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교단(大神敎團)의 역사와 정체성
대신교단(大神敎團)의 역사와 정체성
1. 머리말 2. 초교파시대 3. 대한신학교와 교파신학시대
4. 대신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5. 대신교단의 전망
1. 머리말
“대신”(大神)이라는 말은 본래 大韓神學校의 약칭으로서 大韓예수敎長老會 大神敎團과 大韓神學校의 대명사이다. 나는 개교 50주년(1988년도) 기념행사 때에 「대신의 역사와 전망」에 관하여 발표한 바 있다. 대신의 역사는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또 말해야 하고 후진들에게 전해주어야 마땅한 것이기에 또 다시 말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기독교 이질화를 극복하는 방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의 집단의 정체성은 그 역사성에서 찾게 된다.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나 사회나 민족에게서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역사를 망각하거나 도외시하거나 무시하는 곳에는 정체성도 전망도 없는 법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역사를 돌이켜 봄으로써 새김질(자기성찰)이 가능하며 새김질을 하여야만 장래가 보이는 법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대신의 역사성을 확인하는 일은 대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신의 역사성은 세계기독교회사에 있어서 칼빈주의적 정통, 즉 사도적 신앙의 전통에 입각하여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질을 보전하여 나아가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개혁파(개혁주의)의 노선이다. 개혁파 혹은 개혁주의란 칼빈주의 전통에 입각한 역사적 장로교회를 의미한다. 이에 대신의 신학은 어떤 신학자 개인의 신앙이나 학문적 지식을 일방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가 역사를 통하여 고백해 온 신앙을 기조(基調)로 하여 작성된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석명(釋明)하여 성경의 계시진리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신학의 본질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교회의 모습을 바꾸고 신앙과 신학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새로운 신학을 창출해 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전통을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 공동신조(사도신조, 니케아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 칼케돈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의 기반 위에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 16, 17세기개혁파신학자들, 19, 20세기의 개혁파 신학자들 알렉산더(Achibald Alexander), 하지 父子(C. Hodge, A.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보스(G. Vos), 메이첸(G. Machen),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밴틸(C. Van Til), 벌코프(L. Berkhof), 朴亨龍, 朴允善, 오카다 미노루(岡田 稔), 崔順直 등에 의하여 보존되어 온 교리체계의 신학이다.
대신의 역사는 초교파시대(1960년 이전)와 교파신학시대(1961년 이후)로 구분되며, 교파신학시대를 다시 구분하여 근본주의신학의 시대, 개혁파신학의 확립시대, 개혁파시학 계승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2. 초교파시대(1948-1960)
(1) 대신의 역사적 배경
1901년에 4개의 주한 외국장로교회선교부(미국 북장로교회선교부, 미국 남장로교회선교부, 호주 장로교회선교부, 카나다 장로교회선교부)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회협의회가 한국인 목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평양에 연합장로회신학교를 정식으로 개설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1907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고, 한일 합방 후에는 조선장로회신학교로 개명되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1938년 제1학기를 마지막으로 폐교되기까지 한국교회의 신학사상을 주도하였다. 이 신학교는 평양에 위치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오르내리는 말로 평양신학교라고 불려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을 맞이하여 개교하였으나 북한의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인하여 다시 폐교되고 말았다.
한편, 남한에서는 장로교회의 신학적 대립과 교권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8년 5월 20일에는 朴亨龍 박사가 평양신학교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회신학교(총회신학교 및 현 총신대학교의 초기)를 개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같은 해 2월에 남대문교회당에서 장로회 야간신학원(구 대한신학교의 초기)을 개설하고 그 해 3월 5일에 개학하였다.
(2) 대한신학교 설립 초기의 내력
1944년에 金致善 박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과 더불어 가장 혼란한 시기에 전국적인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기도, 회개, 전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 남대문교회의 동사목사였던 배명준 목사는 말하기를 “그에게 있어서 오직 기도, 회개, 전도였다. 그는 순전히 칼빈주의적이었다.”(생수, 제3집, 15쪽)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김치선 박사의 신념에는 조국해방을 맞이한 이 민족의 살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와 전도뿐이라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케 한다.
그는 기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좋은 집을 불리하고 문제가 많은 집과 바꾸고 2층을 기도실로 정하고 겨울에는 북풍이 휘몰아치는 방에서 외투 하나 걸치고 기도하다가 그 자리에서 자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자기와 이 민족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전도하고 또 전도하였다.(생수, 제3집, 15쪽). 그 당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이 민족 3천만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쳐야한다고 외쳤다.
