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 있는 자리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롬 8:12-17)
2005년 10월 28일(종교개혁주간)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I 루터의 종교 개혁
이 가을로 종교 개혁 488 주년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그 학교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던 성전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발단되었습니다.
이 반박문에서 루터는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서 자기의 공로를 쌓는 것에 있지 않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의 참 보화는 가장 거룩한 영광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은혜(62조)”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은 먼저 된 자를 나중되게 하기 때문에[마 20:16] 그 본질상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63조)”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또한 당시의 사제들이 “평강, 평강이라고 외치지만 평강은 없으며(92조)”, “십자가, 십자가라고 외치지만 십자가는 없다(93조)”고 선언했습니다.
루터가 95개조를 내걸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처음으로 “성경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 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건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서 곧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찬 것이었습니다.”
독일 종교 개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루터가 쓴 세 가지 문건이었습니다.
첫째로, [독일의 크리스챤 귀족에게]라는 글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성령의 역사로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 받기 때문에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믿어서 구원에 이름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경 해석권은 교황과 사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깨달아 진리에 알게 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주의”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는 글에서 오직 성례는 세례와 성찬 밖에 없으며, 성례는 은혜의 방편이지 공로의 수단이 아님을 선포했습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 사람이 사는(vivificatio) 거듭남(중생)의 예식이며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여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예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례가 은혜에 앞서지 못합니다. 성례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성례에 참석하게 됩니다.
셋째로 루터의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건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mus, nulli subiectus. Christia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i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충실하게 섬겨야 하는 종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이 말씀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는 고전 9:19절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로만 자유롭게 됩니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스스로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이 섬김의 최고는 복음 전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가 외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오늘 읽었던 본문 롬 8:17의 메시지를 그 중심에 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루터가 주창한 종교 개혁은 “진리, 자유, 사랑”으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오직 성경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2) 진리에 거하는 사람마다 자유롭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마다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II 칼빈의 종교 개혁
루터가 주장한 “진리, 자유, 사랑”의 사상을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한 사람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이었습니다.
칼빈은 1509년에 나서 1564년에 5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고백록을 남긴 어거스틴이나, 자신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긴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59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의 글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De me non libenter loquor.”
루터의 종교 개혁의 원리를 SOLA FIDE, SOLA GRATIA, SOLO CHRISTO, SOLA SCRIPTURA라고 한다면 진정 SOLA SCRIPTURA가 이루어진 것은 칼빈에 의해서였습니다.
동시대 루터, 멜랑흐톤, 불링거, 부써가 말씀을 주제 중심으로 다루었다면 칼빈은 성경을 좇아서 주해했습니다. 성경을 좇아서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 신학이 칼빈의 신학입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다스린 것은 정치적인 힘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였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서 대부분의 시기를 HABITANT 즉 단순한 망명객으로 살았으며, 그가 죽기 5년 전에 얻었던 BOURGEOIS라는 시민권도 고위 관직이나 의회원이 될 수 없는 반쪽짜리 시민권이었습니다.
일생을 통한 칼빈의 작업은 성경을 해석하고 체계화하고 그 진리를 변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칼빈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가 탑상(塔狀)에서의 회심을 설명하면서 롬 1:17와 롬 3:23-24를 말하고 어거스틴이 자신의 대회심이 롬 12:12와 딤전 6:16의 은혜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고백을 한 것과는 달리 칼빈은 자신을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에 이르게 한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서도 말한 바가 없습니다. 다만 칼빈의 신학에 심취한 학도요 목사로서 저자는 다음 말씀이 칼빈의 생애와 신학을 가장 잘 반향(反響)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3-16).
이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설 자리가 없다. 지상의 삶을 순례자로 살지 않는다면(nisi peregrinemur) 우리에게 하늘의 유산은 없다.”
칼빈은 당대 유럽에서 에라스무스와 함께 두 손가락에 뽑히는 천재였습니다.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두 곳의 법대에서(오를레앙의 에뚜알, 부르쥬의 알찌아띠) 법학을 공부했으며 인문주의에도 능통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항상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을 칼빈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삶의 역경을 평생을 쫓기며 살았던 다윗의 삶에 투사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내 마음을 가르칠만하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곧 “DOCILIS” 말씀 앞에 마음이 열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마스터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마스터한 사람( the man who God mastered)”이었습니다.
