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고유의 신학 30주제 엄선
칼빈 고유의 신학 30주제 엄선
[인터뷰]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연재하는 문병호 교수
2009년 04월 27일 (월) 17:42:30 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경건의 가르침’ 설교·삶 적용 중점…말씀중심 회복 도움되었으면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쉽게 해석한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지상강좌가 다음 주부터 연재된다. 본지는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30회에 걸쳐 진행될 〈기독교강요〉 지상강좌에 앞서 문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왜 칼빈주의 신학이 중요한 지 들어봤다. 〈편집자 주〉
문병호 교수는 대구 영남고등학교, 고려대학교(법대 법학과, 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으며, 미국 웨스턴신학교(홀랜드)에서 신학석사 학위(Th. M.),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칼빈의 기독론적 율법 이해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Ph. D.)를 취득하였다. 유학 중에 미국 칼빈신학교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종교개혁 센터에서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현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신학서론, 기독론, 칼빈의 기독교강요 연구,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다음 주부터 칼빈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가 연재됩니다. 글의 구성은 어떻게 계획하고 계십니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가르침입니다. 이 중 기독교강요의 정수를 뽑아 40% 정도 할애하고, 가르침 가운데 성경해석은 30% 정도 배분하여 삶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반적인 신학적 배경을 설명할 계획입니다. 개혁신학의 고유성 다시말해 ‘오직 성경으로’를 토대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칼빈은 오로지 성경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고유한 신학의 독특성이 많이 희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기독교강요 지상강좌는 칼빈만이 갖고 있는 특징과 장점 30주제를 엄선하여 기록할 것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말씀 묵상자료 뿐 만 아니라 성경구절도 상당수 인용하고, 성경을 읽는 기회로도 활용하도록 돕겠습니다.
▲지상강좌를 통해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평신도들에게도 기독교강요를 통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지만 목회자들이 기독교강요로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글을 쓰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있는 좋은 서책입니다. 본문을 선택해 설교 제목을 잡아 묵상을 하면서 설교를 작성해 나가면 원래 신학적 뜻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칭의를 말하고 있는데 성화를 가르치면 안됩니다. 기독교강요를 알면 절대로 본문을 놓치지 않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주석 설교 신학적 잡지 등과 같이 읽기를 원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본교리서로서 중심을 잡아주고 주석을 참조하도록 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비롯해 주석서 등의 간행으로 거둔 주요 성과는 무엇입니까.
=칼빈의 업적은 크게 5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기독교강요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입니다. 둘째 주석입니다. 당대에 이만큼 주석한 자는 없습니다. 셋째 목회자와 교회지도자 그리고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강의입니다. 넷째 공관복음을 비롯하여 신명기 욥기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의 설교집 간행입니다. 절반 이상이 분실되어 아쉽지만 수작으로 평가받는 내용들입니다. 다섯째 신학적 문건입니다. 당시 모든 신학의 논쟁에는 칼빈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논쟁거리는 칼빈한테 물어보라고 했겠습니까. 당시 삼위일체는 획기적이었습니다. 기도론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확립했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양성 중보도 파격이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과 섭리론은 칼빈신학의 정수입니다. 이렇듯 논쟁할 때마다 개종자는 늘어났습니다. 칼빈과 논쟁할 때 많은 신학자들은 처음에 고요했고, 나중에는 경악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교훈적입니다. 성경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아멘 할 수 있도록 펴낸 신앙고백서입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경험이 배어있는 책입니다. 거기다 변증적 신학서입니다. 참 교리(신학)를 전하고 있습니다. 교리해석 뿐 만 아니라 참 교회를 지키고 수립하는 대안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기독교강요〉의 세 가지의 내용을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우선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개혁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적 측면도 중요합니다.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입술을 넘어서 예배로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신학은 고백신학입니다. 고백의 영역이 너무 없고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것이 안타까울 때도 많습니다. 거기다 참 신학을 해석하고 수호하려는 변증적 요구가 필요합니다. 목사의 교사권은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수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불법과 미혹의 영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변증적 특성과 바른 신학을 세워야 합니다. 성도들도 바로서야 합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은 안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토양도 알 수 없는 우려할 만한 신학이 많이 들어와 말씀묵상은 없고 이벤트성 스타가 대접받고 있습니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강요〉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기독교강요연구〉란 강좌를 한 학기에 총 80장을 소화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본래 수업 이외에 15시간을 보강하면서 칼빈의 개혁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칼빈에 대한 관심은 언제 생겼으며, 현 시대에 칼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칼빈의 작품을 기초로 하여 교의신학에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관심을 갖고 공부했습니다. 이 시대는 위기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기려는 생각보다 본래 말씀중심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70~80년대는 오순절주의, 90년대는 강남중심의 문화주의가 팽배했다면 21세기는 성경중심 개혁주의 신학시대로 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증거되는 곳에 한국교회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칼빈이 사용되길 바랍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각종 사업들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칼빈의 삶과 신학을 반추하고 조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형식적인 행사보다는 칼빈을 계승하자는 차원에서 칼빈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추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칼빈신학을 함께 모여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여기에 포함시켜 진행하는 방안도 모색했으면 합니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54
<기독교강요> 제1강좌/ 오직 주님만이 우리 지식의 근본
교리사 남을 명구절로 시작 ... 참 경건 없는 곳에 참 지식은 없다
