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관한 생득적 지식(生得的 知識)과 후천적 지식(後天的 知識)
하나님에 관한 생득적 지식(生得的 知識)과 후천적 지식(後天的 知識)
신지식이 생득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동안 사상계 안에 일어났던 논쟁거리였습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물론 특별계시 밖에서의 신지식을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생득적 신지식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신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득적 신지식은 플라톤이나 씨세로(Cicero) 그리고 데카르트(Descartes) 등에게서 발견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경험론적인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상가들은 이 생득적 관념설을 공격하였습니다. 감각만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입각점에 서 있었던 경험론은 이미 희랍 철학자들 중, 원자론자들에게서 발견되며, 그후 중세기의 유명론자(唯名論者)들에게서 그 경향이 드러나며 문예부흥 이후에는 프란시스 베이컨(F.Bacon)에 이르러 한 학파를 형성하였고, 죤 로크(J. Locke)나 데이빗 흄(D.Hume)에 이르러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론적 경향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사상사의 강줄기를 흘러 도도한 맥을 형성하였습니다. 예컨대, 반종교적이며 유물론적 일원론(唯物論的 一元論)에 입각점을 두었던 18세기, 불란서 백과사전학파라든지,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실증주의의 철학의 태두 꽁트(A.Comte) 같은 인물이라든지, 스튜아르트 밀(Stuart Mill), 스펜서(H.Spencer) 그리고 그후, 유물론적 경향의 모든 사상적 조류 속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험론자들의 철학적인 명제는 감각(感覺, sensus) 속에 먼저 있지 않은 것은 지성(知性, intellectus) 속에 존재하지 아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각 이전의 마음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아니한 백지(tabula rasa, in qua nihil scriptum est)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인 생득적 관념설은 경험론자들에 의해 철저히 배격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념론적 경향을 가진 철학자들은 생득적 신지식을 주장하였습니다. 플라톤(BC 427~347)의 상기설에 의하면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였으며 거기서 경험한 것들을 깊이 간직하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씨세로(BC 106~43)는 모든 경험 이전에 진리에 대한 각종 지식이 심겨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각(印刻)된 관념(notiones impressae) 혹은 생래적 사고(cognitionis insitae) 또는 재능의 생래적인 씨(semina innata virtutum)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으로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Deos esse natura opinamur)고 하였습니다.
근세철학에 이르러 데카르트도 역시 생득적 신관념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에 입각하여 우리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 지각에 의하지 않고, 생득적 관념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라이프니쯔(Leibniz, 1646~1716)도 수학적 진리나 신관념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생득적 관념론을 지지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생득적 관념을 단지 잠재적인 능력으로 보았지만, 라이프니쯔는 보다 활성적인 능력으로 보았으며 더우기 신을 우리 마음으로 직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래적 신지식의 합리주의적 관념은 칸트에 의해 많은 비평을 받았으며 또한 그에 의해 많이 수정되었습니다. 칸트가 가르친 것은 생래적 관념이 아니라, 선천적 형식(先天的 形式, aangeboren vormen)이었습니다. 곧 직관의 형식으로 시공계를, 오성의 형식으로 범주를, 이성의 형식으로 신관념, 도덕적 원리(양심), 불멸성을 들었습니다.
생득적 관념론에 대한 칸트의 이와 같은 비평은 신학의 방법론을 다루면서 주관적인 방법에 대해 평가하던 중, 살펴 본 바와 같은 입각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타당성있는 일입니다.
철학자들의 생득적 관념설에 대해 신학자 부치우스(Voetius)는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습니다. ⑴첫째, 만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신지식을 소유한다면 성경이나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며, ⑵둘째는, 날 때부터 신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영과 육 혹은 정신과 물질이 상호 대립하는 이원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보는 가운데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주관적 세계로만 깊이 몰입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독단론(獨斷論)에 빠지고 맙니다.
루터교 신학자들도 데카르트의 독단적 합리주의를 비평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이성이 세계를 관찰하기도 전에 신지식이 印刻되어 있다는 의미의 생득적인 신관념을 말할 것이 아니라, 번거러운 지성적인 추론의 과정 없이 신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자연적 성향을 일컬어 생득적 관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렇다면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생득적 신지식에 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기울어집니다.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개혁파의 입장을 진술하고 있습니다(신론, p.70.).
하나님에 관한 생득적 지식은 사람의 마음의 소질(素質)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되어 나오는 지식(기초적 관념)이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진 『종교의 종자』(semen religionis)의 영향 아래 자연적으로 얻어지고 추리(推理)와 변론(辯論)의 수고로운 과정에 의하여 얻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생득적인 것이다.
