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사도행전 1
김성수 사도행전 1
현대신학의 끝없는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우리는 구약신학 시간이지만 사도행전, 갈라디아서를 선택하여 취급하고자 한다. 이것은 흔히 성경신학적이라고 하는 방법이다.
교의학의 특징은 - 성경신학과 대조되는 입장에서 -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논리의 체계이다. 반면 성경신학은 성경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신학이다. 역사성이란 예전부터 있어 왔다. 종교개혁까지는 이 의미가 단순했으나 요즘에는 이 역사적이란 말이 다양해졌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도 스스로 역사적-문법적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역사주의의 등장과 함께 역사 비평학이 발생하였다. 20세기초반 Barth에 와서 일종의 타협을 볼 때까지 이 방법은 맹위를 떨쳤다. Trelther가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다. 그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것들은 역사를 떠나서 되었다. 그래서 성경 자체가 말하는 역사와 학자들의 역사는 전혀 다른 것이되어 버렸다.
1학년 때 배운 내용과 이 과목과의 가교를 좀 세우자. 종래에는 단순하던 역사개념이 지금은 얼마나 복잡해졌는가? 역사의 장이 무엇인가? 역사의 시공성 : 시공은 하나님이 창조한 땅의 질서의 독특한 실제 영역이다. 럿셀이 질문한 것처럼 공간이 Nothing이냐, 아니면 어떤 용기냐? 어떤 용기이다. 또 시간성은 낮과 밤, 계절들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의 영역은 두 가지이다. 하늘과 땅. 여기서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땅과는 다른 영역이다. 하늘 영역도 피조된 것이다. 골 1:16 그런데 이 두 영역은 구분되기는 하나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땅의 영역은 하늘에 지배된다. 주기도문에 나타난대로, 천사의 회의(욥 1장, 미가야). 인간의 눈에는 영이 안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 장벽은 허물어진다. 천사를 보내어 체험의 형태로 감각하게 한다. 계시도 주신다. 보통 역사라 할 때는 이 땅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총칭하여 말한다.
두 영역 중에 더 실제의 영역은 하늘의 영역이나 성경은 이 땅의 사건들에 아주 관심이 많다. 롬 5:8.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 두 영역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역사에는 천사 등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사의 주체는 누구냐? 이는 두 실제의 영역과 관계 깊다. 대개는 가시적 영역을 보며 인간을 역사 주체로 본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 실현의 장으로 본다. 이것이 예정교리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원하시는대로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은 오랜 질문이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와 ‘선택의 능력’은 다른 말로 취급된다.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범죄는 강요와는 다른 것이다. 필연성은 없으나 자발적 선택으로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신비이다. 한마디로 모른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제한되기는 했으나 자유로운 역사의 주체이기도 하다. 칼빈이 예정교리를 말하며 한 동일한 행동 안에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이 같이 역사한다고 했다. 이 둘을 나눠버릴 때 자연신론이 되어 버린다. 변증법 신학도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본다.
역사와 그리스도 / 성경은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성경이 그리스도 증언의 책이라고 하셨다(요 5:39). 이 의미는 전 역사는 그리스도에 집결된다는 것이다.
신구약의 관계 / 가장 중요한,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설교, 스데반 설교, 바울 설교 등의 공통점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 언약 백성에게 설교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도가 언약 백성에게 설교하는 것에서 신구약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오늘은 딤전 1장을 좀 취급하고자 한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1:4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무익한 사변을 제시할 뿐인 자로 말한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경계하기 위함인데 그 대상은 첫째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 즉 이단이다. απεραντος(아페란토스; 끝없는)는 μυθοις(뮤도이스; 신화)와 γενεαλογιαις(게네알로기아이스; 족보)를 다 꾸밀 수 있다. 이 둘은▥▥ 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즉 족보와 신화는 족보의 신화라는 의미이다. μυθοις는 스토리, 우화, 동화, 전설, 신화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12절 이하는 11절까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바울의 개인 체험이므로 3-11의 내용이 핵심이다. 3-11은 잘못된 교훈에 대한 경계이다.
νομοδιδασκαλος(노모디다스칼로스; 율법사) 누가복음에 예수님께 질문했던 한 율법사는 서기관과 비슷했다. 서기관은 대개 바리새파로써 당시 독특한 계급을 형성하는 성경학자였다. 물론 성경 외의 문헌은 완전히 의지할 수 없다. 어릴 때에 입문하여 40세에 안수받는다. 기능상 오늘날 목사와 매우 비슷함.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사례를 받지 말고 직업을 가지도록 되어있다. 바울 사도도 장막 만드는 업을 가졌는데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율법사는 그 당시 굉장한 존경을 받았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을 율법사라고 부른다. 율법사는 서기관보다 더 높은, 랍비 중의 랍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사변으로 흐르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한때 νομοδιδασκαλος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12절에서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그가 11절까지 관심의 대상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은 좁게는 계명, 넓게는 구약 전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심의 대상은 구약성경, 구약역사까지이다. 다시말하면 ‘구약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그러면 여기 족보에 관한 신화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초대 교부 때부터 이견이 있어 왔다. 특히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은 이것이 영지주의적 이단을 염두에 두고한 말씀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이다.
πληρωμα(플레로마), κενομα(케노마) 실제영역, 물질계 영역, 이들은 신 개념에서도 이원론을 주장한다. 참 하나님과 창조신, 아이온 중 최고의 아이온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πληρομα에 속하므로 악한 물질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가현설을 주장한다.
γανσαλογια(간살로기아) 우주생성 신화는 노스틱 가르침일 것이다. 이 노스틱은 혼합주의적이고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대표자는 시몬 마구스(사도행전에서 베드로에게 책망을 들은 자)이다. 그는 음양 이론자이다.
니골라(계)당도 이런 류의 하나이다. 이들은 육신을 학대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이며 문란했다. 어떤 노스틱 자는 엄격하나 금욕주의이며 혹자는 문란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본문이 bifocal이 되어 버린다. 문맥에서 전체는 구약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신화와 족보가 구약에 대해서 유대적 랍비들의 배경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자는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구약 역사에 대한 번잡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구약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복잡한 생성과정을 유추해 내는 태도를 말하고 있다.
어쨌던 문맥 속의 이단은 노스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4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화와 족보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질을 두고 맞지않는 시각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켜 εκζητησεις(에크제테세이스; 무익한 사변)라고 한다. 이는 ‘무익한 사변’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추구하기보다는”에서 우리가 구약에서 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εν πιστε”(믿음 안에서)의 뜻은 무엇인가? 상당히 애매하다. D사본(베자사본:칼빈 제자인 베자가 소유했다가 기증한 것)에는 οικονομια(오이코노미아)가 οικδομια(오리코도미아)라고 되어 있다. 이러면 믿음 안에서 세우는 건덕 정도로 해석된다(칼빈 주석에서 οικοδομια를 사용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는 그대로 οικονομια를 받는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잘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그 시행’이란 뜻을 포함한다. 그 시행은 또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할 때 창세로부터 비밀었는데 지금 계시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복음,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지난 2년간 강의해 온 바 성경 곳곳에서 암시하는 것들에 대한 결론이다.
4절에서 신화, 족보에 대한 착념은 이런 하나님의 경륜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5,6절)경계의 목적은 이런 것인데 벗어나서 쓸데없는 것들에 떨어졌다. (7절)그 원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도 모르면서 율법 선생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율법의 학자가 되려고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제시하기 보다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동기가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5절)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사랑과 상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절에서는 율법은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12절 이하에서 한 때 바울 자신이 큰 죄인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았음을 말하고 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말하고 있다.
행 2:17-21 해석
1.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신약과 구약이 어떤 관계로 나타나고 있는가?
(1) 설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베드로가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약의 본문이 현재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구성 - 이 설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즉 이 설교는 오순절 사건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성령강림에 대하여 욜 2:28-32을 인용하여 논증한 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하여 시 16:8-11과 시 110:1을 인용함으로써 논증하고 있다.
(3) 구약 본문 - 욜 2:28-32의 인용 부분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중, 여호와께서 긍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사건(욜 2:18)에 이어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4) 신약 성경 저자는 성령강림으로 발생한 가장 특징적인 사실로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행 2:11)을 말씀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큰 일은 요엘서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등에서 잠정적으로 실현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임이 분명하며, 이것이 바로 신약기자의 생각이며 또한 사도 베드로의 선포 내용이다. 요엘서는 바로 이 ‘큰 일’이 있은 후에 성령을 부어주심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증거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2. 본문의 주석에 관한 문제
(1) 말세에 - 베드로가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라고 인용한 구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본문은 ןכ־ירחא היהו(웨 하야 아하레-켄; 그 후에)으로서, 이 말은 2:23의 ןושׁארב(바리오숀; 먼저)과 대조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한글 성경은 ןושׁארכ(카리오숀)으로 보고 번역한 것 같다). 베드로는 ןושׁארב(이전의 일, 하나님의 큰 일이 있을 시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ןכ־ירחא היהו(하나님의 큰 일이 있은 후 즉, 성령강림 사건)을 모두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아, 욜 2:18 전후를 하나로 묶어서 해석적으로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로 표현하고 있다(먼저 + 그 후에 = 말세에 : 종말론적 해석).
