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서 강의3(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선지서 강의3(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01년 4월 24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대적으로 취급해서 보응하시되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회개하는 자와 죄악을 끝까지 고집하는 두 부류에 대해서 달리 취급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돌아오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여 의로운 모습, 성결한 모습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에 참예함으로 말미암는다. 돌이키지 않는 자는 수치를당하고 망하고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을 말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의 큰 틀, 원칙을 확인한 이사야는 이런 하나님의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것인지 역사의 종국에 대해서 말씀한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산이 모든 산 위에 설 것이라고 했다. 어떤 종류의 권세와 힘이든지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위에 높이 시온이 하나님의 교회가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교회의 권세에 대한 표현은 신약에 역시 "내가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했다. 이런 시온의 하나님 교회의 영광과 권세를 바라고 열국들이 시온을 향하여 나아올 것인데 그들을 유인하는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기를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그의 길로 행하게 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런 기대와 소망이 땅의 모든 민족이 교회로 나오게 할 것이라고 한다.시온에서 율법이 나올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이 율법으 말씀으로 열국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셔서 그들로 칼을 쳐 보습을 만들고, 창을 가지고 농기구를 만들게 하여 다시는 전쟁이 없으리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 가르치는 길이 어떤 길인가? 그가 우리를 가르쳐 행하게 하시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요 다스림이요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다스림은 타락이후 특히 노아 홍수 이후 나라와 나라가 갈라져서 피를 흘리는 전쟁의 역사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외부적인 전쟁종식이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부터 미움과 증오와 갈등을 그치게 하시고 마음을 변하게 하사 한을 품고사는 사람들과 서로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마음에서부터 칼을 놓게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참된 평화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사이에 참된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온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이것이 바로 시온이 모든 사람위에 높아질 것이라는 시온의 영광의 내용이다. 교회는 이러한 영광을, 권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성령께서 영안을 열어보게 하시면 시온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절실한 마음으로 호소하기를 은혜와 영광을 약속받은 자가 우리 이스라엘이 아니냐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외친다. 이런 선지자의 절규가 외쳐지고 한편으로 사술이 횡행하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인간의 자기 우상화가 만연하였다. 이것이 6절 이하에 말씀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비천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잊지 않고 이것이 초래하게 될, 이어가게 될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말한다. 회개치 않고 죄악을 고집하는 자 하나님을 저버린 자에게 도래할 것을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꺼지지 않는 불가운데 소멸하게될 두렵고 비참한 미래는 바로 오늘 현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하게 한 죄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원인과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우선 죄악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맨 처음 언급된 것이
대개 평행법은 두 개(bicola line)로 나누어지는데 경우에 따라 세 개(tricola line)로 나누어질 때도 있다.
케뎀의 뜻 ① 동쪽 ② 앞 ③ 상고, 옛날
이스라엘에게 동쪽(케뎀)이 전면이다. 서쪽(얌마)은 뒤가 된다. 케뎀은 '옛날, 상고'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오느님'(신접한 자들)
병행부사이에 같은 말이 사용될 때 같이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서만 사용한다. (double duty) 블레셋 (서부해안지역)과 동방의 풍속을 받아들였다.
케뎀의 3가지 뜻가운데 무엇을 써야 하는가?
저자가 두가지 뜻을 다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노덴'은 '다시'라는 뜻도 될 수 있고 '위로부터'라는 뜻도 된다. 이 두가지를 다 요한이 염두에 두고 썼다고 생각된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것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두가지 뜻을 다 취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악한 영들의 힘을 빌어 사술을 행하는 이방풍속이 가득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동서남북에서 배워온 것이고 오래전부터 배워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단어하나(미케뎀)에서 담아 말하고 있다.
"영적사슬이 옛부터 가득하였으며 블레셋처럼 가득하엿다. 시간적으로 옛부터 악한 영들과 관계하는 사술이 존재해왔으며 정도에서는 이방인 블레셋만큼 성하였다" 고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과 통혼으로 인한 혼혈아들이, 이것을 외인들의 자손이라고 할 때 국제결혼이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질적인 존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특한 영적 신분을 상실했다. 참된 본질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부류들을 양산했다. 더 이상 세상과 이방과 구별되는 것을 상실하고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변질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증거한다. 그 땅은 금은으로 가득하며 보화가 무한하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추구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이 추구하고 의지해온 것은 이방이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않다. 그것은 부,경제력이다. 말과 병거의 힘, 군사적인 힘, 물리적인 힘이엇음을 암시한다. 세상영광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교회의 진정한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세상 권세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온의 긍정적인 미래와 대조된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그 길로 행하게 하심으로 열국을 다스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정한 화평을 이루는것인데, 이것이 시온의 힘이요 권세요 영광인데 돈과 힘이 가득했다. 하나님 교회로 갖추어야 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부, 경제, 군사력을 선망하였고 그런 것으로 자신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게 된 이유를 지적하는데 '가득하다'를 사용한다. 이것이 이방으로부터 배운 영적 사술, 귀신의 힘을 빌어하는 영적 사술이 가득하였고, 이것이 육적 통혼으로 발전하여 육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생아가 가득하였다. 그리고 돈과 힘이 가득하였다.
교회에서 낼 때 가난한 사람도 낼 수 있을 만큼 내도록 한다. 그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한다. 유력한 사람은 오래동안 아무 일도 안시킨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더 오래동안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내에 가득했던 것을 가리켜 우상 신들이라고 했다. 8절에 보면 우상 신의 성격, 본질을 한마디로 그 손이 만든 것에 경배하며 그 손가락이 만든 것에 절한다고 했다. 여기에 손, 손가락이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의지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이것은 실상 자기 손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요 그들의 재주와 재능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긴다.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존재로 높였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신을 만드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면 그렇게 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자기가 만들어놓고 경배한다. 이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근원을 캐보면 인간의 자기 우상화이다. 이러한 단추를 푸는 것이 무엇인가? 우상종교에서는 사람이 신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제사의식, 주술의 형식, 주문은 인간이 신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축복을 어떤 경로, 방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없으면 종교로서의 매력이 없다. 복음의 가장 기본 원칙, 흔히 불교(타종교)의 차이점이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력구원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자신이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이처럼 한편으로는 자기 우상화인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한 존재로 지으신 인간으로 저급한 우상에게 절하여 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위엄을 손상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하나님이 신적형상으로 고귀하게 빚어신 존재를 비하시킨 행위였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인간이 낮아졌다고 한다. 저들을 사하지 마옵소서라고 선지자는 외침으로 이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간접적으로 말한다. 롬 1장에 보면 사람의 죄에 대해 증거할 때 제일먼저 언급하는 것이 인간의 악의와 지적 부패로 인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을 제일먼저 언급한다. 이러한 자들에게 임할 형벌의 무서움을 외치되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을 드러내실 때 그들을 엄습할 두려움을 경고한다. 하나님이 홀로 높아지시는날 참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사 만유중에 홀로 높으신 분임을 나타낼 때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낮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뛰어난 것과 낮은 것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고 탁월한 것들, 바산의 높은 상수리나무와 같이 강렬한 것들, 망대와 요세화된 성벽들, 다시스의 힘들위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같다. 아모스에 보면 여호와의 날은 빛의 날이 아니요 어둠의 날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낯선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과 반대의 것임을 암시한다.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에 나온 것을 추측한다면 하나님이 역사에 결정적인 개입이 있는 날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해온 것 같다. 선지서에서는 이 여호와의 날이 심판과 멸망의 날일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시는 날이다. 나중에 보면 "일어나서 땅을 놀라게 하시는 날"이라고 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위엄과 권능을 지으신 만물을 통해 증거하시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한다. 결정적인 날이 이르면 무지한 자도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영광의 위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 대상은 높고 낮음이 다 포함된다. 모든 것위에 보편적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주로 높은 것들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높은 것들, 자랑하는 것이 낮아지는 날이다. 인간이 의지하는 최고의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고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땅을 뒤흔드실 때 사람은 바위 굴에 들어가며 흙속에 굴을 파고 숨을 것이다. 금은의 실상이 드러나는 날 헛됨을 깨닫고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피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22절. 이스라엘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시는 날,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임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호흡이 코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그치라."고 한다.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악한 영들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거짓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기도 하지만 그 근거에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정서가 깔려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최후의 결론이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명의 코 끝에 있어서 숨이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의 무가치함과 무력함을 말한다.
2장에서는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것 앞으로 이스라엘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신 뒤에 궁극적으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말했다. 긍정적인 미래는 시온이 영화로와 질 것을 말했고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그 영광을 제하실 때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헛된 실상을 알게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3장에보면 이런 말로 시작한다.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의지하는 것을 제하리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이야기 하기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밀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선지자의 시선은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에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궁극적 심판의 전조, 암시이다. 이미 밝히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에게 어떠헥 실현될 것인가를 말한다. 그 첫째로 말씀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의지를 끊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의지해온 원천, 힘을 끊어버리시겠다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정당한 것을 변질시켜 악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 가르침 통치대신에 세상 영광과 충만한 것을 제거하시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변질된 이스라엘을 암시한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전혀 무력한 것임을 드러내시겠다는 말이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여 온 것을 "마센과 마세나(여성명사)"로 쓴다. 하나만 써도 될 것인데 여성명사까지 포함해서 사용한다. 이것은 대상의 다양함과 동시에 전체를 포괄하는 두 가지를 의도한다. 유다가 의지하는 것들가운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유다가 의지하는 다양한 것들을 제거해버리겠다고 한다.
"모든 양식의 의지, 모든 물의 의지"라는 표현이 무엇인가? 왜 '의지'라는 말을 붙이는가?
TDNT (단어의 여러 가지 어원적인 용례를 살핌) → James. Bar 그것에 반대하여 문맥을 중시하는 사람 (비켄슈타인에 영향을 받은 사람)
과거에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설교를 만들었다.
사전에서 제시하는 말의 뜻 몇가지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미묘한 뜻을 잘 파악할 수 있으면 설교를 하는데 큰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설교라는 것은 단순하게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구속사적으로 한번 간파하고 끝나는게 아니다. 대개는 일주일간 지쳐서 졸다가 간다. 그래서 그들에게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고 마음에 박히도록 해야 한다. 이럴 때 성경의 미묘한 표현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이 큰도움이 된다.
물과 양식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 의지물을 지칭하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2절부터 언급된 것을 보면 용사와 군사를 제거하시겠다고 했다. 재판관들 선지자들, 점술사, 장로들을 제거하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용사와 군사를 가지는 것이 잘못인가? 군사와 용사도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요 세우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베푸신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없이 그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잘못이다. 교회는 결코 맘몬신을 섬겨서는 안된다해서 헌금도 거두지말자 해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돈이 그 자체를 지탱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백지장 한 장 차이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생각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과 돈의 힘자체에 끌려 의지하는 것은 백지장 한 장의 차이다.
재판관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처결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다. 이런 직분자들을 세우심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정당한 제도와 질서다.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사람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어서 말씀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재판관은 출 18장에 보면 유사들을 세울 때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맡은 일을 진실되게 감당할 자질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본 율례를 가르쳐 그대로 재판하게 하는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앞으로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것을 보시면서 왕에게 요구한 것이 율법책을 가까이 두어서 주야로 읽으라고 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건을 위함이 아니요 말씀으로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한가지 걸리는 것은 '코셈(점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왜 선지자를 세우셨는가? 신 18장에서 먼저 모세에게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리라는 말앞에 이방의 영적사술에 빠지지 말고 본받지 말라고 한다. 이방은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것을 당할 때 귀신을 찾아간다. 여기에서 지혜, 안내를 구한다. 이런 것을 쫓지말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대신 주시겠다고 한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다스리겠다고 했다.
여기에 보면 '나비'와 '코셈'이 나란히 있다. 이것은 겉으로보면 당시의 통치조직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재판관, 선지자, 군사도 다 잇다. 이들과 함께 이방의 점쟁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안에 함께 역사하고 있었거나 겉으로는 정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내부적으로는 변질된 것임을 말한다. 교회 안에도 악한 영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5월 8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절망적이라 선언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가실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곧 심판의 역사가 시작되겠지만 이것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이 그들을 정화하는 은혜의 역사로 마감될 부류의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우상을 고집하고 불순종하다가 영영히 망하게 되는 두 부류가 있게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역사가 어떻게 마감될 것인가를 말한다. 시온이 영화롭게 될 때 열국이 모여들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스라엘만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의 역사로 확대될 것을 말한다. 긍정적인 미래의 역사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시온이 높아진 것, 그의 백성, 교회가 영화로울 때 나오는 하나님의 통치. 인간의 미움과 증오를 종식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열국이 사모하여 나아와 그 평화에 동참하게 된다. 온 민족에게 이스라엘로 시작된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여 동참할 것을 말한다. 반대로 세상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이들이 궁극적으로 종국에는 그 거짓과 허무함이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역시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계, 민족에게 꼭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시작된 두 줄기의 상반된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마감될 것인가를 말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죄악에 눈을 돌리신다. 첫시작과 마지막 종국이 어떨 것인가를 말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창기와 살인자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지도층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세상과 같이되어 악령의 가르침받아 돈과 군사를 의지하고 사는 이스라엘,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계획에 따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말씀한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것을 다 허물어 버리시겠다고 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힘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의 생존을 지탱하는 것을 허물어 제거하시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사와 군인, 재판관, 선지자, 장로, 신접자라고 한다. 이스라엘에게는 군대가 필요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사단(in division, army)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완전히 군대조직이다. 민수기에 계수한 것이 나오는데 완전히 군대로 조직하는 것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첫시작부터 군대다. 그런데 왜 앞에서는 말과 병거를 많이 둔 것을 그들의 죄악으로 지적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은 군대인데 일반적인 세상군대와 다르다. 하나님의 군대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 있다. 이스라엘 전쟁의 성격은 군사가 많다고 이기고 적다고 지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아닌간에 달려있다.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속군대가 의지하는 최첨단 무기를 의지하는 마음의 자세를 문제삼은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군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오늘도 교회의 성격가운데 하나가 전투하는 교회다. 대상과 모습은 다르지만 교회도 신령한 전쟁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다.