그는 수요일 기도회 후에는 교회의 청년들을 위하여 신앙강좌를 개설하고 청년신앙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청년들에게 신학교육을 시켜서 전도대를 조직하여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장로회 야간신학원을 개설하였다.
(3) 대한신학교와 초교파적 선교
대한신학교는 1948년 3월 5일에 남대문교회 예배당에서 당시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치선 박사에 의하여 장로교회 야간신학원으로 개교되었다. 그 당시는 36년간의 제국주의 일본국의 식민지 통치 압제 밑에서 벗어난 직후인지라 아직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사회 분위기였다. 김치선 박사는 남달리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람의 심정을 가지고 “이 민족 3천만” 이라고 하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외쳤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예레미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였다. 그는 민족복음화의 뜻을 깊이 품고 친히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우선 그 당시 이 민족 3천만의 10분의 1인 3백만명을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여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민족복음화의 영적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신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김 박사는 야간신학원을 개설하고, 연장자이며 교계에서 존경받는 신앙과 학덕이 높은 윤필성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1949년 1월에 김치선 박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1월에 교명을 대한신학교로 개명하고, 교사를 남산 소재 전 KBS TV 방송국 자리에 마련하고, 서소문 소재의 적산가옥을 구입하여 거기에 옮겼다가 후에 남산으로 다시 옮겼다. 1952년 9월에는 대한신학교는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령에 준한 각종학교(문교부 제1275호)로 인가를 취득하여 신학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고 3백만 구령운동과 동시에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이 민족3천만” 이라고 하면서 울부짖었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선교일념은 오직 이 민족 3천만명의 구령운동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인 최순직 박사의 말에 의하면, 김치선 박사의 선교정신은 그의 양부인 영재영 선교사(Re. L. L. Young, D. D.)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영재영 선교사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소속으로 1907년 10월에 내한하여 함경남도 함흥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함흥에 영생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926년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 가서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여 일본에 재일한국인의 교단을 설립하는 등 그는 평생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김치선 박사는 유년시절부터 영재영 선교사의 집에서 살면서 친히 선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생수, 제3집, 14쪽).
김 박사는 영생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고베중앙신학교(현 고베개혁파신학교)와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거쳐서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최순직 박사는 김치선 박사에 관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재학 중 관북학생이 모인 어느 석상에서 그는 설교 도중 ”내 민족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선교사는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그의 속에는 이 선교사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크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데가 있었을 것이며 또 외국인의 한 사람이 이 복음을 위하여 내 민족을 사랑하는 그 선교정신을 배웠을 것이다.”(생수지, 제3집, 15쪽)라고 하였다.
대한신학교의 초기 장로회야간신학원의 교과목의 내용은 신학과목보다는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운동을 위주로 하는 신학수업이었다(생수, 제4집, 30쪽). 이같은 전도운동의 수업이 남대문교회가 중심이 된 청년들의 신앙운동과 더불어 3백만 구령운동과 대한신학교의 기도의 열정과 전도훈련의 교육이 하나가 되어 오직 기도, 회개, 전도에 치중하였다(생수, 제4집, 30쪽). 그 당시에 김 박사가 “순교를 각오하고 이 전도운동에 나설 사람은 없는가” 하고 외쳤는데, 이에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전도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도대원들은 38선 지역과 지리산과 제주도 등지로 가서 전도하였다. 제주도에 간 5명 가운데 1명이 순교하였으며, 지리산에 간 20명 가운데 1명이 순교하였다. 이것은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배명준 목사, 권장학 부목사, 김충범 장로, 김동식 장로 등의 증언이다(생수, 제3집, 17쪽). 본교 제24회 졸업생들이 본교재학 중에 순교한 이들의 순교지 탐방을 나선 일도 있다. 순교지 탐방 여행기록은 「생수」 제3집 21-35쪽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3. 대한신학교와 교파신학시대(1961년 이후)
(1) 근본주의신학 시대(1961-1967)
대한신학교는 이때까지는 교단신학교가 아닌 초교파 신학교로서 초교파적 선교에 주력하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교파신학의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시기는 정부방침에 따라 교단 없는 신학교는 폐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불가불 학교를 보존하기 위하여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 박사가 중심이 되어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신학의 입장인 ICCC와 관계를 맺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을 설립하고, 학교와 교단은 상호 인준협정관계에서 교단 신학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서 불가분리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같은 대한신학교의 역사성을 미루어 볼 때 대한신학교는 대신교단의 보호 아래에서 존속되어 왔음과 동시에 대신교단은 대한신학교에 의하여 성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노선의 교단을 만들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교단이란 개교회의 연합체로서 연합된 각 개교회는 다같이 교리, 정치, 생활에 있어서 일치되어야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기독교의 국내외 정세는 WCC와 ICCC는 치열한 대치상황에 놓여있었다. 