(2) 義의 선생 또는 “비(rain)"
베드로가 구약의 이 구절을 통하여 성령강림과 아울러서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논증하고 있으므로 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인용하는 그 모든 구약 본문들과 설교들이 “너희들이 못박은 예수가 바로 主와 그리스도이시다”는 한 촛점으로 모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ןושׁארב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 / הקדצל הרומה־תא םכל ןתנ־יכ
(와요레드 라켐 게쉠 모레 우말코쉬 바리오숀)/(키-나탄 라켐 에트-하모레 리츠다콰)
위의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הרומ는 “비(rain)”로도 해석될 수도 있고 - 더 확실하게는 הרוי라는 단어를 쓴다 - “선생(teacher)”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곧이어 나오는 구절은 분명히 “비”에 관한 내용이므로, 특히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에서 הרומ와 שׁוקלמ가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본에서 הרומ가 아닌 הרוי가 쓰여졌으며, 성경 전체의 용례에서 볼 때, הרומ가 “비”의 의미로 쓰인 곳은 요엘서 이곳 한 번 뿐인데 이곳에서마저 그 의미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예이다. 이에 반해서 הרומ가 “선생”의 의미로 쓰인 예는 상당히 많이 있다(왕하 17:28; 사 9:14; 시 84:7; 잠 6:13; 욥 36:22; 대하 15:3; 합 2:18; 잠 5:13; 사 30:20 등). 그리고 동사가 דרי(야라드) 대신 ןתנ(나탄)과 연결된 점과 הקדצל와의 연결을 생각한다면 הרומ를 “선생”의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הרומ에 정관사를 함께 씀으로써(“그 선생”, 이런 예는 성경에 단 한 번 이곳 뿐이다) 상당히 메시야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3. 구약 인용 구절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1)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고 나서 특별한 설명이 없이 곧 바로 나사렛 예수를 언급하고 있다. 즉, 요엘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있음을 암시(행 2:22)하고 있다.
(2) 베드로는 구약에서 예언된 바 하나님께서 보내실 성령강림의 사건을, 나사렛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되심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로서 들고 있다(행 2:22-24 - 하나님께서...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하나님께서...하셨으니). 즉,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구도 속에서 구약예언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다(성령강림은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다).
ןושׁארב(前)-הקדצל הרומה־תא // ןכ־ירחא היהו(後)-יהור־תא(성령)
(義의 선생, 예수)
(3) 성령강림은 나사렛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되심의 증거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다(요 16:7 이하 - 죄, 의, 심판).
4. “오순절”의 특별한 의미
(1) 오순절 날이 이르매 - 성경 저자가 성령강림의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서두에서 오순절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2) 오순절과 “안식일”
①오순절 - 유월절 다음 7 안식일(7*7+1=50). 안식일을 기준으로 해서 7번 안식일. 구약에서는 77절, 맥추절(출 34:22, 23:16)이라고 불리움.
②안식일 개념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출 34:22; 민 28:26).
③안식일의 의미 - 출 20장에서는 창조의 의미가 있으며 신 5장에서는 창조+재창조, 즉, 구속의 의미가 있다. 출 31:12 안식일 개념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은 “너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다” 이것을 잊지 않게 하는 날이 안식일이다(이것은 또한, 인용 본문의 욜 2:27과 연관된다).
유월절에서 7번 안식일 - 오순절
안식일을 확대시킨 것. 7 해(年) - 안식년
안식년을 확대시킨 것. 7 안식년 - 희년 - 모든 종되었던 자들을 무상으로 돌려줌. 토지도 무상으로 원주인에게 반환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눌린 것, 죄의 종에서 무상으로 구해 낼 것을 잘 가르치는 절기이다.
오순절은 이 희년의 개념을 잘 가지고 있으면서 매년 지키도록 되어있다.
(3) 오순절과 유월절
①오순절의 계산 방법 - 유월절을 기점으로 해서 7 안식일(7*7+1=50). 오순절은 구원하시는 날(유월절)과 연관되어야만 의미가 있다.
②유월절 - 이 절기는 출애굽 직후와 민 9장에서 한 번 지키고 그 이후 40년 동안 못지켰다. 왜냐하면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하였고 그래서 절기에 쓰일 무교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기업의 땅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유업의 땅의 복됨이 있어야 유월절이 소급하여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오순절(곡식의 날)이 있으므로 비로소 유월절이 의미가 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인한 구속사역이 유월절과 연결된다면 오순절은 성령강림과 관련된다.
私譯
(욜 2:21)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왜냐하면 그가 너희에게 의를 위하여 선생(義의 선생)을 주실 것이며 너희에게 큰 비를 내리실 것이니 먼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실 것이라)
׃ןושׁארב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 הקדצל הרומה־תא םכל ןתנ־יכ
(키-나탄 라켐 에트-하모레 리츠다콰 와요레드 라켐 게쉠 모레 우말코쉬 바리오숀)
우리말 성경은 ב(히브리명 베트; 바)를 כ(히브리명 코프; 카)로 보고 전과 같이라고 해석했다.
(욜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 니하리로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םכיתונבו םכינב ואבנו רשׂב־לכ־לע יחור־תא ךופשׁא ןכ־ירחא היהו
(웨하야 아하레-켄 에슈포크 에트-루히 알-콜-바사르 웨니베우 베네켐 우브노테켐)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욜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ןשׁע תורמית שׁאו םד ץראבו םימשׁב םיתפומ יתתנו
(웨나타티 모페팀 바샤마임 우바아레츠 담 와에쉬 티마로트 아샨)
(욜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평가 - “오순절 의미”는 비약이 심하다.
“말세에”에 대하여 해석적 인용이라는 표현에서 ‘해석적’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문제있다. 그냥 ‘함축적’ 등으로 표현해야 한다.
해석에서는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주관적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한 본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 중에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틀리든지 아니면 각 해석이 부분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아야 그 본문의 뜻의 단일성이 깨어지지 않는다.
불트만의 경우는 해석에는 반드시 주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실존론적 해석이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이해란 죽은 이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강하게 부딪혀 올 때 그것이 내게 의미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해석이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보다 내가 처한 삶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면 해석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에게 있어 해석의 다양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실존론적 해석은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독소가 있다. 그 속에는 모든 전통적 해석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종래에는 석의와 적용을 분리했는데 요즘의 경향은 이 둘을 섞어버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본문의 의미와 해석이 열려 있다고 하는 이것을 신약에 적용한 사람이 불트만이며 구약신학에 적용한 사람이 폰라드이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종결되지 않고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 실존론적 해석의 입장은 무슨 의미인가?
폰라드의 견해는 이렇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야곱의 아들들이 아니고 상이한 집단이었다. 팔레스틴에 돌아다닌 유목민들인데 이들이 팔레스틴에 도달한 시기도 다 다르다. 그들의 신들과 종교적 경험들도 다르다. 이들이 부족 연맹체(종교적 동맹체)를 형성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를 그리스의 델피 동맹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의 이스라엘 신앙은 간단하고 단순했는데 이렇게 집단을 형성하고 나자 각 부족의 상이한 종교적 전통을 수용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의 신, 야곱의 신 등의 혈연 관계로 연결되어 버렸다.
우리가 ‘해석학적’이란 말을 잘못쓰면 이런 오류들에 말려들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요엘서의 “그 후에”를 베드로는 “마지막 날에”로 인용한다. 이것을 ‘해석적 번역’이라고 발표하였으나 ‘해석적’이란 표현이 요즘의 신학적 배경하에서는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옛 본문과 현 상황에 실제적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해석자가 주관적으로 끌어 붙이는 것을 해석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베드로가 “마지막 날에”라고 인용한 것은 오히려 본문의 내용에 충실한 것이다.
신약 저자들이 어떤 본문을 인용할 때는 그 책 전체와 그 책이 구약에서 뜻하는 바를 염두에 두고 인용하고 있다. 그저 의미없이 한 단어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구약적 배경을 전제로 인용하고 있다. 예로 성전 청결 사건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리라”는 말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 보아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요엘서가 구약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요엘서는 한 마디로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요 회개를 촉구하며 그 회개를 통해서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요엘서의 연대는 언제인가? 다른 선지서는 “...시대에”라고 시작하지만 요엘서는 아니다. 그 선포시기를 추측하여 보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1장에서는 강대국으로부터의 압제를 말하고 있다. 또 기근과 병충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병충해는 실제는 전쟁의 참화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바벨론-앗수르의 침입과 비슷하다. 그러나 구원을 약속하는 2:21이하에는 이 침입에 의한 멸망을 바라보게 한다. 3:3이하는 포로후 선지자의 내용처럼 종국적인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극단적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앞부분에 치중하는 학자는 앞부분인 8세기로 잡는다. 그런가하면 뒷부분으로 치중하면 포로후로 잡는다.
그런데 한 가지 천재에 관한 예언은 반드시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8세기 이사야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엘을 빠른 시기로 잡을 수 있다. 또 요엘은 상당히 개략적이다. 그러므로 먼 시기에서 앞으로의 일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사야나 아모스의 경우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바벨론, 앗시리아를 언급하나 요엘은 한 강한 나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빠른 시기설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임할 심판을 말하는 것은 2:23에 있다. 앞에 있는 הרומ는 ‘선생’일 가능성이 많고 뒤에 있는 הרומ는 ‘비’라고 번역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며 의를 소나기처럼 붓는다고 함에서 의와 성령의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지막 날에”는 “그 날에”의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을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베드로 자신의 견해이다. 본믄을 바로 해석해서 예언한 것이다.
3:3(2:30) 이후에서 이는 신약에서 예수 이후의 말세 사건과 동일하다. 4장에서는 심판과 더불어 임할 역사의 전환점들을 잘 짚어 나가고 있다. 신약에서 복음서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비슷한 순서이다.
요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사역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여기 예언, 꿈, 이상은 모두 계시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 계시를 받음과 선포, 전달과 관련되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성령님의 사역의 본질이 계시 사역이다. 이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이다. 고전에서는 새 시대의 특징을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보혜사가 나에 대해 증거하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복음의 증거 사역을 수행함이 유래없이 도래할 것을 말한다.
또 이 사역에 참여할 자는 아들과 딸이다. 남녀의 구별이 없다. 젊은자이다. 노소의 구별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문자 그대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실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받으리니...”는 보편적 은혜성과 관계있다.
