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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עשׁוהי; JOSHUA)]

여호수아(עשׁוהי; JOSHUA)]
 
첫째 이 글은 여호수아서의 서론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간단한 설명만을 말하기로 하고 실제로 들어가서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유익하리라고 본다.
여호수아서를 볼 때 우리는 먼저 삶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들 자신에겐 결여되어 있는 삶, 우리가 갈망하는 - 계획이 아닌 - 삶, 우리가 기대하는 보다 풍성한 삶.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삶이 아니라 특정한 삶 즉, 안식의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와 의도하지 않는 바를 깨닫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신약성경 가운데 히브리서 4장에서 거의 출현하고 있는 “안식”이라는 단어는 매우 흥미있는 단어이다. 명사로 쓰일 때는 “고요함, 평화, 휴식, 평정” 등을 의미하고 동사로 쓰일 때는 “끊기다, 멈추다, 그만두다, 단념하다, 중지하다, 삼가다” 등을 의미한다. 또한 명사로 쓰일 때든지 동사로 쓰일 때든지 “철저한” 또는 “철저하게”를 의미하는 전치사적인 접두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에 담긴 사상은 내적인 평화, 영적인 평정, 완전한 휴식에 관한 것이며 어떤 일을 그만둔 결과 얻어진 상태에 관한 것이다. 그 의미는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인 것이다.
더우기 이 안식의 삶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녹스, Knox)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에 대한 잘 다져진 확신이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다”(웨이무쓰, Weymouth)
그리고 믿음은 고지식함이나 억측이 아니라 행위에 관한 도덕적 영적 원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엡 2:8). 믿음으로 인하여 영적 실재들이 인간 경험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는 코울리지(Coleridge)의 말과 같다.
“믿음이란 긍정하는 것이며, 영원한 진리를 실제화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앞으로 이에 관해 반복해서 강조할 것이다. 이는 안식의 삶이란 믿음에 의한 것처럼 노력에 의한다는 것이다. 안식의 삶을 누리려면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다. 영적 안식에 관한 진리는 꿈이나 환상, 열광적인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개념이 아니라 값비싼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 4:11)라고 한다. 여기서 “힘쓸지니”(strive eagerly)라는 말은 여호수아서 4:10의 말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속히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믿음이 노력을 대체하지 못하며, 노력 또한 믿음을 결코 대체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실제적인 성결에 관한 진리가 때때로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는 성결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올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성화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은 바쁜 일과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어떤 이의 국면에
맞추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선하신 분을
사랑하고 섬김이여!
그분을 향하면서 벗어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떤 질적인 면모를 생각하려고 한다. 이는 포기하는 자세와 따르는 자세를 포함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의해 도달하여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실제화시키며 자기 신조의 신실성과 능력을 인격과 행위로 증명해 보이려는 지속적인 정력적 노력을 통해 지탱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호수아서에서 접근할 때는 그 이야기가 애굽의 속박에서 피와 능력으로 이미 구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힘입어 국가로 구성된 백성들에 관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전 인류를 향하신 구원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셨다.
여호수아서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뒤이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책의 관점을 결정하면서 그 주제가 구속이 아니라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의 성격과 소명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서를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기에 적절한 주제로 만드는 것은 이런 사실 때문이다. 이른바 “케직”(Keswick)의 메시지는 중생치 못한 사람들 - 비록 그런 사람들도 그 메시지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 할지라도 - 에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처음 받은 은혜의 생활과 예배 속에 함축된 의미를 끊임없이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축복은 중생할 때에 주신 바 된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그 모든 축복들이 우리의 소유로 되는 것은 믿음과 노력에 의해서 그것들을 사유화할 때 뿐이다.
축복의 총체인 기업(inheritance)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소유하는 것(possession)은 그 기업 중 사유화하는 부분들이다. 대약진이 이루어진 후에 여호수아로 하여금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수 13:1)라고 말하게 한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이다. 중생 속에 싸여진 것이 성화 가운데서 펼쳐져야 한다. 기업이 소유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가능한 것이 실제화되어야 한다. 숨겨져 있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잠재력이 중심세력으로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서의 진행과정에서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것 중 많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천 삼백여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스라엘의 문자적 역사는 모형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말한다. 유월절, 만나, 갈라진 반석, 장막, 제사장, 희생제물, 홍해, 요단강 등은 모두 영적 실체들을 지닌 역사적 모형들이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 들어간 것,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 가나안 땅에서의 열 두 지파의 경험 등 모든 사실은 오늘날 영적 생활에 관한 진리와 경험을 나타내고 있음을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8,9,11,13)
여호수아서에는 영적 경험들이 역사적 사건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구절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안식의 땅이었던 것이 영적인 면에서 안식의 삶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영역은 특별한 장소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엡 1:3) 인격이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은 그들이 그 땅을 소유했던 것의 원형(antitype)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역은 지상적이었지만 믿는 이들의 영역은 천상적이다. 그들의 영역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그들의 부요함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부요함은 영원하다.
