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 신학자 F. F. 부루스는 롬 12:3-13:14와 산상보훈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롬 12:3-13:14에는 1) 교회의 은사들, 2) 기도와 구제, 3)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 4)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계명, 5) 권세에 대한 복종, 6)말세의 어두움의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규범을 담고 있다.
롬 12:3의 말씀은 이러한 교훈의 서론에 해당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본문은 롬 12:2와 대구가 되어서 강의적으로 말씀되고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으로서 롬 12:3이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길로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은 롬 12:1-2를 성도의 영적인 생활 그리고 12:3 이후를 성도의 사회생활을 다루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롬 12:1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를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의와 가치를 선포한 대헌장과 같이 보고 이어지는 2절과 3절을 이러한 뜻을 이루는 실천 원리를 선포한 구절로 파악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받은 것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은혜와 은사를 받고, 전인격적으로 말씀을 받았으므로 전인격적으로 올려 드리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제물로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오직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거룩한 산 제물”로서 성도는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곧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다(2).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이 조목별로 제물을 드림이다(3). 성도가 한 몸의 지체들로서 각자 자신의 은사대로 섬기는 것이(4-5), 구약의 조목별 제사를 드림으로 묘사된다. 성도의 직분이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번제, 소제, 화제, 전제 등 여러 뜻, 여러 모양으로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II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삶에 있어서 그 목적, 용도, 규모, 방식을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라고 해서 사도적 권위를 드러낸다. 성도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있다. 존 머레이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역에 맞게끔 은혜를 베푸셔서 합당한 권위로 권면하게 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권면에서 “생각하다” 라는 뜻의 단어 “fronein”에서 나온 동사가 네 번 사용되고 있다.
먼저 권면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mh u`perfronein par v o dei pronein)”에서 두 번 사용된다.
그리고 “지혜롭게 생각하라(avlla fronein eivj to swfronein)”에서 두 번 사용된다. swfronein는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자제하다,” “안전하게 하다”는 뜻이 있다. eivj to swfronein가 “지혜롭게”로 해석된다. 제임스 던은 이 단어가 헬라의 자연철학의 절제를 말한다고 하나, 이 단어는 swzw(구원하다)와 fronein(생각하다)의 뜻을 포함한 단어로서 swfronein를 구원받은 자로서 거듭난 생각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는 12:2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fronein은 생각하다는 뜻보다는 관심을 갖다, 사랑하다, 훈련하다 등의 뜻이 있다. 즉 어떤 일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행하면서 그 이루어질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그것에 맞추어 미리 자신을 준비시켜 가는 훈련을 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차알스 홧지는 자신의 주석에서 fronein를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어떤 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 일의 영향을 두고 미리 하는 훈련(the exercise of the affections as well as of the intellect)”이라는 뜻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 . .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본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일로 말미암아 되어질 일을 합당하게 바라고, 그 결과를 미리 바라보고 지금 준비하고 훈련하라 라는 권면으로 풀 수 있다.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도 fronein가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에 그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훈련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불렀다(빌 3:19). 십자가의 원수가 다름 아닌 세상의 것을 알고 그 지식대로 휘둘려 사는 것이라고 본다.
II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난 사람으로서 마땅히 바라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되어질 일을 미리 바라보고 지금 준비할 것인가? 사도 바울을 그것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evkastw w`j o` qeoj evmerisen metron pistewj)”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말은 “믿음으로 재어서 나눈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누어 주신”에 해당하는 단어 evmerisen은 분깃을 단어 meroj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재어보고 나누어 주신 분깃대로” 행하고, 바라고, 그 분깃에 맞추어 일어날 일을 미리 바라보고 지금 훈련을 받으라는 뜻이다.
믿음의 분량을 롬 12:6에서는 “믿음의 분수대로(kata thn avnalogia thj pistewj)”라고 하였다.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다만 12:6의 “믿음의 분수대로”가 예언의 은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길을 제시한다면, 12:3의 “믿음의 분량대로”는 하나님의 일꾼이 자신의 일을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행함을 의미한다.
