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서 강의2(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선지서 강의2(김성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시기에 관해서 밝히고 있는데, 그 시대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를 달리표현하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계시하였던 시기를 요담과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당시는 남북 분열시대기에 두가지 왕통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왕하에는 두가지를 다 언급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를 보면 북이스라엘 역사나 남유다의 역사나 큰 흐름에 있어서는 같이 간다. 물론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에는 유다가 남은 자처럼 여겨졌으나 그러나 큰 흐름에는 같이 갔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예후왕조가 들어서서 아합왕조를 숙청하고 그 이후에 아람에게 유린되는 시기를 거쳐서 점점 이스라엘이 강력해져서 예후의 증손인 여로보암2세때 오면 옛 솔로몬의 영토를 다 회복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만의 현상이 아니고 남 유다도 마찬가지다. rm 역할을 한 사람이 우시야 왕이다. 55년간 긴 기간동안 다스렸고, 부친 아마샤와 같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다스렸다고 한다. 항구건축과 회복은 남쪽 교역로 확보뿐 아니라 이곳에 이르는 에돔지역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의 세력을 확보한 것을 의미한다. 역대하 24:11이하에 부친 아마샤때 에돔을 굴복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유다 남쪽에서 엘랏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에 있었거나 적어도 영향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하 26:3이하에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스가랴의 생전에 하나님을 찾았으며 우시야로 하나님을 찾는 동안에 형통케 하시고 -- 성읍들을 건축했다고 기록한다. 이 지역은 블레셋의 아주 중요한 거점도시다. 블레셋은 5개 도시중 2개를 빼앗겼으니 상당히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 명성이 애굽에 까지 알려졌다. 블레셋을 쳐 이긴 것은 서쪽 지역을 그 세력하에 두었음을 말하고 조공을 바친 것은 동쪽 지역이 그의 세력과 영향하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 지역에 대한 우시야의 지배가 얼마나 철저하엿는지는 모르나 남북을 합쳐서 옛 솔로몬의 지배권을 회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막지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마른 우물을 많이 만들었다.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농경을 위해서 밭을 많이 두고 농부를 두었다. 잘 준비된 지휘관 2600을 두고 군사를 두고, 공격 방어용 무기를 두었다. 이런 내용을 미루어 다같은 시기에 옛 솔로몬의 영토 회복하고 주변 나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이다.
또 8세기 선지자들에게서 살펴보면 당시의 종교적 열심도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외향적인 경건에서는 대단히 열심이었다. 진정한 경건한 왕들이었다. 영적으로도 어느 시대보다 축복받은 시대다. 아하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시대 외적상황과 걸맞지 않는 정죄와 불신앙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이 그러나 그 시야는 당시를 뛰어넘어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역사의 근본 성격을 한 마디로 본다면 우시야와 요담은 대체로 긍적적인 평가를 받는다. 나중에 범죄하기 까지는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런데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어떤가? 앗수르를 끌어들이고 했다., 유다를 신앙적으로 타락시킨 인물이다, 아하스에게서 누가 태어나는가? 히스기야가 되어난다. 경건한 왕의 표본이다. 히스기야에서 므낫세가 난다. 므낫세의 아들이 요시야이다. 경건한 왕에게서 못된 왕이 태어나고 못된 왕에게서 경건한 왕이 태어난다. 우리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다.
요나를 이해하면 그 다음에 아모스가 다음 선지자로 활동했다고 하면 아모스가 등장하여서 사자와 같이 포효하신다. 그 위협적인 음성을 발하신다는 심판의 말씀을 가지고 등장한 시대가 시대적으로 암울하고 비참하고 궁핍하던 시대가 아니고 유래없는 이스라엘의 부흥기다. 옛 황금시대가 되돌아오는,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던, 하나님에대한 열심히 대단했던 시기다. 이런 시기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이 더 충격적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못살아야 한다. 늘 짓밟히고 가난하고 허덕여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풍족하게 베풀어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원칙적으로 말씀하실 때 믿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고난, 핍박이 떠날 수가 없다. 나를 인해 아내, 처자와 전토를 버린 자는 배나 받을 것인데 핍박을 겸하여 받을 것을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교회에서는 잘산다는 말을 안해주면 설교가 먹혀들지않는 경향이 있다. 어딘가 고장이 났다. 참으로 하나님이 물질적인 외적인 축복을 베푸신다면 감사하게 받을 것이요 뜻있게 청지기 자세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추긴다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평가를 읽어보면 세속적 관점에서 평가와는 매우 다르다. 사실 아합왕 아버지 오므리가 정권을 잡았는데 세속적으로는 유능한 군주다. 혼란한 나라를 바로잡고 군사를 안정시키고 했다. 이세벨을 며느리로 삼은 것도 외교적인 조치였다고 이해한다. 그 당시의 앗수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곳이 알려지기를 오므리의 집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 왕조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 어느 왕보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한 왕이었다고 한다. 세속사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근본적으로 맞지않다. 세속적인 관심이나 시각, 평가기준이 교회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 천당하던 복음의 핵심이 예수 믿으면 잘된다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한때는 피세주의라고 했다, 현재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욕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일반 신자는 하나님 나라, 교회의 시민인 반면에 다른 불신자와 함께 국가의 시민이다. 국민으로서 책임,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가장 모범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라는 기관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측면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2장과 관련해서 어려운 점이 있다.
2:1 선지서 앞에 기록된 것이 또 기록되어 있다. 본래 2장부터 시작하는데 1장을 나중에 붙인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13장 같은데 맛사라는 헤딩으로 이방 여러 나라에 관한 것을 따로 모아놓은 것도 있다. 이런 형식적 구조는 1장과 2장은 구별된다. 1장은 독립적인 단위라는 느낌을 준다. 1장 자체를 봐도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말하는 1장 자체도 그 단락이 어떻게 나우어진다는 형식이 있다.
2-9절까지 10절-20절까지, 21절이하로 단락이 나누어진다. 형식적인 특징에 따라 단락구분을 짓는 것이 타당하냐는 내용을 살피면서 해보도록 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마당에서 천지를 불러 들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신 32:1과 같은 내용이다. 그 행위가 온전한 반석이신 여호와의 이름에 대해서 말한다. 5, 6절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비와 자식의 관계로 말하면서 배은을 말한다. 이사야서와 같은 표현을 많이 말한다. 사 1장이 신 32장을 의식하고 썼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천지를 부르는 표현이 완전히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이사야 1장과 신 32장은 깊은 관계가 있다. 1장을 기록할 때 신 32장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예언의 역사적 배경이 이사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신명기 상황까지 소급한다. 이사야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신명기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체 역사와 관련해서 특해 신명기 역사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 이사야는 긴 역사적 시간, 관점에서 예언하고 있다. 장구한 역사과정을 의식하고 있다. 만일 이사야 1장이 신 32장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첫 예언 시작을 천지를 불러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 32장에서 천지를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신 32장의 첫 절에 천지를 부르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신 31장을 볼 필요가 있다. 신 31:28, 29 이스라엘이 부패해서 배역하게 된 사실의 증인으로 천지를 불러 세우고 있다. 천지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배역할 것에 대한 증인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명기의 전체 내용이 무엇인가? 신명기는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길이 며칠 길인가? 열 하루 길이다. 그 다음에 기억된 것이 40년간 광야 여행한 과정을 회상하고 있다. 모세는 지금 그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교훈하되 왜 열 하루길 밖에 되지않는 길을 40년간 여행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반역하여서 광야에서 엎드러졌는가를 말한다. 광야에서 얻은 교훈을 한마디로 순종하며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재확인하면서 갱신체결을 한다. 이스라엘로 순종의 서약을 재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언약갱신을 앞두고 한편으로는 옛광야 40년 여행을 회상하면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진술하고 이제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인데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언약을 맺으면서 순종하면 생명과 축복을 줄 것이나 불순종하면 망하리라고 한다. 맨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앞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반역할 것이요,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천지를 불러 증인으로 세운다. 너희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의 말이다. 순종하라 해놓고 너희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무엇인가? 이 노래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반역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노래이다. 심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노래이다. 너희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만 해도 겁이 나는데 노래를 지어 계속 부르게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동안 불신앙 세력은 멸한 바되고 새 이스라엘이 형성되어 가나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왜 배반과 심판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하시는가? 그 이유를 신 31장21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성품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순간 행하는 것에서 그들의 성품, 영적 본질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품을 따라 행동하며 앞으로도 그 성품을 따라 행할 것이기에 그들의 미래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7절에 이 성품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목이 곧고 완악한 성품이요 반역적인 성품이라고 한다. 반역성이 교정불능, 순종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아주 절망적인임을 암시한다. 신명기는 광야여행에서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교훈앞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도무지 거룩할 수 없는 성품을 제기한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러한데 내가 죽은 후에야 어떠할까를 말한다. 불문가지라는 말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살겠다는 언약앞에 선 이스라엘이 결국 율법을 범하여서 정죄당하여 심판받은 역사의 의미를 심화시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이 지킬려고만 하면 지킬 수 있는 것인데 싫어서 범죄한 것이 아니고 또 그로인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악함으로 특징지어지는 부패에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영적 무능에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도 없고 반드시 깨뜨릴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될 경우 자연히 26절에 의의 규범인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을 말한다. 율법의 기능은 정죄밖에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영적무능을 확인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깨뜨렸고 심판을 받아 망했다.
이사야가 그의 예언을 시작하면서 천지를 소환하고 있는데 이 표현을 단서로 해서 비슷한 내용을 말하는 신 32장에 가보니 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를 때는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뜻을 담아서 천지를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반역해서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증거의 노래이다. 왜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원인을 제시하는 것을 살펴보니 이스라엘은 성품상 목이 곧고 반역의 무리라. 틀림없이 반역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신명기라는 책이 단순한 책이 아니다. 광야여행중 교훈을 말한다. 가나안 눈앞에 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권면하는데 이스라엘에게 직면한 문제가 있다. 그것이 자기의 부패한 성품이다. 죄악성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신명기 자체의 해답은 다시 나온다. 우선 이사야서와 관련하여 이사야는 이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지 살펴보자.
이스라엘 역사는 자신이 가진 근본문제, 율법앞에서 영적 무능함 때문에 결국 예언대로 범죄하여 심판받아 망했다. 이사야는 그 예언 서두에서 신 32장의 이런 내용을 상기시키되 그 예언이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사실로 나타난 것을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보는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깊은 문제, 부패와 전적무능, 필연적이었던 모든 인류의 불행과 근본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소도 구유를 기억하고 나귀도 여물통을 기억하는데 내 백성은 그렇지 못하다. 짐승보다 못한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책망한 것만으로 본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면서 신 32장을 상기시키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렇게만 보지말라는 것이다., 은혜의 배은망덕으로만 보지말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떤 시각에서 볼려고 하느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앞에서 섰을 때 안고 있는 문제, 전적부패와 영적무능의 관점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사야를 통한 모든 선지서를 읽을 때 단순한 윤리적 시각에서 행하려고 했다면 행하지 못한 배은망덕을 지적하는 것으로 접근한다면 선지서의 깊은 면은 파악할 수 없다. 일반적인 학자들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보는가? 선지자들이 나오기 전에는 주위 민족들과 종교적 수준이 다르지 않는 저급한 수준이 있었는데 선지자들의 등장으로 고도의 윤리종교로 발전했다고 한다. 선지자들의 독특성을 윤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선지서의 참된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사야는 예언 첫 서두에서 신 32장을 상기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죄악의 역사를 단순한 시각에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앞에서 안고 있는 근본문제, 부패성, 완악함, 영적 무능의 문제,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어떻게 발전, 진행되어 왔는가 이것을 보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선지서가 피할 수 없는 실패의 원인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은혜를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서가 이것을 말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것이 없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음을 말하고 있고 구원과 함께 29장 초두를 읽어보면 마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근본 변화를 받을 것을 말한다. 근본적인 문제가 철회될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선지서의 조건은 죄를 그치고 회개하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선물에 구할 수 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선지서들의 내용이 흔히 신약의 복음서와 일치한다고 할 때 미래의 구원과 메시야의 오심을 말한다고 한다. 심판과 구원중 일부만을 말한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로서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심판 선언을 통해서 불가피성, 근본적인 부패와 무능, 절망적인 영적 현실을 말하면서 복음의 은혜가 불가피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실패 자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다. 이런 점에서 선지서는 복음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지 않으면 선지서 전체 메시지 구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시각에서 보지않기에 심판을 말하면 일관적으로 심판을 말해야지 왜 구원을 선포하는가가 제기된다. 8세기 선지자들은 심판을 선언했는데 포로후 선지자들이 구원을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되는가?
앞에서 말한 시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선지서의 내용이 지리멸렬해진다. 심판을 선언하면서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면 회개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심판받아 망할 것은 기정사실화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왜 앞으로 오는 구원은 왜 은혜로 말미암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이런 것이 이해가 될 수 없다. 신명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선지서를 이해하면 그런 것이 이해가 된다. 일목요연하게 아귀가 잘 맞는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히 배은망덕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책망할려는 엄중한 심판, 멸망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떤 틀에서 무슨 배경으로 말하는지를 봐야한다. 이러기에 단순하게 구원을 이야기할 때 은혜로 받는다고 하고 은혜의 핵심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할례, 영적인 변화, 성품자체를 변화, 제거하시겠다고 말한다.
2001년 4월 3일
언약백성으로서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서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죄악성, 그들의 성품, 체질인 목이 곧고 반역하는 성품이라고 표현된 악한 성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 성품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면 다른 신들을 찾고 배역하리라고 단정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가진 내적인 부패성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면 양쪽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실패, 반역할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한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내적인 악을 극복할 힘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함께 신명기 19"3에 보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않았다고 하셨고 30장에서는 심판에서 돌이키실 때 마음의 할례를 하시리라고 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직면하였던 부패상의 문제가 어떤 성격의 문제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사야서가 심판과 구원의 예언을 하기 전에 이 약속의 땅을 앞에두고 모압광야에서 모세가 마지막 고별사를 하는 그때 내용을 다시 상기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가 선언하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근본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알리려고 했다.