그럼 칼빈이 말하는 지상의 나그네(viator)의 삶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I 칼빈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해석
오늘 본문의 주제어는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1)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o[soi ga.r pneu,mati qeou/ a;gontai( ou-toi ui`oi. qeou/ eivsin).”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립니다. 롬 8:9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eiv de, tij pneu/ma Cristou/ ouvk e;cei( ou-toj ouvk e;stin auvtou).”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받은 영은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요 19:30)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 이 영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요 14:16).
b.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것과 그가 하신 모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요 14:26).
c. 오순절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각국의 방언이 터짐으로써 “하나님의 큰 일”이 세계 각국 언어로 말해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이 날 이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하면 이방 선교 못함. 곧 이것이 떠나심의 유익이다.
d. 오순절 영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영이다. 주님의 영을 받으면 속사람이 변화된다. 속사람이 변화되니 모든 것이 변화된다. 모든 가치가 바뀌고 삶의 좌표와 가치관이 바뀐다. 아들이 구하는 것은 세상이 구하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예, 요 14:27).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눠 주고, 짐에서 모여서 서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밥상공동체)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리고 많은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났는데, 이와 같은 것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그러했다.
**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처음에는 저주의 대상(왜냐면 그들이 좇는 예수가 저주받은 죽음을 당했기 때문); 다음에는 두려워함을 받은 백성(행 2:43-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두려워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두렵고 핍박을 받으나 즐거워하는 모습이 두렵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음(행 2:47).
** 오순절 성령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어떠함”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은 성도의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의 남은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과정신학자 화이트헤드는 비판하기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보편성의 고독”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쓸수록 일수록 그들은 세상에서 분리된 게토(GHETTO)가 되어서 스스로에게만 가치가 있는 집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지적을 몰트만도 했습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관계성”을 무시하거나 버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체 내에 아무런 모순도 갖지 않고자 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아무런 비판을 받고자 하지 않으려는 신학 체계들이 있다. . . . 이 체계들은 그 안으로 쳐들어 갈 수도 없고 거기로부터 나올 수도 없는 그리하여 결국 모두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는 요새들과 같다”([신학의 방법과 형식]).
화이트헤드나 몰트만의 평가나 염려와는 달리 오순절 성령은 “함께 모이는 영”이며 “밖으로 뻗어 가는 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관계성 속에서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임으로서 더욱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간혹 함께 모이면 하나님 앞에서의 필연성을 망각하고 우연성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 기도하며 신학을 준비할 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섰습니다. 목회자의 직분이 무조건 섬겨야 될 직분임을 알고 이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양지에 모여서 함께 지내면서 점점 우연성이 지배합니다. 비교해서 죄를 따지니, 자연히 나의 공로도 생깁니다. 무조건적 복종의 필연성이 채플의 페센티지의 우연성으로 대체됩니다.
2) 그리스도의 영이 아들의 영이기 때문에 이 영을 받은 사람은 종과 같이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ouv ga.r evla,bete pneu/ma doulei,aj pa,lin eivj fo,bon avlla. evla,bete pneu/ma ui`oqesi,aj evn w-| kra,zomen abba o` path,rÅ).”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더 이상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이제 그리스도로 인도함을 받은 백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에 어떤 사제의 중보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주셨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악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구별할 수 있으나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는 의롭다 칭함 받은 백성이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면서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것: 이 곤고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갈등합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던지려고 돈을 만지작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간음을 정죄함은 간음죄를 짓고 있다거나 지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갈등입니다.
여러분 갈등이 무엇입니까? [헹주 빠뜨린 북어국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 곤고함으로부터 무엇이 우리를 건져 낼 것입니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함은 방종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12절과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자유한 자의 삶은
a. 빚진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빚진 자입니다. 채무는 없으나 빚진 자,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으나 주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스스로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그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에 팔려 죽었던 우리의 생명을 무르고 사 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삯을 대신 지불해 주셨으니, 그 삯이 우리의 빚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빚으로 삼지 않고 그저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주셨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그 탕감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을수록 더 많이 사랑합니다. 즉 “사랑의 빚”을 집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안게 된 죽음의 부채를 생명의 삯으로 갚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죄에 팔여, 죄의 노예로 죽음의 부채를 지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께서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부채를 무름해 주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채도 지우시지 아니하시고, 그저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이 빚은 법정적인 빚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랑의 빚입니다. 성도는 오직 이 사랑의 빚만을 져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바울의 사역은 “채무의식”에서 비롯됩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을 하나님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웠습니다(행 9:15). 그는 이 사역을 ”빚“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다시 생명의 영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생명“을 빚진 자로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그들을 구제 했을 때, 바울은 이를 복음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다 빚진자라”
b. 자유한 자의 삶은 “영으로써 육을 죽이는 삶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주장하나 성령의 소욕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상석에 앉히고자 하나 성령의 소욕은 말단에 자리를 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으로서 육을 죽이는 삶은 “종의 굴레를 매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죄의 종”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의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전에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해서 자유했으나, 이제 의의 종이 되어서 죄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합니다(롬 6:20).