이 성령의 은혜가 왜 오순절에 관련 있을까? 오순절을 설명하면서 왜 하필 요엘서를 인용했을까? 이는 예수님이 설명한 오순절의 의미와 관계있기 때문이다. 행 1:5 성령세례를 말하고 그것에 대한 증인 사역을 하라고 하셨다(1:8). 결국 성령께서 임하셨을때에 방언을 하였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하였다(행 2:11). 이는 독특한 의도를 갖는 방언이다. 증인 사역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적이다. 그들로 땅 끝까지 증인 사역의 성취인 셈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오순절을 설명하면서 구약, 요엘서를 인용하는 것은 적절하였다. 더더욱 구약을 익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했다. 또 한 가지는 요엘서는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 2:22-24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과 표적으로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임을 밝히셨는데 너희가 죽였다. 그런데 이 죽음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이다. 또 부활에 대해서 그가 죽음 아래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 16편을 인용하고 있다.
행 2:33에 밝히듯이 이 시 16편도 오순절 성령오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2:27뿐만 아니라 25절부터 포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더구나 시 16편 전체의 내용은 무엇인가? 저자는 여호와께 피난하는데 그 이유는 2절 이하에 있다. 즉, 주께 피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 성도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핵심 내용은 생명이다.
그런데 이 본문이 부활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으로 인용될 수 있는가? 다윗은 죽어 무덤에 있다. 그러면 이 시편은 다윗에게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윗은 분명히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는 선지자여서 그 자손 중 한 사람이 왕좌에 앉은 것을 미리 보았다. 다윗이 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
그런데 시 16편에서 이렇게 넘어오는 것은 너무나 비약에 해당된다. 이것은 다윗이 당시 자신이 왕이지만 자기 외에 하나님이 왕좌에 앉게하실 궁극적 왕을 알고 있었고 자신은 그 왕에 대한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신약계시를 구약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닌가?라고 할지 모르나 시 110편에서 이것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셨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은 그림자임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약계시가 보다 희미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밝은 계시하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베드로 설교의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2:14,22, 3:12 베드로 설교의 주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 즉, 구약 언약 백성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 즉, 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먼저 구약 언약 백성에게 설명한다. 베드로는 먼저 이 사건이 구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요,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의 실마리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
2:18 나의 남종과 여종들 위에 내 신을 부어주리라(δουλος μου, δουλας μου; 둘로스 무, 둘라스 무). 여기 μου는 MT원문에는 없는 인용이다.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은 신분계층의 구분이 방해 요인일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μου를 붙였다. 그렇다면 낮은 사회계층을 본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과연 본문의 의미에 충실한 것인가? 추가적 의미를 덧붙인 것인가? 얼핏보면 많은 뜻이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본문에서는 단지 남녀 사회적 신분을 뜻하던 말이 μου가 붙음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비천한 신분의 사람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물건 취급받던 노예들이 이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고귀한 일을 하게된다.
2:21에서는 적절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 속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값싼 믿음,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믿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항상 같은 대답을 하심(늘 말세에 관한 말씀을 하심:죽으심→말세→재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으시고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후에 주의 재림이 올 것이다.
말세의 징조 :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있고 또한 핍박은 오히려 왕들과 관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기회가 되고 이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임하고 확장될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2:22ff : 성령 부으심과 계시 사역 이후. 성령오심의 역사적 배경, 경륜적 배경이 나옴. 요즈음은 경륜적 배경보다 역사적 배경이 더 많이 쓰임. 과거의 역사적 배경은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경륜적 배경이라고 말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심을 뜻하는 말을 경륜적 배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엘서 인용 : 요엘서 전체의 내용이 곧,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약속의 성취를 말한다.
행 2:22ff의 오순절 성령오심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의 시각에서 오순절에 성령오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하심(확증하심).
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예정하심에 따라서 저들의 손에 넘기워지신 분이요,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결코 나약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죽으셔야 할 분이셨다.
2:2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히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멸하시고 무력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 왜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무력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붙잡혀 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성경 시 16편을 인용해서 볼 때, 먼저 일반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망에 붙잡혀 계실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원리기 때문이다. 악은 멸하고 의인은 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롬 2:6-7),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으신 의인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다.
4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을 보면(passion narative), 유대인들(산헤드린에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꾸며내려고 애쓰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유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입증하고 있다. 이방 로마의 백부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의인이라고 고백한다.
2:24-25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옛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약속이 있는데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하신 부활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경건한 성도가 얻는 분깃이 곧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며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을 것”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해도 진정한 경건과 참 사람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연히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시 16편의 저자가 다윗임을 밝히면서, 이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역설한다. 그 이유로써 분명한 것은 먼저,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이미 죽어서 그 묘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져간다. “나”라고 제시된 다윗, 경건한 성도의 전형으로 지칭된 다윗은 지금 죽어서 육체가 썩어져 있으므로 이 시편의 27절의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30절 다윗의 독특한 지위, 직분,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다윗은 선지자요,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경륜을 제시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그에게 맹세하신 언약(다윗 언약 : 네 허리에서 난 자 중에 네 왕위에 앉을 자를 세우리라)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좌에 하나님의 사람이 앉으실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의 진정한 통치자의 예표요 그림자임을 알았다. 다윗은 이 언약 속에 세우실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다.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미리 계시받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이 음부에 버림을 당치 않고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을 것,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미 알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온 그의 예언시(詩)요, 나아가서 메시야시(詩)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베드로의 논증, 논리를 체계화시켜보면, 다윗은 지금 죽어 썩었으므로 이 詩가 다윗에게 성취되지 않았으며,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이 시에서 “나”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가?하는 것은 그것이 다윗 자신으로서는 자기가 아닌 자기 이상의 어떤 분이 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 자신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오실 것인데 자신은 그분의 그림자요 예표요, 자신은 그분을 멀리서 바라보며 가리키는 자이다. 단지 다윗은 그분의 대리자에 불과한 존재이다. 자신이 대리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칭호는 자신 가운데서 나중에 오실 자를 포함하여 말하였고 또한 자신을 그분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윗 자신은 이분이야 말로 죽지 않으시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왕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고난 후에 부활하실 것도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곧, 자신인 다윗까지도 함께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기의 영혼이 음부에 버리움을 당치 않고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게 될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 자신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다윗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경건한 성도, 곧 주께 피하는 경건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 다윗, 그리고 모든 경건한 성도가 함께 부활할 것을 예언한 구절이다. 이렇게 시 16편은 부활에 관하여 광범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할 때 비로소 확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을 배경으로 하여 행 3:15절은 ο αρχηγος της ζωης(호 아르케노스 테스 조에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한다.
행 2:32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죽으시고 부활하심. 이 부활은 다윗과 모든 성도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예언이 진정한 부활이 아니다. 이들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베드로는 시 16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직접적인 예언으로 본다.
33절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 승천하셔서 -마 28:18 -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sit in throne,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아들로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성령 부으심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이 앉으심과 관련되어 있다. 만유의 통치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관련되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사역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수행하신다. 이 말은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와 확장을 감당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로 들어 가셨다 → 하늘 영역에 들어가셔서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 → 천상통치시대가 열려짐. 이때 증인 사역이란, 성령님을 통한 통치 사역은 전쟁과 증언 사역을 통해 세상 정부 - 증언 사역의 특별함을 이 맥락을 통해서 밝히심이다.
34절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 천상통치에 대해서 더 깊이있게 밝히는 내용이 34절부터 나온다. 34절에서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행 1:11을 의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심을 의식한 반면 다윗은 하늘 영역에 올라간 자가 아니다. 다윗은 그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후 부활하여 하늘 영역에 들어가서 만유의 통치자로 권세를 가진 진정한 메시야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시 110편과 눅 20:42ff, 그리고 눅 20:2의 질문에서 잘 나타난다.
시 110편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에 관해서
2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무찌르는 부분
4절 히브리서의 아론 가문과 다른 독특한 제사장직임도 인정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왕직의 독특성과 관련된 직으로서 소위 제사장직의 독특한 직임과 정복의 왕적 사역을 함께 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 40:ff 대적의 손에서 그 백성을 건져 내셔서 그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정복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절정이 사 53장에 가서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된 대속적인 종의 모습이다. 이것은 죄값을 치루심으로서 심판의 근거를 소멸시키는 중요한 행위이다. 사단이 인간을 붙들어 맬 수 없도록 죄악을 없애버림으로써 이는 궁극적인 승리이다. 영적인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가장 나약한 모습인 죽는 모습이 가장 강력한 승리의 원천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곧, 제사장으로서의 죽음이 왕으로서의 가장 강력한 승리(정복사역)였다.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이 다윗이 진정한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메시야임을 증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후 왕되심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밝혀주는지 한번 살펴보자.
눅 20:41-44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름 : 메시야는 다윗에게 주이시며 성자이시다. 더군다나 주되신 메시야가 자신의 후손으로 오셔서 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위해 저들을 속하시고 하나님의 진정한 대적을 멸하시고 그의 백성에게 참 안식을 주실 것을 알았다. 즉, 제사장적 왕적 사명을 다하실 것을 알았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야 사역을 내다보는 예표요 예시임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영원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필연성의 한 조건이다. 이것이 성령오심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할 것이다.
성령오심의 방언 사역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이 마귀의 대적에 대한 근본적인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시고(예수 그리스도의 천상통치) 확장하는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과 성령님의 지상사역의 대조를 굳이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은 증언사역이라는 점에서 성령님의 지상사역과 대조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전쟁이다.
마 28:18-20 오순절 성령오심은, 대적을 멸하시고 사람의 심령을 정복하여 이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 시작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바로 사람의 심령에서 시작되는 나라이다.
행 2:37 베드로의 증언 사역에 따라 성령의 칼에 그들의 심령이 찔림을 받았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전쟁은 영적인 전쟁이요 심령을 굴복시키고 심령을 정복하는 전쟁이다. 심령을 정복하는 결과는 그 삶에 거룩한 열매가 맺히게 하는 싸움이다.
행 2:41ff 교회의 본질 :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도의 교제와 성만찬을 행한다.
