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종살이 하기로
그저 종살이 하기로 (롬 1:1-7)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I
종살이 . . .
우리에겐 낯선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더 이상 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예 계약은 더 이상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종살이라는 말은 그저 표현으로만 남아있는 듯합니다.
예화)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매여서 꼼짝도 못하는 젊은 엄마가 한숨을 쉬면서 할 법한 말입니다. “이게 사람 사는 것인가? 종살이지.”
예화) 언젠가 유학 가지 전 기차 안에서 만난 한 신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저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인천에서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부도를 냈는데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원들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적은 돈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시골에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회사 주인이 되는 것보다, 종살이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후 유학을 떠난 후 고국의 IMF 소식을 들으며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 신사를 떠올렸습니다.
종살이가 무엇입니까?
예화) 어릴 때 대문 높고 마당 넓은 친구의 집에 가보면 마루도 없는 문간방에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무를 깎아서 팽이를 잘 만들었으며, 깊은 산에서 잘라 왔다는 이름 모를 나무로 활도 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나무 속 껍질 같은 것으로 묶어서 팽이채도 잘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저녁만 먹으면 방에 들어가 잤으며 새벽 어스름에 대문 고리가 보일 정도만 되면 일어났습니다. 겨울 추위에도 속옷이 없어서 간혹 물이라도 길어서 독에 부을 때에는 허리가 살 채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초여름 꺼내 입은 삼베옷은 논일 한번 갔다 오면 시커먼 갯벌색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그 옷을 빨지 않고 입고 또 입어 반질반질했습니다. 여름 베옷을 가을 서늘한 바람이 불 때 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어릴 때 저와 친구들은 그를 종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종이 죽으면 대문의 문고리 하나 벗겨져 달아났거니 했겠습니다.
종이 죽으면 종의 가족은 큰소리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꼬 두려움에 떨 뿐이었습니다. 아비가 죽었으니 어미와 딸린 가족은 이제 내쳐질 판이었습니다.
종의 죽음은 멍석 한 번 펼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짜고, 그 손으로 수 없이 깔고 접고 하던 멍석은 휑하니 처마 밑에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II
이 시대에 종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공복이니, 충복이니, 섬김이니 하면서 모호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말들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 . . . .
어느 한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이 낙도 선교 갔을 때, 종일 일만 하고, 모임에도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격리 당하고, 개밥그릇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찌그러진 용기에 던져주는 밥을 땅에서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육지에서 팔려 온 종들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종살이가 없겠습니다만, 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도 그렇게 불리고자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종의 노래가 흐릅니다.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를 고난 받는 종으로서 노래합니다. 그는 본래 타고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얼굴이 타인보다 심히 일그러졌습니다(52, 53장). 그가 온갖 질고를 지고 찢기고 상하고 파이는 고난을 당하고 도수장의 양과 같이 잠잠히 죽음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노래에 후렴과 같은 노래를 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분은 종입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직분은 사도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으로 표현됩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따로 나눠 놓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종으로서 복음 전하는 일해야 사도입니다. 사도는 종이어야 하며 종으로서 일해야 합니다. 즉 종살이 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종살이를 해야 사도입니다(1).
모든 성도가 다 주의 종입이다.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스스로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많지 없습니다.
성도들이 이인칭으로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습니다. 대체로 이 때에는 목회자를 종살이를 하는 종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택된 직분자로서 높이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의 이름으로 섬깁니다. 그 이름으로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하거나 합니다.
목회자는 종종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삼인칭으로서 종이라고 불립니다. 아무도 종살이하는 종으로서 여기지 않고 주의 일을 맡은 특별한 직분자로서 목회자를 종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기도합니다.
주의 종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구별되게, 고상하게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이렇듯이 왠지 고급스럽게 여겨짐으로 말미암아 정작 종이라는 불리는 성도들 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종이라고 소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비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신을 높이는 고상한 이름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III
왜 종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종이라는 이름만 있지 종살이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한데, 내가 종살이 하고 있다는 말은 뭔가가 온당치 않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종의 삶이 종살이 일텐데 종살이 라는 말이 너무 와 닿지 않아서 설교 제목으로 잡기가 주저 되었습니다).
종살이가 없는 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사도 바울을 선택할 것입니다.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사도 바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가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 받은 사도로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주의 종이 되고 싶다는 사람도, 그의 종살이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은 매에 맞고, 돌에 맞고, 짐승에 찢기고, 물에 빠지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 황급히 바구니에 실려 쫓겨나듯이 핍박당하는 성도의 삶을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쉽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옮겨 다니면서 교회를 섬기는 일로 일생을 마치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 되기를 원하지만, 종살이를 하기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종이라고, 주의 일꾼이라고 불리기는 원하지만 결코 종살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종살이를 소망하며 기도합니까? 평생 남을 위해서는 멍석을 펴되, 자신은 맨 땅에서, 진흙탕에서만 뒹구는 종의 삶을 과연 소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친 백성이고, 기업을 이을 후사인데, 어떻게 종살이를 한다고 할 것인가? 질문할 것입니다.