이사야 1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첫부분 1:2-9은 첫시작이 출애굽의 고별사의 시작점으로 시선을 돌려서 이사야의 시대까지 이르게된 과거사를 나름대로 더듬어 보고 있다.
첫째 부분은 아비와 자식의 관계를 비유삼아 이스라엘 과거 역사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아들들을 길렀고 저들을 양육하였으나 그들이 나에게 반역하였도다. 자식을 기르는 아비의 심정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돌보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를 아비의 사랑에 비해 말한다. 부정적 사랑에 비유했다는 것은 아비란 자식을 낳은 자요 존재케 한 자요, 모성은 해산의 고통과 관련된 반면에 아비는 자식을 존재하게 한자, 만든 자로 언급되고 있다. 목적을 두고 존재하게 한 자의 애착, 피조물에 대한 포기하지 못하는 사랑, 불변의 사랑이 아비의 사랑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창조 목적에 대한 집착,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부성이 돌아온 아들에게 돌아온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고 확인한 부성이다.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슈브'돌아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도 주인을 알고 한 것도 앞서 이스라엘의 아비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구유는 먹이를 담아주는 것인만큼 주인이 생존케하신 은혜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의 어의없음을 짐승과 비교하여 극적으로 표현한다.
죄의 백성, 죄의 나라, 민족이라고 한 것은 본질이 죄됨을 말하고 죄가 무겁다고 한 것은 그 죄성이 중하고 심각하고 절망적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심각한 죄상이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행악자들의 근원이 영적 혈통이 행악자들임을 말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독사의 자식이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면서 그들의 영적소속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전 역사에 이어져 왔음을 말한다. 부패한 자식들이란 부패한 조상들로부터 태어난, 물려받음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능멸하며 반역한 것은 뿌리깊은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이사야가 신31, 32장에 제기한 이스라엘이 직면한 뿌리깊은 죄성, 부패성에 대한 암시를 단순히 2절 전반절 하늘과 땅을 불러 찾는 표현에서만 암시한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2절 하반절, 3-4절에 이르는 내용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뿌리깊은 대대로 물려받은 절망적 죄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표현을 통해 신 32장에 제기한 문제를 의식하고 암시하고 있다.
5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질병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반역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징계당한 일을 염두에 두면서 그럼에도 죄악에서 돌아서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안타깝게 탄식한다. 어찌 더 맞으려고 더 반역하는가 묻고 있다.
온 머리가 병들었으며 온 마음이 병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병의 깊음을 표현한다. 머리가 병들었다, 마음이 병들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전한 곳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과 밖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전체가 깊이에 있어서나 구분에 있어서나 전체가 병들어서 단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음을 우리에게 표현한다. 그들의 병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르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스라엘 전부가 병들어 있다고 말한다. 상처와 매맞은 자국, 쉴새없이 얻어맞아 아물기도 전에 새로 터진 상처로 가득하다. 기름을 발라 치료하지도 못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징계의 심판을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계속된 범죄로 끊임없이 징계를 받아왔다. 옛상처가 아물기 전에 새 상처를 입었다. 비유적 표현에서 좀 더 직접적 서술로 나간다. 곳곳에 심판의 흔적에 대해 말하되 7절. 너희 경작지는 황폐하였다고 말하며 예루살렘 성읍이 포도막 초막, 망대처럼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오직 시온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말한다. 포위된 성에 비유한 것은 대적에 에워싸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상황을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남은 자를 남겨두셨다는 9절과 잘 통한다. 이스라엘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한다. 유다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불쌍히 여김 때문이다. 징계속에서도 긍휼을 베푸시고 남은 자를 주신 것이다. 심판의 여지를 두셔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하지는 않았다. 심판중에도 긍휼을 잊지않으신고로 이스라엘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만큼 심각해서 멸절당해야 마땅하나 긍휼로 말미암아 소수라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9절까지의 내용을 gksakell로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로 시작되어 지탱되어온 이스라에릥 역사는 이스라엥리 끊임없이 배역한 역사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수준,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불가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것이 망한 역사적 사건은 언제나 하나님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던 부패의 전형이다. 소돔과 고모라 말자체가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한다. 심판날 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땅에서 멸한 효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 이스라엘로 명맥을 유지하게 하셨다.
두 번째부분 10절이하에 내용, 첫부분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시작부터 신32장부터 이사야 당시까지 과거의 역사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셨다면 두 번째부터는 이스라엘의 현재모습에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암시하고 있다. 관원과 백성은 지도층과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만큼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영적본질상 소돔과 고모라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 그렇게 부르기를 서슴치 않았다. 특별히 바로 앞에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하나 이 남은 자를 두지않으시면 우리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죄악으로 보면 당연히 망해야 하나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또 이어서 이스라엘을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제야 하나님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똑같은 "들으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는 들으라는 대상이 천지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스라엘 자신을 대상으로 들으라고 외친다.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먼 거리에서 시각적으로 넓고 광활한 것이요 시간적으로 먼 곳이다. 당사자에게로 옮겨왔으며 시점도 먼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왔다. 대상이나 시점에서 직접적인 관심으로 옮겨진다. 이스라엘 죄악에 대한 어떤 서술 역시 상당히 형식적이고 비유적이고 암시적인 반면에 과거 시점에서 객관적이고 어느 정도 피상적으로 서술했다면 이제 여기 와서는 현재의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할 뿐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내적깊은 곳에 은폐되어있는 것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죄악성을 파해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죄를 파헤친 서술을 살펴보면 어디서 소재를 따오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제의다.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제의를 소제로 삼고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제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형식과 성격의 삶이요 이스라엘 삶중에 매우 특별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제의의 특징중 중요한 것들 몇가지를 뽑는다면, Vergegenwartigung(현재, presence) 현재화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 5대 제사가 있지만 그외에도 어떤 것이 있는가? 절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유월절이다.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가 유월절이다. 이것이 제의에서 어떻게 되는가? 유월절마다 제의를 통해 오늘 다시 우리의 것으로 하고 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되살려 경험하는 것이다. 이 말을 히브리말로 표현하면 '자카르' (기억하다)이다. 또 제사는 어떤가?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는가? 앞으로 그리스도가 드리실 온전한 제사의 상징이다. 구약에서 제사는 무엇인가? 미래의 것을 오늘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성막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했다. 하늘영역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상징을 통해서 만들어 주셨다. 전벽에 금으로 싸고 스랍을 새겨놓았다. 이런 것들은 하늘영역, 신령한 영여게 속한 것인데 이런 상징들을 통해 감각할 수 있도록 '현재화' 시켜 놓았다. 제의의 특징은 현재화 (here and now) 이다.
제의의 이러한 성격,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떤 모양으로도 우리의 접근이 차단된 것이다. 하늘의 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제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데 상징을 통해 경험하는데 상징이라면 실제와 상징의 관계에 있어서 상징은 그 의미가 절하되기 싶다. 그러나 제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 존재를 가능케하는 은혜를 받아누리는 수단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임재의 처소, 중심에 거하시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것이다. 제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물론 당시의 드린 제사나 제물 그 자체가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징에 불과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참 실체와 비교할 수 없지만 상징적이나마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누렸고, 이것은 존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제의가 매우 중요했다. 제의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들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의 얼굴을 뵈며 영적교통을 누리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은혜를 상징하며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의가 목적하는 바는 하나님과 만남과 교통이라는 것은 제의가 이루어지는 성막 그중에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그곳에서 만나 말하리라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같이 간접적으로 상징에 의해 참여, 경험하며 누리는 것이지만 이것이 존재에 결정적이고 핵심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삶을 초월하며 너머의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 너머의 것이 이스라엘 존재와 삶의 본질인 것을 말한다. 이 땅의 것을 초월하는 하늘의 것, 먼 미래의 것, 완성과 실제가 이스라엘 존립의 근거였다. 이렇게 중대한 제의가 하나님 앞에 생명을 누림에 있어 결정적인 부분이,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제의가 전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람마리 로브-지브헤켐' (너희 제물의 많음이)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경건의 외양은 대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수양의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에 내가 배불렀다는 것이다. 차올라서 토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황소, 양,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먹어 토할 만큼 많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너희를 위하여 대신 흘려지는 피를 인해 너희를 용서하고 받으리라 했던 제물의 피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너희가 내 앞에 나타나려 하여 나아오나 누가 이것을 요구하였는가 '리로트'와 '레라오트'의 차이가 무엇인가? 시리악 사본에는 '너희들이 내 얼굴을 보기 위해 나아올 때' 라고 되어있다. '레라오트' '내 앞에 보이려고 나아오니' (니팔형)
하나님 앞에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면전에 나타나는 것은 뜻에는 차이가 없다. 곧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그에게 용납되는 것, 열납되는 것,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제의에 관해 말하면서 너희가 나에게 보이려고 나아올 때에서 간접적으로 제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서 그에게 뵙기 위해서 용납되기 위해서 나아온 것이다. 이것이 제의의 목적이다. 제의의 전제조건이다. 제의의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번제같은 것은 그 목적을 너로 하여금 열납되게 할 것이다. 사람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제의의 목적이라 할 수있다. 어떤 경우는 받아들이는 것이 자체를 넘어 전제로 하고 더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감사제, 낙헌제, 화목제와 같은 것이다. 또 기도 자체도 그러하다.
너희 많은 제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수양의 -- 기뻐하지 않는다 하시고 너희가 내 앞에 나아오니 누가 이것을 너희 손에서 요구하였느냐 내 뜰만 밟을 뿐이니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뵙기위해 제의 목적이 하나님께 나아감을 비유한 것인데 제물로 하여금 제물이 제사자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제물이나 제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제사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뵙기위한 것인데, 열납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은 누가 이것을 요구했느냐고 말한다. 이러니 말이 완전히 안된다. 뒤엣 말이 앞에 것을 부정해 버린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조건, 열납되고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적어도 현재 이스라엘이 드리는 형태의 제사는 아니다. 이런 형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것을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의 제의가 많이 드리는 제의가 성전뜰만 밟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는가? 어떤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고 왜곡이 생겼는가? 누가 이것을 요구하였는가 반문은 이스라엘의 제의는 하나님이 참으로 요구하시는 본질이 그들에게서 빠져있음을 말한다. 뜰만 밟을 뿐이라는 것은 알멩이 없는 제의라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진정한 조건이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제의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13절에 보면 제의가 단순한 제의가 아니고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다. 앞에서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양의 기름, 황소의 피 이렇게 해서 제물 자체를 가리키는 같은데 13절에 가면 소제라는 말에 헛되다는 말이 붙어있다. 그리고 분향이라는 말에 가증하다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제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제의를 외면하신다는 뜻이다. 헛된 제의 또는 제의를 헛되게 하는 요소가 포함된 방식으로 드려지는 제의를 거부하신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의로 하여금 무의미하고 가증한 것으로 만드는 것 때문에 월삭과 안식일과 성회로 모이는 것과 내가 죄악과 성회를 감당할 수 없노라. 자기를 괴롭게 하고 자기의 죄를 살피고 성회로 모이는데 죄가 있다는 것이다. 둘을 아울러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런 죄악을 선지자들이 많이 선포한다. 금식을 선포하면서 뒤로는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이 무슨 회개냐?
이런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제의로 하여금 무의미하게 만들고 가증스럽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가 암시되었다. 너희들의 월삭과 절기를 내가 미워하며 헛되다. 가증스럽게 보신다. 미워하신다. 내게 짐이 되어서 짐지기에 피곤하였노라. 제사와 관련하여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제의에 대한 표현이 무엇인가? 열납하신다, 흠향하신다는 표현이다. 전부 제의가 본래 기능을 다하면 향기로운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에게서 죄가 어떤 모양이든 죄 때문에 하나님께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너무 반복이 되었기에 짐지기에 피곤하였다고 말한다. 너희가 손을 펼지라도 내 눈을 너희로부터 숨길 것이요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재앙을 구하기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하면 제의에서의 기도의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만나고 그의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받아누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가 거부당하고 외면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은혜를 끊어버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교통, 만남도 거부하셨다는 뜻도 된다.