용사와 군인은 하나님 군대로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쇼팻은 여러 가지로 쓰이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사사들이다. 사사의 역할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사사들의 시대를 거쳐서 이것이 왕국으로 이어진다. 왕의 역할과도 다르지 않다. 통치자와 비슷하다. 동시에 출애굽기를 보면 쇼팻의 직무를 율법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재판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직무일 것이다.
교회에서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느냐는 것이다. 쇼팻이 하는 일도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중요한 것이다.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받아 전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생각할 때 사람의 지혜와 뜻을 따라 살지않게 되어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율법을 따라 살게되어 있다. 그리고 이방들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악한 신들을 찾아가 구하는 반면에 이것을 대신할 사람으로 세운 것이 선지자다. 신 17장에 보면 선지자직이 어떻게 세워진 것을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지만 앞에 이방인들 가운데 신접한 자들을 통해 미래를 알려고 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고 한다. 이에 따라서 선지자를 세운 것은 이런 잘못된 것을 따르지 말고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에는 이 직분이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아직까지도 교회 예배에서 중심이 설교가 되고 있다.
'자켄' (장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연단을 받아 백성의 지도자가 될만하다하는 자들이다. 역시 장로들의 역할은 굉장히 크다. 장로들 가운데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너무 이스라엘 백성으로 고통받을 때 70인 장로를 세운다. 그들로 모세의 통치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도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용사나 군사나 재판관이나 선지자나 장로들은 형식적으로 교회에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호세트'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영매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신을 접해서 아는 것이다. 정당한 것 가운데 이런 것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당시 지도층의 실상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러한 정당한 직분자들 외에 악령의 힘을 빌어 엉뚱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일들이 섞여있었다. 본래는 정당한 직분들이 속내용이 저런 것에 의해서 변질되어 있음을 말한다. 왜 하나님이 자기가 세우신 직분인데 이것을 제거하시겠다고 하는가?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지도층의 실상이 무엇인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고발하는 말씀이다.
지혜자들이 선지직, 왕직과 같이 뚜렷하게 내세워진 적은 없으나 '하카밈'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중요한 일을 했는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가! 이것도 정당한 교회 직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라고 원문에는 되어있다) 세속적인 지혜나 한 차원 더 높여서 악령의 힘을 통해 초월적 지식에 접근하려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교회에 이런 직분을 주시고 교회를 감당하게 하실 때 직분이 전제하는 것은 참된 믿음과 경건 위에 서있는 것을 전제했다.
공교한 장인(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영매들이 사용하는 것이다)과 능란한 요술자가 나온다.
악령과 관련된 기술에 지혜로웠고 명철했다는 말은 어떤 말인가? 형식적으로는 교회의 정당한 직분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 믿음과 경건이라는 토대에서 떠나 악령에게로 옮아갔다는 말이다. 완전히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교회에서 직분을 말할 때 성경이 말하는 원칙, 아마 그것을 엄밀하게 적용시키면 다 내어놓고 나가야 될 것이다. 교회에 직분자를 세울 때 조금 부족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지혜와 힘주시기를 기도하자고 격려하면서 직분을 준다. 그래서 이 모양 이꼴이다. 그러니 이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목사요 장로요 집사인데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이 일이 참된 믿음과 경건에 터하여야 하는데 세상에서 하는 방법, 원칙 그대로다. 겉모습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기구인데 실제는 여전히 세상의 세속적인 통치를 시행하고 있다.
지도층의 타락, 변질이 얼마나 심각한가? 물론 전에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었기에 그의 영향이 이스라엘에 전체적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 지를 많이 말씀했다.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실 때 그 선두에 지도층이 서리라고 했다. 솔로몬이 타락했을 때 교회를 반으로 쪼갰다. 타락한 왕가에 교회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에게 맡겼다. 그러나 여로보암 자신이 더 타락했다. 지도층의 타락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이렇게 변질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층을 하나님이 제거하실 것인데 우선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젊은 아이들로 방백을 삼을 것이요 젖먹이들로 너희위에 군림하여 다스리게 하리라고 한다. '자켄'과 '나알'. 자켄은 오랜 경험을 통해 능숙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은이는 혈기가 있고 미숙하다. 권력을 휘두른다. 폭정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시류가 반권위적이다. 비단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다. 철학, 사상이나 모든 사회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가치와 질서를 부인한다. 젊은이들이 노인들 몰아내는 것은 옛날이 되었다. 장유유서의 질서가 무너졌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남녀평등 이름하에 남자가 위축이 된다. 남자가 설 자리가 없다. 물론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관행은 고쳐가야 한다. 신자에게 명하신 것은 특별히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자에게 순복하라고 했지만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에 배려하라고 했다. 영생을 유업으로 같이 받을 자이기에 존중하라고 했다. 남자나 여자나 서로 돌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깨어졌다. 더 재미있는 일은 불륜을 처벌하지 말자고 한다. 이렇게 직분이 있으면 자격이 있는 자가 앉아야지 혈기만 가지고 휘둘러대는 애들을 앉히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들이 사나와진다. 서로 대하는 것이 온순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것이 없다. 한 번 해볼래, 대드는 것이 된다. 젊은 애들이 노인들에게 마구 고함치고 대든다. 누가 봐도 모든 면에서 못한 사람인데,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짓밟는다. 모든 위계질서가 다 붕괴되는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한 형태이다. 겉모양만 갖추고 속은 변질될 때, 리더십이 타락하면 이런 식으로 변해지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면 모든 질서가 무너진다.
(질문) 이것이 미래의 일인가 아니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인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이라면 심판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심판이 죄악과 함께 진행되는, 또 그것과 함께 자연스럽게 오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롬 1장이다. 진행 자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함께 진행된다. 어느 때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마지막날에 총체적으로 심판하는 것도 있지만 죄 그 자체가 심판의 일부이기도 하다.
교회의 지도층이 부패하고 변질되어가면서 전혀 자격이 없는 직분에 적합치 않은 자가 나서서 교회의 일을 전횡하게 되고 그러면서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 멸시받고 순종해야할 권세가 거부당하고 내팽개쳐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교회 질서가 무너지면 한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되어달라. 붕괴된 비참한 현실이 네 손아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네게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되어달라. 왜 겉옷을 거론하면서 방백이 되어달라고 하는가? 당시 이스라엘의 경제적인 현실이 너무 형편없어서 겉옷만 입을 수 있으면 지도자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햇는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
겉옷과 관련하여 어느 나라나 관직에 있어서 품계를 겉옷으로 나타낸다. 겉옷은 직분의 상징이다. 이와함께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했다. 이것은 엘리야보다 더 상황이 험악하니 두배의 영감이 있어야 겠다는 말이 아니다. '두 몫'이라는 말이다. 장자의 몫이다. 승계, 상속, 후사의 문제다. 내가 선생님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 직분을 행할 수 있는 몫이 있어야 겠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다. 이것의 상징적인 것이 겉옷이다. 두배의 영감이 상징하는 것이 겉옷인데 겉옷으로 요단강을 치니 갈라졌다. 이것은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직분이 승계되었음을 말한다. 겉옷이 이런 기능을 한다고 감안한다면 네게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달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당신이 마땅히 방백의 자리에 앉아야할 차례,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방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바로 그 다음 표현이다.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는 말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맡아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이 당신 뿐이요"라는 말이다. 이런 제의를 받은 사람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나는 싸매지 않으리라. 교회의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겠노라"고 한다.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겉옷도 없다. 나는 그런 능력도 자격도 없다는 뜻이다. 나로 백성의 관장(방백)을 삼지 말라. 교회의 지도층이 어지러워지면 자격없는 자가 나서서 어지럽히고 저런 사람이 나서서 교회를 수습해주었으면 하면 도저히 못하겠다고 뒤로 물러난다. 아모스에서는 달리 말하기를 지혜로운자가 아무리 당시의 위기상황을 지적해도 오히려 달려들고 짓밟으니까 지혜자가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 침묵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유다는 넘어졌도다. 하나님의 교회가 붕괴되었다.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그들의 혀와 행위는 대적하되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다. 하나님을 거스려 훼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이 그와같은 것을 역력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는 소돔과 같은데 그들이 그것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죄를 부끄러워조차도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다닌다. 화로다. 그들은 재앙을 자초하였도다. 스스로 행위에 대한 보응으로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뜻이다.
죄악을 범하고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악된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러면 어떠냐는 식으로 막나가는 정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멸시다. 하나님의 법이 서 있다면 존중하기만 해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 것은 그것조차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처벌, 형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대를 향해 말씀하시길 너희는 고하라 의인은 반드시 형통하리라 반드시 그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된다. 악인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전도서에는 공의가 신속히 시행되지 않으므로 악인이 죄를 범하기에 담대하다고 했다. 죽을 때는 고통스럽게 죽어야하는데 평안히 죽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공의가 이루어지느냐고 하면서 담대하게 죄를 짓는다.
그렇게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고하라고 하신 말씀이 의인은 잘될 것이요 그 행위의 열매를 먹게될 것이요 악인은 반드시 망하리라고 했다.
내 백성이여 너희 길을 바로 인도할 자가 오히려 오도하고 있다. 너희 길을 혼란케하고 있다. 너희를 폭군처럼 다스리는 이가 젖먹이요 여자들이 군림하여 다스릴 것이라고 한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 다스림으로 초래되는 통치의 난맥이다. 여기에 덧붙이길 너희의 길을 바로 인도할 자가 오도하며 혼란케한다고 했다. 지도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행동과 다스림을 보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경고하시되 소자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죽으라고 했다. 지도자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그러기에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다. 지도자의 책임이 무서운 것이다. 나의 행위를 보고 교회의 성도들이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배웠는데 목사님을 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워진다. 참 큰일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그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좌정하셔서 그 백성들을 판단하시기 위해 서실 것이다. 백성의 장로와 방백들과 더불어 재판하시리라 말씀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가 포도원을 삼키며, 포도원은 5장에도 나오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네 집에는 탈취물이 가득하다. 어찌하여 네 백성을 깨뜨려 뭉게며 맷돌로 갈 듯이 가는가! 3장 첫부분에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것, 이스라엘의 힘에 관한 말씀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세운 지도층, 제도, 직분에 대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들을 제거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의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시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주신 권위, 힘,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오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지혜를 주신 것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것을 바로 전하고 그들을 잘 가르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오히려 백성의 길을 오도함으로 그들을 보고 백성이 혼란한 지경에 이르게 e되고 저들에게 힘을 주신 것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붙들고 세우라고 했는데 뇌물을 받고 폭력을 행하고 갈아 뭉게듯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제거하시라고 하신 것은 16절에 시온의 딸들이 교만(원래는 높다는 말이다)하여 라고 했다. 어떤 것을 가졌을 때 높다라고 생각하는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때이다. 높다는 것은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대개 등장하는 사람들이 남자다. 여기서는 여자들에게 빗대어 말한다. 여기서 자랑하는 것이 어떤 성격인가? 남자의 특징이 힘이라면 여자에게 상응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교회에 대한 비유다. 남녀의 경우를 들어서 교회의 힘이 어떻게 타락하고 부패하고 오용되고 있는가를 말한다.
우선 자랑하는 모습을 여인에게 빗대어 말하되 목을 쭉 뽑아 올린다고 말했다. 그 의도가 무엇인가? 또 눈을 굴린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아름답게 보이려는 애교의 몸짓인지 아니면 마음에 일어나는 관심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개 유혹하는 눈짓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 걸을 때도 아장거리며 걷는다. 아기죽거린다.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딸의 정수리에 부스럼이 나게 하실 것이다. 앞이마를 밀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 머리를 민다느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임을 잘안다. 머리를 민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갈 때 머리를 밀기도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것, 그 태도가 사랑스러운 몸짓일 것이라고 스스로 행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정말 참된 아름다운 것인가? 벧전 3:2-4 여인의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모든 것이 내면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서술된 것과 시온이 자랑하는 것을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다. 신령한 영적인 아름다움과 외면적인 아름다움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비교하는 것은 외면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그 안에 숨겨진 영적자세가 무엇인가? 남자에게 타락한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의 미적감각도 타락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보고 선하다(토브)고 하실 때 아름다움을 말한다. 보기에 탐스러웠다고 한다. 미적감각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보기에 탐스러웠다고 하신 것은 에덴동산에서 심은 나무의 열매와 관련해서 말한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생존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아름다운 미적 만족을 준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힘의 크기를 영향력의 크기로 따진다면 남자가 크겠는가 여자의 아름다움의 영향력이 큰 것인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여자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느끼는가 이것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온의 영적상태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예루살렘이 자랑하던 아름다움이 타락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앞에 내어놓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라는게 목을 빼고 아기죽거리며 걷고 눈은 음란하게 굴리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시할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 실제로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창부와 같이 돈을 얻고자 하는 구걸이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들의 향수로 하여금 퀴퀴한 냄새가 되게 하겠고 정교한 아름다운 벨트로 노끈이 되게 하겠고, 그의 아름다운 머리장식은 대머리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자랑하는 실상이 무엇인지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오늘 교회가 세상앞에 제시하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한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향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타락한 욕망을 일으키고 부추기며 세상을 더 사랑하게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만드는 것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교회현실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오늘에 짓밟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2001년 5월 22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지하는 모든 것들과 자랑하는 것들을 제거하겠다고 하셨다.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을 그들은 의지한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들, 모습은 하나님이 세우신 외형이지만 그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으면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오해일 수 있다. 실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들이 뿌린 향수대신에 썩은 냄새가 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띠 대신에 밧줄을 매고, 머리털을 밀어 대머리가 되게 할 것이라. 아름다운 옷 대신에 베옷을 입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모습은 포로로 잡혀갈 때 여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자랑하던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요 남자가 죽고 없으니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이 수치를 면하게 하라고 한다.
