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개혁주의신학자

조직신학 서론 -문병호 교수

조직신학 서론  -문병호 교수
 
<1> 신학은 학문인가?
신학은 학문이 될 수 있다.
doing theology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독특하다.
피조물의 신학, 나그네 신학
 
Peter Abelard는 ‘기독교 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신학의 주관성을 말한 중세 신학계의 이단아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Francis Turretin 제네바 대학의 교수였다.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변증적 신학의 개요. 찰스 하지가 프란시스 뚤레틴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신학은 존재로써의 하나님과 지식으로서의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나님의 계시, 인격, 지식으로써의 그의 말씀을 다루는 것이 신학이다.
theos + logos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대상(하나님)이 주체(하나님)가 된다. 하나님 외의 존재는 알려지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알려지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이고, 나는 하나님께서 아신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다. creatureliness 피조성. 피조물은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개혁신학에서는 인간은 신성이 없는 피조물이지만, 인간에게 신적 소질이 있다고 말한다. 카톨릭에서는 신화(神化)를 말한다. 칼 바르트는 “God in us” 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진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진리, 지식은 객관적 지식이다. 우리는 그 지식을 수납한다. 받아들인다.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 내 속에서 진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길어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 자체를 주신다. 물을 길어 먹는 것인 신인 합력설이다. 진리를 아는 소질이 있어서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revelatio archetype 원형계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는 지식. 하나님께서는 어떤 매개를 통해 아시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매개를 통해서 나를 포현하고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것의 의미를 주신다. 모든 사물은 의미를 가지고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다. 피조물은 규정되어서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지식을 갖으신다. 하나님은 객관적 지식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revelatio ectypa 모형계시. 원형 계시로부터 나온 계시. 원형계시는 하나님 스스로 지식. 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추어진 지식을 주신다.
revelatio accommodat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어 주신 계시. 맞추어진 계시는 계시된 계시이다. revelatio reverlata 계시된 계시. revelatio reverlata ad nos 우리에게 계시된 계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맞추어진 계시를 주시고, 우리는 그 맞추어진 계시로 신학을 한다.
맞추어진 계시는 원형 계시의 변형도 아니고 맞추어진 계시는 원형 계시를 포함하지 않고 포함된다. ad nos. 우리를 향한 진리. 아버지에게도 진리이고, 우리에게도 진리가 된다. 우리를 향한 진리를 우리를 위한 진리이다. pro nobis.
 
우리는 모형계시로 신학을 한다. 모형계시는 원형계시로부터 나왔다. 파생되어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형계시를 다 알 수 없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이것이 피조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마음에 갖고 신학을 해야 한다.
피조성만 주장하면, 모르는 존재가 되고 불가지론자가 된다. 반대로 안다고 주장하면, 합리주의지가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았다.
알려짐으로써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제하는 하는 것. 추측적 전제가 아닌 객관적 진리로써의 전제이다.
나 자신을 아는 지식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는 지식은 원형지식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를 필요한 만큼 맞추어서 알려주신다. 이것이 모형지식이다. 알려짐으로써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알려지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대로 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관한 말씀. 이것이 신학이다. 세상 학문은 about이지만, of를 쓸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accommodatio. 맞추어 주신다. 인간에게 의인화되어서 오는 지식이 아니라, 맞추어 주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사람 만큼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큼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의인화가 아니다. 명령에는 약속이 있다. 엄한 명령에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다. 맞추어 주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ratio. 이성, 논리, 이유, 대의명분, 그러함. 하나님으로써의 그러하심.
sermo.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선포된 말씀.
어거스틴 “하나님의 그러하심과 그분의 말씀을 다룬 것이 신학이다.”
아퀴나스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과학적 정의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학의 독특성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다.”
 
세상의 학문은 내가 다 파악하고 시작하지만, 신학은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는 지식이다.
 
진리가 존재한다. 진리의 객관성.
존재와 지식은 구분되지만, 구별하지 말라. 존재와 지식은 함께 있다. 지으신 분이 의미를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Vantil "아무 의미가 없는 사실은 없다."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미 규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존재와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
 
객관적 진리.
헬라 철학에서는 thologia는 형이상학을 의미하는 근원적인 학문, 기초가 되는 학문이었다.
동방 교부에게 thologia는 성자하나님에 관해서만 사용하였다. 오이코노미아(경륜, 하나님의 역사).
로마 신학자들에게 thologia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 했다.
뚤레틴 “신학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원형지식도 교리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변증학도 교리에 포함된다. 교리 전제적 방법론. 교리가 없는 전제는 불가능하다. 전제가 교리고 교리가 전제이다.
교리 지식이 종합화 체계화 되는 것이 신학이다. 종합화, 총화(summa), 종합적 지식을 체계화한다. 찰스 핫지 Biblical facts 성경적 사실들을 다룬다. 찰스 핫지는 귀납법을 강조한다. 이 귀납법은 세상적 귀납법이 아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합의되는 귀납법이 아니라, 성경적 사실들에 의한 종합적 귀납적 방법이다.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 귀납적 방법이다. 찰스 핫지는 이것을 너무 강조해서 이성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알라는 말은 거듭난 이성, 중생한 이성을 말한다. 찰스 핫지가 사실이라고 할 때는 성경적 사실을 말하고, 이성이라고 말할 때는 거듭난, 중생한 이성을 의미한다. 성경적 사실들을 거듭난 이성으로 수납한다. 종합적 귀납법. “신학은 성경의 사실들과 원리들을 다룬다.” principia. 조직신학 -> 종합과 체계화. “성경적 사실들과 원리들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개혁 신학함의 원리. 1)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한다. 2) 계시의 기록이 성경 3) 성경을 믿음으로 수납한다.
 