사랑이 자유자의 굴레입니다. 그런데 이 굴레는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자유의 굴레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ㄱ)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
ㄴ) 적극적으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유
ㄷ) 연약한 사람을 위하려 자유를 삼가는 자유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30절에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무거운 율법의 멍에, 세속의 멍에,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절을 보면 주님은 멍에를 벗긴 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멍에를 매게 하신다고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짐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벼운 짐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멍에”입니다. 사모해야 할 “멍에”입니다.
IV 자녀의 삶은 후사의 삶입니다.
16절과 17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니라(auvto. to. pneu/ma summarturei/ tw/| pneu,mati h`mw/n o[ti evsme.n te,kna qeou/Å eiv de. te,kna( kai. klhrono,moi klhrono,moi me.n qeou/( sugklhrono,moi de. Cristou/( ei;per sumpa,scomen i[na kai. sundoxasqw/men).”
후사(KLERONOMOS)라는 말은 제비 뽑기에서 이긴 자, 기업 무를 자라는 뜻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참 자녀는 온전히 상속하는 자녀입니다. 참 자녀는 부채까지도 받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SUNDOXASTHOMEN, 가정법 과거 수동)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SUNPASCOMEN, 현재 직설법 능동). 이 자녀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SUNKLERONOMOS)”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형제 자매된 것입니다.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약은 이렇습니다.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
미래를 묵상해야 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고 했을 때 바라는 것들이 소망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의 실상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그네”된 지상의 삶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괴롭지만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특권입니다. 진정한 기쁨, 평강을 바라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시대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하는데 평강은 없고,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는데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이를 지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종교 개혁의 요체 진리, 자유, 사랑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됨에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http://blog.daum.net/kkho1105/2194
2005년 10월 28일(종교개혁주간)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I 루터의 종교 개혁
이 가을로 종교 개혁 488 주년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그 학교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던 성전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발단되었습니다.
이 반박문에서 루터는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교황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서 자기의 공로를 쌓는 것에 있지 않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의 참 보화는 가장 거룩한 영광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은혜(62조)”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은 먼저 된 자를 나중되게 하기 때문에[마 20:16] 그 본질상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63조)”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또한 당시의 사제들이 “평강, 평강이라고 외치지만 평강은 없으며(92조)”, “십자가, 십자가라고 외치지만 십자가는 없다(93조)”고 선언했습니다.
루터가 95개조를 내걸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처음으로 “성경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 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건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서 곧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찬 것이었습니다.”
독일 종교 개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루터가 쓴 세 가지 문건이었습니다.
첫째로, [독일의 크리스챤 귀족에게]라는 글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성령의 역사로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 받기 때문에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믿어서 구원에 이름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경 해석권은 교황과 사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깨달아 진리에 알게 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주의”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는 글에서 오직 성례는 세례와 성찬 밖에 없으며, 성례는 은혜의 방편이지 공로의 수단이 아님을 선포했습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 사람이 사는(vivificatio) 거듭남(중생)의 예식이며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여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예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례가 은혜에 앞서지 못합니다. 성례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성례에 참석하게 됩니다.
셋째로 루터의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건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mus, nulli subiectus. Christia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i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충실하게 섬겨야 하는 종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이 말씀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는 고전 9:19절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로만 자유롭게 됩니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스스로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이 섬김의 최고는 복음 전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가 외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오늘 읽었던 본문 롬 8:17의 메시지를 그 중심에 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루터가 주창한 종교 개혁은 “진리, 자유, 사랑”으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오직 성경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2) 진리에 거하는 사람마다 자유롭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마다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II 칼빈의 종교 개혁
루터가 주장한 “진리, 자유, 사랑”의 사상을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한 사람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이었습니다.
칼빈은 1509년에 나서 1564년에 5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고백록을 남긴 어거스틴이나, 자신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긴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59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의 글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De me non libenter loquor.”