여호수아서에서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서신들에서는 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 한 민족의 몫이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호수아서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서는 동일한 내용은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관된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부분들의 제목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1:1-5:12), 가나안 땅을 정복함(5:13-12:24), 가나안 땅을 소유함(13장-24장) 등이다.
이 제목들은 역사의 과정을 지칭할 뿐 아니라 역사가 안고 있는 영적 진리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모형화된 영적 축복에 들어가려면 믿음의 행위에 의거해야만 한다. 이것이 1장의 주제이다. 그리고 들어간 땅에서는 싸워야만 한다. 원수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믿음은 노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것이 2장의 주제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가 싸운 땅을 소유해야만 한다. 믿음과 노력과 엄청난 부요함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3장의 주제이다.
각 장의 배열은 전진적이다. 들어가는 것은 정복하는 것에 선행해야 하며 정복하는 것 또한 소유하는 것에 선행해야 한다. 안식을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여겨진다면 여호수아서에 대한 신약의 대응부인 에베소서가 안식을 싸움과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았고, 하늘에서 우리의 씨름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는 것을(엡 1:3, 2:6, 6:12) 말한다. 에베소서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하늘”(heavenlies)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신자의 영적 경험의 영역”(스코필드)이라고 올바르게 정의되어 왔다. “하늘”은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땅에 대해 신약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면 이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신자가 개종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신분과 기업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신자가 믿음과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르러야 할 수준과 소유하고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첫번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지위에 관련되며, 두번째 것은 경험적인 면에서의 실제 상태에 관련된다. 이런 구분점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흐리멍텅한 생각만 갖게 될 것이고 실망스런 결과만을 낳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며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것이 된 모든 축복을 경험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맨 끝 부분이 역대기이다. 여호수아에서 열왕기까지를 Former prophets,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를 Latter prophets라 한다. 단순히 선지자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은 아니다. 선지자로서의 사역에 걸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지자들의 사역이 어떤 것이었고, 그리고 그들의 기록이 그들의 활동에 맞는 것이었는가? 흔히 선지자는 미래의 일을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자라고 본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의 예언은 미래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역을 미래와 관련시켜서 이해하나 히브리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과거의 사건을 말하기도 한다. 선지자의 사역은(미래와 관련되어 예언한 이사야, 아모스 등) 미래의 사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과거, 현재, 미래에 연관되어 있다. 선지자의 사역은 현재에 비추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행위는 누구에 의해 정해지는가? 우리의 행위의 의미는 내가 정한다. 어떤 행위가 있다고 하면 그 행위의 의미는 행위의 주체자에 의해서 부여된다. 그렇다면 나의 행위는 과연 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다른 많은 영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역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다고 봐서 시작하는 것이 철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까지 포함해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즉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그 원대로 주관하시는 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뜻, 계획)의 실현이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실현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이다. 선지자들은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에 비추어서 현재와 과거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선지자의 근본 사역이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될 수 없이 과거, 현재, 미래에 나타나는 것이다(과거 역사를 선지서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대에 선지자를 허락하심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를 위한 사역자로 주신 것이요,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은 현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호수아 1장 1절에서 신명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 불순종의 제1세대의 멸절후에 새로운 세대가 나오는데 인구조사(계수)로 시작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압에 세워놓고 모세가 자기의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을 한다. 이스라엘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과거의 비참한 역사를 돌이켜보며 이스라엘의 생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이런 생명의 원리는 광야에서만 아니라 오늘 너희에게도 적용된다고 신명기 4장 처음에서 간절히 말한다. 생명의 원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 순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죽은 다음이 여호수아의 시작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 건너편까지 인도하는 것이 그의 사역이었고, 여호수아는 그 백성을 거느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땅을 유업으로 얻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다음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말씀이 5절이다.“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take one's stand)에서 이방 백성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도 여호수아에게 맞설 수 없음을 밝혀준다. Leadership의 핵심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들어가면 된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유기체(organic body)이다. 유기체의 각 요소들이 나름대로의 존재요소를 독특하게 갖고 있다. organic body의 중요한 개념은 각 존재가 독특하지만 그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6절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에서 보듯이 땅을 유업으로 얻게하는 것이다. 이 땅은 역사적으로 관통해서(창세기-계시록), 창 12장과 관계해서 보면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땅에서 삶의 터전을 얻는다는 것이다(예, 산상보훈).
