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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2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2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서철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역사신학)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상12:25-33). 첫째, 하나님의 도구화 및 우상화 작업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됩니다. 대신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적 사이비 신앙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자의적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롬10:2-3, 마7:21-23). 둘째, 자의적 숭배신앙의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모세 율법에 정한 대로 레위지파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임의대로 제사장에 봉직시킵니다(대하11:13-16).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철저히 무시되는 패역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의 배출과 목회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교인의 양산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유유상종해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셋째,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의 문제입니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정해서 드리는 절기를 임의대로 변경해 적용시킵니다. 특별히 7월 15일로 정해져 있는 초막 절기를 8월 15일로 변경해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날짜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습니다.
남왕국 유다 또한 본질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의 경호원들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유다 마저 바벨론의 3차(BC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됩니다(렘25:1-9, 대하36:17-20).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렘25:8-13, 29:10-14, 30:1-3, 겔37:21-22, 사14:1-3). 이는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축복했던 야곱의 예언이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면 다윗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⑩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40:1-2, 42:9, 61:1-3)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남유다 왕국의 패망은 특별히 유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 및 통한의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적어도 다윗언약에 근거하면 남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망정 어떤 경우라도 결코 멸망당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자 하박국마저도 유다의 패역과 간악함을 마땅히 징치해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없는 이방 갈대아 인(바벨론)을 채찍삼아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기막힌 사실 앞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거침없이 항변했던 것입니다(합1:1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박국의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해 줍니다. 렘25:12-13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이런 예언의 말씀은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들이 고토로 귀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스1:1-4).
그렇습니다. 다윗언약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관련해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 구조적 성격에 대해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언약을 포함해서 제반 신적언약의 중심 사상들이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 속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전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들 중,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맞춰 선포한 예언들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새 언약’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이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시내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철저하게 멸망을 선고받을지라도 다윗언약에서 시사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조만간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해 주실 것과 아울러, 보다 미래적인 종말론적 회복을 예시(豫示)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신(新)다윗 왕조의 재건과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신정왕국의 회복을 지향합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특별히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등 세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
첫째,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렘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기 전, 먼저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이런 남 유다의 회복을 북 이스라엘에게 확대 적용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언약 안에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부각시킴으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십니다(렘25:7-10). 그러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고 70년으로 제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1절). 이는 유다의 회복을 보증하시는 말씀(렘29:10-14, 30:1-3)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70년이 찰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 중 일단의 무리를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으로부터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남은 자’(remnant)라고 명명합니다(렘23:3).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친 백성을 가리키는 언약적 용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을 ‘택자’ 사상과 동일한 의미를 간직합니다(엡1:4-6). 신구약 역사를 막론하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은 자증합니다(롬11:4-6). 아울러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공평과 정의를 행사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때 비로소 참 된 구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을 통해 여호와의 의가 실질로 온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3:5-6, 롬3:21-22). 그리고 이들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렘23:7-8).
이상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전히 다윗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은 자체 속에 처음부터 이중적 성격을 띠고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중적 구조를 띠고 진행됨을 보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 말입니다.
이렇게 렘23-30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기술하던 예레미야는 31장에 이르러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렘31:31-34). 새 언약의 내용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시내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나 괄목할만한 갱신과 발전을 통해 심화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심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고 있음은 시내산 옛 언약에 비해 현격한 계시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을 살펴봅니다.
새 언약의 발효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유효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출6:2-9). 새 언약의 성격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옛 언약(시내산 언약)과 비교해서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에 반응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행동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맺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외적으로는 불연속성을 갖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 언약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지켜질 것입니다. 순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내주와 후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십니다(렘31:34상). 이로 인해 죄로부터 온전히 용서를 받습니다(34절하).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상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에 있어서 종전의 언약과 비교해 괄목할만한 언약의 갱신과 발전을 가져 온 부분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죄용서의 시대’란 사실입니다.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시대 말입니다(히10:17-18). 물론 옛 언약 하에서도 죄용서가 가능했습니다(히9:13).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향한 예표적 제도로서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생했을 뿐입니다(히10:11). 그래서 해마다 거듭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서는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once for all)를 드리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 안에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塗抹) 된 것입니다(히9:12, 10:14, 17-18절).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성취됩니다. 마침내 임마누엘의 종말론적 성취가 실현됩니다. 여기서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적 표현은 언약의 본질로서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계21:3, 창17:8, 출19:5, 레26:12). 성경에 약속된 신적 언약의 핵심사상은 한결 같이 위의 주제를 본질로 삼아 역사 속에서 진행돼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이 찰 때 회복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이 다윗의 위를 좇아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 성취될 것이며(렘23:5-6),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결코 다시 멸망하지 않으며 영속될 것입니다(렘33:14-18).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자연법칙을 담보로 보증하십니다(25-26절). 이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은 필연적이고 영원할 것에 대한 확약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일컫는 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입니다(엡2:14-15).
