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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비판한다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비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해야 타 종교와 소통한다는 무모한 논법 시종일관 이어가

지독한 인본주의적 유사 종교가들의 편견을 진실을 가장한 기독교적 설화로 가공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주 일 심야에, SBS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이 공중파를 타고 안방에 흘러 들어왔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 난 자연인으로서 단지 지혜로운 선지자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아들에 불과했다는 반(反)기독교적 메시지를 여과 없이 담고 있었다.

SBS 는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이집트, 로마, 터키, 시리아를 아우르는 방대한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2000년 전의 예수의 실제모습은 어떻게 다른지”를 인식시키기 위해서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험”을 수행했노라고 자평하고 있다. 신앙인들의 정서를 헤아리지 않는 무모함과 논의의 공정성을 상실한 무분별함에 있어서는 “사상 최초”가 될지 몰라도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험”은 아주 해묵은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성경적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들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특히 19세기 초반으로부터 중반을 거쳐서 데이비드 스트라우스(David F. Strauss)와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을 위시한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역사라는 이름의 예수 “탐험”을 이성이라는 노를 저으며 거침없이 감행했다. 그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대속, 부활 등을 단지 신화나 설화 정도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에 이르러 극점에 달한 성경비평학자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성경비평을 넘어서서 문화적이거나 문헌학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신의 길, 인간의 길> 가운데 인터뷰이로 나오는 옥스퍼드 대학교 유대학 교수인 버미스(G. Vermes)와 미국 역사적 예수 연구회에서 활동하는 크로싼(J. D. Crossan)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인터뷰를 통하여서 이들은 예수는 역사상 실재한 인물로서 “지혜로운 사람(an wise man)”이었을 뿐 메시아도 아니었으며 신도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예수는 단지 신격화된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예수도 모세와 무하마드와 다름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용된 선지자였는데, 다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를 신화적으로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듯이 모세와 무하마드와 다름없는 한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근원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고 <신의 길, 인간의 길>은 말한다. 이 세 종교가 “신의 길”로는 하나인데 기독교에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을 세 갈래의 “인간의 길”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상의 한 길’에 그 시신이 버려진 순교자 배형규 목사님이 살해당하면서 찾은 하나님과 10발의 총을 쏜 탈레반이 명분을 구하며 부른 그들의 신은 동일했다는 것이다. 순교의 순간, 살해자와 피살자가 함께 동일한 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는 동일한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제 2위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이 부인되면 삼위일체 하나님도 부인된다.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부인된다. 아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되 오직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자만이 그 분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 신의 길, 인간의 길>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deity) 혹은 신성(divinity)에 대한 미망에서 벗어나야만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소통의 길을 열게 된다는 허망한 논법을 시종 이어가고 있다. 진정 화목의 길, 화해의 길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 곧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는데 있는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순교자의 죽음의 뜻을 철저히 곡해하고 있다.

기독교가 배척하는 것은 순교의 고난이 아니라 비진리의 악이다. 참 기독교는 어느 순간에도 순교를 피하여 비진리 편에 서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 곳에 기독교는 설 자리를 잃는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초대 교부의 외침은 여전한 역사적 진리이다. 그들은 죽임으로써 스스로 옳다하지만 우리는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는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말했듯이,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 의가 없는 사랑, 진리가 결여된 사랑은 또 다른 형태의 테러이다. 성경에서 전하는 “의(義)”는 생명을 의미한다. 오직 양이 살 길은 목자를 따라서 바른 길로 따라 가는 것이다. 오직 주님께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시다. 이를 믿음이 생명에 이르는 의이다.

과연 공중을 위한 방송이 그저 맹목적인 부지런함으로, 진리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정통 신학의 변방에 있는 비전문적인 한 이론을 부각시킴으로써 기독교를 부인하는 자리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역사성이 비판적으로 조명된 이후 이 분야의 연구는 주로 신약신학자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다. 오늘날 소위 바울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는 샌더스(E. P. Sanders), 라이트(N. T. Wright), 던(James Dunn)과 같은 신학자들은 신약의 유대주의적 배경을 중시하는 가운데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입장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심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칼빈, 홧지, 워필드, 레이몽드 등의 학자들의 입장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예수님의 신성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자리에 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SBS와 인터뷰를 한 크로쌍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심지어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단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학자로서 분류된다.