[예화] 최근의 주가와 환율의 변동을 보여주는 그래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게 한다.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이나 외국에 연고를 두고 사업을 하거나 외국에 가족을 두고 부양하는 분들의 마음이 그래프에 따라서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그래프가 가파를수록, 마치 낭떠러지와 같아서, 위험하다. 그래프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볼 것이다. 다만 그래프가 급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급하게 내려가면 원상태지만 속사정을 그렇지 않다. 그래프가 왔다 갔다 한 만큼 부의 분배가 일어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분깃”의 이동이 일어난다.
최근에 호남평야를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다. 그 넓기로만 하면 외국평야에 버금갈 것이었다. 다만 그 논들이 바둑판과 같이 분할되어 있었다. 별로 많지 않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앞으로 한 눈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마치 딱딱한 판에 그인 바둑판의 종선과 횡선과 같이 논의 선은 굵게 그어져 있었다. 농부들이 각자의 분량대로 농사를 지을 것을 생각했다. 추수한 들판을 보면서 각자의 “분깃”대로 추수의 즐거움을 누렸을 농부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자신의 논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놀리거나 할 수 없었다. 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날 논에 피와 잡초가 무성한 채로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꺼리가 되었다.
신대원 들어오기 전에 가평에 있는 어느 산골에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벌써 15년이 다 되었지만 그 때에 벌써 그곳에는 놀리는 땅이 많았다. 간혹 어떤 땅에는 농사를 짓는지 아닌지 그냥 잡초가 너무 무성해서 벼는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요사이 “쌀 직불제” 때문에 말이 많은데, 아마 도시 사람이 땅을 사 놓고는 법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서 농사짓는 흉내만 낸 것이리라.
사람들은 분깃 늘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저 맹목적이다.
농부는 경작할 만큼만 씨를 뿌리고, 어부는 거물을 감아 들일 수 있을 만큼만 망을 친다. 나뭇꾼은 안고 나를 수 있을 만큼만 나무를 한다.
하나님께서 재어서 주신 믿음의 분량만큼 행하고 그 일의 결과를 바라 보아야 한다.
[첫째]
믿음은 선물이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은혜가 선물이며 믿음도 선물이다(엡 2:8). 선물은 공로가 아니다. 공로는 행위로부터 나온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나타났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다 이루심”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persuasio 즉 감화됨이다. 이를 들음이라고 표현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들음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화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들에 대한 진리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들음으로써 그것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가 믿음이다. “다 이루심”을 들음으로써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가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재셔서 합당한 분량대로 주신 것 즉 명사형이다.
그 믿음은 그 자체로 공로가 되는 것이지, 마땅한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믿음은 그저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로 인하여 행위가 따른다. 믿음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미 공로로 삼는 사람은 이미 믿음을 행위로 여기므로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믿음 자체는 행위가 아니다. 믿음 자체에는 상급 받을 공로가 없다.
믿음은 도구적 원인이며 믿음의 숟가락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담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가 믿는 바의 실체 즉 질료적 원인이다. 오직 믿음의 숟가락에만 그리스도의 공로가 담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믿음의 숟가락에 담긴다. 믿음에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은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공로로 여겨서 채울 것이 없다.
믿음은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전가되고 전가된 대로 역사하게끔 나 자신을 그 상태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상태는 우선적으로 자기를 부인함을 요구한다. 자기를 부인함이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관심을 갖고, 그것대로 훈련 받는 것이다.
믿음을 먼저 “동사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믿음의 행위에만 매여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에 이른다. 믿음을 행위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도무지 행위라고 여기기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을 받음에 아무 공로가 없음을 고백하고 빚진 자로서 드디어 행위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이른다. 할례를 받았으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갈 5:6). 카톨릭은 사랑이 먼저라고 했지만, 우리는 믿음이 먼저이다. 믿음을 선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행위로서 사랑이 분명 따른다.