4장 2절부터 보면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힘들, 이것이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이요 영광이라 생각했던 것이 거짓되고 변질되었다고 하시면서 이것을 제거하시고 거짓 아름다움 대신에 수치스러운 실상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변질을 제거하실 것과 맞물려 4:2에 독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싹이 아름다움과 영광이 될 것이요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단어적인 뜻만 가지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사야에만 사용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사용되는 것이기에 그의 뜻은 찾기가 어렵지 않다. 렘 23: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세우신 목자를 그들이 직무, 기능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양을 잘 기르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양을 망하게하고 흩어버리는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때가되면 (5절이하) 다윗을 위하여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라고 하고 있다. 본래는 '싹'(째마흐)과 같은 단어이다. 한 왕이 지혜롭게 다스릴 것이며 공평과 의로 행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윗 계통에서 한 인물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이다. 그의 일이 지혜롭게 다스리고 공평과 의로 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하리라고 했다. 그 이름을 여호와 우리 의 (아도나이 찌드케누) 다. 여호와께서 우리 의가 되신다는 말은 굉장히 광범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백성에게 행하시는 의를 가리켜서 말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 의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킨다. 백성에게 친히 의가 되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렘 23장에 보면 싹이라는 인물이 매우 특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이 렘 33장 14절이하에 나온다. 다윗을 위하여 의의 싹이 나게 하리라. -- 그의 이름을 우리 의라 일컬을것이라고 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가랴 3:8 그들은 표적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순)을 이끌어 오리라고 했다.싹을 내 종이라고 했다. 6:12 순이라고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절에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제사장적 왕의 모습)
이것은 성경에 주로 메시야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것이 시 110편이다. 두 직분이 겸하여 언급될 때 대개 그 내용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사야서 4장에서 언급하는 싹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선지서들을 살펴볼 때 메시야라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전제하고 표현의 의미를 생각하면 "여호와의 싹"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싹틔우신 것이니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여호와의 싹은 7장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줄기가 나며 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다윗으로부터 났다고 하지않고 그의 부친인 이새의 뿌리에서 라고 말함으로 다윗과 동일한 근원에서 대등한 자격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으로 단순히 다윗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인다.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신 일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과 병행해서 "땅의 열매"라는 말이 사용된다. 흔히 말하는 병행구조를 염두에 두고 그 말의 뜻을 이해한다면 여호와의 싹이나 땅의 열매는 병행하여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싹은 그렇게 본다고 해도 땅의 열매는 메시야와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난감해진다. 어떤 분들은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싹턴 것이요 하나는 땅의 열매니 신성과 인성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과 땅의 열매라는 말을 통해서 참 메시야의 영광을 파악하기에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에 메시야가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 이루실 풍성한 열매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땅에 오셔서 이루실 일을 염두에 두고 왜 땅의 열매라고 하셨는가? 구체적으로 짐작해본다면 땅의 모든 역사의 궁극적인 결실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여기에서 한가지 확인한 것은 여호와의 싹이나 땅의 열매나 한 인물,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에 이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있어서 영광과 아름다움과 자랑이 되리라는 말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은 폭력화했고 그의 아름다움은 타락하고 부패한 수치가 되고 마는 때에 언젠가 하나님이 책임을 물어 모든 것을 제거하실 날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스라엘의 변질을 제거하시겠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메시아로 진정한 영광이 되게하시겠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힘이 메시야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세속화하여 세상과 다름없는 교회를 향해 모든 더러움과 악을 제하시리라고 하시고 오직 메시야가 너희의 진정한 힘과 영광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교회의 진정한 능력과 영광이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다.
(질문) 여호와의 싹과 땅의 열매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크게 차이는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요 그를 통해 이루어진 결실이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괜챦다. 그러나 결과나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봐도 되고 병행구조를 의식해서 메시야 인물 자체를 가리킨다고 봐도 문제가 없다. 메시야가 이루실 사역의 결과들이 땅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열매는 최종결실이라는 측면이다. 그래서 뜻이 조금 더 깊어지는 의미가 있다.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이 되는 그날에 시온에 남은 자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 불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출 19장에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불러내신 목적이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또 이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생명을 위하여 녹명된 자들이라고 했다. 흔히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생명얻는 자로 기록된 자들이라는 말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부르심의 목적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참 생명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거룩하다 일컬음을 입게 될 것인가? 메시야께서 저들에게 참된 영광과 아름다움이 되어주셔서 저들로 거룩한 백성이라 불리우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메시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이루어 주실 것인가? 이것을 4절에서 설명한다.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정결케하시는데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하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폭력을 상징한다. 힘이 잘못 사용되면 폭력이다. 물론 살인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극단적인 경우다. 피를 깨끗케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곡된 힘의 사용, 폭력화된 모든 권력들을 깨끗케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의 더러움은 무엇을 말하는가? 타락한 아름다움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타락한 부패한 아름다움이다. 이것을 더러움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이 왜곡, 변질시키고 본래의 것을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이 다시 씻어 회복하시리라고 한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라디하 라하츠"는 제의적 용어이다. 죄의 더러움을 정결케하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말하면서 제의적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 메시야께서 그 백성의 죄를 깨끗케하시는 일이 제의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 다음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으로 하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베루아흐'를 소문자 spirit을 써서 심판의 정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문자로 써서 Spirit으로 보면 심판과 소멸의 성령으로 하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적 성격을 말하시면서 성령을 말씀하신 것은 제의적 성격이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제의적 사역,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과 한묶음이 되어 역사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여기서 심판과 소멸의 성령의 사역은 어떤 사역인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보아도 심판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겠는가? 물론 한 개인을 두고 죄에 대해 심판하시고 소멸하고 깨끗케하시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전체를 두고 생각하면 소멸의 사역이 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것을 제하여 없애시는 것과 정결케하시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지 분리가 안된다. 한 개인을 두고보면 악을 멸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죄를 소멸하여 깨끗케하시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를 보면 죄를 소멸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정화하는 것이 같을 수 있다. 이스라엘 가운데 행악자를 멸하여 제거하는 것이 전체로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증거하면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는 의미도 성령으로 주는 세례와 불로 주는 세례로 나누어서 성령세례는 긍정적이고 불세례는 심판의 의미로 많이 이해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불에 던지리라고 한다. 이것을 불과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 4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시는 사역에 대해 서술하면서 제의의 용어를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사역의 제의적 성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과 밀착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백성의 죄의 더러움을 정결케하신 후에 시온이라는 모든 곳 위에 연기와 화염을 만드실 것이라고 한다. 마치 천계와 같게 하시겠다고 한다. 대개 낮에는 구름,밤에는 연기(화광)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은 출애굽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시온을 정결케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천계(덮어서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 더위나 소나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보호막,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죄악을 지적한 다음 이스라엘에 임할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되 긍정적인 것과 회개치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은 2장 마지막에서 이야기했다. 시온이 영화로울 것이요 시온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열국이 나아올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 4장이다. 이스라엘의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가 한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조금 후에 6장에 가면 거룩한 씨라고 하는것과 연결이 되고 7:14에 임마누엘과 연결이 되고 9장에 가면 한 아기와 연결이 되고 11장에 가면 이새의 줄기에서 날 싹과 연결이 된다. 이것이 53장에 가면 고난으 종과 연결이 된다. 이스라엘의 기대가 긍정적인 소망이 한 인물과 밀착이 된다. 이것은 이사야만의 특징이 아니고 다른 선지자도 다 마찬가지다. 단순히 앞으로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하지않고 한 인물의 출현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전체 구도를 생각하면 메시야의 소망이 포로시대나 후시대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이스라엘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비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왜곡되고 변질된 가운데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5장에 가서는 내용들을 종합하고 있다.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도원 비유를 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얘기한 것을 정리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다 . 그가 곡갱이질을 하고 돌을 골라내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울을 두르고 농부로서 모든 일을 다하였지만 당연히 그런 수고의 결과로 참 포도열매를 맺기 기대하였지만 실제는 쉰포도, 쓸모없는 포도를 맺었다고 한다.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아 나와 포도원 사이를 판단하라.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무엇을 더하여야 할 것이 있고, 내가 하지않은 것이 무엇인가? 아직 소홀히 한 더 무엇이 있겠는가? 농부로서는 포도원에게 모든 것을 다 행하였다. 어째서 내가 포도 맺기를 기대했는데 들포도를 맺었는가? 이제 저들에게 행할 일을 밝히되 울을 걷어내고 불사를 것이며,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라. 파괴할 것이요, 더 이상 손질하지 않으니 가시와 질려가 올라올 것이라. 황폐하도록 버려둘 것이라. 구름에 명하여 비를 내지못하게 할 것이라. 이러한 비유의 참뜻을 저들에게 가르치시되 이스라엘 집이 포도원이라고 한다. 유다 백성이 바로 심은 최상의 상품의 포도나무이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의(하나님 통치의 본질,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이거늘 실제로 그들이 맺은 것은 피흘림과 부르짖음(폭력으로 인한 억울함)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을 보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되 집에 집을 더하며, 밭에 밭을 더하여 남은 자리가 없게 하였으며, 넓은 땅에 홀로 거하리라고 한다. 홀로 독차지 하려는 탐욕스러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웃과 함께 나누기보다는 홀로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집을 많이 얻고 밭을 구한들 저들이 바라는대로 되지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소를 겨리로 광활한 토지에서 한 바트의 포도주를 얻게 하실 것이고 한 호멜의 씨를 뿌려 한 에바의 곡식을 얻게 할 것이라고한다. 대개 곡식은 몇배가 나오는가? 성경에 의하면 30, 60, 100배가 나와야 정상이다. 한 호멜이 열 에바다. 씨를 한 말 뿌렸는데 곡식은 한되를 얻었다는 말이다. 농사를 다 망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욕을 부려 이웃의 것을 차지하여 결국 아침일찍 일어나 독주를 찾으며 밤까지 독주로 몸을 불사르는 도다라고 했다. 수금과 퉁소와 소고 소리에 포도주를 마시는 쾌락에 탐닉한 모습을 지적한다. 자기 몸을 정욕으로 불사르는 일에 온 힘을 쏟으면서 정작 하나님의 일은 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간절히 찾고 살펴야 할 것은 하나 의 뜻이요 그가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어떤 일을 하시며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여기에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 방탕한 쾌락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에 온마음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이 무지한 채 이 땅에서 추방이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된 삶의 영역에서 축출되고 몰수히 죽임을 당하고 자랑, 소유모든 것이 무너지리라고 말씀한다. 이들의 죄악은 그저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착취하고 빼앗아 자기의 부패한 정욕의 만족을 위해 쓰면서 거기에 탐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가운데 행하신 일에는 무관심한 정도에 지나서 이들은 그의 행사를 서둘러 행해보시오 우리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도모가 이루어지게 해보라, 우리가 알아보리라. 말이 좀 어색하지만 쉽게 풀어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선지자 통해 알리신 말씀을 통해서 ,내가 너희 죄악에 대해 알아보리라 하는 말에 대해서 코방귀를 뀌며 한번 해보시오 라고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옥에라도 뛰어들 심사라고 한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자다. 이들은 악을 선이라하고 선을 악이라고 한다. 가치체계를 바꾸어놓았다.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한다. 단순히 악을 행한다는 것과 선악의 기준을 뒤바꾸어놓는 것은 많이 다르다. 자기 혼자 악을 행하면 그의 행위는 악한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워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 경계가 되나 선악과 진리를 뒤바꾸어놓으면 선이 악이요 악이 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선을 행하는 줄 착각하게 한다. 참으로 무서운 죄다. 그러므로 선생의 죄가 참 무섭다. 선생의 책임이 참 크다. 권력을 이용해서 뇌물을 받고 악한 자를 의롭다한다. 사람을 노엽게 만드는 것이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독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이스아렝의 거룩한 자의 말을 능욕함으로 뿌리부터 썩으리라.
