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1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서철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역사신학)
1. 들어가면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단히 성경을 공부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딤전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하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모두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limited salvation)을 강조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마1:28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요6:37, 눅19:10) 성육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입니다(빌2:6-8).
이런 이유로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바른 계시관의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10:17). 때문에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제아무리 은혜롭게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의존적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설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된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마7:21-23, 롬10:2-3). 문제는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천상적 시각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적 의미를 세상적 관점과 질서 속에서 접근하게 될 때, 거기에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의 신앙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좁은 길의 신앙여정과는 무관합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만큼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으로서 세상만사와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창2:17, 3:6)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4:4)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창1:28)은 지속적으로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사역에 집중될 때(요5:39, 딤후3:15-17),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경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찾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의 종국에 가서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무지하거나 왜곡 및 곡해현상은 사이비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목회에로의 귀결이 불가피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와지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입니다(롬1:21-23). 결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의 형성입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유사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기독교 신앙관은 찾기 힘듭니다. 불법적(마7:21-23)이고 불복종적(롬10:2-3)인 자의적 숭배 신앙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바른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계시의 총화가 무엇인 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로서의 천국사상이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관의 궁극적 목표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구현을 위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설파합니다(전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전12:14, 고후5:10, 히9:27, 계20:11-15).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계시의 총화인 사실의 정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공교하게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이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고 실제적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맛보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그래서 현세와는 단절된 사후세계에 속한 나라(that world)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 진행적(this world, 마12:28, 눅17:20-21, 마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눅17:22-24, 22:14-18, 마25:31-33)인 이중적 국면을 띠고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2:31-46). 거기에서 각기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그래서 신적기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 내용입니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후자는 신적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합니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통치의 세상나라를 대치합니다. 이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을 통해, 세상역사의 종식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란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서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집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편집방향성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처음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합니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 말입니다(히3:4). 그런데 계21:1을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창1:1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초의 천지창조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창조사역으로 갱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벧후3:10-13, 마19:28, 사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 세상(this world)의 창조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that world)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선언(宣言)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4:17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본문에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 속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진행형적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막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능력이 현재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와 병자의 치유 및 축사(逐邪)사역, 그리고 천국복음의 증거와 죄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명백한 표적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귀결됩니다.
넷째로, 소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6:33)을 천국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고 선포하시는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사상이야말로 성도들의 존재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섯째로, 동일한 산상수훈 속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6:9-10)에 대해 집중해 기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구현’(고전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것이 확실하기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경륜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와지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啓示)의존적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합니다(고후5:17, 엡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본질에 있어서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합니다. 골1:13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본질에서 이미 천상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합니다(엡2:6).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삶으로 간주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관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관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막7:6-8, 마7:21-23, 롬10:2-3, 딤후3:15-17, 딤전2:4, 요삼4절, 엡4:11-13).
2. 펼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계획을 성경저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역사를 무대로 섭리적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언약(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킵니다(엡1:4-6).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신적(神的, divine)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신적 언약을 중보적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적 구속계시의 본의(엡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나머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①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창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 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전12:13, 요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창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 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6, 벧후2:4, 사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창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不許)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갈4:4).
④ 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更新)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엡1:4, 행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창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창6:8-9, 히11:8, 엡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묵계(?契)적으로 시사합니다. 창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⑥ 노아의 본존언약(창9:8-10, 1-2절)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6:5)이라고 고발합니다.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합니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합니다. 노아를 포함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9:8-10). 이 언약을 일컬어 노아의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부부와 맺었던 창조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의 보존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의 내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창9:1-2). 물론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창11:10, 26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창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서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습니다(창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사건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과 배도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되었다가(창11:1-2, 단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계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적 시험과 반역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습니다.
⑦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인 아브라함 언약(창12:1-3)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10:22, 11:10) 및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11:24-26),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4장-11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暗?적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明示)적으로 바뀝니다. 은닉(隱匿)적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람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직접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12:1-3).