워필드 “하나님을 조직적으로 아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어떻게 학문이 되는가? 1)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신다. 그리고 우리와 관계를 가지신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가지신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이 만약 존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취하게 하신다면 그 지식은 분명히 조직적인 지식일 것이다.” 2) 우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 quod Deus est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qualis Deus est 3) 계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면, 하나님과 우리에게는 교통의 수단, 계시가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이다. 다만 독특한 학문이다.
 
알려짐으로써 안다. 객관적 진리. 하나님 차원의 지식.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내 속에 주님을 가두면 전부 우상이다. “주여 ~하셔야 합니다.”는 우상적 표현. “주님이시므로 선해야 합니다.” 이것이 맞는 표현.
 
revelatio Dei ipsius 하나님의 자기 계시.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궁구함으로써 이르고자 하는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신학함은 대상을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온 지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목표는 대상에 관한 지식과 대상으로부터 주어진 지식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그 일치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객관적 지식을 추구한다. 주님께 기대는 것이 귀한 것이다.
invenire 발명, 발견.
 
계시의 정점(culmen)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이 모두 복음이다. 자신을 드러내심이 이루심이다. 계시하심이 이루심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구원을 받아 거룩해지는 능력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쁘다.
계시 의존적 학문.
믿음 자체에 지식의 요소가 있다. 우리는 지식을 가진 믿음을 말한다.
바빙크 “믿음의 원리는 신앙의 조항들이다.”
 
<2> 기독교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전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지식은 이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지식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물로 말미암는다.
피조성 : 스스로 알지 못한다. 제한된 앎. 상대적 지식. 모조적 지식.
창조자의 절대적 지식. 하나님의 자기 지식. 객관적 지식. 전적인 부정, 지식조차도 부정.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지식을 나에게 주심으로 내가 주님을 알게 된다. 주님이 아를 아심에 의해서 내가 주님을 알 수가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태어났다. 하나님의 형상.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지식이 막혀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반 계시적 은총을 주었다. 모든 것이 은총이다. 3가지.
1.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2. 종교적 씨앗
3. 양심의 불씨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을 도구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말씀을 수납 즉 거듭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아는 것이 존재다. 지식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진리와 존재를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존재, 지식, 도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존재, 지식, 윤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는 성령의 변화와 함께 있고, 항상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한번 거듭나는 의, 지식으로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변화가 일어난다. 거룩해지는 성화의 단계. 지식과 도덕을 분리시키면 안 된다. 객관적 진리의 수납의 힘. 변화시키는 힘. 객관적 진리의 선포가운데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은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된 심령에 수납된다. 동일한 성령의 역사이다. 객관적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우리에게 감화된 말씀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감화된 지식이다. 우리가 읽어야 될 책은 고전은 감화된 책이다. 중생된 이성으로 신학을 한 자들. 하나님께 맡기라. 가장 심오한 것은 영적인 것이다. 가장 영적인 것은 감화된 것이다. 감화에는 순종이 있다. 내 영이 순종하는 지식.
성경의 일반성. 성령은 성경으로 유무식자 간에 역사한다.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이 신학이다. 믿음이 신학의 출발이다. 지식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지식에 이른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 Faith seeking understand.
종합화 : 성경적 사실들을 수납하는 것이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위해 믿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이 아는 것이다. 진리 없는 믿음은 없다. 믿음과 진리는 함께 있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계시의 정점(culmen)이다. 특별히 그의 성육신.
신학의 방법은 믿음이다.
신학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식을 다 주지 않고 맞추어진 지식을 주신다. 맞추어진 지식은 변형된 지식이 아닌 지식 자체다. 우리의 지식은 어머니의 입으로 배운 어린아이의 옹알이에 불과하다. 진리는 동일하지만 우리에게 맞추어진 계시. 하나님께서 맞추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겸손하게 신학을 해야 진리의 한 부분이라도 볼 수 있다. ‘낮추셔서 맞추심’(accommodatio). rhetorical accommodation 예를 들어, 아버지, 교사, 의사, 어머니, 원수, 후회-근심.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표현이다. 계시로써 알만하게 드러내주시는 것. theological accommodation 인간의 죄의 가능성.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의지의 특성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 자체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것이다. 타락하기 전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졌지만,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영생의 소유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우리를 높여주셨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낮추셔야만 우리와 맞추실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아무리 선행이 있다 할지라도 완전한 선행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완전 행위조차도 맞추어서 받아주신다. sursum corda 나 자신을 끌어 올리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삼아주신 것에 합당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맞추심이 지식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맞추심은 성육신이다.
신학은 독특하다. 계시 의존 신학.
신학에는 고유한 원리(principia)가 있다고 한다.
 
원형적 계시(revelatio archetypn)
1. 하나님의 자기 계시(존재의 원리 principium essendi) 하나님은 스스로 진리로 계신다. 진리는 이미 존재한다. 객관적 진리.
모형적 계시(revelatio ectypa)
2.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외적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d ecterna)
3.성령(믿음). 내적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d interna.
 
바빙크 “하나님의 자기 지식, 의식은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자기의식이 없이는 피조물이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관계에서 전자는 원형지식 후자는 모형지식이라고 표현된다. 피조물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지식은 희미하고 부족하다(하나님의 맞추심). 절대적인 하나님의 지식은 피조물의 의식에 맞추어 졌다. 우리가 그를 아는 원리는 신학의 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 교통가운데 피조물에게 계시하신다. 궁극적으로 신학의 목표는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오직 유일한 원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신다(계시의 비 필연성). 모형계시는 원형계시로부터 나왔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도구적 말씀이다.)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첫 번째, 실제적인 하나님의 존재(존재의 원리). 하나님 자신이 신학의 자료시다. 둘째, 외적 인식 원리. 성령의 기록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도구적이고, 이 세상에 맞추어져있다. 셋째, 내적 원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간이 조명을 받는다.(이 세 가지 원리를 계시의 전 과정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동등한 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 그의 지식을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계시를 통하여 교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인간 안에 소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내용적으로 그들은 하나이다. 우리에게 맞추어진 지식이지만, 동등하고 순수하고 기원이 확실한 지식이다. (맞추어진 지식은 변형된 지식이 아니다. 맞추어진 진리이지만 객관적 진리이다. 우리가 받는 지식은 부분적이나 참되다.) 구별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기초하고 있다.(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다.) 성령가운데 그 피조물에게 자신을 나눠주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교리적 전제적 변증
개념을 잘 알고 있어라.
어린이도 진리에 목숨 걸 수 있다. 잘 가르쳐라.
 