행 3장 앉은뱅이를 고치심. 베드로는 자기의 힘과 능력이 아니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 힘과 내 정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마음이 평안하다.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셔서 성령님을 통해 천상통치 사역을 하실 때 옛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모든 말씀이 회복되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왜 이루어질 것이라 하지 않고 회복되어질 것이라고 했나? 그것은 3:22ff에서 모세가 한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라는 말을 한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배경을 인식할 때 매우 깊은 내용과 폭넓은 배경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요엘서와 시 16편의 인용을 보면서 신약 저자들의 구약인용은 견강부회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약 저자들의 구약 이해는 매우 심오하고 광범위하다. 우리의 무식한 시각으로 볼 때 억지같아 보이는 인용은 매우 적절한 구약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신약 본문의 흐름에도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우선 ‘요엘서’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인용한 의도와 그 효과 또는 결과는 무엇일까? 우선 요엘서 인용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밝히신다. 요엘 3장은 보편적 성령감림을 말씀하고 있다. 이 성령 임하심의 결과는 계시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이미 행1장부터 오순절을 앞두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요엘서 인용의 더 큰 의미는 요엘서와 오순절을 연결시켜 오순절 사건을 요엘서의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의미가 있다. 오순절 사건이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 그 역사적 종말의 흐름 속에 차지하는 의미를 밝혔다.
시 16편의 인용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얼핏보아 이것이 잘 나타나지 않으나 36절까지 보면 잘 나타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연성에 이어 부활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편의 참된 적용 대상이 누군가를 밝혀 주고 있다.
다윗이 어떤 심정으로 이 시편을 기록하였느냐? 선지자로서 미리보고 기록하였다. 이는 또 영원한 언약과도 관련되었다. 얼핏보면 다윗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앞으로 오셔서 자신의 왕위에 있을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부활의 생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가분의 연합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뻔한 사실을 왜 이렇게 반복하는가? 이러한 논의가 우리가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특별한 의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높이 올리우심이며 그가 성령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22-36의 논의를 통해 오순절 사건에 어떤 의미가 부여 되었는가? 그리스도가 만유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에 관한 예증으로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심령이 찔렸다. 이것은 성령님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정복의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다.
3장의 내용도 대동소이한데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다루는 관심 부분이다. 3:1 기도시간(상번제)이 언급된 것은 암시적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하는 집”이란 무슨 뜻인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기도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도 적절하다. 나면서부터의 앉은뱅이, 삶의 정상적 기능 상실은 영적 기능까지를 내포해서 취급해야 한다. 성경은 간혹 외적 상태가 내적 상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예:중풍병자).
6절 사도들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 세상적 차원에서의 힘과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우리의 더 근본적이고 참된 소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세상 차원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내게 없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 이름은 그 지위, 본질, 권세, 능력 모든 것이다. 그 신분을 가장 압축해서 밝힌 것이 빌 2:9 이하이다. 만유의 주 되심, 통치자 되심, 이 이름을 제자들이 소유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만유를 통치하시되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 공부라는 것 속에 담긴 뉘앙스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적은 좌우에 모두 있다. 곧장 바로만 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을 자신이 체험할 때 목회자의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선 이 놀라운 사건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어쩌면 신학교육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들지 않는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은 명백히 아니나 자신의 경건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게 된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엘리후가 욥에게 했던 말, “네 의는 너에게나 유익할 뿐이다.”
13절 이하의 설명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14절 ‘거룩하시고 의로운 자’라는 뜻이 무엇일까? 눅 1:35; 요 6:69에서 거룩하신 분은 신적인 신분, 영생의 근원인 신분이라는 예수님의 신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절 “생명의 근원자” 이 세 단어는 독특하다. 이는 부활 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특징 짓는 말이다. 8장에서 το πνχυμα της ζωης(토 프뉴마 테스 조에스; 생명의 성령)라고 한다.
절 이하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너희를 위하여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선 초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록 육신으로는 우리를 떠나 천상영역에 들어갔으나 어떤 의미에서든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심을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단어 사용이 부정과거시제이므로 맞지 않다. 그러면 재림주로 오실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맥이 어색하다. 26절 그를 부활시켜서...악함을 버리게 하셨다. 여기서 ‘보내심’은 초림은 분명히 아니며 재림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20절의 보내심도 aorist사용이 어색하기는 하나 성령을 통한 그의 사역을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 28:20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말에서 예수님의 실제적 임재와 성령의 임재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21절 만유를 회복하시는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을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1:6의 질문을 의미있는 질문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천상사역은 계시의 시초까지 조망하여 바라보게 한다. 그 당시 역사를 향해 선지자의 말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개하라 그리하면 억눌린 것, 저주에서 놓여난다.
3:20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 너희를 위하여 정하신 바 된 예수 그리스도란 것이다. 이는 이 구원이 Ισραηλ(이스라엘)과 밀착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21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그를 받아 두리라 -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님을 통하여 왕적 통치를 행하시고 재림으로 인해 모든 것이 종결될 그의 천상 통치로 선지자가 말한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를 심화, 확대 시키는 것이다. 행 1:8의 제자들의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그 의도로 물은 것인지, 제자들이 심중에서 그 질문이 얼마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질문이 전혀 핵심을 벗어난 질문은 아니다.
Ισραηλ의 회복 - 암 9: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히 짓밟힌 바 된 것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방 구원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일어서는 이 순서가 뒤바뀌어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아니다. 도래할 구원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회복하는 때요, 이방은 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후에 벌어지는 기대밖의 사실 즉, Ισραημ은 구원을 배척하여 떨어져 나가고 이방인이 더욱 적극적으로 구원을 받아들임을 바울은 롬 9장에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깊이 설명한다. 이방인에 대해 더욱 더 복음을 받아들인 현상을 Ισραηλ이 원가지요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으로 말한다.
“옛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들” -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의 범위는 오래 전 옛 시대의 예언까지 다 포함 -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역사를 포함한다. 모든 계시의 말씀, 시초의 계시의 말씀까지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포함한다.
“말씀하신 것들의 회복” - 이는 미래적인 것의 성취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말씀하신 것들의 성취가 아니라 회복이라 쓴 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원상복귀시킨다는 의미가 담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선지자들의 말씀하신 것을 회복하심은 미래에 관련된 예언이라기 보다는 당시 Ισραηλ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었고 잠정적으로나마 현실로 존재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사역은 옛 예언의 자취일 뿐 아니라 옛 Ισραηλ의 역사 속에 현실로 존재했던 것을 회복하는 사역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이것을 Ισραηλ의 역사 속에서 잠정적으로 실현하셨다. 이것이 구약인데 이것이 Ισραηλ의 반역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고 완성해 나가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전Ισραηλ 역사가 포괄되어 있다.
3:22 모세의 말을 인용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가? 신 18:15-20 여기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신 18:9 이하 하늘의 뜻 神意를 묻기 위해 점장이, 복술자를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 이방인, 가나안인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겠다. 즉,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 때가 있을텐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서 너희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는 폭 넓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즉, 모세 이후의 모든 선지자를 포함하는 폭 넓은 의미에서 볼 수 있다.
신 18:19 나의 말을 청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책임을 묻겠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신약에 와서는, 말라기로 예언이 종결되고 400년간 선지자가 없었다. 이 포괄적인 의미가 신약 저자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옛날 모세로부터 말해온 그 선지자를 보았다고 했다. 또 나사렛에서 선한 것 즉,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다. Papias사본에서는 “ο προφητες”(호 프로페테스; 그 선지자) 이는 특별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이것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와 연결해 볼 때, 그 선지자(메시야)는 나사렛에서 나올 수 없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조차 이해하기를 앞으로 오시는 메시야와 그 선지자는 한 동일인으로 직분이 다양할 것이다. 제사장적 사역과 왕직과 선지자적 사역이 overlap할 것이라고 보았다.
베드로 사도는 ‘나와 같은 선지자’라 말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했나?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선지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사무엘로부터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선지자를 말하며 이들이 바로 이 날들을 말하고 선포했다.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사역, 계시사역이 이 날들에 의미있다. 모세도 선지자이다. 그런데 사무엘부터 말한 것은 그 의미가 포괄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선지자라 할 때 우리는 8세기 이후 글을 남긴 선지자들로 본다. 그러나 8세기 이후 글을 남긴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요, 하나님이 다시 회복하시고 이에 이방도 포함된다. 8세기 선지자들에게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이 주로 나온다. 그러나 사무엘에서부터 선지자를 제시하는 것은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부터 나온다.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메시야적 통치이다. 그러나 이 예언의 1차적 적용대상은 다윗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선지자적 사역에 사무엘을 포함시킨 것은 각 시대마다 그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한다. 구약에 대해, 메시야에 대해 명백히 말하는 곳 뿐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구약 전 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볼 수 있다.
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 하신다. 그러나 직접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별로 없다. 그래서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증언이라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만 증언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는 시각에서 볼 때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게 취급되기도 하나 더 깊은 의도는 신,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책으로 이해되기 위한 구체적 길이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것이다.
3:25ff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의 대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착성, 관계를 말하는데, 이를 단순히 설교적 효과를 위해서라고 보는 이도 있다. 설교적 의도도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폰라드가 주장한 것으로서 즉, 설교적 의도란 설교적 효과를 위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서 말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인가가 문제가 아니고 Kerygmatic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3:26 그러나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라는 말은,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한 보편적 언약의 축복을 말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Priority를 말하는 것이다. 롬 2장, 이스라엘을 철저히 깨뜨림, 롬 9장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 말함, 롬 1:16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자는 구절이 있는 같은 장에서도 유대인이 먼저라는 말이 나온다.
유대인의 우선성의 내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잘못하면 세대주의가 되고 또는 유대인 우선성을 말하는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 유대인이 대규모로 회개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세대주의는 앞의 모든 성경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육적 이스라엘의 왕국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철폐하고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말했다. 새 이스라엘을 교회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와 같이 해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이스라엘로 보는 것이 문맥에서 좋은 것 같다.