7절 이하에서는 이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조건은 하나님이 지도자와 함께 하시기 위한 조건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 율법이 가르치는 곧은 길로만 가라 그리하면 내가 갈 수 있는 길 어디든지 형통하리라(산상보훈)는 것이다. 율법은 온전한 지혜를 제공한다. 유대주의에 와서 지혜신학이 발달했으나 그 근원은 율법이다. 성경이 우리의 진정한 지혜가 됨을 신명기, 민수기 등에서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의 삶과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지침이 율법이라고 하신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의지인 명령과 관계시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법은 바로 통치자의 뜻(will)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하나님의 명령을 대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후에 이것은 왕에게 적용된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중보적인 왕권(지도권, 주권, mediatorial. kingship. leadership)으로 율법이 여호수아가 지혜롭게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 - 백성과 inclusio, 핵심적인 내용을 처음과 나중이 일치함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1-9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사명을 주신다. Authoriged leader Joshua.
10절 이하 1) 1:1-9 Joshua Authoriged by as the leader of Israel
2) 10절 이하 백성에게 명함 - 이 명령은 Leadership의 행사이다.
12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메니하 즉 안식의 개념이 덧붙여진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안식의 개념은 무엇인가?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것을 이행토록 촉구한다.
15절에서 안식이란 개념과 연결이 된다. 이어서 16절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으로서 그 반응은 그의 Leadership을 인정한다(be strong). 이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백성이 여호수아를 격려해 준다. 지도자는 필히 그가 지도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나오는 안식과 땅의 개념을 보면 여호수아의 사역이 중보자적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강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셔야 합니다라는 백성들의 바램이다. 하나님의 대행자 - 하나님의 다스림을 중보하고 매개하는 자이다.
여호수아 2장은 정탐을 보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탐 두 사람을 뽑아 싯딤에 보내는데 이들이 여리고에 들어가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 왜 기생의 집에 들어갔을까? 가장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고 온 갖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리고 왕이 정탐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잡으려 하자 기생 라합이 이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나갔다고 거짓정보를 준다. 2장의 주된 관심이 무었일까? 여리고 성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정탐을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 여리고 성의 수비와 약점들을 알아내서 주력부대로 공격하기 위한 군사적 정보를 얻기 위한 파송인가? 이들이 얻어온 것은 무엇인가?
24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븉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들이 가져온 정보는 군사적인 정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 확실함을 알고 있다.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 사실이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그 나라의 백성인 기생 라합과 그 백성들의 입으로부터 듣고 온 것이다. 미래에 대한(그리스도께서 주실 구원의 확신) 여호와의 구원의 확신을 주었다.
기드온의 경우에는 종자 하나를 데리고 미디안 진 중에 정탐하러 갔다가(보리떡의 꿈) 적군들이 꾼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인 것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승리했다. 싯딤의 여리고 사람들 -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홍해에서 건져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아졌다. 라합이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①홍해 사건, ②시혼과 옥을 죽인 사건, 여호와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이르러 마음이 눈처럼 녹아버렸는데 이는 심리적으로 전투의욕이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이는 전쟁의 패망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예) 골리앗과 다윗 : 함성을 지르며 상대의 기를 죽이는 심리적인 요소가 옛 전쟁에서는 크게 작용했다. 신명기와 민수기에 보면 앞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하게 하리라. 이는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성취의 시작을 이미 본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떤 면에서 Holy War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진정한 용사란 여호와시다. 그래서 이를 여호와의 전쟁이라 한다.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미디안의 군대나 다윗의 전쟁 등에서 보면 적군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 하다가 아군들을 서로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용사는 여호와이신 것으로 중요한 것은 두려움(panic)이 임한다는 것이다.