<3> 나는 진리 덩어리이지만, 나는 나를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체지식,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께만 있다. 나무는 지식으로 자란다. 하늘도 지식으로 있다.
그 누구도 세 가지 원리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
도덕경의 도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하나님 자체이시다.
데카르트는 이성이 지식이라고 했고, 존 로크는 경험이라고 했고, 칸트는 하나님은 불가지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알자고 했다. 이성으로는 불가지론이 되니, 하나님을 감정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슐라이허마흐.
감정만 얘기하면 주관적이라고 해서 공동체의 신학을 말한 리츨이 있다. 리츨은 주관의 객화에 불과하다. 다시 계시 중심으로 옮겨졌다.
칼 바르트.
그러나 그 계시는 실존적으로 경험되는 계시라고 말했다. 존재의 원리를 전제하지 않고 하나님은 진리의 자료를 준비하는 분으로 말했다. 성경은 계시의 자료. 계시는 경험되는 것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신적 소질이 있다. 이것은 카톨릭적 사상이다. 칼 바르트는 이것이 있다. 칼 라너는 신화사상을 말한다. 칼 라너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은 객관적 계시를 전제하지 않는다. 계시는 내 안에서 만들어지거나 경험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이성, 합리주의자이다. 모든 학문은 이성을 통해서 과학적 지식에 이른다. ‘코키토 에르고 숨’ 나의 주체는 정신에 있다고 했다.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된다. 복잡하게 관계된 것을 말하긴 하지만,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얘기 했다. 절대적 관념의 존재를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절대적 관념은 거짓일 수 없다. 온전한 것은 존재해야 하므로 하나님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안셀름의 신 존재 증명이다. 완벽한 것은 존재성이 있다. 하나님은 존재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타락한 인간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 될 수는 있어도 구원자는 될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는 나로부터 하나님에게 이르고 존재론적으로는 나는 하나님으로터 온다. 데카르트의 순환. 인식론적인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하나님이 다르다. 전통 기독교 사상은 인식론, 존재론적으로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나는 회의함으로써 하나님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회의를 극복한다. 하나님은 회의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이 주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 사유는 명정하다.
 
헤겔. 인간보다 이성자체를 강조하자. 이것이 관념론이다. 내가 생각하는 주체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이성 그자체가 생각하는 나의 주체를 있게 했다. 이성의 절대성. 절대이성이 관념인 하나님이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인식한다고 했지만 관념론자는 생각이 존재를 낳는다고 했다.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체로써의 이성이 존재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그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를 연구해야 이성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헤겔의 역사철학이 등장한다. 역사가운데 이성이 가장 발달 한 곳이 독일이라고 주장. 절대존재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사유되기에 신은 과정적, 즉 만들어지고 있다. 신도 변증법적 과정가운데 있다. 신은 역사 가운데 되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신에 대한 지식도 역사가운데 되어가고 있다. 계시는 진화 사상. 신은 만들어져가고 있다. 생각은 존재를 만들어 내기에 존재는 논리적, 이성적이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becoming, 즉 진화사상과 연결시킨다(바빙크의 비판). 점차적, 과정적으로 된다. 자연 학문들은 신을 가장 저급하게 다른다. 이성과 멀다. 신학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단지 묘사할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아는가? 절대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하는 철학자들이 하나님을 안다. 결국 자연과학, 신학, 철학. 자연과학은 감정을 다룰 뿐이다. 종교는 감각적인 표상들 가운데서 진리를 표현할 뿐이다. 철학은 진리를 관념, 이성적으로 표현한다.
 헤겔의 영향은 지대하다. 칼 라너,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등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헤겔 사상에서는 범심론적 사고를 갖고 있다. 내가 역사를 사는 것이 신을 만들고 있다. 계시 진화론적 사고. 초대교회 계시는 미개하고 역사가 흐를수록 계시는 진화한다. 과정신학적 사고.
 
존 로크. 순수한 논리적 사고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관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감각적표상을 통한 관념이지, 스스로 관념인 것은 없다. 존 로크는 지각을 강조한다. 로크는 생리적이거 내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다. 로크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피해가는 사람이다. 신을 모르니까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는 것으로 보았다. 데카르트는 신을 모른다고 말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서 신을 알만한 개연성(가능성)조차 가져가 버렸다. deism(디즘). 하나님은 이성적으로 파악된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운행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지으시기만 했고, 운행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질서를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자연을 지각함으로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개연성이있다(조셉 버틀러, 알미니안 신학자). 하나님을 안다거나 모른다고 할 필요도 없고, 자연을 탐구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인간 문명을 파악하느라 과학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은 지각되는 것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각되지 않는 것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이므로, 기독교로는 가장 지식으로부터 멀어져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계시, 믿음보다 관용, 사랑을 강조해서 도덕적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는 박애주의, 공평, 관용을 실현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합의되어 알만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부조리하다.
 
