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
훈장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도 한다. 진짜를 위해 죽는 용기보다 가짜를 위해 죽는 용맹이 더욱 의가 만만해 보이는 법이긴 해도 죽음의 값은 진짜에 매겨지게 되는 법이다.
옛날 강원도 땅 어는 산골에서 서당 훈장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서당 아들에게 글(文字)을 가르치는 대신 고담과 만담으로 공부시간을 메꾸어 나아가는 동시에 먼저 자기가 “곶감, 대추”라고 선창하면 아이들이 따라서 후창하도록 글 읽듯이 복창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글공부하는 전부였다.
그럭저럭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사이에 그는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잘 지냈는데 어느 날 거기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훈장이 그곳에 오게 되었다. 새로운 훈장은 진짜 글을 가르쳤다. 묵필로 쓰는 법과 그리고 숙제도 주고 필요한 모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서당 아이들은 이 훈장에 대해서 불만이었다. 무슨 놈의 글공부가 이렇게 까지 까다롭고 어려우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아이들의 부모와 마을 어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 새로운 훈장이 진짜 선생이 아니라 가짜 선생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에 대한 불신임과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드디어 훈장은 눈물을 머금고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 진실(眞實)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선입주관(先入主觀)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교훈(敎訓)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도 이런 류(類)의 일이 얼마든지 있다. 눈 둘 가진 원숭이가 눈 하나 가진 원숭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다가 병신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우화(寓話)도 역시 진짜와 가짜라고 하는 것에 대한 교훈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베이컨’은 네가지 선입관념의 우상, 즉 허위(가짜)를 말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편견을 의미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인데 이것은 개인의 특수성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요. 셋째는 시장의 우상으로서 이것은 말(언어)로 인한 편견이요.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이것은 전통, 유행. 권의 등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반성 없이 무분별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드리는 데에서 생기는 편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질을 부리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개성을 고집하기도 곧잘하고 입으로 남을 헐뜯기도 하고 높이기도 예사로 하면서 옛것에나 새것에 무조건 따른 버릇이 있다. 이같은 버릇 때문에 사람은 우상, 즉 허위(가짜)라고 하는 것에 자기 자신을 예속시키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마취 현상이다. 분명히 인간은 그 무엇인가에 마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확실히 무지와 병적 요인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편견인 것이다. 일단 편견이라는 병에 걸리면 점차로 전염되어 확대되어 가면서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편견이란 원시적인 고대 세계의 소산(所産)만은 아니다. 기계문명 사회에서도 편견은 생기게 마련이다. 타락된 인간의 양심은 마취병에 걸렸고 세정은 구부러진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자연법칙은 변하는 것이 아닌데도 인간의 이성(理性)은 그것마저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암흑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을 때에 편법을 쓰는 법이다. 약자 역시 강자에 대해서 그랬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세상에 위선자가 생겼고 위선의 분위기가 조장되고 위선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왜 거짓말을 받아드려야 하나. 산다는 것의 의미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의 사이에는 너무나 먼 간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무엇인가에 마취되어 버린 인간에게 동일한 생활의 반복이 무슨 의미를 가져오는 것일까.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고민하는 인간의 이성이 회의를 불러일으킬 때 하나님은 확신을 촉구해 오시기도 하지만 미련한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무엇인가에 의지하려는 본성과 두려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자신을 망각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자를 당할 자는 없을지라도 헛된 죽음을 죽는 일이 어찌 가엾지 않는 일이겠는가. 진짜를 위해 죽는 용기보다 가짜를 위해 죽는 용맹이 더욱 의기 만만해 보이는 법이긴 해도 죽음의 값은 진짜에 매겨지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사는 날 동안 진짜와 가짜는 분간하기 어려워서 그저 세월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 버리는 세정(世情)의 형편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죽은 자가 목숨을 걸었던 그 일도 어느덧 심상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마는 법이다. ‘어디 좀 맛있는 것 없나’하고 부엌을 두리번거리며 뒤지는 노망한 노파나 ‘어느 큰 덩어리 돈벌이 구멍이 없나’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노련한 솜씨의 사업가나 모두 다 먹을 것을 찾아 그 욕심을 기울이기는 매 한가지이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마셔야 되는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지라도 어떻게 먹어야 되고 어떻게 마셔야 되겠느냐!에 대한 가치관은 세월 따라 구름 따라 변해왔다. 이처럼 산다는 문제도 죽는다고 하는 문제도 다 그렇게 변하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사람들은 선악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생활의 수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교도자(敎道者)는 강단에서 외치기만 하는 자가 되었고 웅변술을 익혀가기에 여념이 없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듣기에 아름다운 말에 현혹되기를 원했고 교도자의 웅변술에 마취되는 일에 제법 익숙해져 버렸다. 요행과 같은 신비(神秘)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 요행을 찾는 사람들과의 그럴듯한 공감대가 생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약삭빠른 자들의 종교 심리 이용이라는 것이다.