15절에서 이스라엘의 제의가 완전히 거부당한 이유를 밝히기를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16,17절에 이어서 말씀하신다. 레위기 26:31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그들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다. 무의미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죄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것 역시 앞뒤가 안맞는 듯 하다. 제사라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은혜가 죄사함의 은혜이다. 죄의 대속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제사를 드리는 자체가 죄를 전제한다. 죄가 없으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버린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기 위함이지 우리 죄악 때문에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모순이 되는 것같이 보인다. 여기에는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시는 이유와 삶의 실패, 악한 행위라는 것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 이면에 감추인 더 깊은 것들, 그들에게서 악행으로 나타난 더 근본적인 조건, 영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악행을 지적한 것은 악행, 죄악 자체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의 행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구하여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거룩한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열매맺는 것을 실패했다. 불순종, 불신앙 전체 과정을 봐야 한다. 밖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식, 하나님과 만남과 은혜를 위한 시도를 외면하시는 이유, 제의와 삶의 괴리로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배따로 생활따로가 잘못이라는 의도가 무엇인가?하나님의 은혜는 제의를지속적으로 gkadmf서 가능하다. 얺약준수 안에서 가능하다. 범죄는 심판을 초래한다. 심판에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가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못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편에서 영적 만남과 교통이 거절된 것이 행위의 악함 자체만 두고 하신 말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초래한 영적인 면을 지적하신다. 제사자체가 죄사함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라면 행위의 악함 때문에 거부한다고 하면 모순이다. 그러기에 좀더 깊은 의미가 잇을 것이라고 본다. 악한 행위 배후에 있는 이면에 감추인 것에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죄사함의 은혜가 어던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가를 볼 피룡가 있다. 죄사함의 은혜는 어떠한가? 우리 죄가 사해지고 의롭다고 하신다. 다음부터는 우리가 은헤를 거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무한한 은혜가 있으니 죄에 거하겠느냐, 죄사함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가?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바울은 wlh사함의 은혜와 칭의, 성화의 밀접한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이런 반문을 시작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다 용서해주시니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6,7,8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내용에서 우리는 제의를 통해 베풀어지는 죄사함과 밀접한 연결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과정에 어떤 광범한 왜곡과 변질이 있기에 제의가 거부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말로 한번 대답을 대신해보자.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우리가 복음을 전해받았다하면서 저들과 같이(구약시대의 사람), 구약시대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어떻게 전해졌는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출애굽과 관련해서 홍해사건, 유월절 사건이 복음의 내용이 구현된 것이다. 또 좀더 분명하게는 제사의식들이다. 구약시대도 은혜,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저들에게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믿음을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옛언약하에서도 이스라엘이 복음을 들었으나 유익이 되지못한 것은 저들이 듣는 말씀에 믿음을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질적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제기한다. 이스라엘에 증거된 복음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었다. 믿음에서 실패가 거룩한 삶에서 실패를 초래하였다. 불신앙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외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죄악의 시작이다. 이사야가 여기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제의를 무의미하게 만든 원인을 제시하였을 때는 이런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누림과 거룩한 삶이 이루어지는 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씀한 것이다. 단순히 믿음과 은혜는 받았는데 삶에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조건이 믿음과 은혜에서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전체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원인이 악과 유혈이라고 말씀하신 의도에 대해서 살펴본다고 하면 이 구절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인 인간의 행위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가 제의를 의미있게도 무의미하게도 하는 것인가? 실상은 반대다. 인간의 근본 성품을 극복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인간의 성품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행위의 실패는 그 이전에 믿음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교훈에 비추어 이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왜 죄를 용서하시는 제의가 왜 죄에 의해서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하는가가 분명하게 표현된다.
질문) 믿음과 은혜
믿음 조차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것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행위는 은혜가 아닌가? 거꾸로 물어보면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안주시고에 달려있는가 사람에게 믿음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관계에 대해서 정리가 되지 않아 생긴 의문이라 생각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왜 죄사함을 받도록 된 제의가 왜 죄에 의해 무의미해졌는가? 이것은 죄된 행위에 국한 시켜 하지말고 이것이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 거룩하게 사는 신앙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과 관련하여 죄를 이해하게 되면 어째서 죄가 제의를 무의미하게 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이것을 하나로 묶음으로 말하면 삶에서의 실패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땜누이다. 은혜를 받지못한 것은 믿음의 실패이다. 믿음의 실패라는 말은 무엇인가? 은혜를 받는다고 할 때 은혜의 수단이 제의다. 제의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때 기본 자세가 믿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8세기 선지자들의 출현 메시지 핵심의 근본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것에서 반대한다. 행위가 옳았느냐 의로웠느냐의 관점에서 이 부분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마치 그렇게 하면 제의는 아무 소용이 없고 행위라는 것이 된다.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의가 받아들여지않는 것은 제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해졌기에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고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라 전제가 되는 은혜와 은혜받는 전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제의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말하는 이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2001년 4월 10일
이스라엘의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무의미함을 말한다. 이것은 제의의 양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물론 제의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제의를 행할지라도 제의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많은 것이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는 의미있는 제의를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됨으로 제의가 무의미하고 가증하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5절이하에서 무엇이 이스라엘의 제의로하여금 무의미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기를 한마디로 죄악이라고 밝힌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열납지않는 이유가 죄악이라는 이유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제의라는 자체가 죄사함의 은혜의 수단이다. 모든 제의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전제한다면 죄사함은 제의의 전제가 된다. 제의가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죄라면 앞뒤가 맞지않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않는다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죄라는 것 속에는 좀더 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들이 윤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의와 윤리는 배타적인 것으로 본다. 제의 대신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삶으로 이해하는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몇가지 제의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제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매우 외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것과 달리 인간내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차원의 하나님과 만남이다. 그리고 제의의 영역은 인간의 외부적인 생활, 삶과 무관한 것도 결코 아니다.
레위기 전체 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일 처음에 5대제사가 나온다. 구별된 장소, 임재의 장소 성소에서 특별하게 세운 제사장이 섬기는 것에 의해서 제사라고 하는 특별한 섬김의 형태를 가진 제의 영역이다. 눈에 보이는 의식을 통해 보이지않는 시간적 공간적 영역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실체에서 시작하나 음식을 가려먹으라, 부부관계, 출생 등 가장 일상적인 삶, 공동체적 삶의 영역과 틀로 확대된다. 이러한 레위기의 구조는 각각의 영역에서 분리되지 않고 상호연결됨을 암시한다.
인간의 내면적인 영역과 외부적인 행위간의 관계에 있어서 제의가 갖는 기능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씻지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보고 말할 때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로 말하시기를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에게 배운 것으로 나를 헛되이 섬기는도다"라고 한다. 여기서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시면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다. 이것은 우선 사람의 외부적 행위와 내면적 관계를 말한 것이다. 인간의 외부적 행위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내적 상태, 영적상태다. 외부적인 행위는 내적상태의 외적표현이기 때문이다. 내면과 외면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우선적인 것은 내면에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제의를 통해 말씀하신다. 제의는 자기들이 임의로 만든 것도 포함하지만 무조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의의 역할이 제의가 너희에게 외부적으로 몸을 씻으라 옷을 빨라고 한 것은 단순히 외부적인 것의 때를 제하라고만 한 것은 아니다. 제의적인 명령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의 내적인 정결함에 있다. 이런 의도가 분명히 들어나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레위기 10장의 음식규례를 말한다. 정결한 짐승만을 먹으라는 결례의 진정한 뜻은 내적인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로 우리 몸을 씻거나 옷을 빨라고하는 것의 명령은 우리 마음, 영혼을 깨끗게 하라는 영적인 정결명령이다. 그러면 외부적인 것은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결례나 구약의 제사, 제의가 사람의 외면과 내면의 관계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결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둔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에는 외면과 내면에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의라는 자체가 죄사함을 전제하는데 죄가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은 선후가 맞지않는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마 이런 말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를 포함해서- 언약이 지켜지는 조건하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은혜는 말씀을 순종하는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일만달란트 빚진 자가 백달란트 빚진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를 쳐놓고 너희도 용서하지 않으면 -- 말씀하셨다.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용서하는 삶과 함께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이것도 오해하면 안된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선행을 근거로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은혜를 입게된다는 원리를 말씀한 것이다.
범죄는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는 저주와 심판을 초래하게 되어있고 심판에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가 제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이 포함된다. 너희가 너희 손을 펴서 기도할지라도 내가 외면하리라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죄를 전제하는 죄사함의 은혜와 이것을 누리는 제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제의를 통해 베풀어주는 은혜는 순종의 틀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이 있다.
죄는 제의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사실이 있다. 곰곰히 생각하면 상충된다는 느낌이 든다. 얼핏 모순될 듯한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사실 죄사함의 은혜라고 하는 자체가 한편으로는 죄를 전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죄사함의 은헤는 죄를 사하는 것이기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죄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를 전제한다는 것은 죄를 묵인하거나 용인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죄를 사하기에 죄를 전제하나 동시에 죄를 사하여 씻어 정결케하심으로 동시에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관계가 있다. 이런 긴장관계는 요한일서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요한일서 1:6-7
빛가운데 거했는데 깨끗할 필요가 어디있는가? 이것이 지속적인 죄냐, 습관적인 죄냐 차이로 많이 설명하지만 긴장관계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8-9에 말씀하고 2장 1절에가면 --. 확실한 긴장관계가 깔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무한정 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으니 죄를 범해도 괜찮겠다는 가상적인 질문을 해서 흔히 '반법주의'라고 한다. 율법이 필요없다고 한다. 용서받을 근거가 있기에 그런 것이 필요없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죄에 대하여 죽은 너희가 죄에 거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여기에도 긴장관계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답을 찾는 대신에 잠깐 우회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사야에서 이부분을 가리켜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원인은 제의와 삶의 괴리다라고 한다. 의식과 삶의 일치가 되지않고 유리된 것이 제의가 무의미하게 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드러있다. 제의와 삶은 본래 분리될 수 없고 밀접한 관련맺고 있기에 이 관계가 깨어진 것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나 충분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적 만남과 교통의 시도가 거부당하는 이유를 죄악때문이라고 외부적 악행자체를 의식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적 죄악을 아울러 지적하는 것으로 오히려 더 분명히 그러한 면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제의라는 자체가 특별히 제의에 관한 가르침이 내부적인 동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의와 관련해 밝히신 사실은 마음의 본질을 외부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내부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상태는 더 깊은 것들, 영적인 조건들을 두고 말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악행을 지적한 것은 단순히 죄악 자체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외부적 악행과 더불어 마음의 문제, 또 믿음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악한 행위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의 은혜를 전제로 하는 행위, 죄씻음받은후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지는 거룩한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은혜를 상징하는 제의수단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은혜와 믿음이 그에게서 열매맺게 하는데서 실패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전체과정에서 실패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부당한 내적인 원인, 제의의 실패와 무력함의 깊은 원인은 불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종의 삶, 거룩한 삶은 은혜로 시작된다. 은혜를 가능하게 하는 제의라는 은혜의 수단이 있음에도 은혜를 받지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히 4:2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 것을 참고하라. 복음을 전하였는데도 왜 받지 못하였는가? 복음에 믿음으로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앙 자체가 가장 심각한 죄악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사야가 죄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으로 죄라고 했을 때 믿음까지를 포함해서 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런 믿음에서 실패가 거룩을 가능케하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의 실패를 이루었다. 믿음으로 제의에 참여할 때 얻어누리는 죄사함의 은혜가 정결한 행위, 거룩한 삶, 순종으로 이어지는 전체과정에 광범하게 개입한다.
요점은 흔히 성경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제한적으로 윤리의 해석들, 제의와 윤리가 충돌하고 있다는 표현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의는 겉으로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무엇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영적인 것, 신령한 것,, 미래 과거와 역사,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18-20절 : 18절의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번역을 따르면 너희 죄가 아무리 씻을 수 없는 죄와 같을지라도 희어질 것이다. 미래의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게 한다. 너희 죄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희어질 수 있다는 강한 가능성을 말한다. 더 강하게 하면 지금까지 절망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반드시 희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19절에 너희 앞에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다. 순종해서 복되게 되든지 아니면 계속 반역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1절부터 마지막까지 셋째부분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 된다.
이것의 문제점은 '따져보자'는 것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상황을 놓고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적합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 만일~하면" (임) 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런데 히브리 문법에서 의문사"하"가 없이도 의문문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이러한 죄는 이스라엘 죄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19-20절의 말씀은 율법의 원리를 재천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돌이킬 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보고 율법의 원리를 재천명하는 것은 오히려 절망스러움을 확정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으며 절망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을 가진 표현이다. 이 사실을 더 엄중하게 사람을 짓누르듯 돌이킬 수 없는 단호함으로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엄숙하게 확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은 "따져보자"는 말의 의미가 살아난다. 앞에서 아무리 제의적 노력을 한다고 해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번 따져보자고 한다. 죄를 들추어내는 의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두 번째 해석과 잘 연결이 된다. 순종하면 살고 반역하면 죽는다. 이 원리를 따르면 너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첫째와 둘째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현실은 한편으로 배은망덕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라고 할 수 있으나 먼시각에서 보면 근본적 부패와 타락, 반역적 성격 때문에 범죄를 피할 수 없는 신 2장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현실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 부패와 타락성, 죄악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여실하게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선지서의 증거, 예언을 적용하는데 특별한 시각을 제공한다. 단순히 회개를 권면하는 본문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절망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으로 가보자.
21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 의와 공의가 거하던 곳이 살인이 자행되는 곳이 되었다. 은이 천은(가짜 은-은속에 유황을 제거할 때 납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 산화납이 은에 섞이게되면 쓸모없는 은이 된다)이 되었고 맥주가 물을 탄 것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변질이다.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실하고 의와 공의가 충만하고 은, 맥주처럼 순전한 것이 되기를 원했다. 죄의 성격을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것에서 변질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패가 더욱 심각한 것은 상층, 지도층의 부패였기 때문이다. 관원은 반역하고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고 구하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도 대가를 구하였다. 부하의 소송을 공의롭게 처리하지 않고 힘없는 자들의 송사는 아예 그들에게 이르지도 못한다. 이런 이익추구에 도움이 되지않으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도 하지 않는다. 가장 취약한 계층 -과부 : 권리가 침해되는 계층이다. -을 보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정치를 대행하려는 의도가 완전히 빗나가고 있다. 이렇게 변질된 정반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밝히면서 내 대적에게 보수하리라고 한다. 여기서 내 대적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택하신 백성이 어느 틈엔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응하시리라. 하나님의 대적이 받을 형벌을 이스라엘이 받게 되리라. 앞에서 첫째부분이 이스라엘의 과거부분에 초점이 모아졌고 둘째는 현재, 지금 셋째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초점이 모아져있다. 이런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말한다.
하나님이 노하신 정도로 봐서는 수십장 심판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셔서 그런지 심판은 그 한마디 밖에 없다. 당장 내가 내 손을 돌이켜(다시 돌아온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변질한 이스라엘을 대적으로 처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행할 일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하실 일이 남았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천은이다. 천은을 잿물로 씻듯이 제련(정련)한다는 것이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전한 것을 다시 만드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린 이스라엘에게 대적으로서 받아야할 형벌을 가하시는 심판이기도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불순한 것이 제거되어 순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기회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 계획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 요나다. 왜 요나서가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와 함께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토대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그가 이 세대를 향해 주실 최대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왜 이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것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 다음 너의 재판관들을 그리고 너희 모사들을 처음처럼 히ㅗ복하리라는 말씀이다. 여기에도 처음처럼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처음 부르실 때 의도처럼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네가 의의 성읍이요 신실한 성읍이라 불리울 것이라고 했다. 심판후에 하나님이 탄식하시던 이스라엘의 모습, 본래 의도하시기는 의와 공의가 가득하고 신실한 성읍이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창기와 살인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심판후에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을 말하신다.