주님께서는 주시지 않은 것으로 탓하지 않으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으나, 믿음이 없다는 책망은 믿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심하는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로부터 나온 것으로 어찌 겨자씨 만한 것으로 산을 움직이겠는가? 믿음을 먼저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가 믿음을 받은 선물로 알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으나, “어 내가 걷고 있네” 라고 동사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파악했을 때에는 물에 빠졌다.
[둘째]
믿음의 분량대로 행해야 한다. 각자에게 주신 분량이 있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루어진 결과를 인간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룻과 안나를 비교해 보자.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습속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의 선조가 되었다. 안나는 결혼 후 7년을 남편과 살다가 84년을 살았는데 주야로 금식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했다. 그녀가 한 일을 정결예식을 행하허 오신 아기 예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 일이 전부였다(눅 2:38).
사도 바울은 회심하여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역은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그 위에 계셔서, 성령의 지시함을 받아서 평생을 예수를 기다리다가 예수를 한 번 찬미하고 죽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믿음은 선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이 동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믿음의 선물을 받은 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되어질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 차알스 홧지가 해석했듯이, fronein 즉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그 일이 되어져서 나타날 것들을 미리 바라보고 그것을 날마다 훈련하는 것이다.
(예화) 누가 믿음의 분량이 많은가?
아내는 현실주의자이고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와이셔츠, 105가 작으니 큰 것을 사 달라고 했다. 아내는 “내 몸을 줄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III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자. “믿음의 분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무슨 일이든 벌여 놓고 내가 장이 되면 되겠거나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배를 몰 기술이 있는지는 파악하지 않고 그저 선장만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믿음 속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사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사시는 것이다. 믿음을 더하게 되는 것은, 내가 더 잘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마음껏 사시도록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음과 경건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경건함이 없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행위로 보는 사람의 생각이다. 믿음은 위로부터 말씀을 듣고 위로 예배드리는 경건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갈 2:20).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함이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 기울이자. 그리고 그 분량대로 겸손히 자신을 부인하며 살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아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설교를 위한 묵상]
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물이 샘에서 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난다.
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셨기 때문이다(롬 10:6).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것은 그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써 이제는 자신의 은혜로 율법의 규범을 온전히 좇아서 살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누구든지 그의 “피”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롬 3:25). 예수께서 친히 제사장이시자 제물로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은 오직 그를 믿는 자를 대속하기 위함이셨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림으로써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함께 속함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는 오직 그를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우리를 위하여 번제,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화목제로 자신을 드리셨다. 예수께서는 오직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화제와 소제와 전제와 요제로 드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화목제물 삼으시사 1)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고 2)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셨다(롬 3:26).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하는 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롬 3:22).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셨다. 그 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잉태에서부터 죽기 까지 우리를 위한 의를 다 이루셨다. 그 분께서 모태에서 거룩하게 조성되심으로써 부정한 가운데 조성된 우리의 죄를 잉태 때부터 가져가셨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다 이루심을 선포하심으로써 주님의 구원이 우리가 죽기 까지 짓는 모든 죄와 허물임을 선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의 값을 법정적으로 치루셨다. 이제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에게 정해진 때에 그 법정적인 의로 법정적으로 각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사람의 전 생애를 구원하시되 생애의 특정한 시점에서 하신다. 그 시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2
어떻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가? 우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의 삶을 동행하며 육신의 귀를 열어서 들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하늘로 올라가서 그 분의 육성을 들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이다. 우리를 위한 의를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으로부터 내려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이 곧 들음이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a.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안다(요 14:20).
b.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신다(요 15:26). 그리하여서 우리가 증인이 되게 하신다.
c.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고,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 14:26).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대로 행하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요 14:12). 어떻게 우리가 주님보다 “큰 일”을 하는가? 이 “큰 일”은 주님께 구하여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3) . .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임(수납)”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면,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진리를 알아서, 자유하게 되고, 그 자유함 가운데 아는 대로 행하게 된다.