옛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날들’에서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 바울 서신 자체가 두 가지를 말한다. “이방인, 유대인의 구별이 완전 철폐”와 동시에 먼저는 “유대인에게”라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유대인을 말할 필요없다. 옛 이스라엘은 해소되어 버렸으므로 더 이상 말할 필요없다고 종결지워 버리다. 그러면 “먼저는 유대인에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행 3:26의 그를 먼저 너희에게 보내셨다. 초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니다. 이는 현재적,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의미이다. 3:19은 재림과 관련해서 해석하고 3:20절은 초림으로 번역함으로 3:26은 현재적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의미로 본다. 이 때는 복음전파로 인해 우리에게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 이는 설교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특별한 회중에게 입으로 말씀,복음을 전하므로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먼저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복음전파의 우선성을 말한다. 이는 너희에게 전파되었다(부정과거). 베드로 사도가 이미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부정과거형을 사용한 것이다.
이후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방인의 사도라 하는 바울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도, 회당에 찾아가 유대인에게 먼저 전하고 그 다음 이방인에게 간다.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므로 회당에서 복음 전함이 자연스러운 순서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유대인에게의 복음 전파의 우선성과 관련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복음 전파의 우선성은 잠정적인가? 지속적인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복음 전파는 해소되어 버릴 것인가?
행 15장 예루살렘회의의 결정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잠정적 결정으로 해소되어 버릴 것으로 이해한다. 당시 유대인에게 너무 혐오스러운 것만을 금령으로 정한다. 이와같은 예루살렘회의와 관련하여 유대인의 복음 전파도 잠정적인 것인가? 예루살렘회의의 결정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대인을 의식하고 한 잠정적인 결정이기 보다는 레위기를 의식하고 한 가결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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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끝없는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우리는 구약신학 시간이지만 사도행전, 갈라디아서를 선택하여 취급하고자 한다. 이것은 흔히 성경신학적이라고 하는 방법이다.
교의학의 특징은 - 성경신학과 대조되는 입장에서 -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논리의 체계이다. 반면 성경신학은 성경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신학이다. 역사성이란 예전부터 있어 왔다. 종교개혁까지는 이 의미가 단순했으나 요즘에는 이 역사적이란 말이 다양해졌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도 스스로 역사적-문법적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역사주의의 등장과 함께 역사 비평학이 발생하였다. 20세기초반 Barth에 와서 일종의 타협을 볼 때까지 이 방법은 맹위를 떨쳤다. Trelther가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다. 그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것들은 역사를 떠나서 되었다. 그래서 성경 자체가 말하는 역사와 학자들의 역사는 전혀 다른 것이되어 버렸다.
1학년 때 배운 내용과 이 과목과의 가교를 좀 세우자. 종래에는 단순하던 역사개념이 지금은 얼마나 복잡해졌는가? 역사의 장이 무엇인가? 역사의 시공성 : 시공은 하나님이 창조한 땅의 질서의 독특한 실제 영역이다. 럿셀이 질문한 것처럼 공간이 Nothing이냐, 아니면 어떤 용기냐? 어떤 용기이다. 또 시간성은 낮과 밤, 계절들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의 영역은 두 가지이다. 하늘과 땅. 여기서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땅과는 다른 영역이다. 하늘 영역도 피조된 것이다. 골 1:16 그런데 이 두 영역은 구분되기는 하나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땅의 영역은 하늘에 지배된다. 주기도문에 나타난대로, 천사의 회의(욥 1장, 미가야). 인간의 눈에는 영이 안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 장벽은 허물어진다. 천사를 보내어 체험의 형태로 감각하게 한다. 계시도 주신다. 보통 역사라 할 때는 이 땅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총칭하여 말한다.
두 영역 중에 더 실제의 영역은 하늘의 영역이나 성경은 이 땅의 사건들에 아주 관심이 많다. 롬 5:8.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 두 영역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역사에는 천사 등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사의 주체는 누구냐? 이는 두 실제의 영역과 관계 깊다. 대개는 가시적 영역을 보며 인간을 역사 주체로 본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 실현의 장으로 본다. 이것이 예정교리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원하시는대로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은 오랜 질문이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와 ‘선택의 능력’은 다른 말로 취급된다.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범죄는 강요와는 다른 것이다. 필연성은 없으나 자발적 선택으로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신비이다. 한마디로 모른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제한되기는 했으나 자유로운 역사의 주체이기도 하다. 칼빈이 예정교리를 말하며 한 동일한 행동 안에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이 같이 역사한다고 했다. 이 둘을 나눠버릴 때 자연신론이 되어 버린다. 변증법 신학도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본다.
역사와 그리스도 / 성경은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성경이 그리스도 증언의 책이라고 하셨다(요 5:39). 이 의미는 전 역사는 그리스도에 집결된다는 것이다.
신구약의 관계 / 가장 중요한,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설교, 스데반 설교, 바울 설교 등의 공통점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 언약 백성에게 설교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도가 언약 백성에게 설교하는 것에서 신구약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오늘은 딤전 1장을 좀 취급하고자 한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1:4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무익한 사변을 제시할 뿐인 자로 말한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경계하기 위함인데 그 대상은 첫째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 즉 이단이다. απεραντος(아페란토스; 끝없는)는 μυθοις(뮤도이스; 신화)와 γενεαλογιαις(게네알로기아이스; 족보)를 다 꾸밀 수 있다. 이 둘은▥▥ 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즉 족보와 신화는 족보의 신화라는 의미이다. μυθοις는 스토리, 우화, 동화, 전설, 신화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12절 이하는 11절까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바울의 개인 체험이므로 3-11의 내용이 핵심이다. 3-11은 잘못된 교훈에 대한 경계이다.
νομοδιδασκαλος(노모디다스칼로스; 율법사) 누가복음에 예수님께 질문했던 한 율법사는 서기관과 비슷했다. 서기관은 대개 바리새파로써 당시 독특한 계급을 형성하는 성경학자였다. 물론 성경 외의 문헌은 완전히 의지할 수 없다. 어릴 때에 입문하여 40세에 안수받는다. 기능상 오늘날 목사와 매우 비슷함.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사례를 받지 말고 직업을 가지도록 되어있다. 바울 사도도 장막 만드는 업을 가졌는데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율법사는 그 당시 굉장한 존경을 받았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을 율법사라고 부른다. 율법사는 서기관보다 더 높은, 랍비 중의 랍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사변으로 흐르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한때 νομοδιδασκαλος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12절에서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그가 11절까지 관심의 대상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은 좁게는 계명, 넓게는 구약 전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심의 대상은 구약성경, 구약역사까지이다. 다시말하면 ‘구약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그러면 여기 족보에 관한 신화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초대 교부 때부터 이견이 있어 왔다. 특히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은 이것이 영지주의적 이단을 염두에 두고한 말씀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영지주의의 세계관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이다.
πληρωμα(플레로마), κενομα(케노마) 실제영역, 물질계 영역, 이들은 신 개념에서도 이원론을 주장한다. 참 하나님과 창조신, 아이온 중 최고의 아이온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πληρομα에 속하므로 악한 물질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가현설을 주장한다.
γανσαλογια(간살로기아) 우주생성 신화는 노스틱 가르침일 것이다. 이 노스틱은 혼합주의적이고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대표자는 시몬 마구스(사도행전에서 베드로에게 책망을 들은 자)이다. 그는 음양 이론자이다.
니골라(계)당도 이런 류의 하나이다. 이들은 육신을 학대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이며 문란했다. 어떤 노스틱 자는 엄격하나 금욕주의이며 혹자는 문란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본문이 bifocal이 되어 버린다. 문맥에서 전체는 구약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신화와 족보가 구약에 대해서 유대적 랍비들의 배경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자는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구약 역사에 대한 번잡한 해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구약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복잡한 생성과정을 유추해 내는 태도를 말하고 있다.
어쨌던 문맥 속의 이단은 노스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4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화와 족보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경륜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질을 두고 맞지않는 시각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켜 εκζητησεις(에크제테세이스; 무익한 사변)라고 한다. 이는 ‘무익한 사변’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추구하기보다는”에서 우리가 구약에서 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εν πιστε”(믿음 안에서)의 뜻은 무엇인가? 상당히 애매하다. D사본(베자사본:칼빈 제자인 베자가 소유했다가 기증한 것)에는 οικονομια(오이코노미아)가 οικδομια(오리코도미아)라고 되어 있다. 이러면 믿음 안에서 세우는 건덕 정도로 해석된다(칼빈 주석에서 οικοδομια를 사용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는 그대로 οικονομια를 받는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잘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그 시행’이란 뜻을 포함한다. 그 시행은 또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할 때 창세로부터 비밀었는데 지금 계시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복음,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지난 2년간 강의해 온 바 성경 곳곳에서 암시하는 것들에 대한 결론이다.
4절에서 신화, 족보에 대한 착념은 이런 하나님의 경륜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5,6절)경계의 목적은 이런 것인데 벗어나서 쓸데없는 것들에 떨어졌다. (7절)그 원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도 모르면서 율법 선생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율법의 학자가 되려고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제시하기 보다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성경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동기가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5절)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사랑과 상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절에서는 율법은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12절 이하에서 한 때 바울 자신이 큰 죄인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았음을 말하고 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말하고 있다.
행 2:17-21 해석
1.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신약과 구약이 어떤 관계로 나타나고 있는가?
(1) 설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베드로가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약의 본문이 현재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구성 - 이 설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즉 이 설교는 오순절 사건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성령강림에 대하여 욜 2:28-32을 인용하여 논증한 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하여 시 16:8-11과 시 110:1을 인용함으로써 논증하고 있다.