하나님이 대적에게 보응하듯이 형벌의 의미를 가지나 다른 한편으로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본래 의도하셨던 신실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27절에 '미쉬파'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는 한가지 단어다. 이것은 '쩨다크"와 붙어 다닌다. 이것을 둘로 보지않고 둘이 합해서 한가지 뜻을 나타낸다. (hendiadys-두개를 통하여 하나를 나타내는 기법)
예를 들어서 "욤 바 라일라"라고 할 때 낮따로 밤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루를 의미한다.
히브리 문학에서 병행법이 많이 사용된다. 이것 역시 hendiadys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의 통치 기초가 '미쉬파' '쩨다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는 '의인'만 들어간다. 이런 영적 상태를 현재 이스라엘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변질되었다. 신 32장을 끌어오면서 이것은 이스라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하면서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자신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 드러나 있다. (롬 1:17)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27절에 '구속'(ransom)을 말하고 있다. 그 구속이 무엇으로 되는가? 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 의는 누구의 의인가? 이스라엘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다. 그 대상은 누구인가? 회개하는 자(귀정한 자)를 말한다. 남은 자의 구속사상이다.
다른 부류에 대해서는 부정적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행악자와 죄인이라고 한다. 28절이다. 이들의 미래는 파멸일 것이다. 이스라엘 미래를 일률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중적으로 말한다. 회개하여 구속을 입는 자들, 그들에게는 이루지 못한 의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행악자들, 죄인들은 파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두 부류의 역사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한다. 29-31 하나님 저버린 자들의 받을 수치와 파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끌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니 누구도 막을 자가 없음을 가리치기도 하나 또 영속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으로 이사야서의 큰 틀이 밝혀졌다. 나머지는 이 골격을 따라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2001년 4월 17일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거부하시는 이유에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 성에 피가 가득하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죄악된 행위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의를 거부하게 하시는 원인이다. 불신앙에서 시작하여 불순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곳에 변질과 왜곡이 침입한 것을 가리킨다.
세번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 성격을 다른 면에서 말한다. 어찌하여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느냐 공의와 의가 충만하던 곳이 살인자의 소굴이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람직한 모습에서 벗어나있다고 이스라엘의 죄를 말하고 있다. 신실하도록 의도되어진 이스라엘이 신실한 나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의와 공평이 충만한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창기와 같이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 살인자같이 폭력을 일삼는 나라로 변질되었음을 말한다. 너희 은은 천은(가짜 은)이 되었다. 모양은 비슷한데 실제는 전혀 은이 아니다. 모양은 하나님 백성의 모양이나 실제는 전혀 아니다. 맥주에 물을 타서 이미 술의 향취나 맛을 상실한 것처럼 거룩한 백성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세번째 부분에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말한다. 첫번째 이스라엘 미래에 대해 선언하시기를 화있을진저 내가 내 대적으로부터 진노를 쏟아부어서 분풀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마음에 맺힌대로 보응하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을 대적으로 취급하사 모양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실제는 거슬리는 자에게 본질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대적으로 저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보응하시겠다고 했다. 또 너희에 대해 내 손 더하리라. 보응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가 아니다.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심판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쳐서 멸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정화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경험하게 될 심판이 이런 의미를 갖게 되면 심판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가 이어질 것인데 하나님이 처음과 같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리더십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 재판관, 모사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신실한 고을, 의의 성읍이라 불리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로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이 될 것을 말한다. 특별히 공평과 의라는 말과 관련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 본질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했다. 여기서 의와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통치의 기초이고 더 나아가 통치를 대리하는 자들, 정사와 권세들 - 물론 타락해서 잘못될 수 있으나 -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것은 세속권세들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통치 기초도 공평과 의다.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통치가 세우신 통치자들을 통해서 시행되면 그 영역도 의와 공평이 충만한 곳이 된다.
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이다. 여기에 통치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26절에 신실함과 의와 공평이 사라진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가능성은 배제되고 있다. 특별히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신의 의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의와 공평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구원할 수 없는 형편에서 다른 의인이 대가를 지불하고 속량한다는 것이 근본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롬 1:17이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유대인의 실패의 근본 원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것이라고 한다. (롬 10:2,3) 이사야서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다같이 앞으로 임할 혹독한 심판을 거치게 되겠으나 심판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일률적으로 임하는게 아니라 그중에서 특별한 자들에게 임한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하는 자, 돌아오는 자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악자, 범죄하는 자, 여호와를 저버리는 자는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져버렸다"는 것이다.
파멸이 임할 대상에 대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로 지칭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이다. 이것을 계속해서 이어받아 행하는 자들이다.
'미쉬파트 쩨다카'(공평과 의)를 말하면 엄격하고 폭좁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다. 이 속에는 사랑과 용서를 포함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겉옷이나 맷돌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려간 경우,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한다. 왜 돈을 갚지 않았는데 돌려주라고 하는가? 가난한 사람이 무슨 옷이 많아서 저당잡히겠는가? 밤에 겉옷없이 어떻게 지내겠는가 그런 사정을 생각해서 돌려주면 그 행위는 긍휼과 사랑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돈을 안갚았으니 주지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밤에 부르짖으면 그 책임을 그에게 돌릴 것을 말한다.
편의상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분리하지만 실제는 이것이 떨어져 있지않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자체에 사랑과 긍휼을 포함하고 있다.
여호와를 저버린다는 말속에는 다른 수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너희가 선택한 동산들, 나무는 경배, 숭배의 대상이다. 동산은 우상에게 제의를 행하는 장소다. 여호와를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을 전제하거나 수반하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우상 신들이 시든 나무와 같고 물없는 동산과 같아서 언젠가 그것을 의지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잎이 시듦으로 무력함을 드러내는 신들이 되리라. 너희 섬기는 신들이나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신이 서로를 불태우는 재료가 되어 함께 타되 아무도 끌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택하여 갔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물없는 동산같이 무력하여 전혀 도울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날 것이며, 그것으로 수치를 당할 뿐 아니라 거짓 우상과 서로를 태우는 재료가 되어 서로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끌 자가 없을 것이라. 여기에 의미가 무엇인가? 소멸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심판하시는 것을 아무도 제거할 수 없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이러한 심판이 궁극적으로 영속적임을 말한다. 신약에서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역해왔고 지금은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받고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미래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다같이 혹독한 심판에 이를 것은 사실이나 이것의 의미가 다르다. 긍정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고집한 반역에서 돌이킨 자,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 자체가 불신앙을 제거하여서 순전하게, 정결케 하는 정화의 기능이다. 본래의 온전하고 순전한 의롭고 신실함을 회복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이스라엘의 지금까지 고집하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파멸이 임할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한 것이 저들을 살리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이 드러날 것이다.이것이 오히려 멸망의 수단이 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기회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심판의 될 것이다.
2장
2:1은 1:1과 몇몇 단어 차이가 있긴 하나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다.
이것이 한번만 기록된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본래 이사야서는 2장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뒤에 서론으로 붙인 것이 1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스가략 1:1과 1:17에도 꼭같이 같은말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거기는 계시가 임한 날짜와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서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하나 선지서에서 이런 표현이 단 한번만 사용된다는 철칙은 없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계시가 새로 임한 경우가 적어도 두번 이상이다. 6장에서 제단에서 그의 입술을 숯불로 정켤게하는 것이 나온다. 이것이 처음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그렇다면 왜 처음에 기록하지 뒤에 있는가, 아니면 다른 문학적인 표현으로 연대순과 관계없이 되어진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다.
앗수르 블레셋을 치는 것을 보면 유다를 침입하는 사건들을 보면 이때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신 것이 드러난다. 특히 사 40장 같은 데서는 3절 외치는 자의 ---. 새로운 계시가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명백하게는 스가랴 1:1에서 보았듯이 여러번 걸쳐서 계시가 임했다. 그래서 이것이 편집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1-4은 미가서 4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어느 한쪽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 이사야가 이 부분의 말씀과 관련하여 따로 기록하였는가? 미가서의 예언을 두고 이것은 바로 이사야가 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도 문제가 잇다.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이라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동시대가 아니라면 편집자의 가평이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말이 많은데 유명한 학자들의 주석들을 보면 내용 자체에 대한 설명은 잘 없다.
이사야서 1장 셋째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두가지 상반된 미래의 가능성을 언급한데 이어서 2장에 와서는 그 시선을 먼 미래로 향하여서 본문중에 첫마디가 '날들의 끝'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역사의 종국'에 해당되는 말이다. 조심할 것은 성경이 마지막에 대해 말할 때는 훨씬 여유롭게 생각한다.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때, 또는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순간을 말한다. 히 1:1에서보면 '마지막 날에'라고 표현되어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시선을 역사의 종국으로 향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야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확대된다. 공간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범인류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특별히 시온의 궁극적 미래의 영광을 이방인 참여와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의 긍정적 미래를 혈통적 이스라엘에 제한하지 않고 이방 만국에 개방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온의 먼 미래에 대해서 이사야는 예언하길, 열국을 향해서 열려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이 서있는 산이 굳건히 세워질 것이다. 모든 언덕들 위에 높이 들려질 것이라고 한다. '산들의 꼭대기'라는 말이 무엇인가? 왜 거기에 전치사 '베( )'를 썼는가? 단순히 산들 위에 썼을 것이라고 하면 '알( )'을 써야 한다.
산위에 산이 세워진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썼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산들의 선두에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여러 산들이 있는데 지위또는 위치가 선두, 맨 앞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the leading mountain)
땅에 높이 솟은 모습의 인상에 따라 힘, 세력, 권세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 국가세력이나 종교세력이든지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시 68편에 다른 여러 성들이 시온 산과 지위를 다툼으로 시기하는 시선으로 시온을 바라보느냐는 표현이 있다. 이사야 2:2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는 산이 굳건히 서리라는 말은 임재의 처소로 시온의 권세가 굳건히 확립될 것을 뜻한다. 산들의 머리에 굳게 설 것이요 시온의 권세와 지위가 모든 세력중에 으뜸이요 다른 모든 세력위에 탁월할 것을 말한다. 시온은 장차 하늘과 땅의 으뜸이요 머리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요 탁월한 지위에 설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온이 높아질 영광을 말한 다음에 모든 나라들이 그에게로 물처럼 밀려들 것이라고 한다. 탁월한 지위와 영광이 세계 만국을 유인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가? 땅의 모든 족속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민족들이 우리가 여호와의 산 야곱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열국을 유인하는 핵심적인 것이 하나님의 집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열국은 시온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강물처럼 밀려드는가? 유인 요인이 무엇인가? 시온의 진정한 영광, 탁월한 지위를 얻기위한 것이 무엇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그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며 시온에서 율법이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라고 말한다. 열국이 몰려드는 까닭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가 계심이며 --.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시가 모든 민족들을 이끌어 들이는 요인이요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강물처럼 밀려오며 우리가 그의 집에 올라가 그의 빛가운데 거하게 하시리라. 말씀은 능력이 있어 말씀으로 나라를 판단하시고 바르게 하셔서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하신다. 나라가 나라를 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다. 나라가 나라를 향해 피를 흘리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창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들의 자손들의 역사라 하면서 그 아들들의 역사의 성격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분열의 역사다. 벨렉때에 바벨탑을 쌓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분열의 과정에는 특별히 함계통과 관련하여 얘기한 것인데 각 나라와 민족으로 분열된 것의 성격이 나온다. 니므롯의 영웅의 출현이 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세운 영웅이다. 이것을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전쟁을 통한 정복이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피를 흘리는 전쟁은 바로 홍수 이후 인류 역사의 근본 성격이다. 이런 피의 전쟁을 통해 나라는 갈라진다.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우리는 잘 안다. 전쟁만큼 비참한게 없다. 전쟁, 피흘림을 피하기 위해서 각국의 원수들이 머리를 맞대로 연구한다. 때로는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힘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날 것같으면 선제공격을 해서 아예 대적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끊임없이 군사력으로 정치력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해왔다. 땅위에 참된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단 한사람, 한 국가도 전쟁없는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어떤 군사력, 정치력, 물리적 협박, 교육, 설득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깊이 박힌 미움과 증오와 이기심, 다툼을 정복하지 못한다. 바로 그 어떤 것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전쟁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제거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남을 죽이는 살육의 도구를 만들던 사람들이 그것을 다 부수어 깨뜨리고 살리는 생존수단을 제공하는 경작도구를 만들 것이요 더이상 칼을 들어 죽이는 일이 사라지고 전쟁을 배우지 않게 된다. 살육과 피흘림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어떤 힘이나 수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참평화를 실현하되 인간의 죄악성을 제거함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열국이 시온을 향해 강처럼 물처럼 밀려든 이유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제시해서 세상이 교회로 나아오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에 의해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고 말씀으로 근본적인 영적변화를 일으켜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사이에 참된 화목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민족들로 성전된 교회로 달려오게 하는 진정한 원인이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영향력이고 교회는 이런 은혜를 소유하고 나타내야 한다. 이것을 나타내지 못하면 죽은 교회요 밖에 버리워 짓밟히는 무익한 교회가 된다.
독한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사는 그 사람과 마음에서부터 그 칼을 놓게 하는 은혜가 없이는 사람들이 아무리 구름처럼 모여있어도 헛일이다.