개혁파 신학에서 인간이 생득적으로 신지식을 가진다는 말은 단지 그가 (일반)계시의 도움 없이 생득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또한 태어날 때부터 어떤 신지식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접하자마자, 곧 신에 대한 관념이 추리와 변론의 과정 없이 성장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신지식은 (일반)계시를 접하자마자 어떤 노력 없이(sine ullo labore), 예비적인 연구 없이(sine praevio studio), 깊이 생각하지 않고(sine ratiocinatione) 인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였다면,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지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철학자들이 의미하는 바와 신학자들의 주장 사이에 상이점(相異點)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혁 신학자들이 생득적 신지식이란 말을 사용하면서도 관념론자들의 독단적(獨斷的)인 합리주의(合理主義)를 단호히 배격한 것을 보면, 관념론자들이 사용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 3장 3절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자연적으로 심어진 것이요, 따라서 결코 근절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피조 세계에 대한 관망을 통해 얻게 되는 신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접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인자하심과 사랑을 아무런 추리나 변론 없이, 또한 예비적인 연구와 학문적인 분석 없이 알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켜 생득적 신지식을 소유했다고 한다면, 그 생득적인 신지식에 근거하여 지성적인 분석과 종합적인 판단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을 일컬어 후천적인 신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인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 인간 밖으로부터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이는 양자가 다 인간 밖으로부터 일반계시를 접한 후에야 얻어지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생득적인 지식은 아무런 변론이나 추론의 과정 없이 얻어지는 것이고, 후천적인 지식은 이론적인 사색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후천적인 신지식을 통하여 전적으로 성경 밖에서 참된 신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자연신학자들은 성경 밖에서 선천적인 신지식과 후천적인 신지식을 동원하여 신학을 수립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막연한 생득적인 신지식을 다양한 방법의 추론을 통하여 후천적으로 보다 명백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⑴피조물의 유한성을 부정함으로써 신의 비공유적 속성인 무한성과 불변성을 알 수 있으며(否定의 방법), ⑵피조물의 탁월성을 절대화시킴으로써 공유적 속성인 신의 지혜와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알게 되고(卓越의 방법), ⑶인과율을 통해 세계라는 결과의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因果律에 의한 방법)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전혀 무모한 시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논증을 통해서 신의 존재가 확실히 알려질 수 없습니다. 후천적인 신지식을 통해서도 특별계시의 도움 없이는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개혁신학연구소
http://blog.daum.net/kkho1105/3838
신지식이 생득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동안 사상계 안에 일어났던 논쟁거리였습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물론 특별계시 밖에서의 신지식을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생득적 신지식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신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득적 신지식은 플라톤이나 씨세로(Cicero) 그리고 데카르트(Descartes) 등에게서 발견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경험론적인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상가들은 이 생득적 관념설을 공격하였습니다. 감각만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입각점에 서 있었던 경험론은 이미 희랍 철학자들 중, 원자론자들에게서 발견되며, 그후 중세기의 유명론자(唯名論者)들에게서 그 경향이 드러나며 문예부흥 이후에는 프란시스 베이컨(F.Bacon)에 이르러 한 학파를 형성하였고, 죤 로크(J. Locke)나 데이빗 흄(D.Hume)에 이르러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론적 경향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사상사의 강줄기를 흘러 도도한 맥을 형성하였습니다. 예컨대, 반종교적이며 유물론적 일원론(唯物論的 一元論)에 입각점을 두었던 18세기, 불란서 백과사전학파라든지, 반형이상학적 경향의 실증주의의 철학의 태두 꽁트(A.Comte) 같은 인물이라든지, 스튜아르트 밀(Stuart Mill), 스펜서(H.Spencer) 그리고 그후, 유물론적 경향의 모든 사상적 조류 속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험론자들의 철학적인 명제는 감각(感覺, sensus) 속에 먼저 있지 않은 것은 지성(知性, intellectus) 속에 존재하지 아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각 이전의 마음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아니한 백지(tabula rasa, in qua nihil scriptum est)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적인 생득적 관념설은 경험론자들에 의해 철저히 배격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념론적 경향을 가진 철학자들은 생득적 신지식을 주장하였습니다. 플라톤(BC 427~347)의 상기설에 의하면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였으며 거기서 경험한 것들을 깊이 간직하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씨세로(BC 106~43)는 모든 경험 이전에 진리에 대한 각종 지식이 심겨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각(印刻)된 관념(notiones impressae) 혹은 생래적 사고(cognitionis insitae) 또는 재능의 생래적인 씨(semina innata virtutum)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으로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Deos esse natura opinamur)고 하였습니다.