대한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의 WCC와는 멀리하고,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신학의 입장이었던 ICCC를 선택하여 관계를 가지고, 약간의 원조도 받으면서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신학교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교단이 출범하던 초기는 신학적 기반이 약한 때였다. 그 때는 교단의 교세확장을 위한 선교활동보다는 초교파적 선교활동의 시기였다. 신학적으로는 아직 정돈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국내외적으로 여러가지 복잡한 때였다. 최순직 박사는 그 때의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상황과 교단의 형편을 일괄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때는 교단의 경험도 없이 다만 교리적 받침 속에서 새로운 교단창설과 국제관계 등의 제반의 일들이 시작되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사실상 근본주의 혹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정립되어있지 않았고 하나의 확고한 문헌도 없는 형편이었으며 신학교 교육 역시 아무런 계획이나 방향을 잡지 못한채 교리학도 하나의 교본사적으로 체계있는 교육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오던 중 대신은 다소나마 ICCC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 오면서 큰 뜻을 가지고 나아가던 차에 ICCC와의 의견대립으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 결국 분리되어 대신은 다시 본래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생수, 제4집, 31쪽).
대신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입장인 ICCC와의 관계는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 박사가 별세함(1968. 2. 26)으로써 종식되었으며, 제7회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1972년 4월 6-7일) 때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2) 개혁파신학 활립의 시대(1968-1975)
제7회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는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개명하였으며 교단의 새로운 출발을 교계에 선언하였다. 이 때부터 대신은 개혁파신학의 시대로 출범하게 되었다.
최순직 목사는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신학적 기초를 개혁파신학으로 확립한 주역으로서 결정적인 역할과 공헌을 하였다. 최순직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베개혁파신학교(神戶改革派神學校)와 교도제국대학교(京都帝國大學校) 문학부 기독교학과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일본의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인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본의 보수주의 신학계의 거장이며 조직신학자인 오카다 미노루(岡田 稔, 1902-1992)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카다 교수의 개혁파신학 사상을 그대로 대한신학교에 전수하여 대신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오카다 교수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의 전신인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고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풀톤(Samuel P. Fulton, 1868-1938)1)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하지 父子, 워필드, 보스, 메이첸, 밴틸, 카이퍼, 바빙크, 멀코프 등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개혁파신학자의 입지를 견고히 세우게 되었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들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19세기와 20세기의 칼빈주의 신학의 거장들이다. 그들은 오카다 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카다 교수는 최순직 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최순직 교수는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의 초석이 되었다. 대신의 정체성은 곧 역사적 개혁파 신학적 노선에 입각하여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순직 교수로부터 오카다 교수의 저서 「개혁파교리학교본」을 주교재로 하여 조직신학을 배우고, 또한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오카다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로부터 개혁파신학의 강의를 들으면서 개혁파신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면 필자의 「조직신학」. 상권, 9-10쪽을 읽어보라.
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1) 대신교단의 약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은 처음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로 출발하였다. 1961년 6월 21일은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가 설립된 설립총회일이다. racltjs 박사와 마두원 선교사가 발기인이 되어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제1회 총회가 개최되어 제1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 당시는 기독교 국제기구인 WCC와 ICCC의 첨예한 대립적 양상이 특히 국내 장로교계에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치선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의 WCC를 멀리하고 근본주의 신학의 입장의 ICCC와 관계를 가지제 되었으며, ICCC의 총재인 Carl Macintire 박사와 교류하여 ICCC의 한국지부의 책임자이며 미국 성경장로회 목사였던 마두원(P. R. Malsbury) 선교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제4회 총회(1969년 6월 17일)는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성장측으로 변경하였으며, 제7회 종회(1972년 4월 6-7일)는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총회명을 개명하고 대신교단의 선언문을 작성하여 교계에 공포하였다. 1974년 8월 19일 자로 작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헌법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머리말
장로회헌법은 장로회신조 및 정치원리를 따라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 준용하여야할 법규이다. 그런고로 우리 장로회는 역사적 표준을 떠나 따로 헌법을 만들려 함이 아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사용할 헌법을 따로 발간하게 됨은 교단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변천 속에서 다져진 우리 노선의 천명이 장로회 헌법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다.