라합의 신앙고백은 여호와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시혼과 옥을 죽이신 것을 듣고 이스라엘의 편에 동조하여 자기 민족을 반역한 것이다. 라합의 자기 민족을 버림이 뜻하는 것은, 옛 사람은 무신론이 있을 수 없다. 절대 신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왜곡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 종교는 모든 삶이 종교와 직결되어 있다. 한 민족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 말하는 정치적인 집단을 떠나는 것과 달리 옛날은 한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택하는 것이다.
룻의 신앙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라합은 룻보다 오래전 인물이다. 라합은 자기 민족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택하는 것은 정치적 종교적 인 이유보다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12절에 있는, 여호와께서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기에 자기 민족을 버리는데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신약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믿고 고백했던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약자, 천대 받았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모셨다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창 12:1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왕국이 세워질 땅으로 정하신 곳으로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스라엘의 왕국은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왕국은 지금 교회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왕국이 완전히 완성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왕국이나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나 다 같은 것이다.
구속사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창조(C)-타락(F)-노아(N)-아브라함(A)-출애굽(Ex)-신명기(D, 할례, 제사)-포로(Exile)-그리스도-재림. 이 전체는 하나의 연관된 흐름이다. 일관성과 동질성이다. 발전=변화. 구속사의 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각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각 사건에 적용된 것을 다른 곳에 적용시키지 못한다. 변해버린 구속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애굽 후 그리스도 이전까지의 사람들은 할례, 제사를 드려야 하나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들은 할례나 제사를 드리면 안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역사적 시점의 어떤 시점에서 살고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례, 제사를 드림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상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두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요구들).
3장 싯딤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나온다. 언약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하고 언약궤가 앞서가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앞에 언약궤가 앞서 건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인도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뜻한다.
ןורא(아론) = 법궤(언약궤) →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이 법궤의 의미를 대표하는 것인가? תרפכ  רפכ(카파르, 케파라트) - cover λαοτηριον  רפכ(카파르) - 속죄, 속죄소 위의 두 그룹이 법궤의 뚜껑인지 그룹의 발판(podium)인지 잘 모르겠다.
 אפכ־לע  בשׁוי היבורכה בשׁי רע בשׁי(야샤브 알 야샤브 하케로베 요샤브 알-카파)
 sit onthroned)
요단강 건널 준비를 명하시면서 성결케 할 것을 명하신다.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법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행하라 하셨다. 5절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 자신을 성결케하라 그 이유는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임이니라. 요단강 도강이 어떤 도강인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적적인 도강이 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적적인 도강을 하시는가? 이 목적을 뭐라 말하는가? 7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늘날 내가 너를 온 이스라엘 앞에 높이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것을 보이리라.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세우신 지도자임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구름기둥, 불기둥, 연기 등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가시적 형태의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적, 신현,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심을 이렇게 도식적인 방법으로 표시한다면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Archer는 Pre-Adamic human raichypothesis(아담 이전의 인류 가정설)를 주장하여, ‘창세기는 하나의 우주다’라는 경향으로 아주 위험하게 흘러간다(근래 미국 보수신학의 흐름이). Carborn test는 5천 년 이상은 별가치가 없다. Carborn의 반감기 기준에 의해서(가정으로 된 것으로) 확정할 수 없다.
이적적인 도강으로 하시는 목적이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며 10절에 보면, 이것으로 너희가 알리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을 알리라. 그리고 너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7족속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실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이런 면을 무시하고 성경에서 여러 기사가 주어지면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한 가지 의도만 보고 편집자들의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의도로만 기록되었다고 본다.
요단강 도강의 목적 : ①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세우심에 대한 증거, ②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 ③가나안 7족속을 몰아내심의 의미.