2009년 04월 30일 (목) 09:30:00 기독신문 ekd@kidok.com
문병호 교수
제 1강좌
생명의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기독교 강요 1.1.1-1.5.15)
1. 오직 하나님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지혜, 말하자면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1.1.1).
초판 이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교리사에 있어서 가장 명구(名句)라고 할 만한 본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사랑(fatherly love)을 베푸셔서 천지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운행하시는 섭리를 포함한다.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류의 타락 이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베푸신 긍휼과 자비를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우리 모습의 연약함으로 그 분의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신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뜻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매사에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에 있어서도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타락 전의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순수하게 보존함으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그 위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받은 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전락(顚落)하여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인류에게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셨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낮아져서 그 분을 묵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1.1.2).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표준”이 되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다. 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은 인성의 고귀함이나 심오함을 내세워 스스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때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설파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지식에 있어서조차 진리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전반부).
2.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을 영화롭게 함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함께 역사하므로 참 경건(true godliness, pietas vera)이 없는 곳에 참 지식(true knowledge, notitia vera)도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은혜를 깨달아 그 분의 사랑을 감사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로부터 내려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위로는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이 곧 경건이다(1.2.2).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으로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sense of divinity, 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ed of religion, 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ce, conscientia)”을 각각의 영혼에 부여 받았다. 이러한 은혜는 타락한 인류에게도 계속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불씨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조차 물을 부어서 꺼뜨리는 삶을 살고 종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든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의 고삐”에 매인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마주 보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다(3.1.1; 4.1.1, 4).
그러므로 순서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나 참 지식을 얻음에 있어서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다. 먼저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음으로써 아는 것이 경건한 지식의 출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분께서 계신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적합하고 마땅한지를 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지를 안다”(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에게 유익하다 함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거룩한 지식은 곧 우리에게 유익함이 된다. 우리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데 있음이 자명할진대(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우리의 지식도 참으로 그러하다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스스로 아시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대로 안다. 모든 피조물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되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얻었다. 피조물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알려짐으로써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안다고 하는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이나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흄과 같은 회의주의자들과 칸트와 같은 불가지론자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알되,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시므로, 곧 알려짐으로써 안다.
피조물의 본래적 특성은 하나님에의 의존성에 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 하나님께서 아신 바대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만한 지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피조성(被造性)과 하나님의 형상성(形象性)이 동시에 있다. 우리는 알되, 오직 알려짐으로써 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Coram Deo) 내어 놓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서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참 평강이 없어진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신 바 된 그 지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도록 하자. 오직 그 지식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참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모든 피조물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훈장”으로서, “거울”로서 하나님을 찬미한다(1.5.1,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인류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표본”으로 지으셨다. 인류는 하나님 영광의 최고의 도구이다. 젖 먹는 어린 아이의 말 없는 웅변은 모든 피조물의 찬미를 압도한다(1.5.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화려한 미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셨다”(1.14.20). 그리하여서 영광의 극장의 최고 배우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헛된 사색을 멈추고 그 분이 하신 일을 목도하며 찬미로 나아가자! “그 분을 찾기 위하여 꼼꼼히 따지기보다 그 분을 더욱 경배하도록 하자!”(1.5.9).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후반).