루터의 종교 개혁의 원리를 SOLA FIDE, SOLA GRATIA, SOLO CHRISTO, SOLA SCRIPTURA라고 한다면 진정 SOLA SCRIPTURA가 이루어진 것은 칼빈에 의해서였습니다.
동시대 루터, 멜랑흐톤, 불링거, 부써가 말씀을 주제 중심으로 다루었다면 칼빈은 성경을 좇아서 주해했습니다. 성경을 좇아서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 신학이 칼빈의 신학입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다스린 것은 정치적인 힘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였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서 대부분의 시기를 HABITANT 즉 단순한 망명객으로 살았으며, 그가 죽기 5년 전에 얻었던 BOURGEOIS라는 시민권도 고위 관직이나 의회원이 될 수 없는 반쪽짜리 시민권이었습니다.
일생을 통한 칼빈의 작업은 성경을 해석하고 체계화하고 그 진리를 변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칼빈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가 탑상(塔狀)에서의 회심을 설명하면서 롬 1:17와 롬 3:23-24를 말하고 어거스틴이 자신의 대회심이 롬 12:12와 딤전 6:16의 은혜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고백을 한 것과는 달리 칼빈은 자신을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에 이르게 한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서도 말한 바가 없습니다. 다만 칼빈의 신학에 심취한 학도요 목사로서 저자는 다음 말씀이 칼빈의 생애와 신학을 가장 잘 반향(反響)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3-16).
이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설 자리가 없다. 지상의 삶을 순례자로 살지 않는다면(nisi peregrinemur) 우리에게 하늘의 유산은 없다.”
칼빈은 당대 유럽에서 에라스무스와 함께 두 손가락에 뽑히는 천재였습니다.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두 곳의 법대에서(오를레앙의 에뚜알, 부르쥬의 알찌아띠) 법학을 공부했으며 인문주의에도 능통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항상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을 칼빈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삶의 역경을 평생을 쫓기며 살았던 다윗의 삶에 투사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내 마음을 가르칠만하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곧 “DOCILIS” 말씀 앞에 마음이 열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마스터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마스터한 사람( the man who God mastered)”이었습니다.
그럼 칼빈이 말하는 지상의 나그네(viator)의 삶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I 칼빈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해석
오늘 본문의 주제어는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1)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o[soi ga.r pneu,mati qeou/ a;gontai( ou-toi ui`oi. qeou/ eivsin).”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립니다. 롬 8:9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eiv de, tij pneu/ma Cristou/ ouvk e;cei( ou-toj ouvk e;stin auvtou).”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받은 영은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요 19:30)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 이 영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요 14:16).
b.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것과 그가 하신 모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요 14:26).
c. 오순절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각국의 방언이 터짐으로써 “하나님의 큰 일”이 세계 각국 언어로 말해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이 날 이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하면 이방 선교 못함. 곧 이것이 떠나심의 유익이다.
d. 오순절 영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영이다. 주님의 영을 받으면 속사람이 변화된다. 속사람이 변화되니 모든 것이 변화된다. 모든 가치가 바뀌고 삶의 좌표와 가치관이 바뀐다. 아들이 구하는 것은 세상이 구하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예, 요 14:27).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사람의 필요를 따라서 나눠 주고, 짐에서 모여서 서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밥상공동체)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리고 많은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났는데, 이와 같은 것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그러했다.
**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처음에는 저주의 대상(왜냐면 그들이 좇는 예수가 저주받은 죽음을 당했기 때문); 다음에는 두려워함을 받은 백성(행 2:43-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두려워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두렵고 핍박을 받으나 즐거워하는 모습이 두렵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음(행 2:47).
** 오순절 성령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어떠함”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은 성도의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의 남은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과정신학자 화이트헤드는 비판하기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보편성의 고독”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쓸수록 일수록 그들은 세상에서 분리된 게토(GHETTO)가 되어서 스스로에게만 가치가 있는 집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지적을 몰트만도 했습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관계성”을 무시하거나 버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체 내에 아무런 모순도 갖지 않고자 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아무런 비판을 받고자 하지 않으려는 신학 체계들이 있다. . . . 이 체계들은 그 안으로 쳐들어 갈 수도 없고 거기로부터 나올 수도 없는 그리하여 결국 모두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는 요새들과 같다”([신학의 방법과 형식]).