(3) 구약 본문 - 욜 2:28-32의 인용 부분은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중, 여호와께서 긍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사건(욜 2:18)에 이어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4) 신약 성경 저자는 성령강림으로 발생한 가장 특징적인 사실로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행 2:11)을 말씀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큰 일은 요엘서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등에서 잠정적으로 실현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임이 분명하며, 이것이 바로 신약기자의 생각이며 또한 사도 베드로의 선포 내용이다. 요엘서는 바로 이 ‘큰 일’이 있은 후에 성령을 부어주심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증거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2. 본문의 주석에 관한 문제
(1) 말세에 - 베드로가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라고 인용한 구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본문은 ןכ־ירחא היהו(웨 하야 아하레-켄; 그 후에)으로서, 이 말은 2:23의 ןושׁארב(바리오숀; 먼저)과 대조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한글 성경은 ןושׁארכ(카리오숀)으로 보고 번역한 것 같다). 베드로는 ןושׁארב(이전의 일, 하나님의 큰 일이 있을 시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ןכ־ירחא היהו(하나님의 큰 일이 있은 후 즉, 성령강림 사건)을 모두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아, 욜 2:18 전후를 하나로 묶어서 해석적으로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로 표현하고 있다(먼저 + 그 후에 = 말세에 : 종말론적 해석).
(2) 義의 선생 또는 “비(rain)"
베드로가 구약의 이 구절을 통하여 성령강림과 아울러서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논증하고 있으므로 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인용하는 그 모든 구약 본문들과 설교들이 “너희들이 못박은 예수가 바로 主와 그리스도이시다”는 한 촛점으로 모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ןושׁארב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 / הקדצל הרומה־תא םכל ןתנ־יכ
(와요레드 라켐 게쉠 모레 우말코쉬 바리오숀)/(키-나탄 라켐 에트-하모레 리츠다콰)
위의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הרומ는 “비(rain)”로도 해석될 수도 있고 - 더 확실하게는 הרוי라는 단어를 쓴다 - “선생(teacher)”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곧이어 나오는 구절은 분명히 “비”에 관한 내용이므로, 특히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에서 הרומ와 שׁוקלמ가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본에서 הרומ가 아닌 הרוי가 쓰여졌으며, 성경 전체의 용례에서 볼 때, הרומ가 “비”의 의미로 쓰인 곳은 요엘서 이곳 한 번 뿐인데 이곳에서마저 그 의미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예이다. 이에 반해서 הרומ가 “선생”의 의미로 쓰인 예는 상당히 많이 있다(왕하 17:28; 사 9:14; 시 84:7; 잠 6:13; 욥 36:22; 대하 15:3; 합 2:18; 잠 5:13; 사 30:20 등). 그리고 동사가 דרי(야라드) 대신 ןתנ(나탄)과 연결된 점과 הקדצל와의 연결을 생각한다면 הרומ를 “선생”의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הרומ에 정관사를 함께 씀으로써(“그 선생”, 이런 예는 성경에 단 한 번 이곳 뿐이다) 상당히 메시야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3. 구약 인용 구절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1)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고 나서 특별한 설명이 없이 곧 바로 나사렛 예수를 언급하고 있다. 즉, 요엘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있음을 암시(행 2:22)하고 있다.
(2) 베드로는 구약에서 예언된 바 하나님께서 보내실 성령강림의 사건을, 나사렛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되심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로서 들고 있다(행 2:22-24 - 하나님께서...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하나님께서...하셨으니). 즉,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구도 속에서 구약예언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다(성령강림은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다).
ןושׁארב(前)-הקדצל הרומה־תא // ןכ־ירחא היהו(後)-יהור־תא(성령)
(義의 선생, 예수)
(3) 성령강림은 나사렛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되심의 증거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다(요 16:7 이하 - 죄, 의, 심판).
4. “오순절”의 특별한 의미
(1) 오순절 날이 이르매 - 성경 저자가 성령강림의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서두에서 오순절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2) 오순절과 “안식일”
①오순절 - 유월절 다음 7 안식일(7*7+1=50). 안식일을 기준으로 해서 7번 안식일. 구약에서는 77절, 맥추절(출 34:22, 23:16)이라고 불리움.
②안식일 개념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출 34:22; 민 28:26).
③안식일의 의미 - 출 20장에서는 창조의 의미가 있으며 신 5장에서는 창조+재창조, 즉, 구속의 의미가 있다. 출 31:12 안식일 개념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은 “너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다” 이것을 잊지 않게 하는 날이 안식일이다(이것은 또한, 인용 본문의 욜 2:27과 연관된다).
유월절에서 7번 안식일 - 오순절
안식일을 확대시킨 것. 7 해(年) - 안식년
안식년을 확대시킨 것. 7 안식년 - 희년 - 모든 종되었던 자들을 무상으로 돌려줌. 토지도 무상으로 원주인에게 반환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눌린 것, 죄의 종에서 무상으로 구해 낼 것을 잘 가르치는 절기이다.
오순절은 이 희년의 개념을 잘 가지고 있으면서 매년 지키도록 되어있다.
(3) 오순절과 유월절
①오순절의 계산 방법 - 유월절을 기점으로 해서 7 안식일(7*7+1=50). 오순절은 구원하시는 날(유월절)과 연관되어야만 의미가 있다.
②유월절 - 이 절기는 출애굽 직후와 민 9장에서 한 번 지키고 그 이후 40년 동안 못지켰다. 왜냐하면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하였고 그래서 절기에 쓰일 무교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기업의 땅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유업의 땅의 복됨이 있어야 유월절이 소급하여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오순절(곡식의 날)이 있으므로 비로소 유월절이 의미가 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인한 구속사역이 유월절과 연결된다면 오순절은 성령강림과 관련된다.
私譯
(욜 2:21)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왜냐하면 그가 너희에게 의를 위하여 선생(義의 선생)을 주실 것이며 너희에게 큰 비를 내리실 것이니 먼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실 것이라)
׃ןושׁארב שׁוקלמו הרומ םשׁג םכל דרויו הקדצל הרומה־תא םכל ןתנ־יכ
(키-나탄 라켐 에트-하모레 리츠다콰 와요레드 라켐 게쉠 모레 우말코쉬 바리오숀)
우리말 성경은 ב(히브리명 베트; 바)를 כ(히브리명 코프; 카)로 보고 전과 같이라고 해석했다.
(욜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 니하리로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םכיתונבו םכינב ואבנו רשׂב־לכ־לע יחור־תא ךופשׁא ןכ־ירחא היהו
(웨하야 아하레-켄 에슈포크 에트-루히 알-콜-바사르 웨니베우 베네켐 우브노테켐)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욜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ןשׁע תורמית שׁאו םד ץראבו םימשׁב םיתפומ יתתנו
(웨나타티 모페팀 바샤마임 우바아레츠 담 와에쉬 티마로트 아샨)
(욜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평가 - “오순절 의미”는 비약이 심하다.
“말세에”에 대하여 해석적 인용이라는 표현에서 ‘해석적’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문제있다. 그냥 ‘함축적’ 등으로 표현해야 한다.
해석에서는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주관적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한 본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 중에 하나는 옳고 나머지는 틀리든지 아니면 각 해석이 부분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아야 그 본문의 뜻의 단일성이 깨어지지 않는다.
불트만의 경우는 해석에는 반드시 주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실존론적 해석이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이해란 죽은 이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강하게 부딪혀 올 때 그것이 내게 의미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해석이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보다 내가 처한 삶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면 해석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에게 있어 해석의 다양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실존론적 해석은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독소가 있다. 그 속에는 모든 전통적 해석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종래에는 석의와 적용을 분리했는데 요즘의 경향은 이 둘을 섞어버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본문의 의미와 해석이 열려 있다고 하는 이것을 신약에 적용한 사람이 불트만이며 구약신학에 적용한 사람이 폰라드이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종결되지 않고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 실존론적 해석의 입장은 무슨 의미인가?
폰라드의 견해는 이렇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야곱의 아들들이 아니고 상이한 집단이었다. 팔레스틴에 돌아다닌 유목민들인데 이들이 팔레스틴에 도달한 시기도 다 다르다. 그들의 신들과 종교적 경험들도 다르다. 이들이 부족 연맹체(종교적 동맹체)를 형성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를 그리스의 델피 동맹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의 이스라엘 신앙은 간단하고 단순했는데 이렇게 집단을 형성하고 나자 각 부족의 상이한 종교적 전통을 수용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의 신, 야곱의 신 등의 혈연 관계로 연결되어 버렸다.
우리가 ‘해석학적’이란 말을 잘못쓰면 이런 오류들에 말려들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요엘서의 “그 후에”를 베드로는 “마지막 날에”로 인용한다. 이것을 ‘해석적 번역’이라고 발표하였으나 ‘해석적’이란 표현이 요즘의 신학적 배경하에서는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옛 본문과 현 상황에 실제적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해석자가 주관적으로 끌어 붙이는 것을 해석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베드로가 “마지막 날에”라고 인용한 것은 오히려 본문의 내용에 충실한 것이다.
신약 저자들이 어떤 본문을 인용할 때는 그 책 전체와 그 책이 구약에서 뜻하는 바를 염두에 두고 인용하고 있다. 그저 의미없이 한 단어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구약적 배경을 전제로 인용하고 있다. 예로 성전 청결 사건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리라”는 말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 보아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요엘서가 구약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요엘서는 한 마디로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요 회개를 촉구하며 그 회개를 통해서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요엘서의 연대는 언제인가? 다른 선지서는 “...시대에”라고 시작하지만 요엘서는 아니다. 그 선포시기를 추측하여 보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1장에서는 강대국으로부터의 압제를 말하고 있다. 또 기근과 병충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병충해는 실제는 전쟁의 참화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바벨론-앗수르의 침입과 비슷하다. 그러나 구원을 약속하는 2:21이하에는 이 침입에 의한 멸망을 바라보게 한다. 3:3이하는 포로후 선지자의 내용처럼 종국적인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극단적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앞부분에 치중하는 학자는 앞부분인 8세기로 잡는다. 그런가하면 뒷부분으로 치중하면 포로후로 잡는다.