에스겔의 새 언약 사상
둘째, 에스겔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겔36:26-38, 37:24-28, 11:19-20). 에스겔서에서는 언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에서 언약(베리트)이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전체 예언은 새 언약적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아직은 미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예언의 중심내용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보다 발전, 확대시켜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선지자의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에 모아집니다.
겔36:16절 이하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설정된 미래적 이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실하게 된 요인들이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회고됩니다(16-20절).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상실은 철저히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특별히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 설명됩니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실제로 가나안 족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호8:4-7, 12:11, 13:1-2),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결핍돼 사사로운 종교적 감정만을 부추겨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이기적인 목적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섬긴 사실을 포함하기도 합니다(사1:11-14).
겔36:21-23절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동기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상당히 예레미야적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회복 및 갱신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 중에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심하셨다는 지적입니다. W.J.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언약과 창조, 크리스챤 서적, 1999년)에서, 21-2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신적 언약을 기필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 문제 때문입니다(21절). 신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동시적으로 당신의 실추된 신실하심을 열방 중에서 영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22절). 셋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국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열방에서도 인정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23절).
겔36:24-25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체화될 수 있는 ‘외적’ 세부내용들이 열거됩니다. 곧 열국에서 먼저 취해 내십니다. 그리고 고토로 데리고 가십니다. 정결 의식을 통해 더러운 행동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들을 깨끗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이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합니다. 이는 본질에서 옛사람적 삶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전제조건입니다. 옛 것과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적극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하기 위해 26절 이후부터 본격적인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회복의 ‘내적’ 요소들이 제시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내주케 하십니다(27절). 이로 인해 새 영과 새 마음, 곧 거듭난 새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27절에서는 26절의 새 영을 주신 목적이 설명됩니다. 곧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3-4). 옛 언약 하에서는 이 부분이 결핍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을 가리켜 ‘낡아지게 하신 것’(히8:13)과 ‘개혁할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히9:10)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실체를 위한 모형적 역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에스겔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순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임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화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언약은 신적 기원(起源)상 동일한 목표를 지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 말입니다.
35절에서는 회복된 가나안 고토가 마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회복될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향하는 바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목적 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의 성격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원리에 입각해 아담의 창조언약, 여자의 후손언약,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의 갱신 및 발전적 확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8절에서 새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선언적 말씀 속에서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확인됩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핵심적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사실과 임마누엘의 궁극적 완성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9-38절에 기술된 ‘환경’의 회복기사 내용에 앞서서 26-28절에 소개된 하나님의 신(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남과 영적 회복 및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기사를 소개함은 ‘환경’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당초 에덴의 천상적 환경은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보장받습니다(창3:15, 롬8:19-21). 지금 에스겔의 새 언약의 일차적 강조점이 새 신의 내주와 후원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들의 영적 회복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신’의 내주와 역사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새 영과 새 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에스겔의 새 언약(겔36:26-28)의 내용은 에스겔서 37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특별히 겔37:26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속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이 화평의 언약 또한 내용적으로 아담의 창조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갱신과 확대를 지향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31:31-34)의 내용이 그랬듯이 동일하게 신적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견지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될 새 신(겔36:27)으로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에스겔은 이를 소위 ‘마른 뼈의 소생’ 사건을 통해 설명합니다(겔37:1-14). 이는 ‘마른 뼈’를 통해 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영적 상태를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현재적 영적 상태를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소생 불가능한 절망의 상태를 극명히 기술함에 다름 아닙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단지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진 진흙 덩어리가 생령(生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돼 있을 뿐입니다.