http://blog.daum.net/kkho1105/2286
[인터뷰]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연재하는 문병호 교수
2009년 04월 27일 (월) 17:42:30 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경건의 가르침’ 설교·삶 적용 중점…말씀중심 회복 도움되었으면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쉽게 해석한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지상강좌가 다음 주부터 연재된다. 본지는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30회에 걸쳐 진행될 〈기독교강요〉 지상강좌에 앞서 문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왜 칼빈주의 신학이 중요한 지 들어봤다. 〈편집자 주〉
문병호 교수는 대구 영남고등학교, 고려대학교(법대 법학과, 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으며, 미국 웨스턴신학교(홀랜드)에서 신학석사 학위(Th. M.),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칼빈의 기독론적 율법 이해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Ph. D.)를 취득하였다. 유학 중에 미국 칼빈신학교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종교개혁 센터에서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현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신학서론, 기독론, 칼빈의 기독교강요 연구,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다음 주부터 칼빈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가 연재됩니다. 글의 구성은 어떻게 계획하고 계십니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가르침입니다. 이 중 기독교강요의 정수를 뽑아 40% 정도 할애하고, 가르침 가운데 성경해석은 30% 정도 배분하여 삶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반적인 신학적 배경을 설명할 계획입니다. 개혁신학의 고유성 다시말해 ‘오직 성경으로’를 토대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칼빈은 오로지 성경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고유한 신학의 독특성이 많이 희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기독교강요 지상강좌는 칼빈만이 갖고 있는 특징과 장점 30주제를 엄선하여 기록할 것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말씀 묵상자료 뿐 만 아니라 성경구절도 상당수 인용하고, 성경을 읽는 기회로도 활용하도록 돕겠습니다.
▲지상강좌를 통해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평신도들에게도 기독교강요를 통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지만 목회자들이 기독교강요로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글을 쓰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있는 좋은 서책입니다. 본문을 선택해 설교 제목을 잡아 묵상을 하면서 설교를 작성해 나가면 원래 신학적 뜻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칭의를 말하고 있는데 성화를 가르치면 안됩니다. 기독교강요를 알면 절대로 본문을 놓치지 않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주석 설교 신학적 잡지 등과 같이 읽기를 원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본교리서로서 중심을 잡아주고 주석을 참조하도록 했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비롯해 주석서 등의 간행으로 거둔 주요 성과는 무엇입니까.
=칼빈의 업적은 크게 5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기독교강요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입니다. 둘째 주석입니다. 당대에 이만큼 주석한 자는 없습니다. 셋째 목회자와 교회지도자 그리고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강의입니다. 넷째 공관복음을 비롯하여 신명기 욥기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의 설교집 간행입니다. 절반 이상이 분실되어 아쉽지만 수작으로 평가받는 내용들입니다. 다섯째 신학적 문건입니다. 당시 모든 신학의 논쟁에는 칼빈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논쟁거리는 칼빈한테 물어보라고 했겠습니까. 당시 삼위일체는 획기적이었습니다. 기도론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확립했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양성 중보도 파격이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과 섭리론은 칼빈신학의 정수입니다. 이렇듯 논쟁할 때마다 개종자는 늘어났습니다. 칼빈과 논쟁할 때 많은 신학자들은 처음에 고요했고, 나중에는 경악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교훈적입니다. 성경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아멘 할 수 있도록 펴낸 신앙고백서입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경험이 배어있는 책입니다. 거기다 변증적 신학서입니다. 참 교리(신학)를 전하고 있습니다. 교리해석 뿐 만 아니라 참 교회를 지키고 수립하는 대안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기독교강요〉의 세 가지의 내용을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우선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개혁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적 측면도 중요합니다.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적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입술을 넘어서 예배로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신학은 고백신학입니다. 고백의 영역이 너무 없고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것이 안타까울 때도 많습니다. 거기다 참 신학을 해석하고 수호하려는 변증적 요구가 필요합니다. 목사의 교사권은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수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불법과 미혹의 영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변증적 특성과 바른 신학을 세워야 합니다. 성도들도 바로서야 합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은 안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토양도 알 수 없는 우려할 만한 신학이 많이 들어와 말씀묵상은 없고 이벤트성 스타가 대접받고 있습니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강요〉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기독교강요연구〉란 강좌를 한 학기에 총 80장을 소화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본래 수업 이외에 15시간을 보강하면서 칼빈의 개혁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칼빈에 대한 관심은 언제 생겼으며, 현 시대에 칼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칼빈의 작품을 기초로 하여 교의신학에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관심을 갖고 공부했습니다. 이 시대는 위기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기려는 생각보다 본래 말씀중심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70~80년대는 오순절주의, 90년대는 강남중심의 문화주의가 팽배했다면 21세기는 성경중심 개혁주의 신학시대로 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증거되는 곳에 한국교회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칼빈이 사용되길 바랍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각종 사업들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말씀을 해석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말씀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아 칼빈의 삶과 신학을 반추하고 조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형식적인 행사보다는 칼빈을 계승하자는 차원에서 칼빈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추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칼빈신학을 함께 모여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여기에 포함시켜 진행하는 방안도 모색했으면 합니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54
<기독교강요> 제1강좌/ 오직 주님만이 우리 지식의 근본