시온의 긍정적인 미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는 선지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실한 마음으로 "야곱 집이여 빛 가운데 거하자. 우리가 은혜와 생명의 빛가운데 행하자"고 절규한다. 한쪽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절규가 들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안에 온갖 정쟁이 돈과 힘과 권세가 만연하고 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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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관해서 밝히고 있는데, 그 시대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를 달리표현하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계시하였던 시기를 요담과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당시는 남북 분열시대기에 두가지 왕통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왕하에는 두가지를 다 언급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를 보면 북이스라엘 역사나 남유다의 역사나 큰 흐름에 있어서는 같이 간다. 물론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에는 유다가 남은 자처럼 여겨졌으나 그러나 큰 흐름에는 같이 갔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예후왕조가 들어서서 아합왕조를 숙청하고 그 이후에 아람에게 유린되는 시기를 거쳐서 점점 이스라엘이 강력해져서 예후의 증손인 여로보암2세때 오면 옛 솔로몬의 영토를 다 회복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만의 현상이 아니고 남 유다도 마찬가지다. rm 역할을 한 사람이 우시야 왕이다. 55년간 긴 기간동안 다스렸고, 부친 아마샤와 같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다스렸다고 한다. 항구건축과 회복은 남쪽 교역로 확보뿐 아니라 이곳에 이르는 에돔지역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의 세력을 확보한 것을 의미한다. 역대하 24:11이하에 부친 아마샤때 에돔을 굴복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유다 남쪽에서 엘랏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에 있었거나 적어도 영향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하 26:3이하에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스가랴의 생전에 하나님을 찾았으며 우시야로 하나님을 찾는 동안에 형통케 하시고 -- 성읍들을 건축했다고 기록한다. 이 지역은 블레셋의 아주 중요한 거점도시다. 블레셋은 5개 도시중 2개를 빼앗겼으니 상당히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 명성이 애굽에 까지 알려졌다. 블레셋을 쳐 이긴 것은 서쪽 지역을 그 세력하에 두었음을 말하고 조공을 바친 것은 동쪽 지역이 그의 세력과 영향하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 지역에 대한 우시야의 지배가 얼마나 철저하엿는지는 모르나 남북을 합쳐서 옛 솔로몬의 지배권을 회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막지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마른 우물을 많이 만들었다.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농경을 위해서 밭을 많이 두고 농부를 두었다. 잘 준비된 지휘관 2600을 두고 군사를 두고, 공격 방어용 무기를 두었다. 이런 내용을 미루어 다같은 시기에 옛 솔로몬의 영토 회복하고 주변 나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이다.
또 8세기 선지자들에게서 살펴보면 당시의 종교적 열심도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외향적인 경건에서는 대단히 열심이었다. 진정한 경건한 왕들이었다. 영적으로도 어느 시대보다 축복받은 시대다. 아하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시대 외적상황과 걸맞지 않는 정죄와 불신앙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이 그러나 그 시야는 당시를 뛰어넘어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역사의 근본 성격을 한 마디로 본다면 우시야와 요담은 대체로 긍적적인 평가를 받는다. 나중에 범죄하기 까지는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런데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어떤가? 앗수르를 끌어들이고 했다., 유다를 신앙적으로 타락시킨 인물이다, 아하스에게서 누가 태어나는가? 히스기야가 되어난다. 경건한 왕의 표본이다. 히스기야에서 므낫세가 난다. 므낫세의 아들이 요시야이다. 경건한 왕에게서 못된 왕이 태어나고 못된 왕에게서 경건한 왕이 태어난다. 우리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다.
요나를 이해하면 그 다음에 아모스가 다음 선지자로 활동했다고 하면 아모스가 등장하여서 사자와 같이 포효하신다. 그 위협적인 음성을 발하신다는 심판의 말씀을 가지고 등장한 시대가 시대적으로 암울하고 비참하고 궁핍하던 시대가 아니고 유래없는 이스라엘의 부흥기다. 옛 황금시대가 되돌아오는,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던, 하나님에대한 열심히 대단했던 시기다. 이런 시기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이 더 충격적인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못살아야 한다. 늘 짓밟히고 가난하고 허덕여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풍족하게 베풀어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원칙적으로 말씀하실 때 믿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고난, 핍박이 떠날 수가 없다. 나를 인해 아내, 처자와 전토를 버린 자는 배나 받을 것인데 핍박을 겸하여 받을 것을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교회에서는 잘산다는 말을 안해주면 설교가 먹혀들지않는 경향이 있다. 어딘가 고장이 났다. 참으로 하나님이 물질적인 외적인 축복을 베푸신다면 감사하게 받을 것이요 뜻있게 청지기 자세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추긴다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평가를 읽어보면 세속적 관점에서 평가와는 매우 다르다. 사실 아합왕 아버지 오므리가 정권을 잡았는데 세속적으로는 유능한 군주다. 혼란한 나라를 바로잡고 군사를 안정시키고 했다. 이세벨을 며느리로 삼은 것도 외교적인 조치였다고 이해한다. 그 당시의 앗수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곳이 알려지기를 오므리의 집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 왕조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 어느 왕보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한 왕이었다고 한다. 세속사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근본적으로 맞지않다. 세속적인 관심이나 시각, 평가기준이 교회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 천당하던 복음의 핵심이 예수 믿으면 잘된다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한때는 피세주의라고 했다, 현재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욕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일반 신자는 하나님 나라, 교회의 시민인 반면에 다른 불신자와 함께 국가의 시민이다. 국민으로서 책임,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가장 모범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라는 기관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측면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2장과 관련해서 어려운 점이 있다.
2:1 선지서 앞에 기록된 것이 또 기록되어 있다. 본래 2장부터 시작하는데 1장을 나중에 붙인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13장 같은데 맛사라는 헤딩으로 이방 여러 나라에 관한 것을 따로 모아놓은 것도 있다. 이런 형식적 구조는 1장과 2장은 구별된다. 1장은 독립적인 단위라는 느낌을 준다. 1장 자체를 봐도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말하는 1장 자체도 그 단락이 어떻게 나우어진다는 형식이 있다.
2-9절까지 10절-20절까지, 21절이하로 단락이 나누어진다. 형식적인 특징에 따라 단락구분을 짓는 것이 타당하냐는 내용을 살피면서 해보도록 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마당에서 천지를 불러 들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신 32:1과 같은 내용이다. 그 행위가 온전한 반석이신 여호와의 이름에 대해서 말한다. 5, 6절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비와 자식의 관계로 말하면서 배은을 말한다. 이사야서와 같은 표현을 많이 말한다. 사 1장이 신 32장을 의식하고 썼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천지를 부르는 표현이 완전히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이사야 1장과 신 32장은 깊은 관계가 있다. 1장을 기록할 때 신 32장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예언의 역사적 배경이 이사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신명기 상황까지 소급한다. 이사야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신명기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체 역사와 관련해서 특해 신명기 역사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 이사야는 긴 역사적 시간, 관점에서 예언하고 있다. 장구한 역사과정을 의식하고 있다. 만일 이사야 1장이 신 32장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첫 예언 시작을 천지를 불러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 32장에서 천지를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신 32장의 첫 절에 천지를 부르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신 31장을 볼 필요가 있다. 신 31:28, 29 이스라엘이 부패해서 배역하게 된 사실의 증인으로 천지를 불러 세우고 있다. 천지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배역할 것에 대한 증인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명기의 전체 내용이 무엇인가? 신명기는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길이 며칠 길인가? 열 하루 길이다. 그 다음에 기억된 것이 40년간 광야 여행한 과정을 회상하고 있다. 모세는 지금 그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교훈하되 왜 열 하루길 밖에 되지않는 길을 40년간 여행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반역하여서 광야에서 엎드러졌는가를 말한다. 광야에서 얻은 교훈을 한마디로 순종하며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재확인하면서 갱신체결을 한다. 이스라엘로 순종의 서약을 재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언약갱신을 앞두고 한편으로는 옛광야 40년 여행을 회상하면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진술하고 이제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인데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언약을 맺으면서 순종하면 생명과 축복을 줄 것이나 불순종하면 망하리라고 한다. 맨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앞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반역할 것이요,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천지를 불러 증인으로 세운다. 너희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의 말이다. 순종하라 해놓고 너희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무엇인가? 이 노래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반역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노래이다. 심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노래이다. 너희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만 해도 겁이 나는데 노래를 지어 계속 부르게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동안 불신앙 세력은 멸한 바되고 새 이스라엘이 형성되어 가나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왜 배반과 심판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하시는가? 그 이유를 신 31장21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성품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순간 행하는 것에서 그들의 성품, 영적 본질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품을 따라 행동하며 앞으로도 그 성품을 따라 행할 것이기에 그들의 미래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7절에 이 성품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목이 곧고 완악한 성품이요 반역적인 성품이라고 한다. 반역성이 교정불능, 순종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아주 절망적인임을 암시한다. 신명기는 광야여행에서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교훈앞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도무지 거룩할 수 없는 성품을 제기한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러한데 내가 죽은 후에야 어떠할까를 말한다. 불문가지라는 말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살겠다는 언약앞에 선 이스라엘이 결국 율법을 범하여서 정죄당하여 심판받은 역사의 의미를 심화시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이 지킬려고만 하면 지킬 수 있는 것인데 싫어서 범죄한 것이 아니고 또 그로인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악함으로 특징지어지는 부패에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영적 무능에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도 없고 반드시 깨뜨릴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될 경우 자연히 26절에 의의 규범인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을 말한다. 율법의 기능은 정죄밖에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영적무능을 확인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깨뜨렸고 심판을 받아 망했다.
이사야가 그의 예언을 시작하면서 천지를 소환하고 있는데 이 표현을 단서로 해서 비슷한 내용을 말하는 신 32장에 가보니 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를 때는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뜻을 담아서 천지를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반역해서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증거의 노래이다. 왜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원인을 제시하는 것을 살펴보니 이스라엘은 성품상 목이 곧고 반역의 무리라. 틀림없이 반역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신명기라는 책이 단순한 책이 아니다. 광야여행중 교훈을 말한다. 가나안 눈앞에 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권면하는데 이스라엘에게 직면한 문제가 있다. 그것이 자기의 부패한 성품이다. 죄악성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신명기 자체의 해답은 다시 나온다. 우선 이사야서와 관련하여 이사야는 이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지 살펴보자.
이스라엘 역사는 자신이 가진 근본문제, 율법앞에서 영적 무능함 때문에 결국 예언대로 범죄하여 심판받아 망했다. 이사야는 그 예언 서두에서 신 32장의 이런 내용을 상기시키되 그 예언이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사실로 나타난 것을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보는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깊은 문제, 부패와 전적무능, 필연적이었던 모든 인류의 불행과 근본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소도 구유를 기억하고 나귀도 여물통을 기억하는데 내 백성은 그렇지 못하다. 짐승보다 못한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책망한 것만으로 본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면서 신 32장을 상기시키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렇게만 보지말라는 것이다., 은혜의 배은망덕으로만 보지말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떤 시각에서 볼려고 하느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앞에서 섰을 때 안고 있는 문제, 전적부패와 영적무능의 관점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사야를 통한 모든 선지서를 읽을 때 단순한 윤리적 시각에서 행하려고 했다면 행하지 못한 배은망덕을 지적하는 것으로 접근한다면 선지서의 깊은 면은 파악할 수 없다. 일반적인 학자들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보는가? 선지자들이 나오기 전에는 주위 민족들과 종교적 수준이 다르지 않는 저급한 수준이 있었는데 선지자들의 등장으로 고도의 윤리종교로 발전했다고 한다. 선지자들의 독특성을 윤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선지서의 참된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사야는 예언 첫 서두에서 신 32장을 상기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죄악의 역사를 단순한 시각에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앞에서 안고 있는 근본문제, 부패성, 완악함, 영적 무능의 문제,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어떻게 발전, 진행되어 왔는가 이것을 보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선지서가 피할 수 없는 실패의 원인을 지적하는 것으로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은혜를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서가 이것을 말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것이 없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음을 말하고 있고 구원과 함께 29장 초두를 읽어보면 마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근본 변화를 받을 것을 말한다. 근본적인 문제가 철회될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선지서의 조건은 죄를 그치고 회개하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선물에 구할 수 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선지서들의 내용이 흔히 신약의 복음서와 일치한다고 할 때 미래의 구원과 메시야의 오심을 말한다고 한다. 심판과 구원중 일부만을 말한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로서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심판 선언을 통해서 불가피성, 근본적인 부패와 무능, 절망적인 영적 현실을 말하면서 복음의 은혜가 불가피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실패 자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다. 이런 점에서 선지서는 복음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지 않으면 선지서 전체 메시지 구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시각에서 보지않기에 심판을 말하면 일관적으로 심판을 말해야지 왜 구원을 선포하는가가 제기된다. 8세기 선지자들은 심판을 선언했는데 포로후 선지자들이 구원을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되는가?
앞에서 말한 시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선지서의 내용이 지리멸렬해진다. 심판을 선언하면서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면 회개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심판받아 망할 것은 기정사실화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왜 앞으로 오는 구원은 왜 은혜로 말미암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이런 것이 이해가 될 수 없다. 신명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선지서를 이해하면 그런 것이 이해가 된다. 일목요연하게 아귀가 잘 맞는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히 배은망덕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책망할려는 엄중한 심판, 멸망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떤 틀에서 무슨 배경으로 말하는지를 봐야한다. 이러기에 단순하게 구원을 이야기할 때 은혜로 받는다고 하고 은혜의 핵심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할례, 영적인 변화, 성품자체를 변화, 제거하시겠다고 말한다.
2001년 4월 3일
언약백성으로서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서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죄악성, 그들의 성품, 체질인 목이 곧고 반역하는 성품이라고 표현된 악한 성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 성품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면 다른 신들을 찾고 배역하리라고 단정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가진 내적인 부패성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면 양쪽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실패, 반역할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한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내적인 악을 극복할 힘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함께 신명기 19"3에 보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않았다고 하셨고 30장에서는 심판에서 돌이키실 때 마음의 할례를 하시리라고 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직면하였던 부패상의 문제가 어떤 성격의 문제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사야서가 심판과 구원의 예언을 하기 전에 이 약속의 땅을 앞에두고 모압광야에서 모세가 마지막 고별사를 하는 그때 내용을 다시 상기시켰다고 하는 것은 그가 선언하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근본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알리려고 했다.