1960년 9월 성경장로회로 총회가 조직되어(창립 총회장 김치선 목사) 근본주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보수교단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사용하여 온 헌법을 그대로 사요하면서 총회규칙을 따로 제정하였다. 1968년 제3회 총회에서 ICCC를 탈퇴하면서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할 것을 가결하였고, 1970년 제5회 총회에서 헌법 수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1972년 일부 교회들의 이탈로 말미암아 총회는 재정비 계획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총회는 개혁주의 노선으로서 교리체계가 확립되었으며, 1974년 제9회 총회에서는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선언을 채택하여 전국 교회에 선언하였다.
이제 명실공히 대한예수교장로회(大神)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 이때 우리 총회의 헌법을 따로 출판하지 못하여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으므로 1975년 제10회 총회에서 우리 헌법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 개정 헌법이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마땅히 승인하고 준행케 할 교회의 신령한 법이 되기 바라며, 또한 신학교에서 가르칠 표준법규가 될 줄 알아 이를 발간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 총회의 수난 속에서 그 역사를 엮어온 역대 총회장을 이 책의 머리에 기록하면서 이분들이 우리의 법을 닦아온 분들임을 밝힌다.
1-2대(1960-1987) 김치선
3-4대(1968-1969) 황영도
6-6대(1970-1971) 김완섭
7-8대(1972-1973) 최순직
9대(1974) 김상묵
10대(1975) 이의완
주후 1974년 8월 19일 】
1980년 4월에는 한국장로회협의회 창립회원교단(대신, 고신, 통합, 개혁, 기장)이 되기도 하였다.
(2) 대신교단의 정체성
대신교단의 정체성은 본 총회의 헌법 책 첫머리의 교단 선언문에서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여러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본 교단의 교회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I. 본 교단의 노선
1. 교리
(1)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제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삼는다.
(2) 우리는 교리적 면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요, 교회사적 면에서 전통적 정통주의이며 보수주의이다.
(3) 우리는 성경원리 면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이며, 세대주의에 비하여 개혁주의 입장이다.
(4) 우리는 은혜의 방편에서 천주교의 성례주의에 비하여 복음주의적 입장이다.
2. 정치
(1) 교회정치에는 장로주의 체제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정체라고 믿는다.
(2)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국가교회형이나 교권형에 비하여 정교분리형을 갖는다.
3. 생활
우리는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을 전제로 한 신률주의적 입장이다.
II. 본 교단의 사명
1. 성경적 교회수립
2. 땅끝까지 복음선교
3. 성경적 유신론에 입각한 사회개혁 】
5. 대신의 전망
(1) 대한신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첫째로, 대한신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는 대신교단의 직영신학교로서의 면모를 손색없이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로,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질과 개혁파신학의 전통적 정체성을 계승 벌전시켜 나아가는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품위를 지켜 나아가야 한다.
넷째로, 세속적인 폐습이 신성한 신학교육 현장에 들어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이 민족 삼천만,” “삼백만 구령운동,” “이만 팔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하신 대신의 설립자의 선교정신을 본받아 국내외 선교의 주역들을 배출하여야 한다.
(2) 대신교단의 총체적 과제
첫째로,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교리, 정치, 생활의 일치를 확고히 다져나아가는 교단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확고한 대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바르게 교역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셋째로, 국내외 기독교계의 정화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교단으로 부상하여야 한다.
넷째로, 총회는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부서를 설치하여 보다 효율적인 발전을 도모하여야 한다.
세속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참된 희생과 참된 봉사는 없는 법이다. 대신인은 맑고 깨끗한 신앙양심의 거울을 가지고 험한 과거사를 반추하면서 허망한 교권을 탐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처럼 속되고 부패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지 말고, 갈등과 반목의 파당을 짓지 말고, 오직 화해와 협력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으로 보다 나은 대신의 미래를 열어 나아가야만 한다.