그런데 한 가지 천재에 관한 예언은 반드시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8세기 이사야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엘을 빠른 시기로 잡을 수 있다. 또 요엘은 상당히 개략적이다. 그러므로 먼 시기에서 앞으로의 일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이사야나 아모스의 경우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바벨론, 앗시리아를 언급하나 요엘은 한 강한 나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빠른 시기설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임할 심판을 말하는 것은 2:23에 있다. 앞에 있는 הרומ는 ‘선생’일 가능성이 많고 뒤에 있는 הרומ는 ‘비’라고 번역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며 의를 소나기처럼 붓는다고 함에서 의와 성령의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지막 날에”는 “그 날에”의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을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베드로 자신의 견해이다. 본믄을 바로 해석해서 예언한 것이다.
3:3(2:30) 이후에서 이는 신약에서 예수 이후의 말세 사건과 동일하다. 4장에서는 심판과 더불어 임할 역사의 전환점들을 잘 짚어 나가고 있다. 신약에서 복음서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비슷한 순서이다.
요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사역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여기 예언, 꿈, 이상은 모두 계시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 계시를 받음과 선포, 전달과 관련되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성령님의 사역의 본질이 계시 사역이다. 이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이다. 고전에서는 새 시대의 특징을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보혜사가 나에 대해 증거하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복음의 증거 사역을 수행함이 유래없이 도래할 것을 말한다.
또 이 사역에 참여할 자는 아들과 딸이다. 남녀의 구별이 없다. 젊은자이다. 노소의 구별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문자 그대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실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받으리니...”는 보편적 은혜성과 관계있다.
이 성령의 은혜가 왜 오순절에 관련 있을까? 오순절을 설명하면서 왜 하필 요엘서를 인용했을까? 이는 예수님이 설명한 오순절의 의미와 관계있기 때문이다. 행 1:5 성령세례를 말하고 그것에 대한 증인 사역을 하라고 하셨다(1:8). 결국 성령께서 임하셨을때에 방언을 하였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하였다(행 2:11). 이는 독특한 의도를 갖는 방언이다. 증인 사역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적이다. 그들로 땅 끝까지 증인 사역의 성취인 셈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오순절을 설명하면서 구약, 요엘서를 인용하는 것은 적절하였다. 더더욱 구약을 익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했다. 또 한 가지는 요엘서는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 2:22-24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과 표적으로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임을 밝히셨는데 너희가 죽였다. 그런데 이 죽음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이다. 또 부활에 대해서 그가 죽음 아래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 16편을 인용하고 있다.
행 2:33에 밝히듯이 이 시 16편도 오순절 성령오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2:27뿐만 아니라 25절부터 포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더구나 시 16편 전체의 내용은 무엇인가? 저자는 여호와께 피난하는데 그 이유는 2절 이하에 있다. 즉, 주께 피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 성도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핵심 내용은 생명이다.
그런데 이 본문이 부활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으로 인용될 수 있는가? 다윗은 죽어 무덤에 있다. 그러면 이 시편은 다윗에게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윗은 분명히 어떤 다른 사람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는 선지자여서 그 자손 중 한 사람이 왕좌에 앉은 것을 미리 보았다. 다윗이 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
그런데 시 16편에서 이렇게 넘어오는 것은 너무나 비약에 해당된다. 이것은 다윗이 당시 자신이 왕이지만 자기 외에 하나님이 왕좌에 앉게하실 궁극적 왕을 알고 있었고 자신은 그 왕에 대한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신약계시를 구약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닌가?라고 할지 모르나 시 110편에서 이것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셨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은 그림자임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약계시가 보다 희미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밝은 계시하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베드로 설교의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2:14,22, 3:12 베드로 설교의 주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 즉, 구약 언약 백성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 즉, 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먼저 구약 언약 백성에게 설명한다. 베드로는 먼저 이 사건이 구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요,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의 실마리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
2:18 나의 남종과 여종들 위에 내 신을 부어주리라(δουλος μου, δουλας μου; 둘로스 무, 둘라스 무). 여기 μου는 MT원문에는 없는 인용이다.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은 신분계층의 구분이 방해 요인일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μου를 붙였다. 그렇다면 낮은 사회계층을 본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과연 본문의 의미에 충실한 것인가? 추가적 의미를 덧붙인 것인가? 얼핏보면 많은 뜻이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본문에서는 단지 남녀 사회적 신분을 뜻하던 말이 μου가 붙음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비천한 신분의 사람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물건 취급받던 노예들이 이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고귀한 일을 하게된다.
2:21에서는 적절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 속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값싼 믿음,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믿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항상 같은 대답을 하심(늘 말세에 관한 말씀을 하심:죽으심→말세→재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으시고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후에 주의 재림이 올 것이다.
말세의 징조 :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있고 또한 핍박은 오히려 왕들과 관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기회가 되고 이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임하고 확장될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2:22ff : 성령 부으심과 계시 사역 이후. 성령오심의 역사적 배경, 경륜적 배경이 나옴. 요즈음은 경륜적 배경보다 역사적 배경이 더 많이 쓰임. 과거의 역사적 배경은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경륜적 배경이라고 말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심을 뜻하는 말을 경륜적 배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엘서 인용 : 요엘서 전체의 내용이 곧,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약속의 성취를 말한다.
행 2:22ff의 오순절 성령오심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의 시각에서 오순절에 성령오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하심(확증하심).
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예정하심에 따라서 저들의 손에 넘기워지신 분이요,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결코 나약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죽으셔야 할 분이셨다.
2:2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히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멸하시고 무력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 왜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무력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붙잡혀 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성경 시 16편을 인용해서 볼 때, 먼저 일반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망에 붙잡혀 계실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원리기 때문이다. 악은 멸하고 의인은 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롬 2:6-7),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으신 의인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다.
4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을 보면(passion narative), 유대인들(산헤드린에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꾸며내려고 애쓰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유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입증하고 있다. 이방 로마의 백부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의인이라고 고백한다.
2:24-25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옛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약속이 있는데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하신 부활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경건한 성도가 얻는 분깃이 곧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며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을 것”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해도 진정한 경건과 참 사람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연히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시 16편의 저자가 다윗임을 밝히면서, 이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역설한다. 그 이유로써 분명한 것은 먼저,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이미 죽어서 그 묘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져간다. “나”라고 제시된 다윗, 경건한 성도의 전형으로 지칭된 다윗은 지금 죽어서 육체가 썩어져 있으므로 이 시편의 27절의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30절 다윗의 독특한 지위, 직분,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다윗은 선지자요,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경륜을 제시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그에게 맹세하신 언약(다윗 언약 : 네 허리에서 난 자 중에 네 왕위에 앉을 자를 세우리라)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좌에 하나님의 사람이 앉으실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의 진정한 통치자의 예표요 그림자임을 알았다. 다윗은 이 언약 속에 세우실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다.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미리 계시받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이 음부에 버림을 당치 않고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을 것,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미 알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온 그의 예언시(詩)요, 나아가서 메시야시(詩)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베드로의 논증, 논리를 체계화시켜보면, 다윗은 지금 죽어 썩었으므로 이 詩가 다윗에게 성취되지 않았으며,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이 시에서 “나”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가?하는 것은 그것이 다윗 자신으로서는 자기가 아닌 자기 이상의 어떤 분이 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 자신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오실 것인데 자신은 그분의 그림자요 예표요, 자신은 그분을 멀리서 바라보며 가리키는 자이다. 단지 다윗은 그분의 대리자에 불과한 존재이다. 자신이 대리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칭호는 자신 가운데서 나중에 오실 자를 포함하여 말하였고 또한 자신을 그분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윗 자신은 이분이야 말로 죽지 않으시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왕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고난 후에 부활하실 것도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곧, 자신인 다윗까지도 함께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기의 영혼이 음부에 버리움을 당치 않고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게 될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 자신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다윗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경건한 성도, 곧 주께 피하는 경건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 다윗, 그리고 모든 경건한 성도가 함께 부활할 것을 예언한 구절이다. 이렇게 시 16편은 부활에 관하여 광범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할 때 비로소 확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을 배경으로 하여 행 3:15절은 ο αρχηγος της ζωης(호 아르케노스 테스 조에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한다.
행 2:32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죽으시고 부활하심. 이 부활은 다윗과 모든 성도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예언이 진정한 부활이 아니다. 이들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베드로는 시 16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직접적인 예언으로 본다.
33절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 승천하셔서 -마 28:18 -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sit in throne,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아들로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성령 부으심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이 앉으심과 관련되어 있다. 만유의 통치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관련되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사역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수행하신다. 이 말은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와 확장을 감당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로 들어 가셨다 → 하늘 영역에 들어가셔서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 → 천상통치시대가 열려짐. 이때 증인 사역이란, 성령님을 통한 통치 사역은 전쟁과 증언 사역을 통해 세상 정부 - 증언 사역의 특별함을 이 맥락을 통해서 밝히심이다.
34절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 천상통치에 대해서 더 깊이있게 밝히는 내용이 34절부터 나온다. 34절에서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행 1:11을 의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심을 의식한 반면 다윗은 하늘 영역에 올라간 자가 아니다. 다윗은 그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후 부활하여 하늘 영역에 들어가서 만유의 통치자로 권세를 가진 진정한 메시야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시 110편과 눅 20:42ff, 그리고 눅 20:2의 질문에서 잘 나타난다.
시 110편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에 관해서
2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무찌르는 부분
4절 히브리서의 아론 가문과 다른 독특한 제사장직임도 인정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왕직의 독특성과 관련된 직으로서 소위 제사장직의 독특한 직임과 정복의 왕적 사역을 함께 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 40:ff 대적의 손에서 그 백성을 건져 내셔서 그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정복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절정이 사 53장에 가서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희생된 대속적인 종의 모습이다. 이것은 죄값을 치루심으로서 심판의 근거를 소멸시키는 중요한 행위이다. 사단이 인간을 붙들어 맬 수 없도록 죄악을 없애버림으로써 이는 궁극적인 승리이다. 영적인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가장 나약한 모습인 죽는 모습이 가장 강력한 승리의 원천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곧, 제사장으로서의 죽음이 왕으로서의 가장 강력한 승리(정복사역)였다.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이 다윗이 진정한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메시야임을 증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후 왕되심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밝혀주는지 한번 살펴보자.