흄은 로크의 이러한 개연성조차도 의심한다. 로크는 순진하게 그 지각되는 순수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흄은 이제는 대상을 경험을 해봤자, 명증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모르게 되므로, 다시 지각하는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인상(impression). 기초적으로는 경험주의에 서있다. 지각을 강조했지만 이것을 회의했다. 우연성을 강조했다. 인상과 개념사이에 필연성이 없다. 흄은 다시 생각의 주체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회의한다. 우연. 회의. 개연성은 없다. 사유될 수도 경험 될 수도 없다. 흄은 원시종교를 깊이 고찰한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단일신교가 나타날 것이라 말함. 신적 이성도 전제하지 않는다. 객관적 진리란 없다. 전체회의. 인간의 마음은 텅빈판(로크)이라는 주장을 부인한다. 인간은 지각하지 못한다. 흄의 회의는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 보편실재론. 토마스 레이드. 지각과 이성을 못 믿어도 경험은 믿을 수 있다. 상식적으로 실재적인 진리가 있다. 이성과 감각으로 철학할 바에야 상식으로 왜 철학할 수 없냐? 이것이 기독교를 살린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바이다. 프린스턴 신학교(대학교 아님)의 구학파(A. Alexder, C. Hodge, A.A. Hodge, B.B. Warfield, J.G. Macheon, John Murray, C. Vantil). A. Alexder의 신학의 시작이 종교경험이다. 시대의 조류가 불가지론일 때, 하나님을 경험하고(exeprientia pietalis), 지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보편실재론, 상식실재론(common sense realism).
 
칸트. 데카르트, 로크, 흄적 회의에서도 교훈을 얻었다. 데카트르의 모든 것은 관념화 할 수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시간과 공간의 감성적 영역, 범주라는 내 속에서 지각된 것들이 개념을 갖는 기본적 관념들. 시간은 전후관계의 연속성, 공간은 현재적인 연속성. 시간과 공간은 지각의 선험적 영역. 지각된다는 전제 하에 시간과 공간. 개념화 된다는 전제로써 범주. 지각되는 것이 내 안에서 관념화된다. 데카르트적 관념 사상을 받아들이며, 지각된 것으로써의 관념도 얘기하므로 경험주의적인 지각적 영역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흄의 회의를 받아들이며 예지계와 현상계를 나눈다. 지식은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자체의 세계는 말할 것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아는 가에서는 신은 거론되지 않는다. 신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시간과 공간에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고로 형성된다.
 자연의 질서와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은 분리, 충돌되지 않는다. 이신론적이다. 불가지론.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 하나님의 형상을 의, 지식, 거룩함에서 지식을 부인.
 현실과 이념의 통합. 덕과 행복. 덕은 원하는 것, 자유의 영역이다(졸렌). 행복이라는 것은 해야 하는 것이다(볼렌). 원하는 것이 해야 할 것이 될 때가 최고선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해야 할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일치 하지 않는다. 칸트의 전제는 나로부터 나온 도덕체계이다. 볼렌이 졸렌이 되는 것이 bonum summom인데, 내가 원하는 것은 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나이다. 자연법적이다. 내가 행해야 할 것은 누가 판단하는가? 이러한 판단의 존재로써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될 뿐이다. 하나님은 도덕의 판단자로서 필요가 요청될 뿐이다. 하나님은 말만 입법자이지, 판단자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만 요청된다. 도덕적 신 존재 논증. 그러나 기독교는 존재, 진리, 도덕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칸트는 하나님이 입법자가 아니기에 그가 말하는 도덕적 논증은 불안정하다.
 칸트는 모든 중심을 나에 두었다. 모든 인식의 주체가 나이다. 결국 이성적 자율에 맡겨진 종교가 가장 순수한 종교하고 말한다. 믿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세계는 지식과 무관하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관련이 없다. 부조리한 믿음이다.
 반틸은 말한다. “칸트가 주장하기를 사실은 관찰될 수 없다. 조직적으로 재 정렬되어 체화되지 않으면(범주화), 사물은 관찰될 수 없다. 마음 자체이다. 실체와 우연성은 범주에 의해서 부과된다. 자연은 우연히 사실들과 연관된다. 우연히 관련되는 사실들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 관찰되고 정렬되는 brute facts(지식이 부여되지 않는, 개념이 부여되지 않는)이다(단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규정될 뿐이다, 스스로 진리가 아니라 내 속에서 개념이 형성될 뿐이다. 하나님이 지식의 부여자라는 것을 부인한다, 모든 사물에는 지식이 없다). 그래서 절대지식의 과정은 어떤 하나님에 대한 언급 없이도 완성된다(내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그러나 실천이성. 실제적 지식은 믿음(지식이 없는 부조리한, 막막한 믿음, 나로부터 기인한 믿음)으로 구성된다.”
 
슐라이엘마허. 칸트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감정이라는 영역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신학은 종교적 주관성의 표현. 모든 사람에게는 믿음의 의식이 있다. 칸트적 믿음.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나로부터 나온 신념, 의식. 비중생자의 신학개념.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의식. 변증학을 강조한다. 이 변증학은 종교 감정 변증학일뿐이다. 그는 칸트, 헬라, 모라비안 교도의 경건주의 영향을 받았다. 슐라이엘마허의 시대는 냉냉한 시대였다. 계몽주의, 단자적, 원자적 인간이해로 젖어 있었다. 교회 생활은 형식적일 뿐이었다. 절대의존감정. 슐라이엘마허의 의의는 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나아갔다. 종교의 전체는 느끼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이 하나가 바로 하나님이다. 경건(주관적). immediate(중보자없이). 중보자 없는 감정(신비주의)이 종교의 기초이다. 내가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도 하나님의 소질이 있다(범신론적). 그리고 과정신학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 일부인 내가 되어 가고 있으므로 하나님도 되어가고 있다. 폴틸리히는 하나님은 존재의 기초다고 말했다. “나에게 무한자에게 중보자 없이 만남을 갖는 것이 신비이다. 모든 유한한 것들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표시와 표지로써. 우주의 모든 새롭고 독창적인 교통이 영감이다. 그리고 모든 근본적인 감정이 영감이다. 새롭고 독창적인 관계(계시진화사상). 우주의 즉각적인 중보자 없는 산출물이 은혜이다(불교의 윤회사상. 니르바나).” 슐라이허마허는 하나님을 나로 부터의 기원으로 본다. 예수님은 절대 신의존 감정을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이다. 아주 특별한 신의존 감정을 가진 사람인 예수. 우리도 신에 동참하고 신이 될 수 있다.
 