이사야 1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첫부분 1:2-9은 첫시작이 출애굽의 고별사의 시작점으로 시선을 돌려서 이사야의 시대까지 이르게된 과거사를 나름대로 더듬어 보고 있다.
첫째 부분은 아비와 자식의 관계를 비유삼아 이스라엘 과거 역사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아들들을 길렀고 저들을 양육하였으나 그들이 나에게 반역하였도다. 자식을 기르는 아비의 심정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돌보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를 아비의 사랑에 비해 말한다. 부정적 사랑에 비유했다는 것은 아비란 자식을 낳은 자요 존재케 한 자요, 모성은 해산의 고통과 관련된 반면에 아비는 자식을 존재하게 한자, 만든 자로 언급되고 있다. 목적을 두고 존재하게 한 자의 애착, 피조물에 대한 포기하지 못하는 사랑, 불변의 사랑이 아비의 사랑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창조 목적에 대한 집착,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부성이 돌아온 아들에게 돌아온 탕자에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고 확인한 부성이다.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슈브'돌아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도 주인을 알고 한 것도 앞서 이스라엘의 아비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구유는 먹이를 담아주는 것인만큼 주인이 생존케하신 은혜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의 어의없음을 짐승과 비교하여 극적으로 표현한다.
죄의 백성, 죄의 나라, 민족이라고 한 것은 본질이 죄됨을 말하고 죄가 무겁다고 한 것은 그 죄성이 중하고 심각하고 절망적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심각한 죄상이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행악자들의 근원이 영적 혈통이 행악자들임을 말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독사의 자식이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면서 그들의 영적소속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전 역사에 이어져 왔음을 말한다. 부패한 자식들이란 부패한 조상들로부터 태어난, 물려받음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능멸하며 반역한 것은 뿌리깊은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이사야가 신31, 32장에 제기한 이스라엘이 직면한 뿌리깊은 죄성, 부패성에 대한 암시를 단순히 2절 전반절 하늘과 땅을 불러 찾는 표현에서만 암시한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2절 하반절, 3-4절에 이르는 내용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뿌리깊은 대대로 물려받은 절망적 죄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표현을 통해 신 32장에 제기한 문제를 의식하고 암시하고 있다.
5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질병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반역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징계당한 일을 염두에 두면서 그럼에도 죄악에서 돌아서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안타깝게 탄식한다. 어찌 더 맞으려고 더 반역하는가 묻고 있다.
온 머리가 병들었으며 온 마음이 병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병의 깊음을 표현한다. 머리가 병들었다, 마음이 병들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전한 곳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과 밖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전체가 깊이에 있어서나 구분에 있어서나 전체가 병들어서 단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음을 우리에게 표현한다. 그들의 병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르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스라엘 전부가 병들어 있다고 말한다. 상처와 매맞은 자국, 쉴새없이 얻어맞아 아물기도 전에 새로 터진 상처로 가득하다. 기름을 발라 치료하지도 못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징계의 심판을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계속된 범죄로 끊임없이 징계를 받아왔다. 옛상처가 아물기 전에 새 상처를 입었다. 비유적 표현에서 좀 더 직접적 서술로 나간다. 곳곳에 심판의 흔적에 대해 말하되 7절. 너희 경작지는 황폐하였다고 말하며 예루살렘 성읍이 포도막 초막, 망대처럼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오직 시온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말한다. 포위된 성에 비유한 것은 대적에 에워싸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상황을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남은 자를 남겨두셨다는 9절과 잘 통한다. 이스라엘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한다. 유다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불쌍히 여김 때문이다. 징계속에서도 긍휼을 베푸시고 남은 자를 주신 것이다. 심판의 여지를 두셔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하지는 않았다. 심판중에도 긍휼을 잊지않으신고로 이스라엘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만큼 심각해서 멸절당해야 마땅하나 긍휼로 말미암아 소수라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9절까지의 내용을 gksakell로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로 시작되어 지탱되어온 이스라에릥 역사는 이스라엥리 끊임없이 배역한 역사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수준,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불가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것이 망한 역사적 사건은 언제나 하나님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했던 부패의 전형이다. 소돔과 고모라 말자체가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한다. 심판날 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땅에서 멸한 효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 이스라엘로 명맥을 유지하게 하셨다.
두 번째부분 10절이하에 내용, 첫부분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시작부터 신32장부터 이사야 당시까지 과거의 역사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셨다면 두 번째부터는 이스라엘의 현재모습에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암시하고 있다. 관원과 백성은 지도층과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만큼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영적본질상 소돔과 고모라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 그렇게 부르기를 서슴치 않았다. 특별히 바로 앞에서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하나 이 남은 자를 두지않으시면 우리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죄악으로 보면 당연히 망해야 하나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또 이어서 이스라엘을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제야 하나님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똑같은 "들으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는 들으라는 대상이 천지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스라엘 자신을 대상으로 들으라고 외친다.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먼 거리에서 시각적으로 넓고 광활한 것이요 시간적으로 먼 곳이다. 당사자에게로 옮겨왔으며 시점도 먼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왔다. 대상이나 시점에서 직접적인 관심으로 옮겨진다. 이스라엘 죄악에 대한 어떤 서술 역시 상당히 형식적이고 비유적이고 암시적인 반면에 과거 시점에서 객관적이고 어느 정도 피상적으로 서술했다면 이제 여기 와서는 현재의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할 뿐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내적깊은 곳에 은폐되어있는 것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죄악성을 파해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죄를 파헤친 서술을 살펴보면 어디서 소재를 따오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제의다.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제의를 소제로 삼고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제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형식과 성격의 삶이요 이스라엘 삶중에 매우 특별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제의의 특징중 중요한 것들 몇가지를 뽑는다면, Vergegenwartigung(현재, presence) 현재화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 5대 제사가 있지만 그외에도 어떤 것이 있는가? 절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유월절이다.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가 유월절이다. 이것이 제의에서 어떻게 되는가? 유월절마다 제의를 통해 오늘 다시 우리의 것으로 하고 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되살려 경험하는 것이다. 이 말을 히브리말로 표현하면 '자카르' (기억하다)이다. 또 제사는 어떤가?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는가? 앞으로 그리스도가 드리실 온전한 제사의 상징이다. 구약에서 제사는 무엇인가? 미래의 것을 오늘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성막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했다. 하늘영역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상징을 통해서 만들어 주셨다. 전벽에 금으로 싸고 스랍을 새겨놓았다. 이런 것들은 하늘영역, 신령한 영여게 속한 것인데 이런 상징들을 통해 감각할 수 있도록 '현재화' 시켜 놓았다. 제의의 특징은 현재화 (here and now) 이다.
제의의 이러한 성격,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떤 모양으로도 우리의 접근이 차단된 것이다. 하늘의 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제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데 상징을 통해 경험하는데 상징이라면 실제와 상징의 관계에 있어서 상징은 그 의미가 절하되기 싶다. 그러나 제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 존재를 가능케하는 은혜를 받아누리는 수단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임재의 처소, 중심에 거하시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것이다. 제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물론 당시의 드린 제사나 제물 그 자체가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징에 불과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참 실체와 비교할 수 없지만 상징적이나마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누렸고, 이것은 존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제의가 매우 중요했다. 제의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들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의 얼굴을 뵈며 영적교통을 누리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은혜를 상징하며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의가 목적하는 바는 하나님과 만남과 교통이라는 것은 제의가 이루어지는 성막 그중에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그곳에서 만나 말하리라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같이 간접적으로 상징에 의해 참여, 경험하며 누리는 것이지만 이것이 존재에 결정적이고 핵심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삶을 초월하며 너머의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 너머의 것이 이스라엘 존재와 삶의 본질인 것을 말한다. 이 땅의 것을 초월하는 하늘의 것, 먼 미래의 것, 완성과 실제가 이스라엘 존립의 근거였다. 이렇게 중대한 제의가 하나님 앞에 생명을 누림에 있어 결정적인 부분이,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제의가 전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람마리 로브-지브헤켐' (너희 제물의 많음이)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경건의 외양은 대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수양의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에 내가 배불렀다는 것이다. 차올라서 토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황소, 양,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먹어 토할 만큼 많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너희를 위하여 대신 흘려지는 피를 인해 너희를 용서하고 받으리라 했던 제물의 피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너희가 내 앞에 나타나려 하여 나아오나 누가 이것을 요구하였는가 '리로트'와 '레라오트'의 차이가 무엇인가? 시리악 사본에는 '너희들이 내 얼굴을 보기 위해 나아올 때' 라고 되어있다. '레라오트' '내 앞에 보이려고 나아오니' (니팔형)
하나님 앞에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면전에 나타나는 것은 뜻에는 차이가 없다. 곧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그에게 용납되는 것, 열납되는 것,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제의에 관해 말하면서 너희가 나에게 보이려고 나아올 때에서 간접적으로 제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서 그에게 뵙기 위해서 용납되기 위해서 나아온 것이다. 이것이 제의의 목적이다. 제의의 전제조건이다. 제의의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번제같은 것은 그 목적을 너로 하여금 열납되게 할 것이다. 사람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제의의 목적이라 할 수있다. 어떤 경우는 받아들이는 것이 자체를 넘어 전제로 하고 더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감사제, 낙헌제, 화목제와 같은 것이다. 또 기도 자체도 그러하다.
너희 많은 제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수양의 -- 기뻐하지 않는다 하시고 너희가 내 앞에 나아오니 누가 이것을 너희 손에서 요구하였느냐 내 뜰만 밟을 뿐이니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뵙기위해 제의 목적이 하나님께 나아감을 비유한 것인데 제물로 하여금 제물이 제사자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제물이나 제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제사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뵙기위한 것인데, 열납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은 누가 이것을 요구했느냐고 말한다. 이러니 말이 완전히 안된다. 뒤엣 말이 앞에 것을 부정해 버린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조건, 열납되고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적어도 현재 이스라엘이 드리는 형태의 제사는 아니다. 이런 형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것을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의 제의가 많이 드리는 제의가 성전뜰만 밟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는가? 어떤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고 왜곡이 생겼는가? 누가 이것을 요구하였는가 반문은 이스라엘의 제의는 하나님이 참으로 요구하시는 본질이 그들에게서 빠져있음을 말한다. 뜰만 밟을 뿐이라는 것은 알멩이 없는 제의라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는 진정한 조건이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제의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13절에 보면 제의가 단순한 제의가 아니고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다. 앞에서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양의 기름, 황소의 피 이렇게 해서 제물 자체를 가리키는 같은데 13절에 가면 소제라는 말에 헛되다는 말이 붙어있다. 그리고 분향이라는 말에 가증하다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제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제의를 외면하신다는 뜻이다. 헛된 제의 또는 제의를 헛되게 하는 요소가 포함된 방식으로 드려지는 제의를 거부하신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의로 하여금 무의미하고 가증한 것으로 만드는 것 때문에 월삭과 안식일과 성회로 모이는 것과 내가 죄악과 성회를 감당할 수 없노라. 자기를 괴롭게 하고 자기의 죄를 살피고 성회로 모이는데 죄가 있다는 것이다. 둘을 아울러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런 죄악을 선지자들이 많이 선포한다. 금식을 선포하면서 뒤로는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이 무슨 회개냐?
이런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제의로 하여금 무의미하게 만들고 가증스럽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가 암시되었다. 너희들의 월삭과 절기를 내가 미워하며 헛되다. 가증스럽게 보신다. 미워하신다. 내게 짐이 되어서 짐지기에 피곤하였노라. 제사와 관련하여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제의에 대한 표현이 무엇인가? 열납하신다, 흠향하신다는 표현이다. 전부 제의가 본래 기능을 다하면 향기로운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에게서 죄가 어떤 모양이든 죄 때문에 하나님께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너무 반복이 되었기에 짐지기에 피곤하였다고 말한다. 너희가 손을 펼지라도 내 눈을 너희로부터 숨길 것이요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재앙을 구하기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하면 제의에서의 기도의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만나고 그의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받아누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가 거부당하고 외면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은혜를 끊어버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교통, 만남도 거부하셨다는 뜻도 된다.
15절에서 이스라엘의 제의가 완전히 거부당한 이유를 밝히기를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16,17절에 이어서 말씀하신다. 레위기 26:31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그들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다. 무의미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죄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것 역시 앞뒤가 안맞는 듯 하다. 제사라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은혜가 죄사함의 은혜이다. 죄의 대속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제사를 드리는 자체가 죄를 전제한다. 죄가 없으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버린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기 위함이지 우리 죄악 때문에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모순이 되는 것같이 보인다. 여기에는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시는 이유와 삶의 실패, 악한 행위라는 것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 이면에 감추인 더 깊은 것들, 그들에게서 악행으로 나타난 더 근본적인 조건, 영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악행을 지적한 것은 악행, 죄악 자체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의 행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사함의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구하여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거룩한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열매맺는 것을 실패했다. 불순종, 불신앙 전체 과정을 봐야 한다. 밖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식, 하나님과 만남과 은혜를 위한 시도를 외면하시는 이유, 제의와 삶의 괴리로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배따로 생활따로가 잘못이라는 의도가 무엇인가?하나님의 은혜는 제의를지속적으로 gkadmf서 가능하다. 얺약준수 안에서 가능하다. 범죄는 심판을 초래한다. 심판에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가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못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편에서 영적 만남과 교통이 거절된 것이 행위의 악함 자체만 두고 하신 말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초래한 영적인 면을 지적하신다. 제사자체가 죄사함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라면 행위의 악함 때문에 거부한다고 하면 모순이다. 그러기에 좀더 깊은 의미가 잇을 것이라고 본다. 악한 행위 배후에 있는 이면에 감추인 것에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죄사함의 은혜가 어던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가를 볼 피룡가 있다. 죄사함의 은혜는 어떠한가? 우리 죄가 사해지고 의롭다고 하신다. 다음부터는 우리가 은헤를 거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무한한 은혜가 있으니 죄에 거하겠느냐, 죄사함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가?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바울은 wlh사함의 은혜와 칭의, 성화의 밀접한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이런 반문을 시작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다 용서해주시니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6,7,8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내용에서 우리는 제의를 통해 베풀어지는 죄사함과 밀접한 연결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과정에 어떤 광범한 왜곡과 변질이 있기에 제의가 거부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말로 한번 대답을 대신해보자.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우리가 복음을 전해받았다하면서 저들과 같이(구약시대의 사람), 구약시대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어떻게 전해졌는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출애굽과 관련해서 홍해사건, 유월절 사건이 복음의 내용이 구현된 것이다. 또 좀더 분명하게는 제사의식들이다. 구약시대도 은혜,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저들에게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믿음을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옛언약하에서도 이스라엘이 복음을 들었으나 유익이 되지못한 것은 저들이 듣는 말씀에 믿음을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질적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제기한다. 이스라엘에 증거된 복음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었다. 믿음에서 실패가 거룩한 삶에서 실패를 초래하였다. 불신앙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외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죄악의 시작이다. 이사야가 여기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제의를 무의미하게 만든 원인을 제시하였을 때는 이런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누림과 거룩한 삶이 이루어지는 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씀한 것이다. 단순히 믿음과 은혜는 받았는데 삶에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조건이 믿음과 은혜에서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전체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원인이 악과 유혈이라고 말씀하신 의도에 대해서 살펴본다고 하면 이 구절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인 인간의 행위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가 제의를 의미있게도 무의미하게도 하는 것인가? 실상은 반대다. 인간의 근본 성품을 극복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인간의 성품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행위의 실패는 그 이전에 믿음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교훈에 비추어 이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왜 죄를 용서하시는 제의가 왜 죄에 의해서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하는가가 분명하게 표현된다.
