사실로(bare facts) 우리 앞에 그냥 계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리이실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쳐, 마틴 캘러, 그리고 불트만은 성경 가운데서 정황적 케리그마를 읽어 내려고 했다.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사람의 선포가 되어버렸다. 칼 발트는 이러한 관점을 변증법적으로 더욱 교묘하게 추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듯이 우리도 그러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므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한다고 보았다. 발트의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의 신격과 사람의 신격을 동일시함으로써 종국적으로 모든 신격을 부인하는데 이른다. 발트에게 있어서 신은 순간 실존적으로 체험될 뿐이다.
현대 신학의 동향을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하나님을 사람의 이성에 가두는 우상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 케노시스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고통에 동참함을 신화(神化)의 길로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소위 성육신 신학(incarnational theology)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사람에게의 체화(體化)에 모든 상위 가체를 두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포스터 모더니즘의 해체주의 조차 해체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는 해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해체를 고착화 하려고 한다. 그리스도는 많은 길 중의 하나, 진리의 한 가능태, 완전한 생명의 한 전형(典型)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펼친 바알세불 논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 시대 개혁주의 신학은 더욱 말씀의 진리에 부착하려고 노력한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의 원전들이 다시금 연구된다. 진정 이 시대는 “ad fontes(원전으로)!”를 단지 옛 구호로만 여기지 않는다. “성경으로 돌아가자(ad Scripturam Sacram)!” 라는 옛 구호는 영원한 구호가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요 1:1).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 없으며(마 11:27)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본 자 없다(요 6:45). 아들은 아버지의 “위격의 형상(karakthr thj u`postasewj)”이시다(히 1:3). 이는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와 진리”가 됨을 의미한다(요 1:14). 진리(avlhqeia)라 함은 드러내심을, 은혜(carij)라 함은 이루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드러내신 대로 다 이루신다. 그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성령” 곧 자녀의 영을 부어 주셨다(행 2:33). 이 영을 받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돌보”신다(시 8:4).
개혁신학은 칼빈의 신학에 정초해 있다. 칼빈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의를 다 이루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심을 신학함의 중심으로 부각시켰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 분의 것(“auvtou”)이 되어서(롬 8:9)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함께 상속자가 되어(sugklhronomoj)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sumpascw) 함께 고난을(sundoxazw) 받는 자리에 선다(롬 8:17).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한다. 주님의 멍에는 독수리의 날개와 같아서 성도를 하늘 높이 날게 한다. 간혹 그 날개는 우리가 땅위를 걷거나 뛸 때에도 피곤치도 고단치도 않게 우리를 들어 올린다(사 40:30-31).
그러므로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께 배우자.
주님의 학교에서 배우자(Discamus schola Christi)!
http://blog.daum.net/kkho1105/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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