25절 이하에 가면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아 버린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한 강력한 나라를 불러올리셔서 이스라엘을 짓밟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앞둔 이스라엘의 미래는 땅을 살펴보면 어려움과 환난이요 어떤 빛도 보이지 않고 캄캄할 것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과거의 죄악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미래가 궁극적으로는 빛이 없지않지만 남은 자에게서 긍정적인 것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암울하고 암담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2001년 5월 29일
시험문제 : 교회가 세상 앞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보여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 / 교회의 진정한 영광과 권세. (교회를 어떻게 생각해왔으며 어떤 모습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화, 깊이 생각해서 적도록)
교회의 정체성위기를 겪고 있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왕좌왕하며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탐색과 모색이 이루어진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기보다는 굉장히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온갖 것을 다 시도해본다. 그런 가운데서 꿩잡는게 매라고 호소력이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을 교회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장땡이다. 그것으로 목회의 평가기준을 삼으려는 경향이 농후한데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에서 확실하지 않으면 하루 하루에 급급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돌아가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사야서 처음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교회의 진단-창기가 되었다 등)
5장에서는 1장에서부터 이야기한 내용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대되는 바대로 신실하게 언약의 주로서 모든 일을 감당하셨으나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기대에 대해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참포도나무 열매맺기를 기대했으나 먹지못할 신포도를 맺었다고했다. 공의를 바랐으나 피흘림, 억울한 폭력이 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버렸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8절 이하에는 기대에 벗어난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한 처리방침을 말씀한다. 강력한 나라를 불러 짓밟을 것이라고 한다. 유린당할 것을 보고이스라엘의 미래를 전망할 때 땅을 보니 어둠과 환난 뿐이라. 유다의 암담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6장 말씀은 웃시야의 죽던 해라는 말로 시작한다.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신실히 좇았다가 나중에 교만해서 죄를 짓는다. 제사장이 아니면 분향할수 없는데 분향하다가 문둥병이 걸려 별궁에 거한다. 이때 요담이 섭정을 한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는 요담이 정식으로 왕이되어 치리하던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죽고 요담이 왕이 되던 때라고 하지 않고 왜 웃시야 왕의 죽던 해라고 했는가? 웃시야왕이 유다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 모든 면에서 유다가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냈던 때다. 굳이 웃시야의 죽던 해를 부각시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끝이 나고 이제는 암흑이 시작된다는 일종의 암시다. 5장에서 심판이 앗수르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하면서 비참한 것을 바라보니 암흑뿐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칼빈은 웃시야 왕이 죽었다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이 성전에서 충만하신 모습, 왕되신 위엄을 나타낸 것과 관련하여 ---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문맥과 비추어 맞지않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자기 나타내신 모습이 보좌에 들린 모습이었고 옷자락이 성전에 추만한 모습이었다. 만유 통치자로서 무한 충만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저버리고 죄악고집하는 자 심판하실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마지막 날에 여호와 홀로 높아지리라는 말씀을 연상케하는 말씀이다. 특히 하늘의 스랍들로 하여 얼굴, 발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게 한다. 이 선언으로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던 일, 범죄한 백성에게 거룩하심 나타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성전 전체가 뒤흔들리도록 죄를 자복하게 하시고 멸망의 두려움 이기게 하신 것은 5장에 기록된 내용과 연결이 된다. 거룩하심 앞에 스스로 멸망할 죄인을 인식하고 주저앉은 선지자에게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 뜻을 이루도록 하신 것은 앞으로 말씀하실 내용이 긍정적이요 희망적임을 예견하게 한다. 앗수슬 통해 겪게 될 심판이 언제까지며 이 후에 어떻게 역사하실까를 암시한다. 다른 선지자를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내용을 살펴보면 선지자의 죄를 특별히 지적한 내용이 없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거절한다. 하나님 편에서 거룩함 계시하고 선지자로 자기 죄악깨닫고 주저앉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왜 이사야의 경우에는 이렇게 죄인으로 발견하게 하시고 죄속함을 받게하고 사명을 주셨는가? 왜 하난미의 거룩하심을 부각시키셨는가? 이사야 6장의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라 메시지와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우선 6장 전체의 내용과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사항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깊음으로 마미암아 심판과 암울한 미래가 웃시야의 죽음을 언급하여서 하나님께서 형통케한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내가 주를 뵈오니 높은 보좌 위에 좌정하셔서, 보좌에 좌정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통치자로 앉아 계신다는 말이다.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간접적으로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높이 들리우셨다는 말이다, 그 옷자락이 성전에 충만하였다. 이사야가 이 환상을 그저 성전에 들어가, 이사야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왕족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선지자들이 과연 성전안까지 출입이 자유로웠겠는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원칙적으로는 안된다. 물론 제사장 전통에서 선지자직을 수행한 사람이 예레미야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과 관계없이 선지자라는 것만으로 성전출입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대답할 수 없다. 정확한 출신을 모르기에 제사장 가문임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신약에서도 시므온이 예수님을 받아 안고 기도하는 일이 있다. 시므온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마도 제사장 혈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행동을 보아 추측하는게 타당하다. 그런 문제뿐 아니라 이사야가 본 것은 반드시 성전에서 본 환상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곳이든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이다. 욥에게 보이신 것이나 미가야 선지에게 보이신 것이나 그 환상과 비슷하다. 아합 왕때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람을 치러올라 갈 것인가 할 때 거짓선지자들이 올라가라고 부추긴다. 여호사밧이 아합의 권유를 받고 함께 치러올라 갈 때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 부르니까 그가 미가야 선지다. 그가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보니 목자없는 양같이 다 흩어졌다. 전투의 결과를 말한다. 이때 네가 어디서 보았느냐 할 때 하나님앞에 영들이 모여서 의논하는데 한 영이 거짓하는 영을 보내서 거짓말하게 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계신 가운데 영들이 모셔 섰다는 표현을 한다. 또 비슷한 모습이 욥 1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앞에 사탄이 모여 욥의 시험을 말한다. 성경에서 몇 곳에 나오는 이러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하나의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욥의 경우는 여기서 욥의 시험이 결정된다. 미가야 선지의 경우에는 아합을 어떻게 꾀어 죽게하겠는가가 결정된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결정된다. 이것을 가리켜 예레미야 선지는 하나님의 회의라고 부른다. (너희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였더면…)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지상의 모든 역사는 하늘에서 영들과 함께 논의하는 회의에서 결정이 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결정이 시행되는데는 영들의 역사가 개입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참석하는 것이 무엇이냐? 미가야의 얘기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시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대개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통치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회의를 가리켜 우리말식으로 '어전회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예들에 비추어보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통치자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선지자를 불러 세우시고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 대개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해 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관자, 통치자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특별히 스랍들이 하나님 임재하신 곳에서. 이 환상이 반드시 성전에서 본 환상이라고는 볼 필요가 없다. 다른 선지자처럼 하늘에서 본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스랍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창화하여 가로되 6절.
천사들의 외치는 소리로 인해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다. 그 전안에 연기가 가득하였다. 결국 그들의 외치는 바 내용,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선지자의 반응에서도 확인이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였도다고 말한다. 선지자는 천사들이 외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거룩하심 앞에서 망하여야 할 자인 것처럼 완전히 침묵하게 한다. 완전히 존재가 꺼져버리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부정한 백성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술이 부정한 자여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가 드러남에 따라 죄로 인하여 마치 꺼져버리는 것같은 끝장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가 특별히 입술의 부정함을 언급했다는 것은 선지 사역과도 관련이 있다. 입술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뜻하는 것인데 인간의 내면적인 가장 일차적인 표현기관이라고 생각한다면 입술은 마음의 죄악의 모든 것을 포괄해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지자가 자기 자신만의 죄악만을 고백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백성들의 입장에서 놓고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혼자 개인적인 죄를 의식했다기 보다는 온 이스라엘의 죄악을 함께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죄인에게 어떠한 경험인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스랍중의 하나가 숯붓을 입술에 대니 이것이 내 입술에 닿으니 속하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선지자의 겸손은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망하여야 할 자로 의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단에 핀 숯으로 그 죄가 속함을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그러한 선지자에게 주어진 메시지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고,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신다.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이사야가 담대히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지의 내용은 매우 특이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무겁게 하고 눈을 가리우라 그리하여 그 눈으로 보고 귀로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개하려는 마음을 얻지못하게 하라. 굉장히 이상한 말씀이다.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계속 봐라.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인 회개촉구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셔서 눈을 가리워서 회개하여 나음을 얻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오히려 저들을 영적흑암에 내버려 두셔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신 일종의 영적 저주 선언이다. 여기서는 아예 회개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무서운 저주가 없을 것이다.차라리 혹독한 징계와 심판이 낫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심판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때 마지막에 이 심판이 저들을 멸하는 것이 되지않고 저들을 고쳐 온전케하는 은혜의 기회가 되게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 선하신 뜻안에서는 오히려 돌이키고 고치는 선한 기능을 할 수 있다. 마음 자체를 어둡게 하셔서 회개하여 나음을 얻지 못하게 하신 것은 완전히 저들에게 소망의 원천을 봉쇄하시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배역한 자요 타일러도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하신 가장 무서운 저주가 죄악속에 버려두시겠다는 것이다. 회개하여 돌아올 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의 무서움을 즉각 깨달았던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외치기를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는다. 이러한 저주가 이스라엘로 회개할 길조차 막으시는 저주가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영 계속된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저주가 영영 고착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대답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에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읍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을 때까지 집들과 땅이 황무하여서 사람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이 사람을 희소하게, 또 멀리 추방하사 이 땅에 버려두게 하실 것이요 그 가운데 10분의 1일 남을 지라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 하나님이 10분지 1로 줄이겠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심판의 가혹함을 드러 표현하셨다. 여기서는 그 10분의 1마져도 짓밟겠다고 한다. 마치 둥치가 밑에서부터 잘려나가서 그루터기만 남은 상수리 나무와 같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나무가 소생할 수 있는가? 일반적인 느낌은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이 끝장이 났다고 할 그때까지 하나님이 영적 무지와 흑암속에 버려두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이 의미가 있다.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고 한다. 소생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 거룩한 씨가 뿌려지고 싹터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때까지 앞에서 나온 것은 조금 혼란스럽다. 죄악에 대해 진노하사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두가지를 말한다. 영영 망하게 하는 것과 회개하여 돌이키는 두가지를 말했다. 2:4에 긍정적인 것을 말하면서 다음에 하나님 홀로 높아지실 때 인간적 교만과 높음이 낮아질 것이라. 저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상반된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하 궁극적으로 진행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을 버리시겠다고 한 다음에 메시야께서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미래 역사에 대해서 두가지 모습이 혼란스러워 진다. 여기에 와서 최초로 이스라엘의 암울한 심판의 역사와 그들에게 허락된 미래의 궁극적인 소망, 밝은 미래 구원의역사가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제 일정기간동안 이스라엘을 철저히 망한 것같이 심판을 행하실 것이요 그 후에야 어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셨다.
이사야를 통해 밝히신 6장에 기록된 내용이 이사야의 처음 소명을 기록한 것이냐 아니면 사역하고 있을 때 부르신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나 이것은 접어두고 이사야를 통해서 밝히신 내용, 영적인 무지와 흑암속에 버려두시겠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아주 중대한 결정이다. 무서우면서도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결정이다. 신약을 보면 이것이 자주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유대인을 향해 이 말씀을 하신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말씀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결정은 단순히 70년 포로기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오심과 그것을 거부하는 유대인의 역사, 이후의 역사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언이 유효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당시 유대인에게 인용해서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려는 그들에게 영적저주가 여전히 임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 저주의 선언은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과 포로시대 만이 아니고 그 이후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결국은 완전히 망하여 돌위에 돌이 첩놓이지 않고 완전히 파괴하도록 하는 중대한 선언이다. 엘리야를 통해 선언하신 하나님의 계시, 삼중 심판, 이것이 이사야에게 와서는 무서운 영적 저주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야를 통해 선언하신 선언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와 다스림을 받는 역사라는 의미에서 언약을 파기한 족속이요 철저한 심판 속에 두시려는 역사로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은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는 역사이다. 사 6장이 왜 이렇게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하늘의 환상들, 스랍들의 외침,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언되었는가는 이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결정은 이제 이스라엘을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 가운데서 완전히 망했다고 할만큼 철저한 심판을 겪게 될 것이다. 망하여 없어진 곳에서 새롭게 싹터는 새로운 가능성의 여운은 남아있다.
7장에는 요담의 아들 아하스라는 왕이 유다 왕이 되었다.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예루살렘을 치러왔다고 한다. 왜 왔는지는 설명이 안되고 있으나 경외에 보면 예전부터 앗수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 소국가가 동맹을 맺어 저항을 해왔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국가의 맹주역할을 한 사람이 대개 아람왕국이다. 그런데 아람왕이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반앗수르 세력을 형성했는데 아마 아하스가 동조를 안한 것 같다. 아하스는 어떤 정책을 펴는가? 앗수르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러니까 아람이 예전처럼 팔레스타인의 소국가를 규합해서 앗수르를 대적하려고 했는데 아하스가 동조하지 않는다. 6절에 우리가 아하스 대신에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한다.
2절에 아람이 에브라임을 의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백성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때 여호와께서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두 아들이 표적이라고 했다. 이제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의 침입앞에 두려워하고 동요하는 백성들, 왕을 찾아가서 이사야가 고한 말이 두려워말라 불타는 부지깽이에 불과한 저들을 두려워말라고 한다. 저들의 도모가 서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아람같은 에브라임은 망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네가 믿지 않으면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이라. 네가 믿으면 든든히 서리라고 한다.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든든히 설 것이라고 한다.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어떤 제안을 하시는가? 여호와로부터 표적을 구하라고 한다. 그 표적이 아무리 깊고 높은 것이든 음부에까지 든지 어떤 종류의 표적이든 좋으니까 구하라고 한다. 약속의 진실함을 보이겠다고 한다. 그런데 아하스가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이것은 말은 경건하게 보이나 마음은 앗수르를 의지하도록 정한 것이다. 13절ᄋ 이사야가 말씀한다. 하나님이 친히 주실 표적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표적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그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줄 알기까지 버터와 우유를 먹으리라. 이 아이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그들 앞에서 가증히 여기는 왕의 땅이 폐한 바되리라고 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망할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표적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하스는 하나 의 구원약속을 거부하고 앗수르를 의지했다. 여기에 대해서 책망하면서 주신 표적이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표적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7절에 앗수르 왕을 불러일으키겠다고 말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인데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는 분이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거부한 아하스에게 이러한 표적이 되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뜻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하스의 불신앙이니 다윗 왕가의 실패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베푸시고 주시는 것이다. 아하스의 불신앙, 하나님의 구원ᄋ르 거부하는 태도에 불구하고 이어서 구원의 표적을 약속하신 것은 구원의 표적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나 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임마누엘의 표적과 관련하여 까다로운 것은 여기에 태어날 아이가 누구인가? 아이가 악과 선을 택할 줄 알기전에 -. 금방 태어날 아이로 보인다. 태어날 아이가 당시의 태어난 아이로 그가 표적적인 인물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에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나라가 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곧 태어날 아이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해야 할 것인가는 별 문제이다. 특히 히스기야로 많이 본다. 문제는 히스기야 시대의 연대가 굉장히 복잡하다. 이때 히스기야의 나이는 10세 이상이다. 히스기야 전후로 연대가 흐트러져 있다. 상당한 기간이 계산하면 맞지않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숙제로 남아있다. 이것을 떠나서 그 당시의 인물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면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다는 말이 동정녀 탄생과 의미가 멀어진다. 마태복음에서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두 왕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망할 것이라는 것 때문에 문제다. 그런데 이 말을 그렇게만 볼 것인가? 아이가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 버터와 꿀(자연 채집한 것)을 먹는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매우 질박한 식생활, 검소하고 구차한 식생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어 선악을 선택할 줄 안다는 것은 분별의 나이, 성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버터와 꿀을 먹는 것은 심판의 비참한 상황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성년이 되기까지 두 왕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태어나서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기간을 말한다기 보다는 임마누엘이 성년이 되어 이스라엘 앞에 나타날 때까지 이 두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면 어려움을 조금 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뜻은 임마누엘을 보내 함께 거하시겠다는 깨끗하게 하고 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본래 구원의지는 흔들림이없음을 선언한다. 그렇다고 불신앙에 대해 무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만이 망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너와 백성, 유다에게도 앗수르를 보내서 짓밟겠다고 한다. 7장 마지막에는 그로인한 유다가 겪게 될 심판의 참혹한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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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24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대적으로 취급해서 보응하시되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회개하는 자와 죄악을 끝까지 고집하는 두 부류에 대해서 달리 취급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돌아오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여 의로운 모습, 성결한 모습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에 참예함으로 말미암는다. 돌이키지 않는 자는 수치를당하고 망하고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을 말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의 큰 틀, 원칙을 확인한 이사야는 이런 하나님의미래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것인지 역사의 종국에 대해서 말씀한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산이 모든 산 위에 설 것이라고 했다. 어떤 종류의 권세와 힘이든지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위에 높이 시온이 하나님의 교회가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교회의 권세에 대한 표현은 신약에 역시 "내가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했다. 이런 시온의 하나님 교회의 영광과 권세를 바라고 열국들이 시온을 향하여 나아올 것인데 그들을 유인하는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기를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그의 길로 행하게 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런 기대와 소망이 땅의 모든 민족이 교회로 나오게 할 것이라고 한다.시온에서 율법이 나올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이 율법으 말씀으로 열국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셔서 그들로 칼을 쳐 보습을 만들고, 창을 가지고 농기구를 만들게 하여 다시는 전쟁이 없으리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 가르치는 길이 어떤 길인가? 그가 우리를 가르쳐 행하게 하시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요 다스림이요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다스림은 타락이후 특히 노아 홍수 이후 나라와 나라가 갈라져서 피를 흘리는 전쟁의 역사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외부적인 전쟁종식이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부터 미움과 증오와 갈등을 그치게 하시고 마음을 변하게 하사 한을 품고사는 사람들과 서로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마음에서부터 칼을 놓게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참된 평화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사이에 참된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온으로 이끄는 요인이다. 이것이 바로 시온이 모든 사람위에 높아질 것이라는 시온의 영광의 내용이다. 교회는 이러한 영광을, 권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성령께서 영안을 열어보게 하시면 시온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절실한 마음으로 호소하기를 은혜와 영광을 약속받은 자가 우리 이스라엘이 아니냐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외친다. 이런 선지자의 절규가 외쳐지고 한편으로 사술이 횡행하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인간의 자기 우상화가 만연하였다. 이것이 6절 이하에 말씀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비천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잊지 않고 이것이 초래하게 될, 이어가게 될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말한다. 회개치 않고 죄악을 고집하는 자 하나님을 저버린 자에게 도래할 것을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꺼지지 않는 불가운데 소멸하게될 두렵고 비참한 미래는 바로 오늘 현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하게 한 죄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원인과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우선 죄악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맨 처음 언급된 것이
대개 평행법은 두 개(bicola line)로 나누어지는데 경우에 따라 세 개(tricola line)로 나누어질 때도 있다.