리츨. 주관적인 지식을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슐라이허마허가 너무 주관적으로 가자, 공동체의 윤리를 주장했다.  리츨은 신론, 기독론을 배제하고 구원론만을 다루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떤 가치를 가지느냐? 그러나 주관의 합은 객관이 아니다. 단체의 신앙적 진리.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신앙은 주관적 진리이다. 리츨은 이상시대를 꿈꾸었다. 후천년설 유행. 독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츨의 낙관적 도덕적 신학이 19~20세기 초를 점령해버린다. 공동체의 주관적 진리를 추구한 결과 히틀러가 나왔다.
 
<4> 칼 바르트는 계시를 강조한다. 칼 바르트의 계시론. 그는 슐라이에르마허를 비판하며 자신의 신학을 전재한다. 계시를 강조한다. 성부는 계시하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계시이고, 성령은 계시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계시 차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계시과정으로써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칼 바르트는 너무 주관적으로 계시에 대한 생각이 없자 다시 계시를 강조하고자 했다.
 칼 바르트는 칼빈을 가지고 얘기 했다. 칼빈의 부흥을 일으켰다. 바르트는 신앙의 행위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전통기독교에서 신앙과 행위라는 말은 같이 부합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신앙은 행위라고 말했다. 즉 신앙은 자질적이고 의지의 산물이 된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신앙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요소이다. 모든 사람은 의지만 있으면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즉 신앙은 보편적인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 성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 그에게는 계시의 준비로 있다. 즉 하나의 자료로써 존재한다. 신앙은 내적 준비하면, 성경은 외적 준비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 그 성경을 펴고 읽을 때 실존적 부딪힘이 일어난다. 즉 그 사람에게 성경이 계시가 된다. 그 사람이 실존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한 그 성경이 그에게 진리가 된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최후의 의미는 내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러한 실존적 계시 체험을 통한 진리를 내가 믿는 것이다. 진리를 내가 만들과 내가 아는 데로 믿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내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진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의 돌판 글은 그냥 문자에 불과한 것이다.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진리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지식을 계시해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그것이 자신에게 실존적 의미가 있을 때, 진리가 되고 계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실존적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바르트에게는 전적타락, 예정 교리도 없다. 예정은 전적타락가운데 무조건적 은혜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안에 하나님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God in Christ).1) -존 베일리(에딘버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을 담고 있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바르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격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있다(God in us)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얘기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예수와 같은 우리. 인간에게는 신성은 없고 하나님의 형상만 있을 뿐이다. 칼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존재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존재의 통보’ 그리스도와 우리가 질적으로 통한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신적인 요소가 있고 그리스도에게도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범신론적 요소가 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니 과정적인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하나님이 되지 않았기에 하나님도 되어가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연합은 의의 전가였다(Inputatio)2).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거룩해 지는 공로를 끊임없이 받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존재의 통보, 즉 '자질의 주입(infusa)'이다. 자질의 주입은 카톨릭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공로 사상이다. 존재의 통보 사상을 발전시켜 ‘칼 라너’는 신화신학(deification)을 말했다. 칼 바르트는 술어는 우리와 비슷한데, 몸통은 우리와 다르다.
 바르트의 말. “말씀은 믿음에 선행한다; 말씀은 믿음의 행위를 전제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표현이다. 이 말의 의미는 내게 실존적 의미가 있는 것을 믿는 것, 즉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이다.
 “교리학은 신학적 훈련이다. 신학은 교회의 작용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고백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대로 말한다(이 부분은 리츨적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대해 말한다고 하지 않고, 교회가 하나님을 말한다고 말한다). 교의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God in Christ)을 전제하는데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자신을 약속하셨다.” 바르트도 오직 믿음을 말하지만, 솔라 스크립쳐가 아니다. 보편적 인간 의지 표현으로서의 믿음일 뿐이다. “믿음 안에서 오직 믿음 안에서” 그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인간적 의지의 표현이고 그가 말하는 계시는 계시의 준비일 뿐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는 교회의 존재와 관계있다. 계시와 화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관계되면서 교회의 존재와 관계된다.”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 관계된다. <God in Action>이라는 책을 쓴다.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가? 존재의 원리, 외적 인식의 원리(말씀), 내적 인식의 원리(믿음)가 잘못 되었다. “교의학은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인간의 행위의 결정(실존주의적 용어이다)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 바르트는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다.
 바르트의 입장은 슐라이에르마허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글, “교의학은 신학적 훈련이므로 오직 기독교 교회에 속한다. 우리는 단지 기독교 교회의 개념에 관하여 확실해질 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에 바르트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우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진리는 존재하고 우리는 그 진리를 받는다. 이것이 겸손의 신학이다. 상승이 아닌 ‘하강’의 신학이다.
칼빈은 건전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사람을 아는 지식이 아니다)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손’(섭리)라고 말한다.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 나를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는 것이 기도이다. 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통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모든 피조물은 아는 존재가 아니라 알려지는 존재이다. 인간은 알려지면서 아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르고, 나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순환적이다. 결론적으로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보이는 손은 인간이다.
 알려짐으로써 아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우리가 담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 알려짐으로써 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절망이다. 바르트와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에 대한 신뢰가 있지만, 칼빈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선행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다. 이것이 창조의 모습이고, 샬롬의 상태이다.
 경건의 세 가지는 ‘계시, 그리스도의 연합, 예배’이다. 영성은 자질에 기초한 단어이다.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으며 그분과 연합되어 살며 예배로 표현되는 것이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적 중보.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심으로 그분으로부터 지식을 내려 받고 있다. 중보자 없이는 어떤 지식도 없다. 개혁신학은 그런 의미에서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의를 전가 받는 존재이고, 신성이 없는 것이다. 형상은 그림자가 아닌 인격이다. 그의 의를 전가 받는 존재이다. 존재의 통보나, 신화와 같은 자질의 변화가 아니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이루심이다. 예수님의 모든 모양과 행위가 나를 위함이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의로 나를 채우시고, 지식을 주셨다. 계시의 지식이 구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메이첸 “사도행전 1:8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거하기 운동이었다. 개개인의 후미진 곳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가가 아니라, 반대로 바울의 편지와 많은 편지들이 보여주기를 증거는 영적인 내적 사항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단번에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전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성인들처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직접 죽으신 분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것을 풀어쓰는 것이다. 기독교 일꾼 들은 기본적으로 증인들이다.” 지식은 행위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5> 조직신학을 개념화해서 내것으로 만들라.
목회자는 말이 달라져야 한다. 선포적 언어가 되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학문으로서의 신학
신학을 가르치는 순서(ordo docend, order of teaching)
1. 계시(특별계시, 성경)
2. 신론(하나님을 아는 지식, 삼위일체, 창조, 섭리)
3. 인간론(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인죄론, 자유의지)
4. 기독론(예수 그리스도의 인격3)과 사역,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속죄론4)) [3) 신인 양성, 4)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가치]
5. 구원론(개인의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5) - 구원의 적용으로 역사하는 성령론이 포함된다.
6. 교회론6) - 그리스도는 기독론적으로 다룰 수 있다.
7. 종말론
 