저자: 조석만박사(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http://blog.daum.net/kkho1105/1963
1. 머리말 2. 초교파시대 3. 대한신학교와 교파신학시대
4. 대신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5. 대신교단의 전망
1. 머리말
“대신”(大神)이라는 말은 본래 大韓神學校의 약칭으로서 大韓예수敎長老會 大神敎團과 大韓神學校의 대명사이다. 나는 개교 50주년(1988년도) 기념행사 때에 「대신의 역사와 전망」에 관하여 발표한 바 있다. 대신의 역사는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또 말해야 하고 후진들에게 전해주어야 마땅한 것이기에 또 다시 말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기독교 이질화를 극복하는 방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의 집단의 정체성은 그 역사성에서 찾게 된다.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나 사회나 민족에게서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역사를 망각하거나 도외시하거나 무시하는 곳에는 정체성도 전망도 없는 법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역사를 돌이켜 봄으로써 새김질(자기성찰)이 가능하며 새김질을 하여야만 장래가 보이는 법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대신의 역사성을 확인하는 일은 대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신의 역사성은 세계기독교회사에 있어서 칼빈주의적 정통, 즉 사도적 신앙의 전통에 입각하여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질을 보전하여 나아가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개혁파(개혁주의)의 노선이다. 개혁파 혹은 개혁주의란 칼빈주의 전통에 입각한 역사적 장로교회를 의미한다. 이에 대신의 신학은 어떤 신학자 개인의 신앙이나 학문적 지식을 일방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가 역사를 통하여 고백해 온 신앙을 기조(基調)로 하여 작성된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석명(釋明)하여 성경의 계시진리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신학의 본질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교회의 모습을 바꾸고 신앙과 신학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새로운 신학을 창출해 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전통을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 공동신조(사도신조, 니케아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 칼케돈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의 기반 위에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 16, 17세기개혁파신학자들, 19, 20세기의 개혁파 신학자들 알렉산더(Achibald Alexander), 하지 父子(C. Hodge, A.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보스(G. Vos), 메이첸(G. Machen),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밴틸(C. Van Til), 벌코프(L. Berkhof), 朴亨龍, 朴允善, 오카다 미노루(岡田 稔), 崔順直 등에 의하여 보존되어 온 교리체계의 신학이다.
대신의 역사는 초교파시대(1960년 이전)와 교파신학시대(1961년 이후)로 구분되며, 교파신학시대를 다시 구분하여 근본주의신학의 시대, 개혁파신학의 확립시대, 개혁파시학 계승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2. 초교파시대(1948-1960)
(1) 대신의 역사적 배경
1901년에 4개의 주한 외국장로교회선교부(미국 북장로교회선교부, 미국 남장로교회선교부, 호주 장로교회선교부, 카나다 장로교회선교부)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회협의회가 한국인 목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평양에 연합장로회신학교를 정식으로 개설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1907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고, 한일 합방 후에는 조선장로회신학교로 개명되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1938년 제1학기를 마지막으로 폐교되기까지 한국교회의 신학사상을 주도하였다. 이 신학교는 평양에 위치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오르내리는 말로 평양신학교라고 불려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을 맞이하여 개교하였으나 북한의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인하여 다시 폐교되고 말았다.
한편, 남한에서는 장로교회의 신학적 대립과 교권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8년 5월 20일에는 朴亨龍 박사가 평양신학교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회신학교(총회신학교 및 현 총신대학교의 초기)를 개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같은 해 2월에 남대문교회당에서 장로회 야간신학원(구 대한신학교의 초기)을 개설하고 그 해 3월 5일에 개학하였다.
(2) 대한신학교 설립 초기의 내력
1944년에 金致善 박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과 더불어 가장 혼란한 시기에 전국적인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기도, 회개, 전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 남대문교회의 동사목사였던 배명준 목사는 말하기를 “그에게 있어서 오직 기도, 회개, 전도였다. 그는 순전히 칼빈주의적이었다.”(생수, 제3집, 15쪽)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김치선 박사의 신념에는 조국해방을 맞이한 이 민족의 살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와 전도뿐이라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케 한다.
그는 기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좋은 집을 불리하고 문제가 많은 집과 바꾸고 2층을 기도실로 정하고 겨울에는 북풍이 휘몰아치는 방에서 외투 하나 걸치고 기도하다가 그 자리에서 자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자기와 이 민족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전도하고 또 전도하였다.(생수, 제3집, 15쪽). 그 당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이 민족 3천만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쳐야한다고 외쳤다.