케뎀의 뜻 ① 동쪽 ② 앞 ③ 상고, 옛날
이스라엘에게 동쪽(케뎀)이 전면이다. 서쪽(얌마)은 뒤가 된다. 케뎀은 '옛날, 상고'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오느님'(신접한 자들)
병행부사이에 같은 말이 사용될 때 같이 사용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서만 사용한다. (double duty) 블레셋 (서부해안지역)과 동방의 풍속을 받아들였다.
케뎀의 3가지 뜻가운데 무엇을 써야 하는가?
저자가 두가지 뜻을 다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노덴'은 '다시'라는 뜻도 될 수 있고 '위로부터'라는 뜻도 된다. 이 두가지를 다 요한이 염두에 두고 썼다고 생각된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것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두가지 뜻을 다 취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악한 영들의 힘을 빌어 사술을 행하는 이방풍속이 가득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동서남북에서 배워온 것이고 오래전부터 배워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단어하나(미케뎀)에서 담아 말하고 있다.
"영적사슬이 옛부터 가득하였으며 블레셋처럼 가득하엿다. 시간적으로 옛부터 악한 영들과 관계하는 사술이 존재해왔으며 정도에서는 이방인 블레셋만큼 성하였다" 고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과 통혼으로 인한 혼혈아들이, 이것을 외인들의 자손이라고 할 때 국제결혼이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질적인 존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특한 영적 신분을 상실했다. 참된 본질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부류들을 양산했다. 더 이상 세상과 이방과 구별되는 것을 상실하고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변질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증거한다. 그 땅은 금은으로 가득하며 보화가 무한하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추구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이 추구하고 의지해온 것은 이방이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않다. 그것은 부,경제력이다. 말과 병거의 힘, 군사적인 힘, 물리적인 힘이엇음을 암시한다. 세상영광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교회의 진정한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세상 권세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온의 긍정적인 미래와 대조된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그 길로 행하게 하심으로 열국을 다스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정한 화평을 이루는것인데, 이것이 시온의 힘이요 권세요 영광인데 돈과 힘이 가득했다. 하나님 교회로 갖추어야 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부, 경제, 군사력을 선망하였고 그런 것으로 자신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게 된 이유를 지적하는데 '가득하다'를 사용한다. 이것이 이방으로부터 배운 영적 사술, 귀신의 힘을 빌어하는 영적 사술이 가득하였고, 이것이 육적 통혼으로 발전하여 육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생아가 가득하였다. 그리고 돈과 힘이 가득하였다.
교회에서 낼 때 가난한 사람도 낼 수 있을 만큼 내도록 한다. 그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한다. 유력한 사람은 오래동안 아무 일도 안시킨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더 오래동안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내에 가득했던 것을 가리켜 우상 신들이라고 했다. 8절에 보면 우상 신의 성격, 본질을 한마디로 그 손이 만든 것에 경배하며 그 손가락이 만든 것에 절한다고 했다. 여기에 손, 손가락이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의지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이것은 실상 자기 손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요 그들의 재주와 재능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긴다.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존재로 높였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을 신을 만드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면 그렇게 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자기가 만들어놓고 경배한다. 이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는 근원을 캐보면 인간의 자기 우상화이다. 이러한 단추를 푸는 것이 무엇인가? 우상종교에서는 사람이 신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제사의식, 주술의 형식, 주문은 인간이 신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축복을 어떤 경로, 방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없으면 종교로서의 매력이 없다. 복음의 가장 기본 원칙, 흔히 불교(타종교)의 차이점이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력구원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자신이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이처럼 한편으로는 자기 우상화인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한 존재로 지으신 인간으로 저급한 우상에게 절하여 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위엄을 손상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하나님이 신적형상으로 고귀하게 빚어신 존재를 비하시킨 행위였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인간이 낮아졌다고 한다. 저들을 사하지 마옵소서라고 선지자는 외침으로 이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간접적으로 말한다. 롬 1장에 보면 사람의 죄에 대해 증거할 때 제일먼저 언급하는 것이 인간의 악의와 지적 부패로 인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을 제일먼저 언급한다. 이러한 자들에게 임할 형벌의 무서움을 외치되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을 드러내실 때 그들을 엄습할 두려움을 경고한다. 하나님이 홀로 높아지시는날 참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사 만유중에 홀로 높으신 분임을 나타낼 때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낮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뛰어난 것과 낮은 것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고 탁월한 것들, 바산의 높은 상수리나무와 같이 강렬한 것들, 망대와 요세화된 성벽들, 다시스의 힘들위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같다. 아모스에 보면 여호와의 날은 빛의 날이 아니요 어둠의 날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낯선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과 반대의 것임을 암시한다.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에 나온 것을 추측한다면 하나님이 역사에 결정적인 개입이 있는 날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해온 것 같다. 선지서에서는 이 여호와의 날이 심판과 멸망의 날일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시는 날이다. 나중에 보면 "일어나서 땅을 놀라게 하시는 날"이라고 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위엄과 권능을 지으신 만물을 통해 증거하시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한다. 결정적인 날이 이르면 무지한 자도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영광의 위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 대상은 높고 낮음이 다 포함된다. 모든 것위에 보편적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주로 높은 것들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높은 것들, 자랑하는 것이 낮아지는 날이다. 인간이 의지하는 최고의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고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땅을 뒤흔드실 때 사람은 바위 굴에 들어가며 흙속에 굴을 파고 숨을 것이다. 금은의 실상이 드러나는 날 헛됨을 깨닫고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피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22절. 이스라엘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시는 날, 그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임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호흡이 코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그치라."고 한다.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악한 영들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거짓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기도 하지만 그 근거에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정서가 깔려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최후의 결론이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명의 코 끝에 있어서 숨이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의 무가치함과 무력함을 말한다.
2장에서는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것 앞으로 이스라엘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신 뒤에 궁극적으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말했다. 긍정적인 미래는 시온이 영화로와 질 것을 말했고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그 영광을 제하실 때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헛된 실상을 알게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3장에보면 이런 말로 시작한다.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의지하는 것을 제하리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이야기 하기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밀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선지자의 시선은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에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궁극적 심판의 전조, 암시이다. 이미 밝히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에게 어떠헥 실현될 것인가를 말한다. 그 첫째로 말씀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의지를 끊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의지해온 원천, 힘을 끊어버리시겠다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정당한 것을 변질시켜 악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 가르침 통치대신에 세상 영광과 충만한 것을 제거하시겠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변질된 이스라엘을 암시한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전혀 무력한 것임을 드러내시겠다는 말이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여 온 것을 "마센과 마세나(여성명사)"로 쓴다. 하나만 써도 될 것인데 여성명사까지 포함해서 사용한다. 이것은 대상의 다양함과 동시에 전체를 포괄하는 두 가지를 의도한다. 유다가 의지하는 것들가운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유다가 의지하는 다양한 것들을 제거해버리겠다고 한다.
"모든 양식의 의지, 모든 물의 의지"라는 표현이 무엇인가? 왜 '의지'라는 말을 붙이는가?
TDNT (단어의 여러 가지 어원적인 용례를 살핌) → James. Bar 그것에 반대하여 문맥을 중시하는 사람 (비켄슈타인에 영향을 받은 사람)
과거에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설교를 만들었다.
사전에서 제시하는 말의 뜻 몇가지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미묘한 뜻을 잘 파악할 수 있으면 설교를 하는데 큰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설교라는 것은 단순하게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구속사적으로 한번 간파하고 끝나는게 아니다. 대개는 일주일간 지쳐서 졸다가 간다. 그래서 그들에게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고 마음에 박히도록 해야 한다. 이럴 때 성경의 미묘한 표현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이 큰도움이 된다.
물과 양식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 의지물을 지칭하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2절부터 언급된 것을 보면 용사와 군사를 제거하시겠다고 했다. 재판관들 선지자들, 점술사, 장로들을 제거하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용사와 군사를 가지는 것이 잘못인가? 군사와 용사도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요 세우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베푸신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없이 그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잘못이다. 교회는 결코 맘몬신을 섬겨서는 안된다해서 헌금도 거두지말자 해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돈이 그 자체를 지탱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백지장 한 장 차이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생각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과 돈의 힘자체에 끌려 의지하는 것은 백지장 한 장의 차이다.
재판관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처결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다. 이런 직분자들을 세우심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정당한 제도와 질서다.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사람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어서 말씀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재판관은 출 18장에 보면 유사들을 세울 때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맡은 일을 진실되게 감당할 자질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본 율례를 가르쳐 그대로 재판하게 하는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앞으로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것을 보시면서 왕에게 요구한 것이 율법책을 가까이 두어서 주야로 읽으라고 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건을 위함이 아니요 말씀으로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한가지 걸리는 것은 '코셈(점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왜 선지자를 세우셨는가? 신 18장에서 먼저 모세에게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리라는 말앞에 이방의 영적사술에 빠지지 말고 본받지 말라고 한다. 이방은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것을 당할 때 귀신을 찾아간다. 여기에서 지혜, 안내를 구한다. 이런 것을 쫓지말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대신 주시겠다고 한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다스리겠다고 했다.
여기에 보면 '나비'와 '코셈'이 나란히 있다. 이것은 겉으로보면 당시의 통치조직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재판관, 선지자, 군사도 다 잇다. 이들과 함께 이방의 점쟁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안에 함께 역사하고 있었거나 겉으로는 정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내부적으로는 변질된 것임을 말한다. 교회 안에도 악한 영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5월 8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절망적이라 선언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가실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곧 심판의 역사가 시작되겠지만 이것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이 그들을 정화하는 은혜의 역사로 마감될 부류의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우상을 고집하고 불순종하다가 영영히 망하게 되는 두 부류가 있게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역사가 어떻게 마감될 것인가를 말한다. 시온이 영화롭게 될 때 열국이 모여들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스라엘만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의 역사로 확대될 것을 말한다. 긍정적인 미래의 역사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시온이 높아진 것, 그의 백성, 교회가 영화로울 때 나오는 하나님의 통치. 인간의 미움과 증오를 종식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열국이 사모하여 나아와 그 평화에 동참하게 된다. 온 민족에게 이스라엘로 시작된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여 동참할 것을 말한다. 반대로 세상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이들이 궁극적으로 종국에는 그 거짓과 허무함이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역시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계, 민족에게 꼭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시작된 두 줄기의 상반된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마감될 것인가를 말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죄악에 눈을 돌리신다. 첫시작과 마지막 종국이 어떨 것인가를 말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창기와 살인자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지도층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세상과 같이되어 악령의 가르침받아 돈과 군사를 의지하고 사는 이스라엘,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계획에 따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말씀한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것을 다 허물어 버리시겠다고 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힘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의 생존을 지탱하는 것을 허물어 제거하시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사와 군인, 재판관, 선지자, 장로, 신접자라고 한다. 이스라엘에게는 군대가 필요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사단(in division, army)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완전히 군대조직이다. 민수기에 계수한 것이 나오는데 완전히 군대로 조직하는 것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첫시작부터 군대다. 그런데 왜 앞에서는 말과 병거를 많이 둔 것을 그들의 죄악으로 지적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은 군대인데 일반적인 세상군대와 다르다. 하나님의 군대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 있다. 이스라엘 전쟁의 성격은 군사가 많다고 이기고 적다고 지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아닌간에 달려있다.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속군대가 의지하는 최첨단 무기를 의지하는 마음의 자세를 문제삼은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군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오늘도 교회의 성격가운데 하나가 전투하는 교회다. 대상과 모습은 다르지만 교회도 신령한 전쟁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다.