인간의 형상을 다룰 때는 원 형상(신론의 창조), 타락한 형상(인간론), 회복한 형상(구원론)을 다뤄야 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율법은 계시론에서 다루나, 칼빈은 율법을 기독론에서 다룬다. 율법의 실체와 완성과 해석이 그리스도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센세이션한 사상이었었다. 이 부분이 칼빈의 언약신학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기독교 강요는 우리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 학자들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서 다룬다. 그러나 칼빈은 구원론에서 기도에서 예정론을 다룬다. 칼빈은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나누는 예정론이 아니다. 이것은 은혜에 감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무조건적 은혜를 받았다는 감사의 표현에서 나오는 것이 예정론이다.
칼빈 이전에는 성경론이 없다. 칼빈이 성경론을 시작했다. 초대교회에는 정경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뿐이다. 성경을 교리의 제목으로 여긴 사람은 칼빈이 처음이다.
교리(doctrina)는  성경적 가르침 자체이다.
교의는 교회가 권위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주경신학은 조직신학과 함께 읽어야 한다.
 
윤리
슐라이에르마허 
인간에게는 지성과 감정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표현된다. 종교와 윤리는 분리될 수 없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경건은 내 속에서 만들어 진다. 내가 만든 것이다. 지킬 것을 내가 규정한다. 내가 되어진 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내로부터 규정된다. 윤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며 사는 것이다. what humans can do.
 
우리의 윤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what we should do.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타락한 우리, 하나님의 자녀)도 거룩하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명령은 저주로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령과 함께 즉시 약속을 주신다. 우리는 즉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 명령과 함께 약속을 포함해서 주신다. 모든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명령한다. quid debeant homines. 하나님께서는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명령하신다. 그러나 약속을 수반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와 칸트는 quid possint homines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말한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다. 율법은 삶의 규범이다. regula vivendi pie et iuste, rule of living piously and  uprightly
 
이신론
1. 창조는 했지만 섭리하지 않는다.
2. 하나님도 자연의 일부로써 대상화 되어 합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알기 위해 믿는 다는 말도 아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이성주의이이다. 우리는 믿는 게 아는 것이다. 믿는 것은 알기위한 중간단계가 아니다. 신비는 이성적으로 결론 내려질 수 없다. 신비는 신비로 남겨두라. 그 자체로 신학적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믿는다. 이것은 카톨릭의 신학이다. 독단주의는 계시는 인정하되 계시 자체가 이성이라고 한다.
 
<6> 무한하고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무한함. 하나님 스스로 충족하신다.
영이심. 스스로 계시다.
 
intra-trinitatian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는 믿음으로서 안다는 말이다. 신앙으로써 하나님이심을 안다. 구약에는 성자의 현재 뿐만 아니라 표상(예표)도 있으시다. 표상만 얘기하면, 세대주의가 된다. 성자는 구약에도 표상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현재하셨다.
 
셀베투스(Servetus)7)는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거부, 구약을 폐지, 유아세례 거부. [ 제네바에서 화형당함. ]
셀베투스는 유니테리언의 조상이다.
말씀은 제2의 하나님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다.
 
무한한 영 곧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
슐라이에르마허, 폴 틸리히는 하나님을 무한자, 절대자라고 하나 범신론적이다.
하나님 자신이 증거이시다. 하나님 스스로 증거하신다. 성령의 역사로 감화하여 알게하셔 증거하신다. 조직신학은 용어적, 주제적, 전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비중생자의 신학은 불가능하다.
신학은 연역적일 수 밖에 없다. 원형계시, 모형계시. 신학은 변증법적이지 않다. A와 비A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로부터 창조이다.
 
<7> 판넨베르그는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본다. 역사가운데 어떻게 성취되고 계시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계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계시한다. 마지막까지 가봐야 한다. 그 전에 판단하는 것을 상대적이다. 역사 끝에 가봐야 안다. 종말에 가기 전에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이 중요하기보다 가르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나. 보충 설명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는 성경을 말하되 이성적으로 말하고, 개혁주의는 성경을 말하되 성경 안에서 말한다. 복음주의의 특성은 다양하다는데 있다.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데에서 복음주의가 시작되었다. 풀러,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을 읽느냐 이용하느냐? 많은 사람들은 칼빈을 이용할 뿐 칼빈을 읽지 않는다. 텍스트 자체가 이야기 하도록 하지 않고 텍스트를 이용한다.  성경을 이용한 에세이와 깊은 신학적 통찰은 다르다. 성경이 말하게끔 하라. 신학교 때는 교리적이 되라. 기초가 없을 땐 이성적이게만 된다.
 