그는 수요일 기도회 후에는 교회의 청년들을 위하여 신앙강좌를 개설하고 청년신앙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청년들에게 신학교육을 시켜서 전도대를 조직하여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장로회 야간신학원을 개설하였다.
(3) 대한신학교와 초교파적 선교
대한신학교는 1948년 3월 5일에 남대문교회 예배당에서 당시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치선 박사에 의하여 장로교회 야간신학원으로 개교되었다. 그 당시는 36년간의 제국주의 일본국의 식민지 통치 압제 밑에서 벗어난 직후인지라 아직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사회 분위기였다. 김치선 박사는 남달리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람의 심정을 가지고 “이 민족 3천만” 이라고 하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외쳤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예레미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였다. 그는 민족복음화의 뜻을 깊이 품고 친히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우선 그 당시 이 민족 3천만의 10분의 1인 3백만명을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여야겠다는 뜻을 세우고 민족복음화의 영적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신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김 박사는 야간신학원을 개설하고, 연장자이며 교계에서 존경받는 신앙과 학덕이 높은 윤필성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1949년 1월에 김치선 박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1월에 교명을 대한신학교로 개명하고, 교사를 남산 소재 전 KBS TV 방송국 자리에 마련하고, 서소문 소재의 적산가옥을 구입하여 거기에 옮겼다가 후에 남산으로 다시 옮겼다. 1952년 9월에는 대한신학교는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령에 준한 각종학교(문교부 제1275호)로 인가를 취득하여 신학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고 3백만 구령운동과 동시에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이 민족3천만” 이라고 하면서 울부짖었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선교일념은 오직 이 민족 3천만명의 구령운동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인 최순직 박사의 말에 의하면, 김치선 박사의 선교정신은 그의 양부인 영재영 선교사(Re. L. L. Young, D. D.)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영재영 선교사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소속으로 1907년 10월에 내한하여 함경남도 함흥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함흥에 영생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926년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 가서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여 일본에 재일한국인의 교단을 설립하는 등 그는 평생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김치선 박사는 유년시절부터 영재영 선교사의 집에서 살면서 친히 선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생수, 제3집, 14쪽).
김 박사는 영생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고베중앙신학교(현 고베개혁파신학교)와 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거쳐서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최순직 박사는 김치선 박사에 관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재학 중 관북학생이 모인 어느 석상에서 그는 설교 도중 ”내 민족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선교사는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그의 속에는 이 선교사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크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데가 있었을 것이며 또 외국인의 한 사람이 이 복음을 위하여 내 민족을 사랑하는 그 선교정신을 배웠을 것이다.”(생수지, 제3집, 15쪽)라고 하였다.
대한신학교의 초기 장로회야간신학원의 교과목의 내용은 신학과목보다는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운동을 위주로 하는 신학수업이었다(생수, 제4집, 30쪽). 이같은 전도운동의 수업이 남대문교회가 중심이 된 청년들의 신앙운동과 더불어 3백만 구령운동과 대한신학교의 기도의 열정과 전도훈련의 교육이 하나가 되어 오직 기도, 회개, 전도에 치중하였다(생수, 제4집, 30쪽). 그 당시에 김 박사가 “순교를 각오하고 이 전도운동에 나설 사람은 없는가” 하고 외쳤는데, 이에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전도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도대원들은 38선 지역과 지리산과 제주도 등지로 가서 전도하였다. 제주도에 간 5명 가운데 1명이 순교하였으며, 지리산에 간 20명 가운데 1명이 순교하였다. 이것은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배명준 목사, 권장학 부목사, 김충범 장로, 김동식 장로 등의 증언이다(생수, 제3집, 17쪽). 본교 제24회 졸업생들이 본교재학 중에 순교한 이들의 순교지 탐방을 나선 일도 있다. 순교지 탐방 여행기록은 「생수」 제3집 21-35쪽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3. 대한신학교와 교파신학시대(1961년 이후)
(1) 근본주의신학 시대(1961-1967)
대한신학교는 이때까지는 교단신학교가 아닌 초교파 신학교로서 초교파적 선교에 주력하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교파신학의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시기는 정부방침에 따라 교단 없는 신학교는 폐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불가불 학교를 보존하기 위하여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 박사가 중심이 되어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신학의 입장인 ICCC와 관계를 맺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을 설립하고, 학교와 교단은 상호 인준협정관계에서 교단 신학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서 불가분리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같은 대한신학교의 역사성을 미루어 볼 때 대한신학교는 대신교단의 보호 아래에서 존속되어 왔음과 동시에 대신교단은 대한신학교에 의하여 성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노선의 교단을 만들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교단이란 개교회의 연합체로서 연합된 각 개교회는 다같이 교리, 정치, 생활에 있어서 일치되어야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기독교의 국내외 정세는 WCC와 ICCC는 치열한 대치상황에 놓여있었다. 