마른 뼈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됩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적 형태’를 갖춥니다.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뼈 조각들이 상합하고 연락해 서로 맞춰집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지막으로 가죽이 덮입니다(겔37:7-8). 완연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습니다. 아직은 죽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즉시 죽은 상태에서 소생합니다. 에스겔은 살아난 사람들을 군대라 칭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해명해 주십니다(10-11절). 남북이 연합된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 말입니다. 이어서 보여주신 두 막대기의 상징적 비유(15-17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고토(가나안)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부연해 약속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체화시켜 천명하십니다(12-14절).
다음으로 겔37:15-28까지의 내용을 통해서는 ‘두 막대기’(15-16절)의 묵시적 비유를 통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정치적으로 통합돼 한 나라를 이룰 것(17절)과, 이들을 가나안 고토로 인도해서 한 왕에 의해 영속적으로 다스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보다 진전된 언약적 계시의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소위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일명 ‘영원한 언약’(26절, 렘32:40)이라 부릅니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겔37:15-28)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 임금이란 다름 아닌 참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곧 복권된 다윗 왕이 신(新) 다윗 왕조인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영속적인 보전(保全)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는 궁극적 구원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궁극적 안식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회복된 에덴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간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역사와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 및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계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다름 아닌 재창조로서 에덴의 회복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3, 2:17, 3:6, 3:15). 이런 식으로 가나안과 에덴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동질성을 함의(含意)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천상의 도성을 동일하게 지향합니다.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고 성소를 저들 가운데 둠으로써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합니다(계21:3). 그리고 이 사건은 성소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됩니다(요2:19-21, 고전3:16, 6:19, 12:13). 따라서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은 예레미아의 ‘새 언약’(렘31:31-34)과 더불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가 보장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과 새 언약은 동일한 목적의 다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최종 목표로 삼아 진행됩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
셋째, 이사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사40-66장). 이사야는 예레미야(BC628-586)와 에스겔(BC595-572)이 포로시대 선지자로 활약한 것에 비해, 포로기전 선지자로서 유다의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740-680년경)에 걸쳐 예언 활동을 한 문서 선지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역사에서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 군사적 격변기로 평가됩니다. 즉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 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키며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스라엘 전(全)역사의 진행구도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 이어 가나안 실지 정복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사사기서에서 구속사 진행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순환적 패턴(구원-타락- 심판-회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유다의 언약파기와 배역의 죄악상과 관련해 원색적인 독설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지적 사역을 시작합니다(사1:24, 28-31). 그러나 본 장(사1장)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淨化)적 차원에서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기에 심판의 예언 중에도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수반됩니다(25-27절).
이사야는 1장에서 먼저 과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재 유다의 패역에 대한 책망을 기록합니다(2-9절). 유다는 그 죄악상의 격심함과 이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이런 비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 소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심으로 아주 멸하시지는 않습니다(9절).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입니다.
앞에서(2-9절) 유다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며 책망하던 이사야는 본 절(10-1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죄악상을 지적합니다. 특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유다의 범죄가 제의(祭儀)적 영역에서부터 비롯됐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당시 유다의 국가적 정체성이 내외적으로 심각히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 여전히 신정왕국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의식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제의에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시적으로나마 대속적 사죄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됩니다. 당시 이런 방식의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될 구속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만을 습관적으로만 반복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가식적인 제사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심리를 발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제사의 본질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사건(BC722)과 남 왕국 유다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는 유다인들에는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때때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적잖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용(御用)선지자들에 의한 왕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적극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혐오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신랄히 정죄하십니다.
이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회개를 촉구합니다(18절). 참으로 언약백성의 특권이란 그들의 죄가 아무리 중(重)할지라도 충심(衷心)으로 드려지는 회개를 통해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기억됨이 없도록 영원히 도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히10:14-18).
이제 이사야는 사39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의 초기부터 유다의 범죄와 타락상을 책망하며 줄곧 심판을 경고해 오던 이사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이 당시 대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사39장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침공과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는 사40-66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의 내용을 예언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새 언약 속에는 비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먼저 사40:1-2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메시지,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곧 다가 올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적 회복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말입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의 내용인즉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2절).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내용을 빌리자면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의 때가 거의 찼다는 것입니다(렘25:11, 29:10). 이제 가나안 고토로의 포로귀환과 이로 인한 회복의 때가 다가온다는 얘기입니다(사14:1, 겔37:21). 이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애굽으로부터의 제 1의 출애굽 사건의 실체로 암시하면서 포로귀환의 구속사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동일한 계시적 관점에서 취급합니다(렘23:5-8).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갖는 새 언약의 계시적 의미가 결국은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공동체와 불가분의 계시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때 두 공동체간 계시의 연속성이란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성의 원리와 관련해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모형과 실체라는 관계성을 갖기 때문이며, 계시의 불연속성이란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반면에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갈3:7, 29, 롬9:6-8).