아무도 스스로 들을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이 나서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좇아가서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신비주의요 자질주의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로 먼저 오셔야 한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자신이 행하는 행함으로 인한 의로 살게 되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주님을 맞아들임으로써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스스로 높은 체 말라 이는 승귀하신 주심을 끌어 내림이요, 스스로 낮은 체 말라 이는 낮아지신 주님을 끌어 올림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찾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써 듣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림으로써 듣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앎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알려짐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다. 믿음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믿음 속에 사는 것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심이 곧 믿음의 역사이다. “”(갈 2:20). 이제 우리 속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니 우리가 믿음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믿은 것이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인하지 않다(갈 3:2, 5).
오직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이요, 그 들음은 주의 영의 임재로 인함이니, 믿음을 믿는 행위로 여길 것이 아니다. 믿음을 행위라고 하면 공로를 헤아리게 된다. 먼저 믿는 행위가 있지 않았다. 먼저 믿음을 주심이 있었다. 그리고 믿음을 받아서 믿게 되었다.
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너희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에 “아멘”하는데 있다(고후 1:20).
1) 믿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든 것을 맡길 분으로 알고 맡기는 것이다. 도무지 내가 할 것이 조금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로 여기고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2) 믿음이 없으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순교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가능하다. 전부 하나님께 맡기면 물 위를 걷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순간 나도 할 수 있네 하면 곧 물에 빠지고 만다.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이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3)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상태이다. 믿음도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만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4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채워졌을 때 행위해야 하느냐의 질문이 나에게는 항상 있다.
얻는 분량도 있고 베푸는 분량도 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백성은 유아기의 불평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맞추셔서 단지 베푸시기만 하셨다. 직접적인 섭리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로 채우셨다. 그들에게는 아직 유아기를 지나는 마음의 여림과 강퍅함이 있었다. 불평은 가히 받기만 하면서도 투덜거리는 것이다. 여리고를 향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1) 할례 2) 물을 멈추심 3)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치심. 기념으로 돌을 쌓게 하심. 홍해를 건널 때도 요구하시지 않은 무지개와 같은 표적을 남기심. 새로운 차원의 분량을 요구하신다. 이전의 은혜를 기억하라. 그리고 담대하게 나아가라. 이제는 길을 제시 받기 전에, 묻고 찾아야 한다. 이제 피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며 나아가야 한다.
믿음의 분량이라고 했다. 믿음이 선물이라고 한 이상, 그것은 선물의 분량이다. 믿음의 분량은 그렇다면 단지 결정론적이고 운명론적인가?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길로 내몰리는 것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으니, 절대적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곧 절대적 믿음이다. 믿음 외의 조건이 없다. 오직 믿음은 그렇데 주어지는 것이다.
5
그렇다면 믿음은 그저 그렇게 머무는 것이다. 1) 믿음은 내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주어져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믿음 없으심을 책망하심은 주신 것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못함에 대한 질책이시다. 그렇다면 믿음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 머무는 것인가? 2) 믿음은 믿음으로 자란다. 곧 믿음으로 믿음으로 이른다. 믿음은 믿음을 요구한다. 물관이 자라면서 물의 양을 더 많이 공급하듯이, 믿음 자체가 자람이 곧 성도의 자람이다. 곧 믿음으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
6
1) 나의 믿음의 분량이 얼마인가? 2) 그 믿음의 분량을 알았다면 그것에 걸 맞는 삶은 무엇인가? 이 둘의 일치가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해 질 것이다. 오늘 본문은 생각이라는 것을 그 기준으로 들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생각은 유념하다, 관심과 애정을 갖다, 훈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의 생각(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지혜롭게-믿음의 분량대로. 비둘기 같은 진리와 뱀 같은 믿음으로. “지혜롭게”-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거론됨
믿음의 양상. 그리스도의 공로를 담음. 숟가락(도구인). 질료인 .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은-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의 숟가락에 담아서 먹는 것이다.
믿음은 단지 도구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는다.
곧,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만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말씀을 듣게 한다.