대한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의 WCC와는 멀리하고,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신학의 입장이었던 ICCC를 선택하여 관계를 가지고, 약간의 원조도 받으면서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신학교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교단이 출범하던 초기는 신학적 기반이 약한 때였다. 그 때는 교단의 교세확장을 위한 선교활동보다는 초교파적 선교활동의 시기였다. 신학적으로는 아직 정돈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국내외적으로 여러가지 복잡한 때였다. 최순직 박사는 그 때의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상황과 교단의 형편을 일괄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때는 교단의 경험도 없이 다만 교리적 받침 속에서 새로운 교단창설과 국제관계 등의 제반의 일들이 시작되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니 사실상 근본주의 혹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정립되어있지 않았고 하나의 확고한 문헌도 없는 형편이었으며 신학교 교육 역시 아무런 계획이나 방향을 잡지 못한채 교리학도 하나의 교본사적으로 체계있는 교육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오던 중 대신은 다소나마 ICCC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아 오면서 큰 뜻을 가지고 나아가던 차에 ICCC와의 의견대립으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 결국 분리되어 대신은 다시 본래의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생수, 제4집, 31쪽).
대신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입장인 ICCC와의 관계는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 박사가 별세함(1968. 2. 26)으로써 종식되었으며, 제7회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1972년 4월 6-7일) 때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2) 개혁파신학 활립의 시대(1968-1975)
제7회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는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교단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개명하였으며 교단의 새로운 출발을 교계에 선언하였다. 이 때부터 대신은 개혁파신학의 시대로 출범하게 되었다.
최순직 목사는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신학적 기초를 개혁파신학으로 확립한 주역으로서 결정적인 역할과 공헌을 하였다. 최순직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베개혁파신학교(神戶改革派神學校)와 교도제국대학교(京都帝國大學校) 문학부 기독교학과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일본의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인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본의 보수주의 신학계의 거장이며 조직신학자인 오카다 미노루(岡田 稔, 1902-1992)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카다 교수의 개혁파신학 사상을 그대로 대한신학교에 전수하여 대신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오카다 교수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의 전신인 고베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고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풀톤(Samuel P. Fulton, 1868-1938)1)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하지 父子, 워필드, 보스, 메이첸, 밴틸, 카이퍼, 바빙크, 멀코프 등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개혁파신학자의 입지를 견고히 세우게 되었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들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19세기와 20세기의 칼빈주의 신학의 거장들이다. 그들은 오카다 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카다 교수는 최순직 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최순직 교수는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의 초석이 되었다. 대신의 정체성은 곧 역사적 개혁파 신학적 노선에 입각하여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순직 교수로부터 오카다 교수의 저서 「개혁파교리학교본」을 주교재로 하여 조직신학을 배우고, 또한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오카다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로부터 개혁파신학의 강의를 들으면서 개혁파신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면 필자의 「조직신학」. 상권, 9-10쪽을 읽어보라.
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1) 대신교단의 약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은 처음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로 출발하였다. 1961년 6월 21일은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가 설립된 설립총회일이다. racltjs 박사와 마두원 선교사가 발기인이 되어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제1회 총회가 개최되어 제1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 당시는 기독교 국제기구인 WCC와 ICCC의 첨예한 대립적 양상이 특히 국내 장로교계에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치선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의 WCC를 멀리하고 근본주의 신학의 입장의 ICCC와 관계를 가지제 되었으며, ICCC의 총재인 Carl Macintire 박사와 교류하여 ICCC의 한국지부의 책임자이며 미국 성경장로회 목사였던 마두원(P. R. Malsbury) 선교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제4회 총회(1969년 6월 17일)는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성장측으로 변경하였으며, 제7회 종회(1972년 4월 6-7일)는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총회명을 개명하고 대신교단의 선언문을 작성하여 교계에 공포하였다. 1974년 8월 19일 자로 작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헌법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머리말
장로회헌법은 장로회신조 및 정치원리를 따라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 준용하여야할 법규이다. 그런고로 우리 장로회는 역사적 표준을 떠나 따로 헌법을 만들려 함이 아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사용할 헌법을 따로 발간하게 됨은 교단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변천 속에서 다져진 우리 노선의 천명이 장로회 헌법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다.