따라서 이사야의 새 언약은 단순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만이 아닙니다. 사43:19에서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집행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회복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의 경륜을 실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사44:3). 다음으로 허물과 죄를 기억치 않으십니다(사43:25).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40:2, 44:22).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예표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새 언약 안에서 보다 진전되고 확대된 구속사의 경륜이 집행될 것입니다(사48:6-7). 이 뿐만이 아닙니다. 파괴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사44:28) 및 시온의 회복을 약속합니다(사46:13). 이는 다름 아닌 다윗 언약의 회복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 및 시온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곧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고레스 왕(메데-파샤)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사45:1-7). 당시의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판도 속에서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 부은 종으로 삼아 새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여기서 고레스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명해 부르심은 그만큼 새 언약의 집행이 확실하며 사실적임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역사의 주관자가 천지상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극명하게 현시하시는 대목입니다(5-7절). 이 예언적 약속의 말씀은 에스라1:1-4을 통해 성취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진전됩니다.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통치적 왕권을 가져올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합니다(사52:7). 그는 처녀에게서 잉태될 것입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컫습니다(사7:14). 그의 본체와 속성은 하나님과 동일시 여김을 받습니다(사9:6). 그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며 친히 참 다윗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될 것입니다(사9:7, 32:1, 55:3). 더하여 다윗 왕으로 오실 구원자는 이새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사11:1-2). 이런 사실은 야곱이 임종에 즈음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예언적 축복을 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선언한 복의 내용 속에서 이미 확인됩니다(창49:10). 이런 식으로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메시아의 가문으로 택정을 입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성취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왕적 통치하에서 모든 피조물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납니다. 허무한 데 더 이상 굴복치 않습니다(롬8:19-23). 본래의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마치 회복된 에덴처럼 말입니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와 새 창조의 시대가 도래하는 셈입니다(사11:6-9). 그러나 이런 새 시대는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해 본격적으로 출현한 교회시대를 거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고 선언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그 진정한 실상(實像)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성격도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보다 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초림의 사역 및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재림의 사역까지를 포괄적으로 망라해서 전망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지상적 생애가 이렇게 오묘하신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호리만큼의 차착(差錯)도 없이 시종일관하게 섭리적으로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가장 큰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의 도래는 왕적 메시아의 신분(사52:13, 15)으로 확인되기 이전에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이사야의 새 언약이 간직한 구속사적 특징입니다(사52:14, 53:1-12). 동일한 메시아에 대한 이중적 예언 말입니다(사52:13, 15절과 14절의 비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먼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기에 마치 겹쳐진 두 산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서 하나의 산인 양 착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각축장(角逐場)을 방불케 하는 가나안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자연히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봅니다.
구원자로서 종의 승귀(exaltation)와 함께 고난 받는 종의 처참한 비하(卑下, humiliation)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먼저 예고합니다(사52:13-15). 사53장에서는 종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끝내 싫어 버림을 받게 됩니다(1-3절). 그 종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찔림을 받습니다. 그는 심하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8-9절).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오직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애매히 당한 고난입니다. 헌신적인 희생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대속적으로 짐지게 하심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사53:4-6).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부활과 하늘 보좌로의 승귀가 보장된 대속적 죽음이었기에 말입니다(히12:2, 롬8:34).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종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며, 만인의 무릎을 그 분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사53:10-12, 52:13, 15, 빌2:9-11).
나아가 사61:1-3의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메시아 사역의 구속사적 성격을 이스라엘의 희년 절기(레25:10-11)의 종말론적 성취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의 성격이 사61:1-3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하심으로 구약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고난의 종 된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암시적으로 증거하십니다(눅4: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새 언약의 내용들을 특별히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들이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다윗왕조의 복권이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왕조의 복권은 미래에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현한 새 이스라엘로서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자연히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다윗언약을 총체적으로 포괄(包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을 통해 성취의 실상을 드러내게 됩니다(눅22:19-20), 히브리서 기자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 진술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히10:12-18).
http://blog.daum.net/kkho1105/7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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