그리스도의 계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종교의 씨앗과 양심을 주셨다.
양심은 심판좌의 증인이다.
섬광(scintilva)은 남아 있으나 질식되어 버렸다.
구원 받지 못하는 자는 성광이 꺼져 버린 것이고, 구원받은 자는 섬광에 불타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씨앗과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
일반 계시의 은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일반계시의 두 가지 작용
1. 특별계시와 함께 작용. 거듭난 사람들. 선택된 백성.
2. 일반계시는 죄 때문에 멸망. 하나님을 알게 하셨지만,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일반계시를 이미 주셨기에 핑계치 못한다. 유기된 백성.
거듭난 사람만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1:21 “하나님을 알되(알만 하되, 알 수 있으되, 알만한 지식이 있으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삼위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구원의 협약으로 구원자, 구속 방식, 선택 백성(아들 안에서 기뻐하심에 따라)을 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말씀이시다. 말씀과 구원은 분리되지 않는다. 계시주가 구원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자를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예수께서 중보자의 직무를 감당하시기에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 아들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들을 알자가 없다. 그분이 말씀이고 그분이 가르쳐주시고 그분이 이루신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것이다. 그분은 말씀 자체, 드러내심, 이루심이다. 이것이 계시의 정점(culman)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아는 것과 이루는 것이 따로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앎으로, 들음으로 변화된다.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의 능력이 내 속에 역사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는다. 그분이 계속 중보하시기에 가능하다. 아는데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중보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셔서 가능하게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보하면 그분의 의가 끊임없이 전가된다. 한번만 의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 의를 전가 받는다. 그 한차원이 계시이다. 그분께서 의를 전가하심으로 우리는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말씀을 수납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개념이 부족하다. 그래서 현상만 좇아간다.
요한복음 14장이 말하는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함께 계시는 영), 진리의 영(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는 영), 능력의 영(보다 큰일을 하게 하는 영)이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를 기억하게 하는 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의 전체이다. 그분을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다.
1. 구약은 예수를 표상(representation)한다. -> 약속과 성취의 유비. 그러나 약속과 성취로 모든 것을 설명하면 세대주의가 된다.
2. 구약에서 예수는 현재(顯在, praesentia)한다. 그림자와 실체의 유비.
구약은 오실 예수 뿐 아니라 그때 계시던 예수님을 계시한다. 구약의 모든 종류의 제사는 예수님의 제사이다. 제사장의 제사는 단지 오실 예수님만 바라보는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서 예수님의 중보에 의지해서 제사를 드렸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님은 현존해계셨다.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 계셨다.
그렇다면 지금의 예수는 누구인가? 또한 앞으로 오실 재림의 예수는 누구인가? 율법에는 규범과 약속이 있다. 율법의 약속의 성취가 복음이다. 율법에는 약속의 요소가 있다. 약속이 없는 규범은 세상 법이다. 복음에도 규범과 약속이 있다. 거룩하게 살라야 한다. 약속은 재림이다. 지금 시대에도 우리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 속에 있다. 이렇게 통시적 관점(시간 가운데서의 관점)으로, 지금 무슨 의미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세대주의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라.
 
능력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도의 고상한 즐거움을 깨달아야 한다. 성도는 기적을 추구하고 잘 살고 잘 먹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아는 대로 행하는 대에 있다. 이것을 보여준 분이 예수님이시다.  리에게 명령하신 분은 그것을 이루게 하신다. 규범과 약속이 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할 수 있게 하신다. 산상수훈은 새로운 법은 아니다. 새로운 해석도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산상수훈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백성이 강퍅(harden)하였을 뿐이다. 구약시대의 백성은 그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구약의 계명은 적극적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이웃의 집을 세워주고 살인하지 말라는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뜻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도덕법은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말한 율법을 다 이루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롭게 가르친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을 지킬 것을 조성하시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조성. 이것이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과 영원함을 다 포함한 것이다. 영원한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다. 죽으셔서 다 이루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의 백성을 만든다. 그의 영을 받은 자는 본질적으로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본질상 의의 자녀이다. 이제는 본질상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백성이다. 다만 육체의 소욕이 있을 뿐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할 수 없는 자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자가 못하는 것은 곤고한 것이다. 본질상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곤고한 것이다. 예수님을 안 바라보고 예수님께 속한 것만 바라보는 것도 우상이다. 은혜도 우상이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봐야한다. 나의 본질대로 살자. 곤고할 지라도 그 본질대로 살자.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금한 것은 유대인들이 쫓는 표적이었다. 헬라인이 지혜를 구한다는 말은 그냥 예의상 한 말이고 유대인을 말하고 싶었다.
발을 씻기며 우리는 우리의 본질대로 살 것을 가르쳐야 한다.  사를 사모하라는 말은 본질적인 것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주어지는 것이다. 사모하라는 말은 악세서리 적인 것에 사용하는 말이다. 사모하라는 말에 강조를 하지 말라. 본질적인 것은 사모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되어야 될 대상이다. 성령은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보화를 발견케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연하게 주신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맞추어서 주시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위로부터 부어내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려주시는 데로 행할 수 있는 영. 주를 위해 사는 기쁨. 이것을 위해 우리는 산다. 복음만 전하라. 말씀에 있는 그대로 전하라. 이것을 위해 살라.
 
신앙의 유비. 신앙으로 안다. 신앙으로 비교해서 안다. 하나님을 직접 알지 못하므로 믿음으로 안다. 자연신학은 신앙의 유비가 아닌 존재의 유비를 말한다. 신앙은 믿어서 알지만 존재의 유비는 자연과 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존재적으로 하나님을 접근한다. 나와 자연을 비교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자연에 신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신성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모든 존재는 신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신화(神化)된다. 거듭나야지 해탈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이성적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하시고 알게 하시고 능력이 되시는 성령을 의식하며 생각해야 한다.
약속 성취 유비 promissio - perfectio analogia
그림자 실제 유비 substantia - umbra analogia
 
계시에 의존해서 신학
 
1. 계시의 가능성
계시는 단순히 드러냄이 아니라 계시자의 말씀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완전하게 지으셨다. 완전하게 지으셨으므로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 행할 수도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유의지 가운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순종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인간을 완전하게 자유의지를 갖도록 만드셨다. 전적타락이 있기에 전적은혜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식과 의와 거룩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은 다 부패했다.
 