우리 자신도 행동을 할 때 한 가지 행동만을 위해 하지 않고 그 의도와 목적은 여러가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요단강 건너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과거 사건과 비교하면 홍해와 유사성을 갖는다. 홍해사건을 통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높이 보였고, 요단강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며 가나안 7족속이 너희 앞에서 쫓겨나리라 했는데, 홍해사건도 홍해사건을 통해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실케 하는 신앙으로 나타났다.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안의 여러 왕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두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단순한 약속 이상의 것이요, 하나의 전쟁이었다. 홍해 =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물 속에 수장됨, 요단 = 적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됨. 이것으로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인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놓은 것이다. 요단강을 건넘은 가나안 백성과의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4장에 보면, 홍해 경험을 통해 노예로서의 이스라엘은 죽고, 건넌 후에는 자유로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존재로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의미가 요단강의 도강에서도 조금 다른 의미로 적용된다. 요단강을 건넌 후 약속의 땅이, 순례자의 생(pilgrim)이 안식의 삶이 된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넘으로 광야에서 약속의 땅이 되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4:1절에 요단강 건너편에 열 두 돌을 취하여 세운다. 돌을 취하는 것은 12지파가 광야생활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광야생활의 12지파가 죽고 안식의 땅에서 새로운 안식이 시작된 것을 상징한다. 광야생활의 종식과 약속의 땅의 생활이 시작된다. 돌을 세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이스라엘의 신앙전승은 아비가 아들에게 이야기 한다.
②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 기념비 등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히 모세나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건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은 사실이다(모세오경 저작, 여호수아 기록설).
14절에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생전에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두려워하였다. 요단강 도하 날짜 = 정월 10일, 유월절 양을 선택하는 날 = 14일에 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친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킨다(1월 14일).
유월절의 의미를 크게 생각한다면 출애굽의 경우는 먼저 유월절이 있은 다음에 홍해가 있고, 광야여행이 있다가, 요단강에서는 요단강 도하가 먼저 있고 유월절이 있다. 홍해에서부터 요단강의 기간은 transition period이고, 홍해 이전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옛시대(애굽의 노예 상태)이고, 요단 이후의 시대는 새 이스라엘의 시대로 구분짓는다(약속의 땅에서 축복의 상태의 삶).
유월절 󰠏󰠏󰠏󰠏󰠏󰠏󰠏 홍해 󰠏󰠏󰠏󰠏󰠏󰠏󰠏󰠏󰠏󰠏󰠏󰠏󰠏󰠏󰠏󰠏󰠏󰠏󰠏󰠏󰠏󰠏󰠏󰠏󰠏󰠏󰠏󰠏󰠏󰠏󰠏󰠏󰠏󰠏󰠏 요단 󰠏󰠏󰠏󰠏󰠏󰠏󰠏󰠏 유월절
길갈은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을 하면서 본진(main camp)으로 삼은 곳이다. 고별사를 행할 때는 세겜에서 행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이 도강한 사실을 당대에 이스라엘이 느끼도록 하지 않으시고 대대로 온 이스라엘에 선포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행하신 큰 기원의 행동을 대대로 알기를 원하셨는데 그 방편으로 돌들을 세우셨다(4:19-24).
요단강 도하 사실과 홍해를 건넌 사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비교할 점은 홍해사건과 요단강을 이적적으로 건너게 한 사실이 24절에 나온다. ①땅의 온 민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온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으로)하시기 위함이다. ②온 민족들로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자연계 변화(Naturwan Dlung)
약속의 땅에서 자연적인(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현상은 하나님의 원하실 때마다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이는 하나님의 자연계에 대한 통치권(주권)을 말한다. 홍해와 요단강을 일시적으로 말리우심은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리이다. 라합이 이런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신앙고백을 했다(롬 1:18). 모든 피조계를 통해 변명할 수 없도록 자신을 알리신다.
자연계시 :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고(보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추론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본래 인간의 지음이 그렇게 지어졌다. 자연계시가 인간세상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느냐 하면 우상숭배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①인간의 이성이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고(εν διαλορισμοις; 엔 디알로리스모이스), ②이성이 제 기능을 상실한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내가 내 가치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뿌리 깊은 반역심이 더 큰 원인이다.
계시는 점점 발전해서 더 밝게 풍부하게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내용은 그 당시의 수준에다가만 맞추어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 천하 만민들이 그 사실을 보고,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생토록 여호와를 경외케 하려 하심이다.