그런데 <신의 길, 인간의 길>의 기본 논조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러한 크로쌍의 극단적인 견해 수준을 더 넘어서서 예수의 역사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이 프로그램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티모시 프레크(Timothy Freke)는 피터 간디(Peter Gandy)와 함께 저술한 <예수의 신비제의(The Jesus Mysteries)>라는 파격적인 책에서 성경의 모든 기사는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신화와 설화들을 미래 묵시적인 소망과 섞어서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프레크는 예수의 탄생, 할례, 성찬식 제정에 관한 기사들의 기원을 미트라스 신화에서 찾는다. 부활은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의 재판(再版)에 다름없다고 본다. 성경의 예수는 실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살았던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가공한 인물일 뿐이라고 한다. 성전 정결 사건, 요나의 표적 사건 등도 모두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프 레크와 간디는 <예수는 신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위의 책의 서문에서 참 기독교가 세워지고 그 교훈이 기독교인의 삶 가운데 더욱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예수가 신화 속의 인물임을 옳게 파악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는데(롬 8:9) 그리스도의 존재가 부인되는 곳에 성도와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생애 자체가 구원의 길이며 그 분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자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를 그의 가르침과 분리하여 다룰 수 없다. 석가, 소크라테스, 공자, 그리고 무하마드 등과 같은 현자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생애와 무관하게 교훈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생애가 가르침으로부터 분리될수록 교의는 더욱 신비함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는 그 자체가 복음이 되기 때문에 역사상 실재하신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이 부인되면 모든 교리가 파괴되고 무화(無化)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한 자들이다.

오 직 예수님 한 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을 동시에 걸어 가셨다. 그 분께서는 어제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 분께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자녀 된 자들로서 또한 후사가 되어서 그 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자리에 선다. 오직 이 자리가 우리가 설 자리요, 화목의 자리요, 관용의 자리요, 순교의 자리이다. 무하마드는 꾸란과 칼을 들고 ‘인간의 길’을 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시고 빈손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의 길 그리고 인간의 길’을 함께 걸어 가셨다. 우리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그 분과 함께 그 분의 길을 좇아간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접근이 혹은 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시도되어 왔다. 철학자들은 예수의 삶은 그것이 우리에 의해서 이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때에만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여긴다. 일부 신학자들도 비록 계시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나 이와 같은 이론에 서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 가운데 신학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esse infiniti)”는 말을 불가지론에 대한 변명꺼리로 삼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그 분께서 스스로 알려 주심으로써 그러함을 인정한다. 즉 불가해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알되 은혜로써 안다는 계시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 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그 속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요 1:1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어떠하심을 진리로서 계시하실 때 동시에 은혜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受納)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에 이른다. 오직 예수 외에 구원에 이를 다른 이름도 다른 길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가운데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완전하고 충족하게 주셨다.

신약성경이 계시하는 진리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 아무도 그것을 그 자체로서 비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대한 사본들이 약 5,000여개 존재한다. 그러나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마치 절대 진리인 양 인용하고 있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의 사본들은 많아야 10개 미만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왜 성경 자체의 가르침은 멀리하고 사람의 작품들과 전승들과 흔적들만 내세우는가? 그것이야말로 전통적인 이교적, 밀교적 방법 아닌가?

성경은 역사적 예수와 신학적 예수를 분리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와 전혀 동일한 사람으로 오셨으되 죄는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진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화평의 길이 된다. 진리가 이러하므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여전히 순교를 무릅쓰고 무슬림들을 위하여, 유대교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심을 전한다.
 
< 신의 길, 사람의 길>은 기독교의 계시성을 부인하고 지독한 인본주의적 낙관론에 빠져 있는 유사 종교가들의 편견을 “역사” 혹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가공하여 뽑아낸 반기독교적 설화를 제시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해묵은, 외진, 일차원적 역사적 예수 탐험의 현대적 영상 처리에 불과하다. 그것이 비진리로 진리를 구축(驅逐)하려는 반기독교적 시대정서에 편승하여 마치 정설인 양 제시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경성하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으니, 이러한 때 우리는 더욱 깨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순종과 죽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만이 우리의 산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벧전 1:3).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http://cafe.daum.net/AFFECTION/45rw/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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