아브람 언약의 대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창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지향적이던 삶을 천상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마6:33).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고전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무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4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창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4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착 없이 전개됩니다. 이들 각각의 성취내용을 우선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 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神政)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 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http://blog.daum.net/kkho1105/7293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서철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역사신학)
1. 들어가면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단히 성경을 공부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딤전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하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모두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limited salvation)을 강조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마1:28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요6:37, 눅19:10) 성육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입니다(빌2:6-8).
이런 이유로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바른 계시관의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10:17). 때문에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제아무리 은혜롭게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의존적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설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된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마7:21-23, 롬10:2-3). 문제는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천상적 시각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적 의미를 세상적 관점과 질서 속에서 접근하게 될 때, 거기에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의 신앙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좁은 길의 신앙여정과는 무관합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만큼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으로서 세상만사와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창2:17, 3:6)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4:4)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창1:28)은 지속적으로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사역에 집중될 때(요5:39, 딤후3:15-17),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경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찾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의 종국에 가서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무지하거나 왜곡 및 곡해현상은 사이비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목회에로의 귀결이 불가피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와지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입니다(롬1:21-23). 결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의 형성입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유사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기독교 신앙관은 찾기 힘듭니다. 불법적(마7:21-23)이고 불복종적(롬10:2-3)인 자의적 숭배 신앙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바른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계시의 총화가 무엇인 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로서의 천국사상이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관의 궁극적 목표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구현을 위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설파합니다(전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전12:14, 고후5:10, 히9:27, 계20:11-15).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계시의 총화인 사실의 정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공교하게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이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고 실제적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맛보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그래서 현세와는 단절된 사후세계에 속한 나라(that world)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 진행적(this world, 마12:28, 눅17:20-21, 마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눅17:22-24, 22:14-18, 마25:31-33)인 이중적 국면을 띠고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2:31-46). 거기에서 각기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그래서 신적기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 내용입니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후자는 신적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합니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통치의 세상나라를 대치합니다. 이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을 통해, 세상역사의 종식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란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서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집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편집방향성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처음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합니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 말입니다(히3:4). 그런데 계21:1을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창1:1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초의 천지창조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창조사역으로 갱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벧후3:10-13, 마19:28, 사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 세상(this world)의 창조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that world)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선언(宣言)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4:17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본문에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 속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진행형적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막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능력이 현재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와 병자의 치유 및 축사(逐邪)사역, 그리고 천국복음의 증거와 죄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명백한 표적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귀결됩니다.
넷째로, 소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6:33)을 천국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고 선포하시는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사상이야말로 성도들의 존재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섯째로, 동일한 산상수훈 속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6:9-10)에 대해 집중해 기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구현’(고전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것이 확실하기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경륜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와지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啓示)의존적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합니다(고후5:17, 엡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본질에 있어서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합니다. 골1:13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본질에서 이미 천상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합니다(엡2:6).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삶으로 간주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관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관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막7:6-8, 마7:21-23, 롬10:2-3, 딤후3:15-17, 딤전2:4, 요삼4절, 엡4:11-13).
2. 펼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계획을 성경저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역사를 무대로 섭리적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언약(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킵니다(엡1:4-6).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신적(神的, divine)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신적 언약을 중보적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적 구속계시의 본의(엡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나머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①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창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 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전12:13, 요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창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 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6, 벧후2:4, 사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창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不許)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갈4:4).
④ 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更新)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엡1:4, 행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창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창6:8-9, 히11:8, 엡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묵계(?契)적으로 시사합니다. 창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⑥ 노아의 본존언약(창9:8-10, 1-2절)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6:5)이라고 고발합니다.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합니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합니다. 노아를 포함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9:8-10). 이 언약을 일컬어 노아의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부부와 맺었던 창조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의 보존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의 내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창9:1-2). 물론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창11:10, 26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창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서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습니다(창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사건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과 배도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되었다가(창11:1-2, 단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계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적 시험과 반역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습니다.
⑦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인 아브라함 언약(창12:1-3)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10:22, 11:10) 및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11:24-26),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4장-11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暗?적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明示)적으로 바뀝니다. 은닉(隱匿)적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람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직접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12:1-3).
아브람 언약의 대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창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지향적이던 삶을 천상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마6:33).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고전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무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4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창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4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착 없이 전개됩니다. 이들 각각의 성취내용을 우선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 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神政)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 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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