용사와 군인은 하나님 군대로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쇼팻은 여러 가지로 쓰이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사사들이다. 사사의 역할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사사들의 시대를 거쳐서 이것이 왕국으로 이어진다. 왕의 역할과도 다르지 않다. 통치자와 비슷하다. 동시에 출애굽기를 보면 쇼팻의 직무를 율법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재판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직무일 것이다.
교회에서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느냐는 것이다. 쇼팻이 하는 일도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중요한 것이다.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받아 전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생각할 때 사람의 지혜와 뜻을 따라 살지않게 되어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율법을 따라 살게되어 있다. 그리고 이방들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악한 신들을 찾아가 구하는 반면에 이것을 대신할 사람으로 세운 것이 선지자다. 신 17장에 보면 선지자직이 어떻게 세워진 것을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지만 앞에 이방인들 가운데 신접한 자들을 통해 미래를 알려고 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고 한다. 이에 따라서 선지자를 세운 것은 이런 잘못된 것을 따르지 말고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에는 이 직분이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아직까지도 교회 예배에서 중심이 설교가 되고 있다.
'자켄' (장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연단을 받아 백성의 지도자가 될만하다하는 자들이다. 역시 장로들의 역할은 굉장히 크다. 장로들 가운데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너무 이스라엘 백성으로 고통받을 때 70인 장로를 세운다. 그들로 모세의 통치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도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용사나 군사나 재판관이나 선지자나 장로들은 형식적으로 교회에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호세트'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영매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신을 접해서 아는 것이다. 정당한 것 가운데 이런 것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당시 지도층의 실상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러한 정당한 직분자들 외에 악령의 힘을 빌어 엉뚱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일들이 섞여있었다. 본래는 정당한 직분들이 속내용이 저런 것에 의해서 변질되어 있음을 말한다. 왜 하나님이 자기가 세우신 직분인데 이것을 제거하시겠다고 하는가?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지도층의 실상이 무엇인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고발하는 말씀이다.
지혜자들이 선지직, 왕직과 같이 뚜렷하게 내세워진 적은 없으나 '하카밈'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중요한 일을 했는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가! 이것도 정당한 교회 직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라고 원문에는 되어있다) 세속적인 지혜나 한 차원 더 높여서 악령의 힘을 통해 초월적 지식에 접근하려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교회에 이런 직분을 주시고 교회를 감당하게 하실 때 직분이 전제하는 것은 참된 믿음과 경건 위에 서있는 것을 전제했다.
공교한 장인(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영매들이 사용하는 것이다)과 능란한 요술자가 나온다.
악령과 관련된 기술에 지혜로웠고 명철했다는 말은 어떤 말인가? 형식적으로는 교회의 정당한 직분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 믿음과 경건이라는 토대에서 떠나 악령에게로 옮아갔다는 말이다. 완전히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교회에서 직분을 말할 때 성경이 말하는 원칙, 아마 그것을 엄밀하게 적용시키면 다 내어놓고 나가야 될 것이다. 교회에 직분자를 세울 때 조금 부족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지혜와 힘주시기를 기도하자고 격려하면서 직분을 준다. 그래서 이 모양 이꼴이다. 그러니 이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목사요 장로요 집사인데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이 일이 참된 믿음과 경건에 터하여야 하는데 세상에서 하는 방법, 원칙 그대로다. 겉모습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기구인데 실제는 여전히 세상의 세속적인 통치를 시행하고 있다.
지도층의 타락, 변질이 얼마나 심각한가? 물론 전에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었기에 그의 영향이 이스라엘에 전체적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 지를 많이 말씀했다.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실 때 그 선두에 지도층이 서리라고 했다. 솔로몬이 타락했을 때 교회를 반으로 쪼갰다. 타락한 왕가에 교회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에게 맡겼다. 그러나 여로보암 자신이 더 타락했다. 지도층의 타락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이렇게 변질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층을 하나님이 제거하실 것인데 우선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젊은 아이들로 방백을 삼을 것이요 젖먹이들로 너희위에 군림하여 다스리게 하리라고 한다. '자켄'과 '나알'. 자켄은 오랜 경험을 통해 능숙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은이는 혈기가 있고 미숙하다. 권력을 휘두른다. 폭정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시류가 반권위적이다. 비단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다. 철학, 사상이나 모든 사회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가치와 질서를 부인한다. 젊은이들이 노인들 몰아내는 것은 옛날이 되었다. 장유유서의 질서가 무너졌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남녀평등 이름하에 남자가 위축이 된다. 남자가 설 자리가 없다. 물론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관행은 고쳐가야 한다. 신자에게 명하신 것은 특별히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자에게 순복하라고 했지만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에 배려하라고 했다. 영생을 유업으로 같이 받을 자이기에 존중하라고 했다. 남자나 여자나 서로 돌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깨어졌다. 더 재미있는 일은 불륜을 처벌하지 말자고 한다. 이렇게 직분이 있으면 자격이 있는 자가 앉아야지 혈기만 가지고 휘둘러대는 애들을 앉히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들이 사나와진다. 서로 대하는 것이 온순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것이 없다. 한 번 해볼래, 대드는 것이 된다. 젊은 애들이 노인들에게 마구 고함치고 대든다. 누가 봐도 모든 면에서 못한 사람인데,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짓밟는다. 모든 위계질서가 다 붕괴되는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한 형태이다. 겉모양만 갖추고 속은 변질될 때, 리더십이 타락하면 이런 식으로 변해지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면 모든 질서가 무너진다.
(질문) 이것이 미래의 일인가 아니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인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이라면 심판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심판이 죄악과 함께 진행되는, 또 그것과 함께 자연스럽게 오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롬 1장이다. 진행 자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함께 진행된다. 어느 때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마지막날에 총체적으로 심판하는 것도 있지만 죄 그 자체가 심판의 일부이기도 하다.
교회의 지도층이 부패하고 변질되어가면서 전혀 자격이 없는 직분에 적합치 않은 자가 나서서 교회의 일을 전횡하게 되고 그러면서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 멸시받고 순종해야할 권세가 거부당하고 내팽개쳐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교회 질서가 무너지면 한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되어달라. 붕괴된 비참한 현실이 네 손아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네게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되어달라. 왜 겉옷을 거론하면서 방백이 되어달라고 하는가? 당시 이스라엘의 경제적인 현실이 너무 형편없어서 겉옷만 입을 수 있으면 지도자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햇는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
겉옷과 관련하여 어느 나라나 관직에 있어서 품계를 겉옷으로 나타낸다. 겉옷은 직분의 상징이다. 이와함께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했다. 이것은 엘리야보다 더 상황이 험악하니 두배의 영감이 있어야 겠다는 말이 아니다. '두 몫'이라는 말이다. 장자의 몫이다. 승계, 상속, 후사의 문제다. 내가 선생님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 직분을 행할 수 있는 몫이 있어야 겠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다. 이것의 상징적인 것이 겉옷이다. 두배의 영감이 상징하는 것이 겉옷인데 겉옷으로 요단강을 치니 갈라졌다. 이것은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직분이 승계되었음을 말한다. 겉옷이 이런 기능을 한다고 감안한다면 네게 겉옷이 있으니 우리의 방백이 달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당신이 마땅히 방백의 자리에 앉아야할 차례,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방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바로 그 다음 표현이다.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는 말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맡아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이 당신 뿐이요"라는 말이다. 이런 제의를 받은 사람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나는 싸매지 않으리라. 교회의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겠노라"고 한다.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겉옷도 없다. 나는 그런 능력도 자격도 없다는 뜻이다. 나로 백성의 관장(방백)을 삼지 말라. 교회의 지도층이 어지러워지면 자격없는 자가 나서서 어지럽히고 저런 사람이 나서서 교회를 수습해주었으면 하면 도저히 못하겠다고 뒤로 물러난다. 아모스에서는 달리 말하기를 지혜로운자가 아무리 당시의 위기상황을 지적해도 오히려 달려들고 짓밟으니까 지혜자가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 침묵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유다는 넘어졌도다. 하나님의 교회가 붕괴되었다.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그들의 혀와 행위는 대적하되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다. 하나님을 거스려 훼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이 그와같은 것을 역력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는 소돔과 같은데 그들이 그것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죄를 부끄러워조차도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다닌다. 화로다. 그들은 재앙을 자초하였도다. 스스로 행위에 대한 보응으로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뜻이다.
죄악을 범하고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악된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러면 어떠냐는 식으로 막나가는 정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멸시다. 하나님의 법이 서 있다면 존중하기만 해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 것은 그것조차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처벌, 형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대를 향해 말씀하시길 너희는 고하라 의인은 반드시 형통하리라 반드시 그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된다. 악인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전도서에는 공의가 신속히 시행되지 않으므로 악인이 죄를 범하기에 담대하다고 했다. 죽을 때는 고통스럽게 죽어야하는데 평안히 죽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공의가 이루어지느냐고 하면서 담대하게 죄를 짓는다.
그렇게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고하라고 하신 말씀이 의인은 잘될 것이요 그 행위의 열매를 먹게될 것이요 악인은 반드시 망하리라고 했다.
내 백성이여 너희 길을 바로 인도할 자가 오히려 오도하고 있다. 너희 길을 혼란케하고 있다. 너희를 폭군처럼 다스리는 이가 젖먹이요 여자들이 군림하여 다스릴 것이라고 한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 다스림으로 초래되는 통치의 난맥이다. 여기에 덧붙이길 너희의 길을 바로 인도할 자가 오도하며 혼란케한다고 했다. 지도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행동과 다스림을 보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경고하시되 소자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죽으라고 했다. 지도자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그러기에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다. 지도자의 책임이 무서운 것이다. 나의 행위를 보고 교회의 성도들이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배웠는데 목사님을 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워진다. 참 큰일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그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좌정하셔서 그 백성들을 판단하시기 위해 서실 것이다. 백성의 장로와 방백들과 더불어 재판하시리라 말씀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가 포도원을 삼키며, 포도원은 5장에도 나오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네 집에는 탈취물이 가득하다. 어찌하여 네 백성을 깨뜨려 뭉게며 맷돌로 갈 듯이 가는가! 3장 첫부분에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것, 이스라엘의 힘에 관한 말씀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세운 지도층, 제도, 직분에 대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들을 제거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의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시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주신 권위, 힘,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오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지혜를 주신 것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것을 바로 전하고 그들을 잘 가르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오히려 백성의 길을 오도함으로 그들을 보고 백성이 혼란한 지경에 이르게 e되고 저들에게 힘을 주신 것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붙들고 세우라고 했는데 뇌물을 받고 폭력을 행하고 갈아 뭉게듯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제거하시라고 하신 것은 16절에 시온의 딸들이 교만(원래는 높다는 말이다)하여 라고 했다. 어떤 것을 가졌을 때 높다라고 생각하는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때이다. 높다는 것은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대개 등장하는 사람들이 남자다. 여기서는 여자들에게 빗대어 말한다. 여기서 자랑하는 것이 어떤 성격인가? 남자의 특징이 힘이라면 여자에게 상응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교회에 대한 비유다. 남녀의 경우를 들어서 교회의 힘이 어떻게 타락하고 부패하고 오용되고 있는가를 말한다.
우선 자랑하는 모습을 여인에게 빗대어 말하되 목을 쭉 뽑아 올린다고 말했다. 그 의도가 무엇인가? 또 눈을 굴린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아름답게 보이려는 애교의 몸짓인지 아니면 마음에 일어나는 관심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개 유혹하는 눈짓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 걸을 때도 아장거리며 걷는다. 아기죽거린다.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딸의 정수리에 부스럼이 나게 하실 것이다. 앞이마를 밀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 머리를 민다느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임을 잘안다. 머리를 민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갈 때 머리를 밀기도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것, 그 태도가 사랑스러운 몸짓일 것이라고 스스로 행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정말 참된 아름다운 것인가? 벧전 3:2-4 여인의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모든 것이 내면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서술된 것과 시온이 자랑하는 것을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다. 신령한 영적인 아름다움과 외면적인 아름다움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비교하는 것은 외면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그 안에 숨겨진 영적자세가 무엇인가? 남자에게 타락한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의 미적감각도 타락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보고 선하다(토브)고 하실 때 아름다움을 말한다. 보기에 탐스러웠다고 한다. 미적감각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보기에 탐스러웠다고 하신 것은 에덴동산에서 심은 나무의 열매와 관련해서 말한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생존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아름다운 미적 만족을 준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힘의 크기를 영향력의 크기로 따진다면 남자가 크겠는가 여자의 아름다움의 영향력이 큰 것인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여자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느끼는가 이것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온의 영적상태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예루살렘이 자랑하던 아름다움이 타락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앞에 내어놓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라는게 목을 빼고 아기죽거리며 걷고 눈은 음란하게 굴리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시할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 실제로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창부와 같이 돈을 얻고자 하는 구걸이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들의 향수로 하여금 퀴퀴한 냄새가 되게 하겠고 정교한 아름다운 벨트로 노끈이 되게 하겠고, 그의 아름다운 머리장식은 대머리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자랑하는 실상이 무엇인지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오늘 교회가 세상앞에 제시하는 것을 보여준다. 진정한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향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타락한 욕망을 일으키고 부추기며 세상을 더 사랑하게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만드는 것인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교회현실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오늘에 짓밟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2001년 5월 22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지하는 모든 것들과 자랑하는 것들을 제거하겠다고 하셨다.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을 그들은 의지한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들, 모습은 하나님이 세우신 외형이지만 그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으면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오해일 수 있다. 실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들이 뿌린 향수대신에 썩은 냄새가 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띠 대신에 밧줄을 매고, 머리털을 밀어 대머리가 되게 할 것이라. 아름다운 옷 대신에 베옷을 입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모습은 포로로 잡혀갈 때 여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자랑하던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요 남자가 죽고 없으니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이 수치를 면하게 하라고 한다.