5장 초두에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하신 이적(천하만민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리는 이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열왕들의 마음이 녹아버렸다(םבבל; 레바밤 . 하나님의 행동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①라합과 같이 믿음을 유발시킨다. 순종의 믿음에는 항상 순종의 전제가 있다. ②두려움(המיא; 임마 이 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믿음(의지,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롬 1장에서 바울이 복음전도를 자기의 사도 직분 받은 목적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롬 1:5 εις υπακοην πιστιως(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티오스)라고 한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bilievism, 마귀도 하나님 계신줄 안다. 그렇구나 하는 믿음은 마귀도 갖고 있다. 요단강 도강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패배시킨 하나님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5:9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5장을 보면 요단강을 건넜고 가나안 땅들 아모리 왕들의 마음이 녹았다.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한다. 그 이유는 출애굽 제 1세대는 할례를 행하였지만 광야 여정에서 낳은 자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례의 본 뜻은 창 15장에 나타나는데 언약 즉, 하나님 편에서의 Commitment(헌신, 은혜)이다. 창 17장에서는 할례를 가리켜 언약의 징표라 하였다. 갈라놓은 짐승 사이로 하나님이 불로 지나가심으로 확실케 해준다. 내가 만약 어길진대는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창 17장에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면서 할례를 지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징표이다(아브라함의 Commitment). Corporate personality individualim individuality.
개인신앙을 강조하면서(에스겔서의 이야기를 들어서) 개인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십계명에 아비의 잘못을 삼 사대까지 저주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아담이 행한 범죄가 모두에게 미치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한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왜 그런가? 인간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각각을 취급하면서 집단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를 히브리서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에 성경은 그 후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흥망은 그들의 왕과 일치한다. 왕과 이스라엘 백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류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성경은 인류 속에서의 한 개인, 인류를 어떤 조직으로 보느냐 하면 유기체로 본다. 유기체란 각자 개별성이 있으면서 상호간에 뗄 수 없는 연결이 되어 전체가 하나됨을 말한다. 유기체적인 인간관계가 항상 필요하다. 할례가 이처럼 은혜받은 자(언약)의 징표이다.
길갈에서 할례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인가? 그것을 생각해봄이 중요하다. 불순종의 광야세대의 이스라엘이 다 멸망한 후 새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순종과 언약을 맺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새세대에게 명하신 삶은 성결의 삶을 명하신 것이다. 이방 땅의 노예상태로부터 광야생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새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신 후에 새세대에게 명하신 것이 할례를 통한 순종과 헌신의 맹세였다. 가나안 입성과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과 약속의 신실성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이다. 11절에 만나의 종결사건이 있는데 이는 가나안 정복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13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출현한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적이냐?하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제 도착했음을 알리고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암시한다. 이 말을 하는 자가 신적 존재임을 암시해 준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맡기신 것과 연관이 되어진다. 특별히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출현과 관련시켜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의미는 여호수아의 질문에서 나오는데 적이냐 위하는 자냐고 물어보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말과 함께 만나 종결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전쟁이 도래함을 말한다. 이것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명하시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6장에 여리고성이 닫히고 이스라엘은 군대진영으로 전형적인 공격진영을 취한다. 고대로 갈수록(야만 사회로 갈수록) 왕 자신이 진두에 선다. 특히 동로마제국(불가리아)은 황제가 선두에 서서 싸웠다. 중국에서는 왕 자신이 나서기 보다 중앙에서 지휘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두고 공격진영을 취했다. 여기의 전쟁방법이 특이하다. 6일 동안 성을 돌고 7일에 성이 무너진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쟁법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טרח; 하라트 → ban).
이것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이요, 몰살시키라는 명령인데, 라합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하나님과 함께 거함을 특별히 보여준다. 다른데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데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연관되는 때문으로 본다.
7장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참패가 나온다. 제비뽑아 아간이 걸려 돌로 쳐 죽임이 되어 후세의 모든 이에게 경고가 되었다. 매우 시사적인 상반되는 두 사건이 나타난다. 라합과 아간이다. 라합이 본래 멸망받기로 약속된 이방민족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아간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스스로 하나님 백성됨을 포기했던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되기를(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했던 자로서 가나안이 당할 벌을 아간이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19절 이하에 보면 제비를 뽑아 아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라 한다.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드리는 구체적인 것은 자복이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찬송하라는 히브리어는 הדות(토다) ← הרי(야라) → הרותה(하토다; confess)이다. 어떻게 죄의 고백이 하나님께 찬송이 되어지는가?
아간의 죄가 마땅히 진멸해야 할 여리고성의 모든 것 중에 그는 금과 옷을 숨겼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대신 멸망(진멸)을 당한다. 여리고와 아이성 공략과 관련해서 라합과 아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라합의 경우는 이방여인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능력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이방여인 한 사람의 신앙고백이 끼친 영향은 심히 컸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군이 갔다와서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승리케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라합에 의한 것이다. 라합은 어떤 의미에서 여리고성을 믿음으로 정복케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아간은 저주의 대상인 물질을 탐해 숨김으로(라합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숨겨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자기 백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음을 초래하여 이로인해 이스라엘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 믿음 대신 패배의식과 두려움을 갖게 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아간으로 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로는 험난해져 적국이 이스라엘에 대항할 마음을 주어 가나안 왕들이 뭉쳐 대적하는 동기를 주었다.