7
신앙의 유비. 아멘, 아멘!
http://blog.daum.net/kkho1105/2193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 신학자 F. F. 부루스는 롬 12:3-13:14와 산상보훈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롬 12:3-13:14에는 1) 교회의 은사들, 2) 기도와 구제, 3)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 4)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계명, 5) 권세에 대한 복종, 6)말세의 어두움의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규범을 담고 있다.
롬 12:3의 말씀은 이러한 교훈의 서론에 해당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본문은 롬 12:2와 대구가 되어서 강의적으로 말씀되고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으로서 롬 12:3이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길로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은 롬 12:1-2를 성도의 영적인 생활 그리고 12:3 이후를 성도의 사회생활을 다루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롬 12:1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를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의와 가치를 선포한 대헌장과 같이 보고 이어지는 2절과 3절을 이러한 뜻을 이루는 실천 원리를 선포한 구절로 파악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받은 것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은혜와 은사를 받고, 전인격적으로 말씀을 받았으므로 전인격적으로 올려 드리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제물로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오직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며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거룩한 산 제물”로서 성도는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곧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다(2).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이 조목별로 제물을 드림이다(3). 성도가 한 몸의 지체들로서 각자 자신의 은사대로 섬기는 것이(4-5), 구약의 조목별 제사를 드림으로 묘사된다. 성도의 직분이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번제, 소제, 화제, 전제 등 여러 뜻, 여러 모양으로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II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삶에 있어서 그 목적, 용도, 규모, 방식을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라고 해서 사도적 권위를 드러낸다. 성도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있다. 존 머레이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역에 맞게끔 은혜를 베푸셔서 합당한 권위로 권면하게 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권면에서 “생각하다” 라는 뜻의 단어 “fronein”에서 나온 동사가 네 번 사용되고 있다.
먼저 권면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mh u`perfronein par v o dei pronein)”에서 두 번 사용된다.
그리고 “지혜롭게 생각하라(avlla fronein eivj to swfronein)”에서 두 번 사용된다. swfronein는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자제하다,” “안전하게 하다”는 뜻이 있다. eivj to swfronein가 “지혜롭게”로 해석된다. 제임스 던은 이 단어가 헬라의 자연철학의 절제를 말한다고 하나, 이 단어는 swzw(구원하다)와 fronein(생각하다)의 뜻을 포함한 단어로서 swfronein를 구원받은 자로서 거듭난 생각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는 12:2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fronein은 생각하다는 뜻보다는 관심을 갖다, 사랑하다, 훈련하다 등의 뜻이 있다. 즉 어떤 일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행하면서 그 이루어질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그것에 맞추어 미리 자신을 준비시켜 가는 훈련을 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차알스 홧지는 자신의 주석에서 fronein를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단어가 “어떤 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 일의 영향을 두고 미리 하는 훈련(the exercise of the affections as well as of the intellect)”이라는 뜻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 . .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본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일로 말미암아 되어질 일을 합당하게 바라고, 그 결과를 미리 바라보고 지금 준비하고 훈련하라 라는 권면으로 풀 수 있다.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도 fronein가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에 그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훈련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불렀다(빌 3:19). 십자가의 원수가 다름 아닌 세상의 것을 알고 그 지식대로 휘둘려 사는 것이라고 본다.
II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난 사람으로서 마땅히 바라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되어질 일을 미리 바라보고 지금 준비할 것인가? 사도 바울을 그것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evkastw w`j o` qeoj evmerisen metron pistewj)”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말은 “믿음으로 재어서 나눈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누어 주신”에 해당하는 단어 evmerisen은 분깃을 단어 meroj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재어보고 나누어 주신 분깃대로” 행하고, 바라고, 그 분깃에 맞추어 일어날 일을 미리 바라보고 지금 훈련을 받으라는 뜻이다.
믿음의 분량을 롬 12:6에서는 “믿음의 분수대로(kata thn avnalogia thj pistewj)”라고 하였다.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다만 12:6의 “믿음의 분수대로”가 예언의 은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길을 제시한다면, 12:3의 “믿음의 분량대로”는 하나님의 일꾼이 자신의 일을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행함을 의미한다.