4장 2절부터 보면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힘들, 이것이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이요 영광이라 생각했던 것이 거짓되고 변질되었다고 하시면서 이것을 제거하시고 거짓 아름다움 대신에 수치스러운 실상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변질을 제거하실 것과 맞물려 4:2에 독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싹이 아름다움과 영광이 될 것이요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열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단어적인 뜻만 가지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사야에만 사용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사용되는 것이기에 그의 뜻은 찾기가 어렵지 않다. 렘 23: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세우신 목자를 그들이 직무, 기능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양을 잘 기르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양을 망하게하고 흩어버리는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때가되면 (5절이하) 다윗을 위하여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라고 하고 있다. 본래는 '싹'(째마흐)과 같은 단어이다. 한 왕이 지혜롭게 다스릴 것이며 공평과 의로 행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윗 계통에서 한 인물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이다. 그의 일이 지혜롭게 다스리고 공평과 의로 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하리라고 했다. 그 이름을 여호와 우리 의 (아도나이 찌드케누) 다. 여호와께서 우리 의가 되신다는 말은 굉장히 광범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백성에게 행하시는 의를 가리켜서 말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 의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킨다. 백성에게 친히 의가 되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렘 23장에 보면 싹이라는 인물이 매우 특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이 렘 33장 14절이하에 나온다. 다윗을 위하여 의의 싹이 나게 하리라. -- 그의 이름을 우리 의라 일컬을것이라고 했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가랴 3:8 그들은 표적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순)을 이끌어 오리라고 했다.싹을 내 종이라고 했다. 6:12 순이라고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절에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제사장적 왕의 모습)
이것은 성경에 주로 메시야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것이 시 110편이다. 두 직분이 겸하여 언급될 때 대개 그 내용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사야서 4장에서 언급하는 싹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선지서들을 살펴볼 때 메시야라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전제하고 표현의 의미를 생각하면 "여호와의 싹"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싹틔우신 것이니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여호와의 싹은 7장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줄기가 나며 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다윗으로부터 났다고 하지않고 그의 부친인 이새의 뿌리에서 라고 말함으로 다윗과 동일한 근원에서 대등한 자격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으로 단순히 다윗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인다.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신 일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과 병행해서 "땅의 열매"라는 말이 사용된다. 흔히 말하는 병행구조를 염두에 두고 그 말의 뜻을 이해한다면 여호와의 싹이나 땅의 열매는 병행하여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싹은 그렇게 본다고 해도 땅의 열매는 메시야와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난감해진다. 어떤 분들은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싹턴 것이요 하나는 땅의 열매니 신성과 인성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호와의 싹이라는 말과 땅의 열매라는 말을 통해서 참 메시야의 영광을 파악하기에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에 메시야가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 이루실 풍성한 열매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땅에 오셔서 이루실 일을 염두에 두고 왜 땅의 열매라고 하셨는가? 구체적으로 짐작해본다면 땅의 모든 역사의 궁극적인 결실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여기에서 한가지 확인한 것은 여호와의 싹이나 땅의 열매나 한 인물,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에 이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있어서 영광과 아름다움과 자랑이 되리라는 말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은 폭력화했고 그의 아름다움은 타락하고 부패한 수치가 되고 마는 때에 언젠가 하나님이 책임을 물어 모든 것을 제거하실 날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스라엘의 변질을 제거하시겠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메시아로 진정한 영광이 되게하시겠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힘이 메시야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세속화하여 세상과 다름없는 교회를 향해 모든 더러움과 악을 제하시리라고 하시고 오직 메시야가 너희의 진정한 힘과 영광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교회의 진정한 능력과 영광이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다.
(질문) 여호와의 싹과 땅의 열매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크게 차이는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요 그를 통해 이루어진 결실이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괜챦다. 그러나 결과나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봐도 되고 병행구조를 의식해서 메시야 인물 자체를 가리킨다고 봐도 문제가 없다. 메시야가 이루실 사역의 결과들이 땅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열매는 최종결실이라는 측면이다. 그래서 뜻이 조금 더 깊어지는 의미가 있다.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이 되는 그날에 시온에 남은 자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 불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출 19장에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불러내신 목적이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또 이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생명을 위하여 녹명된 자들이라고 했다. 흔히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생명얻는 자로 기록된 자들이라는 말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부르심의 목적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참 생명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거룩하다 일컬음을 입게 될 것인가? 메시야께서 저들에게 참된 영광과 아름다움이 되어주셔서 저들로 거룩한 백성이라 불리우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메시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이루어 주실 것인가? 이것을 4절에서 설명한다.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정결케하시는데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하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폭력을 상징한다. 힘이 잘못 사용되면 폭력이다. 물론 살인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극단적인 경우다. 피를 깨끗케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곡된 힘의 사용, 폭력화된 모든 권력들을 깨끗케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의 더러움은 무엇을 말하는가? 타락한 아름다움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타락한 부패한 아름다움이다. 이것을 더러움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이 왜곡, 변질시키고 본래의 것을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이 다시 씻어 회복하시리라고 한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라디하 라하츠"는 제의적 용어이다. 죄의 더러움을 정결케하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말하면서 제의적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 메시야께서 그 백성의 죄를 깨끗케하시는 일이 제의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 다음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으로 하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베루아흐'를 소문자 spirit을 써서 심판의 정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문자로 써서 Spirit으로 보면 심판과 소멸의 성령으로 하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적 성격을 말하시면서 성령을 말씀하신 것은 제의적 성격이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제의적 사역,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과 한묶음이 되어 역사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여기서 심판과 소멸의 성령의 사역은 어떤 사역인가?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보아도 심판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겠는가? 물론 한 개인을 두고 죄에 대해 심판하시고 소멸하고 깨끗케하시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전체를 두고 생각하면 소멸의 사역이 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것을 제하여 없애시는 것과 정결케하시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지 분리가 안된다. 한 개인을 두고보면 악을 멸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죄를 소멸하여 깨끗케하시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를 보면 죄를 소멸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정화하는 것이 같을 수 있다. 이스라엘 가운데 행악자를 멸하여 제거하는 것이 전체로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증거하면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는 의미도 성령으로 주는 세례와 불로 주는 세례로 나누어서 성령세례는 긍정적이고 불세례는 심판의 의미로 많이 이해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불에 던지리라고 한다. 이것을 불과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 4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시는 사역에 대해 서술하면서 제의의 용어를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사역의 제의적 성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과 밀착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백성의 죄의 더러움을 정결케하신 후에 시온이라는 모든 곳 위에 연기와 화염을 만드실 것이라고 한다. 마치 천계와 같게 하시겠다고 한다. 대개 낮에는 구름,밤에는 연기(화광)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은 출애굽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시온을 정결케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천계(덮어서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 더위나 소나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보호막,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염두에 둘 것은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죄악을 지적한 다음 이스라엘에 임할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되 긍정적인 것과 회개치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은 2장 마지막에서 이야기했다. 시온이 영화로울 것이요 시온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열국이 나아올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 4장이다. 이스라엘의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가 한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조금 후에 6장에 가면 거룩한 씨라고 하는것과 연결이 되고 7:14에 임마누엘과 연결이 되고 9장에 가면 한 아기와 연결이 되고 11장에 가면 이새의 줄기에서 날 싹과 연결이 된다. 이것이 53장에 가면 고난으 종과 연결이 된다. 이스라엘의 기대가 긍정적인 소망이 한 인물과 밀착이 된다. 이것은 이사야만의 특징이 아니고 다른 선지자도 다 마찬가지다. 단순히 앞으로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하지않고 한 인물의 출현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전체 구도를 생각하면 메시야의 소망이 포로시대나 후시대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이스라엘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비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왜곡되고 변질된 가운데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5장에 가서는 내용들을 종합하고 있다.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도원 비유를 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얘기한 것을 정리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다 . 그가 곡갱이질을 하고 돌을 골라내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울을 두르고 농부로서 모든 일을 다하였지만 당연히 그런 수고의 결과로 참 포도열매를 맺기 기대하였지만 실제는 쉰포도, 쓸모없는 포도를 맺었다고 한다.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아 나와 포도원 사이를 판단하라.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무엇을 더하여야 할 것이 있고, 내가 하지않은 것이 무엇인가? 아직 소홀히 한 더 무엇이 있겠는가? 농부로서는 포도원에게 모든 것을 다 행하였다. 어째서 내가 포도 맺기를 기대했는데 들포도를 맺었는가? 이제 저들에게 행할 일을 밝히되 울을 걷어내고 불사를 것이며,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라. 파괴할 것이요, 더 이상 손질하지 않으니 가시와 질려가 올라올 것이라. 황폐하도록 버려둘 것이라. 구름에 명하여 비를 내지못하게 할 것이라. 이러한 비유의 참뜻을 저들에게 가르치시되 이스라엘 집이 포도원이라고 한다. 유다 백성이 바로 심은 최상의 상품의 포도나무이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의(하나님 통치의 본질,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이거늘 실제로 그들이 맺은 것은 피흘림과 부르짖음(폭력으로 인한 억울함)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을 보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되 집에 집을 더하며, 밭에 밭을 더하여 남은 자리가 없게 하였으며, 넓은 땅에 홀로 거하리라고 한다. 홀로 독차지 하려는 탐욕스러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웃과 함께 나누기보다는 홀로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집을 많이 얻고 밭을 구한들 저들이 바라는대로 되지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소를 겨리로 광활한 토지에서 한 바트의 포도주를 얻게 하실 것이고 한 호멜의 씨를 뿌려 한 에바의 곡식을 얻게 할 것이라고한다. 대개 곡식은 몇배가 나오는가? 성경에 의하면 30, 60, 100배가 나와야 정상이다. 한 호멜이 열 에바다. 씨를 한 말 뿌렸는데 곡식은 한되를 얻었다는 말이다. 농사를 다 망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욕을 부려 이웃의 것을 차지하여 결국 아침일찍 일어나 독주를 찾으며 밤까지 독주로 몸을 불사르는 도다라고 했다. 수금과 퉁소와 소고 소리에 포도주를 마시는 쾌락에 탐닉한 모습을 지적한다. 자기 몸을 정욕으로 불사르는 일에 온 힘을 쏟으면서 정작 하나님의 일은 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간절히 찾고 살펴야 할 것은 하나 의 뜻이요 그가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어떤 일을 하시며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여기에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 방탕한 쾌락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에 온마음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이 무지한 채 이 땅에서 추방이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된 삶의 영역에서 축출되고 몰수히 죽임을 당하고 자랑, 소유모든 것이 무너지리라고 말씀한다. 이들의 죄악은 그저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착취하고 빼앗아 자기의 부패한 정욕의 만족을 위해 쓰면서 거기에 탐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가운데 행하신 일에는 무관심한 정도에 지나서 이들은 그의 행사를 서둘러 행해보시오 우리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도모가 이루어지게 해보라, 우리가 알아보리라. 말이 좀 어색하지만 쉽게 풀어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선지자 통해 알리신 말씀을 통해서 ,내가 너희 죄악에 대해 알아보리라 하는 말에 대해서 코방귀를 뀌며 한번 해보시오 라고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옥에라도 뛰어들 심사라고 한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자다. 이들은 악을 선이라하고 선을 악이라고 한다. 가치체계를 바꾸어놓았다.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한다. 단순히 악을 행한다는 것과 선악의 기준을 뒤바꾸어놓는 것은 많이 다르다. 자기 혼자 악을 행하면 그의 행위는 악한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워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 경계가 되나 선악과 진리를 뒤바꾸어놓으면 선이 악이요 악이 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선을 행하는 줄 착각하게 한다. 참으로 무서운 죄다. 그러므로 선생의 죄가 참 무섭다. 선생의 책임이 참 크다. 권력을 이용해서 뇌물을 받고 악한 자를 의롭다한다. 사람을 노엽게 만드는 것이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독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이스아렝의 거룩한 자의 말을 능욕함으로 뿌리부터 썩으리라.