질문) 믿음과 은혜
믿음 조차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것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행위는 은혜가 아닌가? 거꾸로 물어보면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안주시고에 달려있는가 사람에게 믿음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관계에 대해서 정리가 되지 않아 생긴 의문이라 생각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왜 죄사함을 받도록 된 제의가 왜 죄에 의해 무의미해졌는가? 이것은 죄된 행위에 국한 시켜 하지말고 이것이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 거룩하게 사는 신앙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과 관련하여 죄를 이해하게 되면 어째서 죄가 제의를 무의미하게 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이것을 하나로 묶음으로 말하면 삶에서의 실패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땜누이다. 은혜를 받지못한 것은 믿음의 실패이다. 믿음의 실패라는 말은 무엇인가? 은혜를 받는다고 할 때 은혜의 수단이 제의다. 제의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때 기본 자세가 믿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8세기 선지자들의 출현 메시지 핵심의 근본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것에서 반대한다. 행위가 옳았느냐 의로웠느냐의 관점에서 이 부분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마치 그렇게 하면 제의는 아무 소용이 없고 행위라는 것이 된다.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의가 받아들여지않는 것은 제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해졌기에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고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라 전제가 되는 은혜와 은혜받는 전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제의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말하는 이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2001년 4월 10일
이스라엘의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무의미함을 말한다. 이것은 제의의 양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물론 제의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제의를 행할지라도 제의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많은 것이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는 의미있는 제의를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됨으로 제의가 무의미하고 가증하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5절이하에서 무엇이 이스라엘의 제의로하여금 무의미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기를 한마디로 죄악이라고 밝힌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열납지않는 이유가 죄악이라는 이유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제의라는 자체가 죄사함의 은혜의 수단이다. 모든 제의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전제한다면 죄사함은 제의의 전제가 된다. 제의가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죄라면 앞뒤가 맞지않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않는다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 죄라는 것 속에는 좀더 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들이 윤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의와 윤리는 배타적인 것으로 본다. 제의 대신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삶으로 이해하는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몇가지 제의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제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매우 외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것과 달리 인간내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차원의 하나님과 만남이다. 그리고 제의의 영역은 인간의 외부적인 생활, 삶과 무관한 것도 결코 아니다.
레위기 전체 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일 처음에 5대제사가 나온다. 구별된 장소, 임재의 장소 성소에서 특별하게 세운 제사장이 섬기는 것에 의해서 제사라고 하는 특별한 섬김의 형태를 가진 제의 영역이다. 눈에 보이는 의식을 통해 보이지않는 시간적 공간적 영역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실체에서 시작하나 음식을 가려먹으라, 부부관계, 출생 등 가장 일상적인 삶, 공동체적 삶의 영역과 틀로 확대된다. 이러한 레위기의 구조는 각각의 영역에서 분리되지 않고 상호연결됨을 암시한다.
인간의 내면적인 영역과 외부적인 행위간의 관계에 있어서 제의가 갖는 기능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씻지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보고 말할 때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로 말하시기를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에게 배운 것으로 나를 헛되이 섬기는도다"라고 한다. 여기서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시면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다. 이것은 우선 사람의 외부적 행위와 내면적 관계를 말한 것이다. 인간의 외부적 행위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내적 상태, 영적상태다. 외부적인 행위는 내적상태의 외적표현이기 때문이다. 내면과 외면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우선적인 것은 내면에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제의를 통해 말씀하신다. 제의는 자기들이 임의로 만든 것도 포함하지만 무조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의의 역할이 제의가 너희에게 외부적으로 몸을 씻으라 옷을 빨라고 한 것은 단순히 외부적인 것의 때를 제하라고만 한 것은 아니다. 제의적인 명령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의 내적인 정결함에 있다. 이런 의도가 분명히 들어나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레위기 10장의 음식규례를 말한다. 정결한 짐승만을 먹으라는 결례의 진정한 뜻은 내적인 정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로 우리 몸을 씻거나 옷을 빨라고하는 것의 명령은 우리 마음, 영혼을 깨끗게 하라는 영적인 정결명령이다. 그러면 외부적인 것은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결례나 구약의 제사, 제의가 사람의 외면과 내면의 관계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결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둔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에는 외면과 내면에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의라는 자체가 죄사함을 전제하는데 죄가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은 선후가 맞지않는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마 이런 말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를 포함해서- 언약이 지켜지는 조건하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은혜는 말씀을 순종하는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일만달란트 빚진 자가 백달란트 빚진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를 쳐놓고 너희도 용서하지 않으면 -- 말씀하셨다.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용서하는 삶과 함께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이것도 오해하면 안된다. 우리가 용서했기에 선행을 근거로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은혜를 입게된다는 원리를 말씀한 것이다.
범죄는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는 저주와 심판을 초래하게 되어있고 심판에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가 제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이 포함된다. 너희가 너희 손을 펴서 기도할지라도 내가 외면하리라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죄를 전제하는 죄사함의 은혜와 이것을 누리는 제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제의를 통해 베풀어주는 은혜는 순종의 틀에서 지속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이 있다.
죄는 제의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사실이 있다. 곰곰히 생각하면 상충된다는 느낌이 든다. 얼핏 모순될 듯한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사실 죄사함의 은혜라고 하는 자체가 한편으로는 죄를 전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죄사함의 은헤는 죄를 사하는 것이기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죄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를 전제한다는 것은 죄를 묵인하거나 용인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죄를 사하기에 죄를 전제하나 동시에 죄를 사하여 씻어 정결케하심으로 동시에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관계가 있다. 이런 긴장관계는 요한일서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요한일서 1:6-7
빛가운데 거했는데 깨끗할 필요가 어디있는가? 이것이 지속적인 죄냐, 습관적인 죄냐 차이로 많이 설명하지만 긴장관계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8-9에 말씀하고 2장 1절에가면 --. 확실한 긴장관계가 깔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무한정 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으니 죄를 범해도 괜찮겠다는 가상적인 질문을 해서 흔히 '반법주의'라고 한다. 율법이 필요없다고 한다. 용서받을 근거가 있기에 그런 것이 필요없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죄에 대하여 죽은 너희가 죄에 거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여기에도 긴장관계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답을 찾는 대신에 잠깐 우회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사야에서 이부분을 가리켜 제의를 무의미하게 하는 원인은 제의와 삶의 괴리다라고 한다. 의식과 삶의 일치가 되지않고 유리된 것이 제의가 무의미하게 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드러있다. 제의와 삶은 본래 분리될 수 없고 밀접한 관련맺고 있기에 이 관계가 깨어진 것이 제의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나 충분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선지자 이사야가 영적 만남과 교통의 시도가 거부당하는 이유를 죄악때문이라고 외부적 악행자체를 의식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적 죄악을 아울러 지적하는 것으로 오히려 더 분명히 그러한 면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제의라는 자체가 특별히 제의에 관한 가르침이 내부적인 동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의와 관련해 밝히신 사실은 마음의 본질을 외부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내부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상태는 더 깊은 것들, 영적인 조건들을 두고 말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악행을 지적한 것은 단순히 죄악 자체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외부적 악행과 더불어 마음의 문제, 또 믿음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악한 행위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의 은혜를 전제로 하는 행위, 죄씻음받은후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지는 거룩한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은혜를 상징하는 제의수단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은혜와 믿음이 그에게서 열매맺게 하는데서 실패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전체과정에서 실패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부당한 내적인 원인, 제의의 실패와 무력함의 깊은 원인은 불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종의 삶, 거룩한 삶은 은혜로 시작된다. 은혜를 가능하게 하는 제의라는 은혜의 수단이 있음에도 은혜를 받지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히 4:2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한 것을 참고하라. 복음을 전하였는데도 왜 받지 못하였는가? 복음에 믿음으로 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앙 자체가 가장 심각한 죄악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사야가 죄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으로 죄라고 했을 때 믿음까지를 포함해서 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런 믿음에서 실패가 거룩을 가능케하는 은혜의 수단인 제의의 실패를 이루었다. 믿음으로 제의에 참여할 때 얻어누리는 죄사함의 은혜가 정결한 행위, 거룩한 삶, 순종으로 이어지는 전체과정에 광범하게 개입한다.
요점은 흔히 성경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제한적으로 윤리의 해석들, 제의와 윤리가 충돌하고 있다는 표현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의는 겉으로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무엇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영적인 것, 신령한 것,, 미래 과거와 역사,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18-20절 : 18절의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번역을 따르면 너희 죄가 아무리 씻을 수 없는 죄와 같을지라도 희어질 것이다. 미래의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게 한다. 너희 죄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희어질 수 있다는 강한 가능성을 말한다. 더 강하게 하면 지금까지 절망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반드시 희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19절에 너희 앞에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다. 순종해서 복되게 되든지 아니면 계속 반역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1절부터 마지막까지 셋째부분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 된다.
이것의 문제점은 '따져보자'는 것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상황을 놓고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적합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 만일~하면" (임) 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런데 히브리 문법에서 의문사"하"가 없이도 의문문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겠느냐?"
이러한 죄는 이스라엘 죄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19-20절의 말씀은 율법의 원리를 재천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돌이킬 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보고 율법의 원리를 재천명하는 것은 오히려 절망스러움을 확정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으며 절망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을 가진 표현이다. 이 사실을 더 엄중하게 사람을 짓누르듯 돌이킬 수 없는 단호함으로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엄숙하게 확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은 "따져보자"는 말의 의미가 살아난다. 앞에서 아무리 제의적 노력을 한다고 해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번 따져보자고 한다. 죄를 들추어내는 의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두 번째 해석과 잘 연결이 된다. 순종하면 살고 반역하면 죽는다. 이 원리를 따르면 너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첫째와 둘째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현실은 한편으로 배은망덕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라고 할 수 있으나 먼시각에서 보면 근본적 부패와 타락, 반역적 성격 때문에 범죄를 피할 수 없는 신 2장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현실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 부패와 타락성, 죄악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여실하게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선지서의 증거, 예언을 적용하는데 특별한 시각을 제공한다. 단순히 회개를 권면하는 본문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절망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으로 가보자.
21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 의와 공의가 거하던 곳이 살인이 자행되는 곳이 되었다. 은이 천은(가짜 은-은속에 유황을 제거할 때 납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 산화납이 은에 섞이게되면 쓸모없는 은이 된다)이 되었고 맥주가 물을 탄 것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변질이다.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실하고 의와 공의가 충만하고 은, 맥주처럼 순전한 것이 되기를 원했다. 죄의 성격을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것에서 변질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패가 더욱 심각한 것은 상층, 지도층의 부패였기 때문이다. 관원은 반역하고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고 구하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도 대가를 구하였다. 부하의 소송을 공의롭게 처리하지 않고 힘없는 자들의 송사는 아예 그들에게 이르지도 못한다. 이런 이익추구에 도움이 되지않으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도 하지 않는다. 가장 취약한 계층 -과부 : 권리가 침해되는 계층이다. -을 보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정치를 대행하려는 의도가 완전히 빗나가고 있다. 이렇게 변질된 정반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밝히면서 내 대적에게 보수하리라고 한다. 여기서 내 대적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택하신 백성이 어느 틈엔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응하시리라. 하나님의 대적이 받을 형벌을 이스라엘이 받게 되리라. 앞에서 첫째부분이 이스라엘의 과거부분에 초점이 모아졌고 둘째는 현재, 지금 셋째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초점이 모아져있다. 이런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말한다.
하나님이 노하신 정도로 봐서는 수십장 심판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셔서 그런지 심판은 그 한마디 밖에 없다. 당장 내가 내 손을 돌이켜(다시 돌아온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변질한 이스라엘을 대적으로 처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행할 일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하실 일이 남았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천은이다. 천은을 잿물로 씻듯이 제련(정련)한다는 것이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전한 것을 다시 만드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린 이스라엘에게 대적으로서 받아야할 형벌을 가하시는 심판이기도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불순한 것이 제거되어 순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기회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 계획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 요나다. 왜 요나서가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와 함께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토대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그가 이 세대를 향해 주실 최대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왜 이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것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 다음 너의 재판관들을 그리고 너희 모사들을 처음처럼 히ㅗ복하리라는 말씀이다. 여기에도 처음처럼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처음 부르실 때 의도처럼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네가 의의 성읍이요 신실한 성읍이라 불리울 것이라고 했다. 심판후에 하나님이 탄식하시던 이스라엘의 모습, 본래 의도하시기는 의와 공의가 가득하고 신실한 성읍이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창기와 살인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심판후에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을 말하신다.