[예화] 최근의 주가와 환율의 변동을 보여주는 그래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게 한다.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이나 외국에 연고를 두고 사업을 하거나 외국에 가족을 두고 부양하는 분들의 마음이 그래프에 따라서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그래프가 가파를수록, 마치 낭떠러지와 같아서, 위험하다. 그래프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볼 것이다. 다만 그래프가 급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급하게 내려가면 원상태지만 속사정을 그렇지 않다. 그래프가 왔다 갔다 한 만큼 부의 분배가 일어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분깃”의 이동이 일어난다.
최근에 호남평야를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다. 그 넓기로만 하면 외국평야에 버금갈 것이었다. 다만 그 논들이 바둑판과 같이 분할되어 있었다. 별로 많지 않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앞으로 한 눈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마치 딱딱한 판에 그인 바둑판의 종선과 횡선과 같이 논의 선은 굵게 그어져 있었다. 농부들이 각자의 분량대로 농사를 지을 것을 생각했다. 추수한 들판을 보면서 각자의 “분깃”대로 추수의 즐거움을 누렸을 농부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자신의 논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놀리거나 할 수 없었다. 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날 논에 피와 잡초가 무성한 채로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꺼리가 되었다.
신대원 들어오기 전에 가평에 있는 어느 산골에서 섬긴 적이 있었는데, 벌써 15년이 다 되었지만 그 때에 벌써 그곳에는 놀리는 땅이 많았다. 간혹 어떤 땅에는 농사를 짓는지 아닌지 그냥 잡초가 너무 무성해서 벼는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요사이 “쌀 직불제” 때문에 말이 많은데, 아마 도시 사람이 땅을 사 놓고는 법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서 농사짓는 흉내만 낸 것이리라.
사람들은 분깃 늘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저 맹목적이다.
농부는 경작할 만큼만 씨를 뿌리고, 어부는 거물을 감아 들일 수 있을 만큼만 망을 친다. 나뭇꾼은 안고 나를 수 있을 만큼만 나무를 한다.
하나님께서 재어서 주신 믿음의 분량만큼 행하고 그 일의 결과를 바라 보아야 한다.
[첫째]
믿음은 선물이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은혜가 선물이며 믿음도 선물이다(엡 2:8). 선물은 공로가 아니다. 공로는 행위로부터 나온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나타났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다 이루심”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persuasio 즉 감화됨이다. 이를 들음이라고 표현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들음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화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들에 대한 진리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들음으로써 그것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상태가 믿음이다. “다 이루심”을 들음으로써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가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재셔서 합당한 분량대로 주신 것 즉 명사형이다.
그 믿음은 그 자체로 공로가 되는 것이지, 마땅한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믿음은 그저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로 인하여 행위가 따른다. 믿음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미 공로로 삼는 사람은 이미 믿음을 행위로 여기므로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 믿음 자체는 행위가 아니다. 믿음 자체에는 상급 받을 공로가 없다.
믿음은 도구적 원인이며 믿음의 숟가락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담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가 믿는 바의 실체 즉 질료적 원인이다. 오직 믿음의 숟가락에만 그리스도의 공로가 담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믿음의 숟가락에 담긴다. 믿음에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은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공로로 여겨서 채울 것이 없다.
믿음은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전가되고 전가된 대로 역사하게끔 나 자신을 그 상태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상태는 우선적으로 자기를 부인함을 요구한다. 자기를 부인함이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관심을 갖고, 그것대로 훈련 받는 것이다.
믿음을 먼저 “동사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믿음의 행위에만 매여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에 이른다. 믿음을 행위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도무지 행위라고 여기기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을 받음에 아무 공로가 없음을 고백하고 빚진 자로서 드디어 행위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이른다. 할례를 받았으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갈 5:6). 카톨릭은 사랑이 먼저라고 했지만, 우리는 믿음이 먼저이다. 믿음을 선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행위로서 사랑이 분명 따른다.