카톨릭과 Osiander(루터란 신학자)
형상은 자연적 형상이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형상이 누구에게나 있다. 여기에다가 모양을 덧붙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인(이성)의 형상에다가 덧붙여진 은사를 주었다. 이 덧붙여진 은사를 원의(原義)라고 한다. 아담에게는 원의가 있었다. 타락한 인간은 자연적 의인 자연적 형상은 남아 있지만 덧붙여진 은사인 원의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신인합력하여 구원을 받는다. 자연적 의로 도움을 받아 구원받는다. 개혁주의는 계시도 전적 의지라고 이해한 반면, 이들은 계시도 자연적 의로 알아갈 수 있다고 한다. 자질의 주입을 이야기 한다. 자질이 완성되면 신과 같이 된다. 개혁주의는 의의 전가이기에 마지막까지 피조물로 남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보는 순간까지 피조물이다. 여기서 오시안더는 한가지를 질문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러도 성육신 하셨을까? 성육신은 타락이 없어도 필요한 것인가? 성육신의 필연성은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예수님이 자연적인 인간을 “완성”시키는 모델로써 오셨다고 주장했다. 부족한 가운데서 “완성”이 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모범이다. 타락이 없더라도 예수님은 오셔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나아갈 바, 모범이 되시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즉 자질적인 형상, 즉 신처럼 될 수 있음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기뻐한다. 이것이 함께 한다.
진리가 아닌 것은 깊어질 수 없다.
 
<8>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혼합, 변화, 분별, 분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신성이 아니시면서 인성이신 적이 없다. 형성, 잉태됨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었다. 인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 신적이 있는가? 마리아는 사람의 어머니셨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인성에 관한한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셨다. 마리아는 참 사람, 참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다. "Deo tokos"
예수님이 배고프신 것은 인성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배고프신 것은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배고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배고프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위격적 고난’의 감수이다.
 
<9> 제11장 교의신학
 
3. 교의의 정의
후기 종교개혁자들(post-reformation)
폴라누스, 뚤레틴, 사무엘 퍼킨스
칼빈을 먼저 공부해야 이들을 바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중심을 먼저 알아야 한다. 칼빈을 열심히 읽어서 저술하면 청교도 저술이 된다.
 
기독교 강요->어거스틴->오웬->로이드 존스
 
<10> 96페이지
칼 바르트에게 하나님은 작정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구약에서 작정으로 있다. 인간에게는 외적 준비(성경)과 내적 준비(신앙과 성령)이 있다.
칼 바르트에게는 예정론이 부정된다. 누구라도 준비해서 자신을 가다듬고 성경을 읽을 때  계시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성경이 계시가 된다. 계시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이다. 칼 바르트는 변증적이어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지만(신성한 언어), 계시로써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하나님이 같아야 하고 자질이 같아야 한다. 존재적 통보.
 
p 100
카톨릭은 최초의 사람 아담은 불완전한 본성, 즉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담은 자유의지로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본성에 죄가 있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지으셨다. 사람은 불완전한 본성이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이기에 죄를 짓는다.
 
<11> 라틴어를 꼭 배워라. 읽을 것이 많다. 헬라어만큼 중요하다. 신학은 이미 주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학서론은 introduction이 아니라, prolegomena 이다. 교리를 배우는 준비가 아니라, 바탕이 되는 교리이다. 신학서론을 처음 만든 사람이 칼빈이다. doctrine of scripture 성경론, 계시론 등. prolegomena를 다루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이다. solo scriptura은 개혁신학의 가장 상위 개념이다.
 
루터의 신학 방법은 예를 들어 칭의라는 주제로 성경을 다룰 땐, 그 발췌하여 부분만 다룬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다 다루다가 칭의가 나오고 그것에 집중을 한다. 루터는 교리로 성경을 해석하지만, 칼빈은 성경으로 교리를 도출한다. 루터는 아직 알레고리칼한 면이 있지만, 칼빈은 문자적이다.
 
카톨릭은 교회의 권위와 함께 성경을 다룬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신학은 흐름이다. 하나님께서 진리 체계를 수립하신다. 말씀이 살아있는 한 신학은 역동적 학문이다. 신학에는 역동성이 있다. 살아있는 말씀을 다루는 신학은 역동적이다. 살아있는 공부이다.
그리스도와 율법. 율법이 복음에서 성취된다. 그리스도와 율법을 얘기하면 그것이 복음이다. 칼빈 신학에 관심이 많고 좋아한다.
 
신학적 주제가 있는 기도를 드리자. 예를 들어 회개는 죄 사함과 의의 전가이다. 회개는 지으면서 쓰는 것이다. 동시적이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존재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회개는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이다. 회개의 적극적, 창조적 측면. 우리는 회개를 통해 단순한 반성이 아닌 더 나은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다.
배운 대로 기도하라.
 
가장 독창적 비평적 신학은 기도에서 나온다. 배운 것을 묵상하고 기도하라.
신학적 주제가 있는 설교를 하자.
나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는 것이다. 수납의 미학이 있다. 가능한 교회를 섬기라.
아이들에게 교리를 안 가르쳐주면, 아이들에게 교리가 없어진다. 예수님처럼 발을 씻으며, 눈물 흘리며 가르쳐야 한다. 신학교에서 이론을 가르치지만, 적용은 기도가 가르쳐준다. http://blog.daum.net/kkho1105/6091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