하나님이 대적에게 보응하듯이 형벌의 의미를 가지나 다른 한편으로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본래 의도하셨던 신실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27절에 '미쉬파'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는 한가지 단어다. 이것은 '쩨다크"와 붙어 다닌다. 이것을 둘로 보지않고 둘이 합해서 한가지 뜻을 나타낸다. (hendiadys-두개를 통하여 하나를 나타내는 기법)
예를 들어서 "욤 바 라일라"라고 할 때 낮따로 밤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루를 의미한다.
히브리 문학에서 병행법이 많이 사용된다. 이것 역시 hendiadys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의 통치 기초가 '미쉬파' '쩨다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는 '의인'만 들어간다. 이런 영적 상태를 현재 이스라엘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변질되었다. 신 32장을 끌어오면서 이것은 이스라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하면서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자신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 드러나 있다. (롬 1:17)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27절에 '구속'(ransom)을 말하고 있다. 그 구속이 무엇으로 되는가? 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 의는 누구의 의인가? 이스라엘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다. 그 대상은 누구인가? 회개하는 자(귀정한 자)를 말한다. 남은 자의 구속사상이다.
다른 부류에 대해서는 부정적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행악자와 죄인이라고 한다. 28절이다. 이들의 미래는 파멸일 것이다. 이스라엘 미래를 일률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중적으로 말한다. 회개하여 구속을 입는 자들, 그들에게는 이루지 못한 의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행악자들, 죄인들은 파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두 부류의 역사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한다. 29-31 하나님 저버린 자들의 받을 수치와 파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끌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니 누구도 막을 자가 없음을 가리치기도 하나 또 영속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으로 이사야서의 큰 틀이 밝혀졌다. 나머지는 이 골격을 따라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2001년 4월 17일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거부하시는 이유에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 성에 피가 가득하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죄악된 행위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의를 거부하게 하시는 원인이다. 불신앙에서 시작하여 불순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곳에 변질과 왜곡이 침입한 것을 가리킨다.
세번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 성격을 다른 면에서 말한다. 어찌하여 신실한 성읍이 창기가 되었느냐 공의와 의가 충만하던 곳이 살인자의 소굴이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람직한 모습에서 벗어나있다고 이스라엘의 죄를 말하고 있다. 신실하도록 의도되어진 이스라엘이 신실한 나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의와 공평이 충만한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창기와 같이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 살인자같이 폭력을 일삼는 나라로 변질되었음을 말한다. 너희 은은 천은(가짜 은)이 되었다. 모양은 비슷한데 실제는 전혀 은이 아니다. 모양은 하나님 백성의 모양이나 실제는 전혀 아니다. 맥주에 물을 타서 이미 술의 향취나 맛을 상실한 것처럼 거룩한 백성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세번째 부분에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말한다. 첫번째 이스라엘 미래에 대해 선언하시기를 화있을진저 내가 내 대적으로부터 진노를 쏟아부어서 분풀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마음에 맺힌대로 보응하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을 대적으로 취급하사 모양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실제는 거슬리는 자에게 본질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대적으로 저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보응하시겠다고 했다. 또 너희에 대해 내 손 더하리라. 보응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가 아니다.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심판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쳐서 멸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정화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경험하게 될 심판이 이런 의미를 갖게 되면 심판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가 이어질 것인데 하나님이 처음과 같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리더십을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 재판관, 모사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신실한 고을, 의의 성읍이라 불리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로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이 될 것을 말한다. 특별히 공평과 의라는 말과 관련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 본질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했다. 여기서 의와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통치의 기초이고 더 나아가 통치를 대리하는 자들, 정사와 권세들 - 물론 타락해서 잘못될 수 있으나 -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것은 세속권세들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통치 기초도 공평과 의다.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통치가 세우신 통치자들을 통해서 시행되면 그 영역도 의와 공평이 충만한 곳이 된다.
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이다. 여기에 통치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26절에 신실함과 의와 공평이 사라진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가능성은 배제되고 있다. 특별히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신의 의가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의와 공평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구원할 수 없는 형편에서 다른 의인이 대가를 지불하고 속량한다는 것이 근본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롬 1:17이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유대인의 실패의 근본 원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것이라고 한다. (롬 10:2,3) 이사야서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다같이 앞으로 임할 혹독한 심판을 거치게 되겠으나 심판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일률적으로 임하는게 아니라 그중에서 특별한 자들에게 임한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하는 자, 돌아오는 자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악자, 범죄하는 자, 여호와를 저버리는 자는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져버렸다"는 것이다.
파멸이 임할 대상에 대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로 지칭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이다. 이것을 계속해서 이어받아 행하는 자들이다.
'미쉬파트 쩨다카'(공평과 의)를 말하면 엄격하고 폭좁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다. 이 속에는 사랑과 용서를 포함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겉옷이나 맷돌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려간 경우,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한다. 왜 돈을 갚지 않았는데 돌려주라고 하는가? 가난한 사람이 무슨 옷이 많아서 저당잡히겠는가? 밤에 겉옷없이 어떻게 지내겠는가 그런 사정을 생각해서 돌려주면 그 행위는 긍휼과 사랑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돈을 안갚았으니 주지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밤에 부르짖으면 그 책임을 그에게 돌릴 것을 말한다.
편의상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분리하지만 실제는 이것이 떨어져 있지않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자체에 사랑과 긍휼을 포함하고 있다.
여호와를 저버린다는 말속에는 다른 수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너희가 선택한 동산들, 나무는 경배, 숭배의 대상이다. 동산은 우상에게 제의를 행하는 장소다. 여호와를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을 전제하거나 수반하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우상 신들이 시든 나무와 같고 물없는 동산과 같아서 언젠가 그것을 의지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잎이 시듦으로 무력함을 드러내는 신들이 되리라. 너희 섬기는 신들이나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신이 서로를 불태우는 재료가 되어 함께 타되 아무도 끌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택하여 갔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물없는 동산같이 무력하여 전혀 도울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날 것이며, 그것으로 수치를 당할 뿐 아니라 거짓 우상과 서로를 태우는 재료가 되어 서로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끌 자가 없을 것이라. 여기에 의미가 무엇인가? 소멸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심판하시는 것을 아무도 제거할 수 없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이러한 심판이 궁극적으로 영속적임을 말한다. 신약에서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역해왔고 지금은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받고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미래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다같이 혹독한 심판에 이를 것은 사실이나 이것의 의미가 다르다. 긍정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고집한 반역에서 돌이킨 자,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 자체가 불신앙을 제거하여서 순전하게, 정결케 하는 정화의 기능이다. 본래의 온전하고 순전한 의롭고 신실함을 회복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는 이스라엘의 지금까지 고집하던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파멸이 임할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한 것이 저들을 살리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이 드러날 것이다.이것이 오히려 멸망의 수단이 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기회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심판의 될 것이다.
2장
2:1은 1:1과 몇몇 단어 차이가 있긴 하나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다.
이것이 한번만 기록된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본래 이사야서는 2장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뒤에 서론으로 붙인 것이 1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스가략 1:1과 1:17에도 꼭같이 같은말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거기는 계시가 임한 날짜와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서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하나 선지서에서 이런 표현이 단 한번만 사용된다는 철칙은 없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계시가 새로 임한 경우가 적어도 두번 이상이다. 6장에서 제단에서 그의 입술을 숯불로 정켤게하는 것이 나온다. 이것이 처음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그렇다면 왜 처음에 기록하지 뒤에 있는가, 아니면 다른 문학적인 표현으로 연대순과 관계없이 되어진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다.
앗수르 블레셋을 치는 것을 보면 유다를 침입하는 사건들을 보면 이때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신 것이 드러난다. 특히 사 40장 같은 데서는 3절 외치는 자의 ---. 새로운 계시가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명백하게는 스가랴 1:1에서 보았듯이 여러번 걸쳐서 계시가 임했다. 그래서 이것이 편집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1-4은 미가서 4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어느 한쪽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 이사야가 이 부분의 말씀과 관련하여 따로 기록하였는가? 미가서의 예언을 두고 이것은 바로 이사야가 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도 문제가 잇다.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이라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동시대가 아니라면 편집자의 가평이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말이 많은데 유명한 학자들의 주석들을 보면 내용 자체에 대한 설명은 잘 없다.
이사야서 1장 셋째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두가지 상반된 미래의 가능성을 언급한데 이어서 2장에 와서는 그 시선을 먼 미래로 향하여서 본문중에 첫마디가 '날들의 끝'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역사의 종국'에 해당되는 말이다. 조심할 것은 성경이 마지막에 대해 말할 때는 훨씬 여유롭게 생각한다.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때, 또는 역사를 궁극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순간을 말한다. 히 1:1에서보면 '마지막 날에'라고 표현되어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시선을 역사의 종국으로 향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야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확대된다. 공간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범인류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특별히 시온의 궁극적 미래의 영광을 이방인 참여와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의 긍정적 미래를 혈통적 이스라엘에 제한하지 않고 이방 만국에 개방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온의 먼 미래에 대해서 이사야는 예언하길, 열국을 향해서 열려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이 서있는 산이 굳건히 세워질 것이다. 모든 언덕들 위에 높이 들려질 것이라고 한다. '산들의 꼭대기'라는 말이 무엇인가? 왜 거기에 전치사 '베( )'를 썼는가? 단순히 산들 위에 썼을 것이라고 하면 '알( )'을 써야 한다.
산위에 산이 세워진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썼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산들의 선두에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여러 산들이 있는데 지위또는 위치가 선두, 맨 앞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the leading mountain)
땅에 높이 솟은 모습의 인상에 따라 힘, 세력, 권세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 국가세력이나 종교세력이든지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시 68편에 다른 여러 성들이 시온 산과 지위를 다툼으로 시기하는 시선으로 시온을 바라보느냐는 표현이 있다. 이사야 2:2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는 산이 굳건히 서리라는 말은 임재의 처소로 시온의 권세가 굳건히 확립될 것을 뜻한다. 산들의 머리에 굳게 설 것이요 시온의 권세와 지위가 모든 세력중에 으뜸이요 다른 모든 세력위에 탁월할 것을 말한다. 시온은 장차 하늘과 땅의 으뜸이요 머리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요 탁월한 지위에 설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온이 높아질 영광을 말한 다음에 모든 나라들이 그에게로 물처럼 밀려들 것이라고 한다. 탁월한 지위와 영광이 세계 만국을 유인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가? 땅의 모든 족속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민족들이 우리가 여호와의 산 야곱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열국을 유인하는 핵심적인 것이 하나님의 집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열국은 시온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강물처럼 밀려드는가? 유인 요인이 무엇인가? 시온의 진정한 영광, 탁월한 지위를 얻기위한 것이 무엇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그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며 시온에서 율법이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라고 말한다. 열국이 몰려드는 까닭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가 계심이며 --.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시가 모든 민족들을 이끌어 들이는 요인이요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강물처럼 밀려오며 우리가 그의 집에 올라가 그의 빛가운데 거하게 하시리라. 말씀은 능력이 있어 말씀으로 나라를 판단하시고 바르게 하셔서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하신다. 나라가 나라를 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다. 나라가 나라를 향해 피를 흘리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창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들의 자손들의 역사라 하면서 그 아들들의 역사의 성격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분열의 역사다. 벨렉때에 바벨탑을 쌓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분열의 과정에는 특별히 함계통과 관련하여 얘기한 것인데 각 나라와 민족으로 분열된 것의 성격이 나온다. 니므롯의 영웅의 출현이 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세운 영웅이다. 이것을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전쟁을 통한 정복이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피를 흘리는 전쟁은 바로 홍수 이후 인류 역사의 근본 성격이다. 이런 피의 전쟁을 통해 나라는 갈라진다.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우리는 잘 안다. 전쟁만큼 비참한게 없다. 전쟁, 피흘림을 피하기 위해서 각국의 원수들이 머리를 맞대로 연구한다. 때로는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힘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날 것같으면 선제공격을 해서 아예 대적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끊임없이 군사력으로 정치력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해왔다. 땅위에 참된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단 한사람, 한 국가도 전쟁없는 평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어떤 군사력, 정치력, 물리적 협박, 교육, 설득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깊이 박힌 미움과 증오와 이기심, 다툼을 정복하지 못한다. 바로 그 어떤 것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전쟁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제거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남을 죽이는 살육의 도구를 만들던 사람들이 그것을 다 부수어 깨뜨리고 살리는 생존수단을 제공하는 경작도구를 만들 것이요 더이상 칼을 들어 죽이는 일이 사라지고 전쟁을 배우지 않게 된다. 살육과 피흘림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어떤 힘이나 수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참평화를 실현하되 인간의 죄악성을 제거함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열국이 시온을 향해 강처럼 물처럼 밀려든 이유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제시해서 세상이 교회로 나아오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에 의해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고 말씀으로 근본적인 영적변화를 일으켜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사이에 참된 화목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민족들로 성전된 교회로 달려오게 하는 진정한 원인이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영향력이고 교회는 이런 은혜를 소유하고 나타내야 한다. 이것을 나타내지 못하면 죽은 교회요 밖에 버리워 짓밟히는 무익한 교회가 된다.
독한 마음을 품고 칼을 품고 사는 그 사람과 마음에서부터 그 칼을 놓게 하는 은혜가 없이는 사람들이 아무리 구름처럼 모여있어도 헛일이다.
시온의 긍정적인 미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는 선지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실한 마음으로 "야곱 집이여 빛 가운데 거하자. 우리가 은혜와 생명의 빛가운데 행하자"고 절규한다. 한쪽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절규가 들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안에 온갖 정쟁이 돈과 힘과 권세가 만연하고 난무하고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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