IV
주님께서는 이 땅에 종살이 하러 오셨습니다.
고난의 종살이 하러 오셨습니다.
종이 땀 흘려 곡물을 생산하듯이, 남을 섬기기 위해서 먹을 것을 만드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심으로써 먹을 것을 구하셔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소외되어 매 끼니 억눌린 한숨과 눈물의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값없이 매품을 파셨습니다. 우리 대신 맞고, 대신 차이고, 대신 모욕당하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유혹을 대신 지셨습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시고 창살에 찔리셔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베어가셨습니다.
자신의 살찜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로 “그와 우리의 함께”와 “우리들의 함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다 지우시기 위해서 벌거벗고 백주에 언덕 위 나무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앞에서 장성한 아들이 맨 몸으로 달리셨습니다. 이를 갈고 몸을 떨었습니다. 고통의 절규에 심장의 혈관이 터져 배여 나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 세상의 흑암을 다 끌어 모아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가 종살이를 다 마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본문 3-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신성으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셨습니다. 신성으로는 우리의 죽음을 죽으실 수 없고 인성으로는 그 죽음을 이길 수 없으니 신인 양성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우리 주”가 되셨습니다.
종살이를 하심으로써 우리의 주가 되신 이 분이 누구입니까? 본문 2절은 우리 주가 되신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미리 약속”되신 분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종살이 하셨습니다. 근본 아들이신 분이 종으로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빌 2:6-7). 여기서 본체와 형체는 모두 morfh라는 단어입니다. morfh는 자체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전체 속성이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칼빈은 morfh라는 단어를 인격과 삶이 모두 그러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았고, 워필드는 모든 속성의 전체를 포함하는 실체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으로서 자체 종으로서 종의 모든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으로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아들이 “종의식”을 가지고 사셨으니, 항상 위에 계신 아버지를 높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그저 종살이 하셨습니다.
종으로서 종의식을 가지고 종살이 하셨으니, 무엇 하나 자신이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더 크신 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만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V
우리를 위하여 종살이를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종을 우리가 죽였다. 우리가 죽인 그 종이 우리를 살리셨도다! 베드로 오순절 설교에서 이와 같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보혜사 성령을 받고서야 영적이 눈이 열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심을 보았습니다(행 3:13).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가 우리의 주인이 되셨도다(행 4:27, 30)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한 자녀이며 그와 함께한 후사로서 종이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살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듯이, 우리도 이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종살이를 계승합니다.
5절에서 보듯이 우리가 “은혜(carij)”와 “사도의 직분(avpostolh)”을 받았습니다. 은혜는 아들이 됨이요. 사도의 직분을 받음은 종이 됨입니다. 곧 우리는 아들이자 종으로서 만세 전에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들이자 종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 순종케” 합니다. 믿음(pistej)은 은혜 즉 아들 됨과 연결되는 말이며 순종(u`pakoh)은 사도의 직분 즉 종 됨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도 아들이자 종으로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아들이자 종으로서 아들이자 종으로서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담대하게 전하고 달콤한 말로만 전할 것이 아닙니다.
한글로는 믿음으로 순종에 이른다고 했지만 원어는 “믿음의 순종(eij u`pakohn tistewj)”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아들됨과 종됨이 동시입니다. 즉 칭의와 함께 성화가 출발합니다.
종살이는 아들이자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서 살되 종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종살이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과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은 누가 주인인가라는 것과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인의 뜻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한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배는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순종함은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5절에서 보듯이,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는 것”은 종으로서 “이방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들이 종이므로, 믿음과 순종이 함께하며, 예배와 섬김이 함께합니다. 이것이 종살이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종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VI
6절에서 말씀하듯이,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을 롬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본문 7절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말하는 필리오케를 연상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의 표는 그저 종살이 하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예배하며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그러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 5:8-9).
우리는 종이라는 이름에만 익숙하지 종살이에는 등한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종이라고 불러주는 것에는 흡사하지만 우리에게 종살이를 요구할 때는 시큰둥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성경을 자의로 해석해서, 주님 앞에서는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후사로서의 고상함만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가 고난 받는 종을 주인으로 모신 종이라면 우리도 고난의 종살이를 해야 할 터인데, 우리가 종살이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http://blog.daum.net/kkho1105/2197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I
종살이 . . .