근세철학에 이르러 데카르트도 역시 생득적 신관념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에 입각하여 우리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 지각에 의하지 않고, 생득적 관념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라이프니쯔(Leibniz, 1646~1716)도 수학적 진리나 신관념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생득적 관념론을 지지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생득적 관념을 단지 잠재적인 능력으로 보았지만, 라이프니쯔는 보다 활성적인 능력으로 보았으며 더우기 신을 우리 마음으로 직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래적 신지식의 합리주의적 관념은 칸트에 의해 많은 비평을 받았으며 또한 그에 의해 많이 수정되었습니다. 칸트가 가르친 것은 생래적 관념이 아니라, 선천적 형식(先天的 形式, aangeboren vormen)이었습니다. 곧 직관의 형식으로 시공계를, 오성의 형식으로 범주를, 이성의 형식으로 신관념, 도덕적 원리(양심), 불멸성을 들었습니다.
생득적 관념론에 대한 칸트의 이와 같은 비평은 신학의 방법론을 다루면서 주관적인 방법에 대해 평가하던 중, 살펴 본 바와 같은 입각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타당성있는 일입니다.
철학자들의 생득적 관념설에 대해 신학자 부치우스(Voetius)는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습니다. ⑴첫째, 만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신지식을 소유한다면 성경이나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며, ⑵둘째는, 날 때부터 신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영과 육 혹은 정신과 물질이 상호 대립하는 이원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보는 가운데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주관적 세계로만 깊이 몰입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독단론(獨斷論)에 빠지고 맙니다.
루터교 신학자들도 데카르트의 독단적 합리주의를 비평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이성이 세계를 관찰하기도 전에 신지식이 印刻되어 있다는 의미의 생득적인 신관념을 말할 것이 아니라, 번거러운 지성적인 추론의 과정 없이 신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자연적 성향을 일컬어 생득적 관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렇다면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생득적 신지식에 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기울어집니다.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개혁파의 입장을 진술하고 있습니다(신론, p.70.).
하나님에 관한 생득적 지식은 사람의 마음의 소질(素質)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되어 나오는 지식(기초적 관념)이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진 『종교의 종자』(semen religionis)의 영향 아래 자연적으로 얻어지고 추리(推理)와 변론(辯論)의 수고로운 과정에 의하여 얻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생득적인 것이다.
개혁파 신학에서 인간이 생득적으로 신지식을 가진다는 말은 단지 그가 (일반)계시의 도움 없이 생득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또한 태어날 때부터 어떤 신지식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접하자마자, 곧 신에 대한 관념이 추리와 변론의 과정 없이 성장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신지식은 (일반)계시를 접하자마자 어떤 노력 없이(sine ullo labore), 예비적인 연구 없이(sine praevio studio), 깊이 생각하지 않고(sine ratiocinatione) 인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였다면,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지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철학자들이 의미하는 바와 신학자들의 주장 사이에 상이점(相異點)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혁 신학자들이 생득적 신지식이란 말을 사용하면서도 관념론자들의 독단적(獨斷的)인 합리주의(合理主義)를 단호히 배격한 것을 보면, 관념론자들이 사용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 3장 3절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자연적으로 심어진 것이요, 따라서 결코 근절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피조 세계에 대한 관망을 통해 얻게 되는 신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접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인자하심과 사랑을 아무런 추리나 변론 없이, 또한 예비적인 연구와 학문적인 분석 없이 알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켜 생득적 신지식을 소유했다고 한다면, 그 생득적인 신지식에 근거하여 지성적인 분석과 종합적인 판단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을 일컬어 후천적인 신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인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 인간 밖으로부터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이는 양자가 다 인간 밖으로부터 일반계시를 접한 후에야 얻어지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생득적인 지식은 아무런 변론이나 추론의 과정 없이 얻어지는 것이고, 후천적인 지식은 이론적인 사색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후천적인 신지식을 통하여 전적으로 성경 밖에서 참된 신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자연신학자들은 성경 밖에서 선천적인 신지식과 후천적인 신지식을 동원하여 신학을 수립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막연한 생득적인 신지식을 다양한 방법의 추론을 통하여 후천적으로 보다 명백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⑴피조물의 유한성을 부정함으로써 신의 비공유적 속성인 무한성과 불변성을 알 수 있으며(否定의 방법), ⑵피조물의 탁월성을 절대화시킴으로써 공유적 속성인 신의 지혜와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알게 되고(卓越의 방법), ⑶인과율을 통해 세계라는 결과의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因果律에 의한 방법)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전혀 무모한 시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논증을 통해서 신의 존재가 확실히 알려질 수 없습니다. 후천적인 신지식을 통해서도 특별계시의 도움 없이는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개혁신학연구소
http://blog.daum.net/kkho1105/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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