화이트헤드나 몰트만의 평가나 염려와는 달리 오순절 성령은 “함께 모이는 영”이며 “밖으로 뻗어 가는 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관계성 속에서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임으로서 더욱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간혹 함께 모이면 하나님 앞에서의 필연성을 망각하고 우연성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 기도하며 신학을 준비할 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섰습니다. 목회자의 직분이 무조건 섬겨야 될 직분임을 알고 이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양지에 모여서 함께 지내면서 점점 우연성이 지배합니다. 비교해서 죄를 따지니, 자연히 나의 공로도 생깁니다. 무조건적 복종의 필연성이 채플의 페센티지의 우연성으로 대체됩니다.
2) 그리스도의 영이 아들의 영이기 때문에 이 영을 받은 사람은 종과 같이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ouv ga.r evla,bete pneu/ma doulei,aj pa,lin eivj fo,bon avlla. evla,bete pneu/ma ui`oqesi,aj evn w-| kra,zomen abba o` path,rÅ).”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더 이상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이제 그리스도로 인도함을 받은 백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에 어떤 사제의 중보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주셨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악을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구별할 수 있으나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는 의롭다 칭함 받은 백성이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면서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것: 이 곤고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갈등합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던지려고 돈을 만지작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간음을 정죄함은 간음죄를 짓고 있다거나 지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갈등입니다.
여러분 갈등이 무엇입니까? [헹주 빠뜨린 북어국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 곤고함으로부터 무엇이 우리를 건져 낼 것입니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함은 방종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12절과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자유한 자의 삶은
a. 빚진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빚진 자입니다. 채무는 없으나 빚진 자,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으나 주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스스로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그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에 팔려 죽었던 우리의 생명을 무르고 사 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삯을 대신 지불해 주셨으니, 그 삯이 우리의 빚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빚으로 삼지 않고 그저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주셨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그 탕감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을수록 더 많이 사랑합니다. 즉 “사랑의 빚”을 집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안게 된 죽음의 부채를 생명의 삯으로 갚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죄에 팔여, 죄의 노예로 죽음의 부채를 지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께서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부채를 무름해 주셔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채도 지우시지 아니하시고, 그저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이 빚은 법정적인 빚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랑의 빚입니다. 성도는 오직 이 사랑의 빚만을 져야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바울의 사역은 “채무의식”에서 비롯됩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바울을 하나님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웠습니다(행 9:15). 그는 이 사역을 ”빚“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다시 생명의 영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생명“을 빚진 자로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그들을 구제 했을 때, 바울은 이를 복음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다 빚진자라”
b. 자유한 자의 삶은 “영으로써 육을 죽이는 삶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주장하나 성령의 소욕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상석에 앉히고자 하나 성령의 소욕은 말단에 자리를 잡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으로서 육을 죽이는 삶은 “종의 굴레를 매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죄의 종”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의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전에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해서 자유했으나, 이제 의의 종이 되어서 죄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합니다(롬 6:20).
사랑이 자유자의 굴레입니다. 그런데 이 굴레는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자유의 굴레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ㄱ)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
ㄴ) 적극적으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유
ㄷ) 연약한 사람을 위하려 자유를 삼가는 자유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30절에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무거운 율법의 멍에, 세속의 멍에,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절을 보면 주님은 멍에를 벗긴 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멍에를 매게 하신다고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짐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벼운 짐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멍에”입니다. 사모해야 할 “멍에”입니다.
IV 자녀의 삶은 후사의 삶입니다.
16절과 17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니라(auvto. to. pneu/ma summarturei/ tw/| pneu,mati h`mw/n o[ti evsme.n te,kna qeou/Å eiv de. te,kna( kai. klhrono,moi klhrono,moi me.n qeou/( sugklhrono,moi de. Cristou/( ei;per sumpa,scomen i[na kai. sundoxasqw/men).”
후사(KLERONOMOS)라는 말은 제비 뽑기에서 이긴 자, 기업 무를 자라는 뜻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참 자녀는 온전히 상속하는 자녀입니다. 참 자녀는 부채까지도 받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SUNDOXASTHOMEN, 가정법 과거 수동)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SUNPASCOMEN, 현재 직설법 능동). 이 자녀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SUNKLERONOMOS)”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형제 자매된 것입니다.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약은 이렇습니다.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
미래를 묵상해야 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고 했을 때 바라는 것들이 소망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의 실상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그네”된 지상의 삶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괴롭지만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특권입니다. 진정한 기쁨, 평강을 바라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시대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하는데 평강은 없고,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는데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이를 지는 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종교 개혁의 요체 진리, 자유, 사랑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됨에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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