주님께서는 주시지 않은 것으로 탓하지 않으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으나, 믿음이 없다는 책망은 믿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심하는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로부터 나온 것으로 어찌 겨자씨 만한 것으로 산을 움직이겠는가? 믿음을 먼저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가 믿음을 받은 선물로 알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으나, “어 내가 걷고 있네” 라고 동사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파악했을 때에는 물에 빠졌다.
[둘째]
믿음의 분량대로 행해야 한다. 각자에게 주신 분량이 있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루어진 결과를 인간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룻과 안나를 비교해 보자.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습속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의 선조가 되었다. 안나는 결혼 후 7년을 남편과 살다가 84년을 살았는데 주야로 금식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했다. 그녀가 한 일을 정결예식을 행하허 오신 아기 예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 일이 전부였다(눅 2:38).
사도 바울은 회심하여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역은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그 위에 계셔서, 성령의 지시함을 받아서 평생을 예수를 기다리다가 예수를 한 번 찬미하고 죽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믿음은 선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이 동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믿음의 선물을 받은 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되어질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 차알스 홧지가 해석했듯이, fronein 즉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그 일이 되어져서 나타날 것들을 미리 바라보고 그것을 날마다 훈련하는 것이다.
(예화) 누가 믿음의 분량이 많은가?
아내는 현실주의자이고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와이셔츠, 105가 작으니 큰 것을 사 달라고 했다. 아내는 “내 몸을 줄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III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자. “믿음의 분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무슨 일이든 벌여 놓고 내가 장이 되면 되겠거나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배를 몰 기술이 있는지는 파악하지 않고 그저 선장만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믿음 속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사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사시는 것이다. 믿음을 더하게 되는 것은, 내가 더 잘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마음껏 사시도록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음과 경건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경건함이 없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행위로 보는 사람의 생각이다. 믿음은 위로부터 말씀을 듣고 위로 예배드리는 경건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라”(갈 2:20).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함이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 기울이자. 그리고 그 분량대로 겸손히 자신을 부인하며 살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아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설교를 위한 묵상]
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물이 샘에서 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난다.
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셨기 때문이다(롬 10:6).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것은 그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써 이제는 자신의 은혜로 율법의 규범을 온전히 좇아서 살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누구든지 그의 “피”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롬 3:25). 예수께서 친히 제사장이시자 제물로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은 오직 그를 믿는 자를 대속하기 위함이셨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림으로써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함께 속함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는 오직 그를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우리를 위하여 번제,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화목제로 자신을 드리셨다. 예수께서는 오직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화제와 소제와 전제와 요제로 드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화목제물 삼으시사 1)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고 2)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셨다(롬 3:26).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하는 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롬 3:22).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셨다. 그 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잉태에서부터 죽기 까지 우리를 위한 의를 다 이루셨다. 그 분께서 모태에서 거룩하게 조성되심으로써 부정한 가운데 조성된 우리의 죄를 잉태 때부터 가져가셨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다 이루심을 선포하심으로써 주님의 구원이 우리가 죽기 까지 짓는 모든 죄와 허물임을 선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의 값을 법정적으로 치루셨다. 이제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에게 정해진 때에 그 법정적인 의로 법정적으로 각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사람의 전 생애를 구원하시되 생애의 특정한 시점에서 하신다. 그 시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2
어떻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가? 우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의 삶을 동행하며 육신의 귀를 열어서 들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하늘로 올라가서 그 분의 육성을 들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이다. 우리를 위한 의를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으로부터 내려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이 곧 들음이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a.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안다(요 14:20).
b.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신다(요 15:26). 그리하여서 우리가 증인이 되게 하신다.
c.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고,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 14:26).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대로 행하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요 14:12). 어떻게 우리가 주님보다 “큰 일”을 하는가? 이 “큰 일”은 주님께 구하여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3) . .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임(수납)”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면,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진리를 알아서, 자유하게 되고, 그 자유함 가운데 아는 대로 행하게 된다.