우리에겐 낯선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더 이상 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예 계약은 더 이상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종살이라는 말은 그저 표현으로만 남아있는 듯합니다.
예화)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매여서 꼼짝도 못하는 젊은 엄마가 한숨을 쉬면서 할 법한 말입니다. “이게 사람 사는 것인가? 종살이지.”
예화) 언젠가 유학 가지 전 기차 안에서 만난 한 신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저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인천에서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부도를 냈는데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원들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적은 돈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시골에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회사 주인이 되는 것보다, 종살이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후 유학을 떠난 후 고국의 IMF 소식을 들으며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 신사를 떠올렸습니다.
종살이가 무엇입니까?
예화) 어릴 때 대문 높고 마당 넓은 친구의 집에 가보면 마루도 없는 문간방에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무를 깎아서 팽이를 잘 만들었으며, 깊은 산에서 잘라 왔다는 이름 모를 나무로 활도 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나무 속 껍질 같은 것으로 묶어서 팽이채도 잘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저녁만 먹으면 방에 들어가 잤으며 새벽 어스름에 대문 고리가 보일 정도만 되면 일어났습니다. 겨울 추위에도 속옷이 없어서 간혹 물이라도 길어서 독에 부을 때에는 허리가 살 채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초여름 꺼내 입은 삼베옷은 논일 한번 갔다 오면 시커먼 갯벌색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그 옷을 빨지 않고 입고 또 입어 반질반질했습니다. 여름 베옷을 가을 서늘한 바람이 불 때 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어릴 때 저와 친구들은 그를 종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종이 죽으면 대문의 문고리 하나 벗겨져 달아났거니 했겠습니다.
종이 죽으면 종의 가족은 큰소리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꼬 두려움에 떨 뿐이었습니다. 아비가 죽었으니 어미와 딸린 가족은 이제 내쳐질 판이었습니다.
종의 죽음은 멍석 한 번 펼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짜고, 그 손으로 수 없이 깔고 접고 하던 멍석은 휑하니 처마 밑에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II
이 시대에 종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공복이니, 충복이니, 섬김이니 하면서 모호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말들로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 . . . .
어느 한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이 낙도 선교 갔을 때, 종일 일만 하고, 모임에도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격리 당하고, 개밥그릇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찌그러진 용기에 던져주는 밥을 땅에서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육지에서 팔려 온 종들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종살이가 없겠습니다만, 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도 그렇게 불리고자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종의 노래가 흐릅니다.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를 고난 받는 종으로서 노래합니다. 그는 본래 타고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얼굴이 타인보다 심히 일그러졌습니다(52, 53장). 그가 온갖 질고를 지고 찢기고 상하고 파이는 고난을 당하고 도수장의 양과 같이 잠잠히 죽음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노래에 후렴과 같은 노래를 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분은 종입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직분은 사도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으로 표현됩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따로 나눠 놓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종으로서 복음 전하는 일해야 사도입니다. 사도는 종이어야 하며 종으로서 일해야 합니다. 즉 종살이 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종살이를 해야 사도입니다(1).
모든 성도가 다 주의 종입이다.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스스로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많지 없습니다.
성도들이 이인칭으로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습니다. 대체로 이 때에는 목회자를 종살이를 하는 종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택된 직분자로서 높이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의 이름으로 섬깁니다. 그 이름으로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하거나 합니다.
목회자는 종종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삼인칭으로서 종이라고 불립니다. 아무도 종살이하는 종으로서 여기지 않고 주의 일을 맡은 특별한 직분자로서 목회자를 종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기도합니다.
주의 종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구별되게, 고상하게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이렇듯이 왠지 고급스럽게 여겨짐으로 말미암아 정작 종이라는 불리는 성도들 자들 자신은 스스로를 종이라고 소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비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신을 높이는 고상한 이름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III
왜 종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종이라는 이름만 있지 종살이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한데, 내가 종살이 하고 있다는 말은 뭔가가 온당치 않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종의 삶이 종살이 일텐데 종살이 라는 말이 너무 와 닿지 않아서 설교 제목으로 잡기가 주저 되었습니다).
종살이가 없는 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사도 바울을 선택할 것입니다.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사도 바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가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 받은 사도로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주의 종이 되고 싶다는 사람도, 그의 종살이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은 매에 맞고, 돌에 맞고, 짐승에 찢기고, 물에 빠지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 황급히 바구니에 실려 쫓겨나듯이 핍박당하는 성도의 삶을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쉽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옮겨 다니면서 교회를 섬기는 일로 일생을 마치기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 되기를 원하지만, 종살이를 하기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종이라고, 주의 일꾼이라고 불리기는 원하지만 결코 종살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종살이를 소망하며 기도합니까? 평생 남을 위해서는 멍석을 펴되, 자신은 맨 땅에서, 진흙탕에서만 뒹구는 종의 삶을 과연 소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친 백성이고, 기업을 이을 후사인데, 어떻게 종살이를 한다고 할 것인가? 질문할 것입니다.