1960년 9월 성경장로회로 총회가 조직되어(창립 총회장 김치선 목사) 근본주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보수교단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사용하여 온 헌법을 그대로 사요하면서 총회규칙을 따로 제정하였다. 1968년 제3회 총회에서 ICCC를 탈퇴하면서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할 것을 가결하였고, 1970년 제5회 총회에서 헌법 수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1972년 일부 교회들의 이탈로 말미암아 총회는 재정비 계획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총회는 개혁주의 노선으로서 교리체계가 확립되었으며, 1974년 제9회 총회에서는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선언을 채택하여 전국 교회에 선언하였다.
이제 명실공히 대한예수교장로회(大神)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 이때 우리 총회의 헌법을 따로 출판하지 못하여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으므로 1975년 제10회 총회에서 우리 헌법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 개정 헌법이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마땅히 승인하고 준행케 할 교회의 신령한 법이 되기 바라며, 또한 신학교에서 가르칠 표준법규가 될 줄 알아 이를 발간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 총회의 수난 속에서 그 역사를 엮어온 역대 총회장을 이 책의 머리에 기록하면서 이분들이 우리의 법을 닦아온 분들임을 밝힌다.
1-2대(1960-1987) 김치선
3-4대(1968-1969) 황영도
6-6대(1970-1971) 김완섭
7-8대(1972-1973) 최순직
9대(1974) 김상묵
10대(1975) 이의완
주후 1974년 8월 19일 】
1980년 4월에는 한국장로회협의회 창립회원교단(대신, 고신, 통합, 개혁, 기장)이 되기도 하였다.
(2) 대신교단의 정체성
대신교단의 정체성은 본 총회의 헌법 책 첫머리의 교단 선언문에서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여러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본 교단의 교회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I. 본 교단의 노선
1. 교리
(1)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제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삼는다.
(2) 우리는 교리적 면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요, 교회사적 면에서 전통적 정통주의이며 보수주의이다.
(3) 우리는 성경원리 면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이며, 세대주의에 비하여 개혁주의 입장이다.
(4) 우리는 은혜의 방편에서 천주교의 성례주의에 비하여 복음주의적 입장이다.
2. 정치
(1) 교회정치에는 장로주의 체제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정체라고 믿는다.
(2)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국가교회형이나 교권형에 비하여 정교분리형을 갖는다.
3. 생활
우리는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을 전제로 한 신률주의적 입장이다.
II. 본 교단의 사명
1. 성경적 교회수립
2. 땅끝까지 복음선교
3. 성경적 유신론에 입각한 사회개혁 】
5. 대신의 전망
(1) 대한신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첫째로, 대한신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는 대신교단의 직영신학교로서의 면모를 손색없이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로,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질과 개혁파신학의 전통적 정체성을 계승 벌전시켜 나아가는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품위를 지켜 나아가야 한다.
넷째로, 세속적인 폐습이 신성한 신학교육 현장에 들어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이 민족 삼천만,” “삼백만 구령운동,” “이만 팔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하신 대신의 설립자의 선교정신을 본받아 국내외 선교의 주역들을 배출하여야 한다.
(2) 대신교단의 총체적 과제
첫째로,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교리, 정치, 생활의 일치를 확고히 다져나아가는 교단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로, 확고한 대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바르게 교역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셋째로, 국내외 기독교계의 정화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교단으로 부상하여야 한다.
넷째로, 총회는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부서를 설치하여 보다 효율적인 발전을 도모하여야 한다.
세속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참된 희생과 참된 봉사는 없는 법이다. 대신인은 맑고 깨끗한 신앙양심의 거울을 가지고 험한 과거사를 반추하면서 허망한 교권을 탐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처럼 속되고 부패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지 말고, 갈등과 반목의 파당을 짓지 말고, 오직 화해와 협력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으로 보다 나은 대신의 미래를 열어 나아가야만 한다.
저자: 조석만박사(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http://blog.daum.net/kkho1105/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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