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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3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3 
서철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역사신학)

⑪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 사상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첫째,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족보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移住)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주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임마누엘의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의 생명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相應)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암시적으로 증거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험(先驗)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마2:23).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합니다(마3:1). 4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합니다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입니다. (막1:1-8, 눅3:1-17, 요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와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하는 선구자로서의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마태는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사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3: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인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마3:1절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마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탄생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눅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침례) 받으심입니다. 마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금까지 은거(隱居)해 계시던 참 다윗 왕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되었고 그의 왕적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합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증하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마3:15절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에서 되어진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요구를 성취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요한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고후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 책(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를 죄인들과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하고자 대신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빌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14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식은 단순한 성례전적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 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4:17부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됩니다.
셋째, 하늘의 재가(裁可)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4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입니다. 특별히 요1:31-34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번 공인된 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행사로 들어갑니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에 충만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적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적 능력들과 복음적 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마12:28, 눅4:18, 행10:36-38). 셋째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행2:38).
넷째,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마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동일한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마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 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마4:1, 막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요일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합니다(마4:1). 여기서 ‘그 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2)다음으로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창2:16-17). 본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 속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롬5:14, 고전15:45, 막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행4:12, 히4:14-16, 벧전2:22, 고후5:21).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본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7:38)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13:1-2, 25-26)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주시고는 다시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창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 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일관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해서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계시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적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비하한 반면(민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민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자세는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와지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민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적 심판의 일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신1:3).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입니다(신8:3, 16, 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적 출애굽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안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모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세 번에 걸친 시험(마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마치십니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과의 관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명실공히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입니다. 렘31:34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 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입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의 당초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공히 약속하고 있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재차 확약하십니다(렘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얘깁니다(계21:3, 엡2:14-16).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됐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영과 새 마음의 변화 곧 전인적인 거듭남에서 찾습니다(겔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을 시도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한 성전재건도 시도됐습니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여전히 일삼았을 뿐입니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기록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곧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약교회공동체의 출현 말입니다(마16:16-21).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는 어떤 방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예식을 잡수시는 것으로 이를 폐하시고, 새롭게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가운데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하시는 내용을 기술합니다(눅22:14-20). 본문에서 유월절 예식은 분명히 성찬식으로 대체됩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예표적 본의가 성찬식의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모형과 예표로서 유월절 예식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표가 실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죄(赦罪)와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됩니다(엡2:8-9, 1:7, 롬3:22-24, 8: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양자), 그리고 후사 등으로 부릅니다. 이들을 집합적으로 부르게 될 경우 바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한 새 사람 곧 천상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 말입니다(엡2:14-15, 1:23, 4:12, 골1:18).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출현은 성찬식에 암시 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천상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마16:16-21)
상황이 이럴진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사역의 결과로 출현하게 된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 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이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춰진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도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逐邪)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에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명백한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후에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미 도래한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차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실천적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수혜자(受惠者)로 하여금 시혜자(施惠者)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마련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약2:22, 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때론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증거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질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의 정체성을 가시(可視)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 및 대립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적으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그렇습니다.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언급 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구원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능력 있게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확인 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종착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상적 나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기자들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빌3:20)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골1:13)들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의존적인 관계상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천상의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3. 마치면서
이제 본 강론을 맺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서 자체 속에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증하는 통전(通全)적 주제이기도합니다.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의 편집구도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사상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상을 주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려고 할 때, 언약적 구속사란 관점은 성경의 본의를 밝히는 최선의 해석의 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해석적 관점이며 구조적인 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해석상의 객관적 증거를 특별히 창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언약(문화명령)-선악과 언약(아담언약)-여자의 후손언약(원시복음) 속에서 발견되는 신적 언약간의 상호 불가피한 의존적인 관계성과 연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상의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마6:33)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구속의 원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신적 언약의 총화요 제반 언약의 결국인 새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른신앙/바른교회/바른목회를 지향하는 일과 관련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이란 주제 안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총체적인 계시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데서 비로소 그 가능성과 실현성이 일차적으로 보장된다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본 강론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What the Bible Says)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적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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