신비란 하나님의 조명(照明)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비춰주시는 사역(事役)인 것이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비를 만들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요행과 같은 신비를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도깨비 같은 가짜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법이다.
http://cafe.daum.net/Creed/6xB3/11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도 한다. 진짜를 위해 죽는 용기보다 가짜를 위해 죽는 용맹이 더욱 의가 만만해 보이는 법이긴 해도 죽음의 값은 진짜에 매겨지게 되는 법이다.
옛날 강원도 땅 어는 산골에서 서당 훈장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서당 아들에게 글(文字)을 가르치는 대신 고담과 만담으로 공부시간을 메꾸어 나아가는 동시에 먼저 자기가 “곶감, 대추”라고 선창하면 아이들이 따라서 후창하도록 글 읽듯이 복창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글공부하는 전부였다.
그럭저럭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사이에 그는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잘 지냈는데 어느 날 거기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훈장이 그곳에 오게 되었다. 새로운 훈장은 진짜 글을 가르쳤다. 묵필로 쓰는 법과 그리고 숙제도 주고 필요한 모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서당 아이들은 이 훈장에 대해서 불만이었다. 무슨 놈의 글공부가 이렇게 까지 까다롭고 어려우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아이들의 부모와 마을 어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 새로운 훈장이 진짜 선생이 아니라 가짜 선생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에 대한 불신임과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드디어 훈장은 눈물을 머금고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 진실(眞實)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선입주관(先入主觀)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교훈(敎訓)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도 이런 류(類)의 일이 얼마든지 있다. 눈 둘 가진 원숭이가 눈 하나 가진 원숭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다가 병신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우화(寓話)도 역시 진짜와 가짜라고 하는 것에 대한 교훈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베이컨’은 네가지 선입관념의 우상, 즉 허위(가짜)를 말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편견을 의미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인데 이것은 개인의 특수성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요. 셋째는 시장의 우상으로서 이것은 말(언어)로 인한 편견이요.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이것은 전통, 유행. 권의 등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반성 없이 무분별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드리는 데에서 생기는 편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질을 부리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개성을 고집하기도 곧잘하고 입으로 남을 헐뜯기도 하고 높이기도 예사로 하면서 옛것에나 새것에 무조건 따른 버릇이 있다. 이같은 버릇 때문에 사람은 우상, 즉 허위(가짜)라고 하는 것에 자기 자신을 예속시키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마취 현상이다. 분명히 인간은 그 무엇인가에 마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확실히 무지와 병적 요인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편견인 것이다. 일단 편견이라는 병에 걸리면 점차로 전염되어 확대되어 가면서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편견이란 원시적인 고대 세계의 소산(所産)만은 아니다. 기계문명 사회에서도 편견은 생기게 마련이다. 타락된 인간의 양심은 마취병에 걸렸고 세정은 구부러진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자연법칙은 변하는 것이 아닌데도 인간의 이성(理性)은 그것마저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암흑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을 때에 편법을 쓰는 법이다. 약자 역시 강자에 대해서 그랬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세상에 위선자가 생겼고 위선의 분위기가 조장되고 위선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왜 거짓말을 받아드려야 하나. 산다는 것의 의미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의 사이에는 너무나 먼 간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무엇인가에 마취되어 버린 인간에게 동일한 생활의 반복이 무슨 의미를 가져오는 것일까.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고민하는 인간의 이성이 회의를 불러일으킬 때 하나님은 확신을 촉구해 오시기도 하지만 미련한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무엇인가에 의지하려는 본성과 두려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자신을 망각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자를 당할 자는 없을지라도 헛된 죽음을 죽는 일이 어찌 가엾지 않는 일이겠는가. 진짜를 위해 죽는 용기보다 가짜를 위해 죽는 용맹이 더욱 의기 만만해 보이는 법이긴 해도 죽음의 값은 진짜에 매겨지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사는 날 동안 진짜와 가짜는 분간하기 어려워서 그저 세월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 버리는 세정(世情)의 형편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죽은 자가 목숨을 걸었던 그 일도 어느덧 심상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마는 법이다. ‘어디 좀 맛있는 것 없나’하고 부엌을 두리번거리며 뒤지는 노망한 노파나 ‘어느 큰 덩어리 돈벌이 구멍이 없나’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노련한 솜씨의 사업가나 모두 다 먹을 것을 찾아 그 욕심을 기울이기는 매 한가지이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마셔야 되는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지라도 어떻게 먹어야 되고 어떻게 마셔야 되겠느냐!에 대한 가치관은 세월 따라 구름 따라 변해왔다. 이처럼 산다는 문제도 죽는다고 하는 문제도 다 그렇게 변하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사람들은 선악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생활의 수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교도자(敎道者)는 강단에서 외치기만 하는 자가 되었고 웅변술을 익혀가기에 여념이 없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듣기에 아름다운 말에 현혹되기를 원했고 교도자의 웅변술에 마취되는 일에 제법 익숙해져 버렸다. 요행과 같은 신비(神秘)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 요행을 찾는 사람들과의 그럴듯한 공감대가 생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약삭빠른 자들의 종교 심리 이용이라는 것이다.
신비란 하나님의 조명(照明)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비춰주시는 사역(事役)인 것이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비를 만들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요행과 같은 신비를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도깨비 같은 가짜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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