IV
주님께서는 이 땅에 종살이 하러 오셨습니다.
고난의 종살이 하러 오셨습니다.
종이 땀 흘려 곡물을 생산하듯이, 남을 섬기기 위해서 먹을 것을 만드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심으로써 먹을 것을 구하셔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소외되어 매 끼니 억눌린 한숨과 눈물의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값없이 매품을 파셨습니다. 우리 대신 맞고, 대신 차이고, 대신 모욕당하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세상의 유혹을 대신 지셨습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시고 창살에 찔리셔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베어가셨습니다.
자신의 살찜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로 “그와 우리의 함께”와 “우리들의 함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다 지우시기 위해서 벌거벗고 백주에 언덕 위 나무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앞에서 장성한 아들이 맨 몸으로 달리셨습니다. 이를 갈고 몸을 떨었습니다. 고통의 절규에 심장의 혈관이 터져 배여 나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 세상의 흑암을 다 끌어 모아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가 종살이를 다 마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본문 3-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신성으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셨습니다. 신성으로는 우리의 죽음을 죽으실 수 없고 인성으로는 그 죽음을 이길 수 없으니 신인 양성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우리 주”가 되셨습니다.
종살이를 하심으로써 우리의 주가 되신 이 분이 누구입니까? 본문 2절은 우리 주가 되신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미리 약속”되신 분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종살이 하셨습니다. 근본 아들이신 분이 종으로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빌 2:6-7). 여기서 본체와 형체는 모두 morfh라는 단어입니다. morfh는 자체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전체 속성이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칼빈은 morfh라는 단어를 인격과 삶이 모두 그러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았고, 워필드는 모든 속성의 전체를 포함하는 실체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으로서 자체 종으로서 종의 모든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으로서 종살이 하셨습니다. 아들이 “종의식”을 가지고 사셨으니, 항상 위에 계신 아버지를 높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그저 종살이 하셨습니다.
종으로서 종의식을 가지고 종살이 하셨으니, 무엇 하나 자신이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더 크신 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만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V
우리를 위하여 종살이를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종을 우리가 죽였다. 우리가 죽인 그 종이 우리를 살리셨도다! 베드로 오순절 설교에서 이와 같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보혜사 성령을 받고서야 영적이 눈이 열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심을 보았습니다(행 3:13).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가 우리의 주인이 되셨도다(행 4:27, 30)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한 자녀이며 그와 함께한 후사로서 종이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살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듯이, 우리도 이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종살이를 계승합니다.
5절에서 보듯이 우리가 “은혜(carij)”와 “사도의 직분(avpostolh)”을 받았습니다. 은혜는 아들이 됨이요. 사도의 직분을 받음은 종이 됨입니다. 곧 우리는 아들이자 종으로서 만세 전에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들이자 종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 순종케” 합니다. 믿음(pistej)은 은혜 즉 아들 됨과 연결되는 말이며 순종(u`pakoh)은 사도의 직분 즉 종 됨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도 아들이자 종으로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아들이자 종으로서 아들이자 종으로서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담대하게 전하고 달콤한 말로만 전할 것이 아닙니다.
한글로는 믿음으로 순종에 이른다고 했지만 원어는 “믿음의 순종(eij u`pakohn tistewj)”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아들됨과 종됨이 동시입니다. 즉 칭의와 함께 성화가 출발합니다.
종살이는 아들이자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서 살되 종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종살이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과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은 누가 주인인가라는 것과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인의 뜻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한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배는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순종함은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5절에서 보듯이,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는 것”은 종으로서 “이방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들이 종이므로, 믿음과 순종이 함께하며, 예배와 섬김이 함께합니다. 이것이 종살이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종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VI
6절에서 말씀하듯이,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을 롬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본문 7절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말하는 필리오케를 연상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의 표는 그저 종살이 하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예배하며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그러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 5:8-9).
우리는 종이라는 이름에만 익숙하지 종살이에는 등한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종이라고 불러주는 것에는 흡사하지만 우리에게 종살이를 요구할 때는 시큰둥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성경을 자의로 해석해서, 주님 앞에서는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후사로서의 고상함만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가 고난 받는 종을 주인으로 모신 종이라면 우리도 고난의 종살이를 해야 할 터인데, 우리가 종살이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http://blog.daum.net/kkho1105/2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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