아무도 스스로 들을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이 나서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좇아가서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신비주의요 자질주의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로 먼저 오셔야 한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자신이 행하는 행함으로 인한 의로 살게 되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주님을 맞아들임으로써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스스로 높은 체 말라 이는 승귀하신 주심을 끌어 내림이요, 스스로 낮은 체 말라 이는 낮아지신 주님을 끌어 올림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찾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써 듣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림으로써 듣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앎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알려짐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다. 믿음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믿음 속에 사는 것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심이 곧 믿음의 역사이다. “”(갈 2:20). 이제 우리 속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니 우리가 믿음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믿은 것이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인하지 않다(갈 3:2, 5).
오직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이요, 그 들음은 주의 영의 임재로 인함이니, 믿음을 믿는 행위로 여길 것이 아니다. 믿음을 행위라고 하면 공로를 헤아리게 된다. 먼저 믿는 행위가 있지 않았다. 먼저 믿음을 주심이 있었다. 그리고 믿음을 받아서 믿게 되었다.
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너희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에 “아멘”하는데 있다(고후 1:20).
1) 믿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든 것을 맡길 분으로 알고 맡기는 것이다. 도무지 내가 할 것이 조금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로 여기고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2) 믿음이 없으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순교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가능하다. 전부 하나님께 맡기면 물 위를 걷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순간 나도 할 수 있네 하면 곧 물에 빠지고 만다.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이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3)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상태이다. 믿음도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만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4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채워졌을 때 행위해야 하느냐의 질문이 나에게는 항상 있다.
얻는 분량도 있고 베푸는 분량도 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백성은 유아기의 불평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맞추셔서 단지 베푸시기만 하셨다. 직접적인 섭리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로 채우셨다. 그들에게는 아직 유아기를 지나는 마음의 여림과 강퍅함이 있었다. 불평은 가히 받기만 하면서도 투덜거리는 것이다. 여리고를 향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1) 할례 2) 물을 멈추심 3)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치심. 기념으로 돌을 쌓게 하심. 홍해를 건널 때도 요구하시지 않은 무지개와 같은 표적을 남기심. 새로운 차원의 분량을 요구하신다. 이전의 은혜를 기억하라. 그리고 담대하게 나아가라. 이제는 길을 제시 받기 전에, 묻고 찾아야 한다. 이제 피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며 나아가야 한다.
믿음의 분량이라고 했다. 믿음이 선물이라고 한 이상, 그것은 선물의 분량이다. 믿음의 분량은 그렇다면 단지 결정론적이고 운명론적인가?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길로 내몰리는 것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으니, 절대적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곧 절대적 믿음이다. 믿음 외의 조건이 없다. 오직 믿음은 그렇데 주어지는 것이다.
5
그렇다면 믿음은 그저 그렇게 머무는 것이다. 1) 믿음은 내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주어져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믿음 없으심을 책망하심은 주신 것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못함에 대한 질책이시다. 그렇다면 믿음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 머무는 것인가? 2) 믿음은 믿음으로 자란다. 곧 믿음으로 믿음으로 이른다. 믿음은 믿음을 요구한다. 물관이 자라면서 물의 양을 더 많이 공급하듯이, 믿음 자체가 자람이 곧 성도의 자람이다. 곧 믿음으로 믿음을 자라게 하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
6
1) 나의 믿음의 분량이 얼마인가? 2) 그 믿음의 분량을 알았다면 그것에 걸 맞는 삶은 무엇인가? 이 둘의 일치가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해 질 것이다. 오늘 본문은 생각이라는 것을 그 기준으로 들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생각은 유념하다, 관심과 애정을 갖다, 훈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의 생각(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지혜롭게-믿음의 분량대로. 비둘기 같은 진리와 뱀 같은 믿음으로. “지혜롭게”-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거론됨
믿음의 양상. 그리스도의 공로를 담음. 숟가락(도구인). 질료인 .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은-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의 숟가락에 담아서 먹는 것이다.
믿음은 단지 도구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는다.
곧,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만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말씀을 듣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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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유비.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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