25절 이하에 가면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아 버린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한 강력한 나라를 불러올리셔서 이스라엘을 짓밟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앞둔 이스라엘의 미래는 땅을 살펴보면 어려움과 환난이요 어떤 빛도 보이지 않고 캄캄할 것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과거의 죄악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미래가 궁극적으로는 빛이 없지않지만 남은 자에게서 긍정적인 것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암울하고 암담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2001년 5월 29일
시험문제 : 교회가 세상 앞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보여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 / 교회의 진정한 영광과 권세. (교회를 어떻게 생각해왔으며 어떤 모습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화, 깊이 생각해서 적도록)
교회의 정체성위기를 겪고 있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왕좌왕하며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탐색과 모색이 이루어진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기보다는 굉장히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온갖 것을 다 시도해본다. 그런 가운데서 꿩잡는게 매라고 호소력이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을 교회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장땡이다. 그것으로 목회의 평가기준을 삼으려는 경향이 농후한데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에서 확실하지 않으면 하루 하루에 급급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돌아가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사야서 처음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교회의 진단-창기가 되었다 등)
5장에서는 1장에서부터 이야기한 내용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대되는 바대로 신실하게 언약의 주로서 모든 일을 감당하셨으나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기대에 대해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참포도나무 열매맺기를 기대했으나 먹지못할 신포도를 맺었다고했다. 공의를 바랐으나 피흘림, 억울한 폭력이 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버렸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8절 이하에는 기대에 벗어난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한 처리방침을 말씀한다. 강력한 나라를 불러 짓밟을 것이라고 한다. 유린당할 것을 보고이스라엘의 미래를 전망할 때 땅을 보니 어둠과 환난 뿐이라. 유다의 암담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6장 말씀은 웃시야의 죽던 해라는 말로 시작한다.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신실히 좇았다가 나중에 교만해서 죄를 짓는다. 제사장이 아니면 분향할수 없는데 분향하다가 문둥병이 걸려 별궁에 거한다. 이때 요담이 섭정을 한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는 요담이 정식으로 왕이되어 치리하던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죽고 요담이 왕이 되던 때라고 하지 않고 왜 웃시야 왕의 죽던 해라고 했는가? 웃시야왕이 유다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 모든 면에서 유다가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냈던 때다. 굳이 웃시야의 죽던 해를 부각시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끝이 나고 이제는 암흑이 시작된다는 일종의 암시다. 5장에서 심판이 앗수르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하면서 비참한 것을 바라보니 암흑뿐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칼빈은 웃시야 왕이 죽었다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이 성전에서 충만하신 모습, 왕되신 위엄을 나타낸 것과 관련하여 ---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문맥과 비추어 맞지않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자기 나타내신 모습이 보좌에 들린 모습이었고 옷자락이 성전에 추만한 모습이었다. 만유 통치자로서 무한 충만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저버리고 죄악고집하는 자 심판하실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마지막 날에 여호와 홀로 높아지리라는 말씀을 연상케하는 말씀이다. 특히 하늘의 스랍들로 하여 얼굴, 발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게 한다. 이 선언으로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던 일, 범죄한 백성에게 거룩하심 나타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성전 전체가 뒤흔들리도록 죄를 자복하게 하시고 멸망의 두려움 이기게 하신 것은 5장에 기록된 내용과 연결이 된다. 거룩하심 앞에 스스로 멸망할 죄인을 인식하고 주저앉은 선지자에게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 뜻을 이루도록 하신 것은 앞으로 말씀하실 내용이 긍정적이요 희망적임을 예견하게 한다. 앗수슬 통해 겪게 될 심판이 언제까지며 이 후에 어떻게 역사하실까를 암시한다. 다른 선지자를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내용을 살펴보면 선지자의 죄를 특별히 지적한 내용이 없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거절한다. 하나님 편에서 거룩함 계시하고 선지자로 자기 죄악깨닫고 주저앉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왜 이사야의 경우에는 이렇게 죄인으로 발견하게 하시고 죄속함을 받게하고 사명을 주셨는가? 왜 하난미의 거룩하심을 부각시키셨는가? 이사야 6장의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라 메시지와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우선 6장 전체의 내용과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사항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깊음으로 마미암아 심판과 암울한 미래가 웃시야의 죽음을 언급하여서 하나님께서 형통케한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내가 주를 뵈오니 높은 보좌 위에 좌정하셔서, 보좌에 좌정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통치자로 앉아 계신다는 말이다.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간접적으로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높이 들리우셨다는 말이다, 그 옷자락이 성전에 충만하였다. 이사야가 이 환상을 그저 성전에 들어가, 이사야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왕족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선지자들이 과연 성전안까지 출입이 자유로웠겠는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원칙적으로는 안된다. 물론 제사장 전통에서 선지자직을 수행한 사람이 예레미야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과 관계없이 선지자라는 것만으로 성전출입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대답할 수 없다. 정확한 출신을 모르기에 제사장 가문임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신약에서도 시므온이 예수님을 받아 안고 기도하는 일이 있다. 시므온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마도 제사장 혈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행동을 보아 추측하는게 타당하다. 그런 문제뿐 아니라 이사야가 본 것은 반드시 성전에서 본 환상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곳이든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이다. 욥에게 보이신 것이나 미가야 선지에게 보이신 것이나 그 환상과 비슷하다. 아합 왕때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람을 치러올라 갈 것인가 할 때 거짓선지자들이 올라가라고 부추긴다. 여호사밧이 아합의 권유를 받고 함께 치러올라 갈 때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 부르니까 그가 미가야 선지다. 그가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보니 목자없는 양같이 다 흩어졌다. 전투의 결과를 말한다. 이때 네가 어디서 보았느냐 할 때 하나님앞에 영들이 모여서 의논하는데 한 영이 거짓하는 영을 보내서 거짓말하게 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계신 가운데 영들이 모셔 섰다는 표현을 한다. 또 비슷한 모습이 욥 1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앞에 사탄이 모여 욥의 시험을 말한다. 성경에서 몇 곳에 나오는 이러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하나의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욥의 경우는 여기서 욥의 시험이 결정된다. 미가야 선지의 경우에는 아합을 어떻게 꾀어 죽게하겠는가가 결정된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결정된다. 이것을 가리켜 예레미야 선지는 하나님의 회의라고 부른다. (너희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였더면…)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지상의 모든 역사는 하늘에서 영들과 함께 논의하는 회의에서 결정이 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결정이 시행되는데는 영들의 역사가 개입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참석하는 것이 무엇이냐? 미가야의 얘기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시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대개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통치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회의를 가리켜 우리말식으로 '어전회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예들에 비추어보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통치자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선지자를 불러 세우시고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 대개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해 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관자, 통치자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특별히 스랍들이 하나님 임재하신 곳에서. 이 환상이 반드시 성전에서 본 환상이라고는 볼 필요가 없다. 다른 선지자처럼 하늘에서 본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스랍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창화하여 가로되 6절.
천사들의 외치는 소리로 인해 성전 문지방이 흔들렸다. 그 전안에 연기가 가득하였다. 결국 그들의 외치는 바 내용,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선지자의 반응에서도 확인이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였도다고 말한다. 선지자는 천사들이 외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거룩하심 앞에서 망하여야 할 자인 것처럼 완전히 침묵하게 한다. 완전히 존재가 꺼져버리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부정한 백성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술이 부정한 자여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가 드러남에 따라 죄로 인하여 마치 꺼져버리는 것같은 끝장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가 특별히 입술의 부정함을 언급했다는 것은 선지 사역과도 관련이 있다. 입술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뜻하는 것인데 인간의 내면적인 가장 일차적인 표현기관이라고 생각한다면 입술은 마음의 죄악의 모든 것을 포괄해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지자가 자기 자신만의 죄악만을 고백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백성들의 입장에서 놓고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혼자 개인적인 죄를 의식했다기 보다는 온 이스라엘의 죄악을 함께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죄인에게 어떠한 경험인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스랍중의 하나가 숯붓을 입술에 대니 이것이 내 입술에 닿으니 속하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선지자의 겸손은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망하여야 할 자로 의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단에 핀 숯으로 그 죄가 속함을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그러한 선지자에게 주어진 메시지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고,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신다.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이사야가 담대히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지의 내용은 매우 특이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무겁게 하고 눈을 가리우라 그리하여 그 눈으로 보고 귀로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개하려는 마음을 얻지못하게 하라. 굉장히 이상한 말씀이다.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계속 봐라.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인 회개촉구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셔서 눈을 가리워서 회개하여 나음을 얻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오히려 저들을 영적흑암에 내버려 두셔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신 일종의 영적 저주 선언이다. 여기서는 아예 회개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무서운 저주가 없을 것이다.차라리 혹독한 징계와 심판이 낫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심판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때 마지막에 이 심판이 저들을 멸하는 것이 되지않고 저들을 고쳐 온전케하는 은혜의 기회가 되게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 선하신 뜻안에서는 오히려 돌이키고 고치는 선한 기능을 할 수 있다. 마음 자체를 어둡게 하셔서 회개하여 나음을 얻지 못하게 하신 것은 완전히 저들에게 소망의 원천을 봉쇄하시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배역한 자요 타일러도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하신 가장 무서운 저주가 죄악속에 버려두시겠다는 것이다. 회개하여 돌아올 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의 무서움을 즉각 깨달았던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외치기를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는다. 이러한 저주가 이스라엘로 회개할 길조차 막으시는 저주가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영 계속된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저주가 영영 고착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대답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에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읍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을 때까지 집들과 땅이 황무하여서 사람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이 사람을 희소하게, 또 멀리 추방하사 이 땅에 버려두게 하실 것이요 그 가운데 10분의 1일 남을 지라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 하나님이 10분지 1로 줄이겠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심판의 가혹함을 드러 표현하셨다. 여기서는 그 10분의 1마져도 짓밟겠다고 한다. 마치 둥치가 밑에서부터 잘려나가서 그루터기만 남은 상수리 나무와 같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 나무가 소생할 수 있는가? 일반적인 느낌은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이 끝장이 났다고 할 그때까지 하나님이 영적 무지와 흑암속에 버려두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이 의미가 있다.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고 한다. 소생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 거룩한 씨가 뿌려지고 싹터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때까지 앞에서 나온 것은 조금 혼란스럽다. 죄악에 대해 진노하사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두가지를 말한다. 영영 망하게 하는 것과 회개하여 돌이키는 두가지를 말했다. 2:4에 긍정적인 것을 말하면서 다음에 하나님 홀로 높아지실 때 인간적 교만과 높음이 낮아질 것이라. 저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상반된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하 궁극적으로 진행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것을 버리시겠다고 한 다음에 메시야께서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미래 역사에 대해서 두가지 모습이 혼란스러워 진다. 여기에 와서 최초로 이스라엘의 암울한 심판의 역사와 그들에게 허락된 미래의 궁극적인 소망, 밝은 미래 구원의역사가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제 일정기간동안 이스라엘을 철저히 망한 것같이 심판을 행하실 것이요 그 후에야 어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셨다.
이사야를 통해 밝히신 6장에 기록된 내용이 이사야의 처음 소명을 기록한 것이냐 아니면 사역하고 있을 때 부르신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나 이것은 접어두고 이사야를 통해서 밝히신 내용, 영적인 무지와 흑암속에 버려두시겠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아주 중대한 결정이다. 무서우면서도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결정이다. 신약을 보면 이것이 자주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유대인을 향해 이 말씀을 하신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말씀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결정은 단순히 70년 포로기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오심과 그것을 거부하는 유대인의 역사, 이후의 역사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언이 유효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당시 유대인에게 인용해서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려는 그들에게 영적저주가 여전히 임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 저주의 선언은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과 포로시대 만이 아니고 그 이후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결국은 완전히 망하여 돌위에 돌이 첩놓이지 않고 완전히 파괴하도록 하는 중대한 선언이다. 엘리야를 통해 선언하신 하나님의 계시, 삼중 심판, 이것이 이사야에게 와서는 무서운 영적 저주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야를 통해 선언하신 선언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와 다스림을 받는 역사라는 의미에서 언약을 파기한 족속이요 철저한 심판 속에 두시려는 역사로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은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는 역사이다. 사 6장이 왜 이렇게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하늘의 환상들, 스랍들의 외침,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언되었는가는 이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결정은 이제 이스라엘을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 가운데서 완전히 망했다고 할만큼 철저한 심판을 겪게 될 것이다. 망하여 없어진 곳에서 새롭게 싹터는 새로운 가능성의 여운은 남아있다.
7장에는 요담의 아들 아하스라는 왕이 유다 왕이 되었다.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예루살렘을 치러왔다고 한다. 왜 왔는지는 설명이 안되고 있으나 경외에 보면 예전부터 앗수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 소국가가 동맹을 맺어 저항을 해왔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국가의 맹주역할을 한 사람이 대개 아람왕국이다. 그런데 아람왕이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반앗수르 세력을 형성했는데 아마 아하스가 동조를 안한 것 같다. 아하스는 어떤 정책을 펴는가? 앗수르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러니까 아람이 예전처럼 팔레스타인의 소국가를 규합해서 앗수르를 대적하려고 했는데 아하스가 동조하지 않는다. 6절에 우리가 아하스 대신에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한다.
2절에 아람이 에브라임을 의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백성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때 여호와께서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두 아들이 표적이라고 했다. 이제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의 침입앞에 두려워하고 동요하는 백성들, 왕을 찾아가서 이사야가 고한 말이 두려워말라 불타는 부지깽이에 불과한 저들을 두려워말라고 한다. 저들의 도모가 서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아람같은 에브라임은 망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네가 믿지 않으면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이라. 네가 믿으면 든든히 서리라고 한다.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 든든히 설 것이라고 한다.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어떤 제안을 하시는가? 여호와로부터 표적을 구하라고 한다. 그 표적이 아무리 깊고 높은 것이든 음부에까지 든지 어떤 종류의 표적이든 좋으니까 구하라고 한다. 약속의 진실함을 보이겠다고 한다. 그런데 아하스가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이것은 말은 경건하게 보이나 마음은 앗수르를 의지하도록 정한 것이다. 13절ᄋ 이사야가 말씀한다. 하나님이 친히 주실 표적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표적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그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줄 알기까지 버터와 우유를 먹으리라. 이 아이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그들 앞에서 가증히 여기는 왕의 땅이 폐한 바되리라고 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망할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표적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하스는 하나 의 구원약속을 거부하고 앗수르를 의지했다. 여기에 대해서 책망하면서 주신 표적이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표적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7절에 앗수르 왕을 불러일으키겠다고 말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인데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는 분이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거부한 아하스에게 이러한 표적이 되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뜻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하스의 불신앙이니 다윗 왕가의 실패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베푸시고 주시는 것이다. 아하스의 불신앙, 하나님의 구원ᄋ르 거부하는 태도에 불구하고 이어서 구원의 표적을 약속하신 것은 구원의 표적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나 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임마누엘의 표적과 관련하여 까다로운 것은 여기에 태어날 아이가 누구인가? 아이가 악과 선을 택할 줄 알기전에 -. 금방 태어날 아이로 보인다. 태어날 아이가 당시의 태어난 아이로 그가 표적적인 인물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에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나라가 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곧 태어날 아이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해야 할 것인가는 별 문제이다. 특히 히스기야로 많이 본다. 문제는 히스기야 시대의 연대가 굉장히 복잡하다. 이때 히스기야의 나이는 10세 이상이다. 히스기야 전후로 연대가 흐트러져 있다. 상당한 기간이 계산하면 맞지않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숙제로 남아있다. 이것을 떠나서 그 당시의 인물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면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다는 말이 동정녀 탄생과 의미가 멀어진다. 마태복음에서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두 왕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망할 것이라는 것 때문에 문제다. 그런데 이 말을 그렇게만 볼 것인가? 아이가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 버터와 꿀(자연 채집한 것)을 먹는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매우 질박한 식생활, 검소하고 구차한 식생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어 선악을 선택할 줄 안다는 것은 분별의 나이, 성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버터와 꿀을 먹는 것은 심판의 비참한 상황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성년이 되기까지 두 왕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태어나서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기간을 말한다기 보다는 임마누엘이 성년이 되어 이스라엘 앞에 나타날 때까지 이 두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면 어려움을 조금 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뜻은 임마누엘을 보내 함께 거하시겠다는 깨끗하게 하고 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본래 구원의지는 흔들림이없음을 선언한다. 그렇다고 불신앙에 대해 무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만이 망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너와 백성, 유다에게도 앗수르를 보내서 짓밟겠다고 한다. 7장 마지막에는 그로인한 유다가 겪게 될 심판의 참혹한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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