이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축복 및 저주를 선포한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왕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왕의 칙령, 법을 선포함으로 시작된다. 축복과 저주의 선언은 하나님의 통치선언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율법선언을 이야기하면서 세겜정복이 안나온다. 이로인해 생기는 영미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trihalleague는 야웨종교를 중심으로 동맹체를 형성하였다고 독일 계통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예) 델피동맹:희랍의 여러 반국가들이 동맹체 형성한 것(amphyctyony).
9장-12장까지는 가나안 지역을 본격적으로 정복한 내용을 적고 있다. 대규모 정복전쟁을 언급하기 전에 유의할 점은 9:1절에 온 가나안 주민들이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꾀했다(결심). 그러나 단 한 곳, 기브온 주민들은 이를 거절한다. 멀리서 온 것처럼 꾸며서 화평을 꾀한다. 이스라엘은 속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 기브온은 이때 맺은 언약의 신실성으로 인해 사무엘하에 나타난다. 사울이 기브온 백성을 죽이자 이로 인해 책망과 기근이 오고 사울 집안의 일곱 자손이 죽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시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문맥에서 기브온 사건의 의미는 이로 인해 기브온 백성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브온을 먼저 치려하자, 길갈로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고 아얄론 골짜기 싸움이 시작된다. “태양아 머무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 기브온 사건을 통해 여호수아가 남방연합세력을 완전히 쳐부수는 계기가 된다.
세겜과의 충돌사건이 왜 없었을까? 세겜은 그 민족이 히위민족이고 기브온이 히위민족이다. 왜 기브온민족이 이스라엘과 화친했을까?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정복은 중요 거점만의 정복이지 완전한 정복은 아니다. 이 정복전쟁도 하나님의 전쟁이다.
11장에 북방지역 전쟁이 나온다. 메롬 물가에서 싸워 이긴다. 이 정복전쟁은 장기간에 걸쳐 수행이 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무서운 적으로 그들을 제거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의 종결을 말한다. 12장에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의 상태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 13장에 땅분배를 명하신다.
아직 정복해야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신다(중요 거점만 정복한 것이기에). 완전한 정복이 아니므로 그렇다. 남은 땅(블레셋) 정복은 다윗 때에 이루어진다. 다윗은 여호수아가 이루지 못한 정복을 종결한 인물이다. 각 지파에게 할당된 지도를 그려오게 한다. 이는 도면상의 분배이다.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사사기의 배경이 된다. 여호수아로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사명을 다했다. 14:10절에 갈렙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45년으로 말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전쟁기간을 포함한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야 한다. 21:43절에 보면 약속의 땅에서의 각 지파의 기업이 분배되고 각자가 분배받은 땅에서 정착하는 생활은 안식의 생활이라고 한다(44절).
22장 두 지파는 회향하다가 요단강가에서 단을 쌓고(이는 이스라엘의 동질성을 표시하기 위한 제단을 쌓은 것) 하나님이 예비한 처소는 한 곳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한 시기에는 오직 여호와를 예배하는 곳이 한 곳밖에 없다. 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엄하게 지켰으며 하나님의 성소를 한 곳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를 볼 수 있다.
23장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나온다. 신명기의 모세의 고별사와 그 골격이 유사하다. 과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미래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하나님의 성전과 직결된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한다. 23:14절에서 임종을 앞둔 심각한 경고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이다. 24장에서도 고별사가 계속된다. 제 2의 시내산 언약(Covenant Renewal)으로서 시내산 언약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 유업의 땅에 묻히는 것은 의미가 굉장히 깊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제사장)의 죽음은 땅 정복세대가 종말을 고하는 것을 암시한다. 세겜 땅의 장사 내용은 땅 정복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방 애굽에서 눈을 감은 요셉의 하나님 언약을 굳게 믿은 믿음을 신실하고 확실하게 보는 장면이다.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가 한 세대를 구분짓는다. 땅 정복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로운 약속의 완성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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