교리사 남을 명구절로 시작 ... 참 경건 없는 곳에 참 지식은 없다
2009년 04월 30일 (목) 09:30:00 기독신문 ekd@kidok.com
문병호 교수
제 1강좌
생명의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기독교 강요 1.1.1-1.5.15)
1. 오직 하나님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지혜, 말하자면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1.1.1).
초판 이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교리사에 있어서 가장 명구(名句)라고 할 만한 본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사랑(fatherly love)을 베푸셔서 천지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운행하시는 섭리를 포함한다.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류의 타락 이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베푸신 긍휼과 자비를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우리 모습의 연약함으로 그 분의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신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뜻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매사에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에 있어서도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타락 전의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순수하게 보존함으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그 위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받은 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전락(顚落)하여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인류에게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셨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낮아져서 그 분을 묵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1.1.2).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표준”이 되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다. 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은 인성의 고귀함이나 심오함을 내세워 스스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때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설파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지식에 있어서조차 진리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전반부).
2.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을 영화롭게 함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함께 역사하므로 참 경건(true godliness, pietas vera)이 없는 곳에 참 지식(true knowledge, notitia vera)도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은혜를 깨달아 그 분의 사랑을 감사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로부터 내려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위로는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이 곧 경건이다(1.2.2).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으로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sense of divinity, 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ed of religion, 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ce, conscientia)”을 각각의 영혼에 부여 받았다. 이러한 은혜는 타락한 인류에게도 계속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불씨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조차 물을 부어서 꺼뜨리는 삶을 살고 종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든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의 고삐”에 매인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마주 보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다(3.1.1; 4.1.1, 4).
그러므로 순서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나 참 지식을 얻음에 있어서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다. 먼저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음으로써 아는 것이 경건한 지식의 출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분께서 계신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적합하고 마땅한지를 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지를 안다”(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에게 유익하다 함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거룩한 지식은 곧 우리에게 유익함이 된다. 우리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데 있음이 자명할진대(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우리의 지식도 참으로 그러하다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스스로 아시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대로 안다. 모든 피조물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되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얻었다. 피조물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알려짐으로써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안다고 하는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이나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흄과 같은 회의주의자들과 칸트와 같은 불가지론자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알되,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시므로, 곧 알려짐으로써 안다.
피조물의 본래적 특성은 하나님에의 의존성에 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 하나님께서 아신 바대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만한 지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피조성(被造性)과 하나님의 형상성(形象性)이 동시에 있다. 우리는 알되, 오직 알려짐으로써 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Coram Deo) 내어 놓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서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참 평강이 없어진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신 바 된 그 지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도록 하자. 오직 그 지식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참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모든 피조물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훈장”으로서, “거울”로서 하나님을 찬미한다(1.5.1,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인류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표본”으로 지으셨다. 인류는 하나님 영광의 최고의 도구이다. 젖 먹는 어린 아이의 말 없는 웅변은 모든 피조물의 찬미를 압도한다(1.5.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화려한 미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셨다”(1.14.20). 그리하여서 영광의 극장의 최고 배우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헛된 사색을 멈추고 그 분이 하신 일을 목도하며 찬미로 나아가자! “그 분을 찾기 위하여 꼼꼼히 따지기보다 그 분을 더욱 경배하도록 하자!”(1.5.9).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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