눅 20:41-44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름 : 메시야는 다윗에게 주이시며 성자이시다. 더군다나 주되신 메시야가 자신의 후손으로 오셔서 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위해 저들을 속하시고 하나님의 진정한 대적을 멸하시고 그의 백성에게 참 안식을 주실 것을 알았다. 즉, 제사장적 왕적 사명을 다하실 것을 알았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야 사역을 내다보는 예표요 예시임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영원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필연성의 한 조건이다. 이것이 성령오심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할 것이다.
성령오심의 방언 사역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이 마귀의 대적에 대한 근본적인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시고(예수 그리스도의 천상통치) 확장하는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과 성령님의 지상사역의 대조를 굳이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은 증언사역이라는 점에서 성령님의 지상사역과 대조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전쟁이다.
마 28:18-20 오순절 성령오심은, 대적을 멸하시고 사람의 심령을 정복하여 이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 시작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바로 사람의 심령에서 시작되는 나라이다.
행 2:37 베드로의 증언 사역에 따라 성령의 칼에 그들의 심령이 찔림을 받았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전쟁은 영적인 전쟁이요 심령을 굴복시키고 심령을 정복하는 전쟁이다. 심령을 정복하는 결과는 그 삶에 거룩한 열매가 맺히게 하는 싸움이다.
행 2:41ff 교회의 본질 :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도의 교제와 성만찬을 행한다.
행 3장 앉은뱅이를 고치심. 베드로는 자기의 힘과 능력이 아니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 힘과 내 정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마음이 평안하다.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셔서 성령님을 통해 천상통치 사역을 하실 때 옛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모든 말씀이 회복되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왜 이루어질 것이라 하지 않고 회복되어질 것이라고 했나? 그것은 3:22ff에서 모세가 한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라는 말을 한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배경을 인식할 때 매우 깊은 내용과 폭넓은 배경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요엘서와 시 16편의 인용을 보면서 신약 저자들의 구약인용은 견강부회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약 저자들의 구약 이해는 매우 심오하고 광범위하다. 우리의 무식한 시각으로 볼 때 억지같아 보이는 인용은 매우 적절한 구약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신약 본문의 흐름에도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우선 ‘요엘서’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인용한 의도와 그 효과 또는 결과는 무엇일까? 우선 요엘서 인용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밝히신다. 요엘 3장은 보편적 성령감림을 말씀하고 있다. 이 성령 임하심의 결과는 계시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이미 행1장부터 오순절을 앞두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요엘서 인용의 더 큰 의미는 요엘서와 오순절을 연결시켜 오순절 사건을 요엘서의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의미가 있다. 오순절 사건이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 그 역사적 종말의 흐름 속에 차지하는 의미를 밝혔다.
시 16편의 인용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얼핏보아 이것이 잘 나타나지 않으나 36절까지 보면 잘 나타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연성에 이어 부활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편의 참된 적용 대상이 누군가를 밝혀 주고 있다.
다윗이 어떤 심정으로 이 시편을 기록하였느냐? 선지자로서 미리보고 기록하였다. 이는 또 영원한 언약과도 관련되었다. 얼핏보면 다윗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앞으로 오셔서 자신의 왕위에 있을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부활의 생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가분의 연합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뻔한 사실을 왜 이렇게 반복하는가? 이러한 논의가 우리가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특별한 의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높이 올리우심이며 그가 성령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22-36의 논의를 통해 오순절 사건에 어떤 의미가 부여 되었는가? 그리스도가 만유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에 관한 예증으로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심령이 찔렸다. 이것은 성령님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정복의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다.
3장의 내용도 대동소이한데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다루는 관심 부분이다. 3:1 기도시간(상번제)이 언급된 것은 암시적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하는 집”이란 무슨 뜻인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기도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도 적절하다. 나면서부터의 앉은뱅이, 삶의 정상적 기능 상실은 영적 기능까지를 내포해서 취급해야 한다. 성경은 간혹 외적 상태가 내적 상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예:중풍병자).
6절 사도들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 세상적 차원에서의 힘과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우리의 더 근본적이고 참된 소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세상 차원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내게 없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 이름은 그 지위, 본질, 권세, 능력 모든 것이다. 그 신분을 가장 압축해서 밝힌 것이 빌 2:9 이하이다. 만유의 주 되심, 통치자 되심, 이 이름을 제자들이 소유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만유를 통치하시되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 공부라는 것 속에 담긴 뉘앙스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적은 좌우에 모두 있다. 곧장 바로만 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을 자신이 체험할 때 목회자의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선 이 놀라운 사건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어쩌면 신학교육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들지 않는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은 명백히 아니나 자신의 경건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게 된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엘리후가 욥에게 했던 말, “네 의는 너에게나 유익할 뿐이다.”
13절 이하의 설명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14절 ‘거룩하시고 의로운 자’라는 뜻이 무엇일까? 눅 1:35; 요 6:69에서 거룩하신 분은 신적인 신분, 영생의 근원인 신분이라는 예수님의 신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절 “생명의 근원자” 이 세 단어는 독특하다. 이는 부활 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특징 짓는 말이다. 8장에서 το πνχυμα της ζωης(토 프뉴마 테스 조에스; 생명의 성령)라고 한다.
절 이하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너희를 위하여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선 초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록 육신으로는 우리를 떠나 천상영역에 들어갔으나 어떤 의미에서든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심을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단어 사용이 부정과거시제이므로 맞지 않다. 그러면 재림주로 오실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맥이 어색하다. 26절 그를 부활시켜서...악함을 버리게 하셨다. 여기서 ‘보내심’은 초림은 분명히 아니며 재림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20절의 보내심도 aorist사용이 어색하기는 하나 성령을 통한 그의 사역을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 28:20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말에서 예수님의 실제적 임재와 성령의 임재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21절 만유를 회복하시는 사역, 그리스도의 사역을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1:6의 질문을 의미있는 질문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천상사역은 계시의 시초까지 조망하여 바라보게 한다. 그 당시 역사를 향해 선지자의 말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개하라 그리하면 억눌린 것, 저주에서 놓여난다.
3:20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 너희를 위하여 정하신 바 된 예수 그리스도란 것이다. 이는 이 구원이 Ισραηλ(이스라엘)과 밀착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21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그를 받아 두리라 -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님을 통하여 왕적 통치를 행하시고 재림으로 인해 모든 것이 종결될 그의 천상 통치로 선지자가 말한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를 심화, 확대 시키는 것이다. 행 1:8의 제자들의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그 의도로 물은 것인지, 제자들이 심중에서 그 질문이 얼마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질문이 전혀 핵심을 벗어난 질문은 아니다.
Ισραηλ의 회복 - 암 9: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히 짓밟힌 바 된 것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방 구원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일어서는 이 순서가 뒤바뀌어 이스라엘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아니다. 도래할 구원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회복하는 때요, 이방은 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후에 벌어지는 기대밖의 사실 즉, Ισραημ은 구원을 배척하여 떨어져 나가고 이방인이 더욱 적극적으로 구원을 받아들임을 바울은 롬 9장에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깊이 설명한다. 이방인에 대해 더욱 더 복음을 받아들인 현상을 Ισραηλ이 원가지요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으로 말한다.
“옛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들” -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의 범위는 오래 전 옛 시대의 예언까지 다 포함 -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역사를 포함한다. 모든 계시의 말씀, 시초의 계시의 말씀까지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포함한다.
“말씀하신 것들의 회복” - 이는 미래적인 것의 성취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말씀하신 것들의 성취가 아니라 회복이라 쓴 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원상복귀시킨다는 의미가 담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선지자들의 말씀하신 것을 회복하심은 미래에 관련된 예언이라기 보다는 당시 Ισραηλ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었고 잠정적으로나마 현실로 존재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사역은 옛 예언의 자취일 뿐 아니라 옛 Ισραηλ의 역사 속에 현실로 존재했던 것을 회복하는 사역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이것을 Ισραηλ의 역사 속에서 잠정적으로 실현하셨다. 이것이 구약인데 이것이 Ισραηλ의 반역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고 완성해 나가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전Ισραηλ 역사가 포괄되어 있다.
3:22 모세의 말을 인용 “나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가? 신 18:15-20 여기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신 18:9 이하 하늘의 뜻 神意를 묻기 위해 점장이, 복술자를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 이방인, 가나안인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겠다. 즉,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할 때가 있을텐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서 너희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는 폭 넓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즉, 모세 이후의 모든 선지자를 포함하는 폭 넓은 의미에서 볼 수 있다.
신 18:19 나의 말을 청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책임을 묻겠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신약에 와서는, 말라기로 예언이 종결되고 400년간 선지자가 없었다. 이 포괄적인 의미가 신약 저자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옛날 모세로부터 말해온 그 선지자를 보았다고 했다. 또 나사렛에서 선한 것 즉,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다. Papias사본에서는 “ο προφητες”(호 프로페테스; 그 선지자) 이는 특별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이것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와 연결해 볼 때, 그 선지자(메시야)는 나사렛에서 나올 수 없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조차 이해하기를 앞으로 오시는 메시야와 그 선지자는 한 동일인으로 직분이 다양할 것이다. 제사장적 사역과 왕직과 선지자적 사역이 overlap할 것이라고 보았다.
베드로 사도는 ‘나와 같은 선지자’라 말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했나?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선지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사무엘로부터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선지자를 말하며 이들이 바로 이 날들을 말하고 선포했다.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사역, 계시사역이 이 날들에 의미있다. 모세도 선지자이다. 그런데 사무엘부터 말한 것은 그 의미가 포괄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선지자라 할 때 우리는 8세기 이후 글을 남긴 선지자들로 본다. 그러나 8세기 이후 글을 남긴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요, 하나님이 다시 회복하시고 이에 이방도 포함된다. 8세기 선지자들에게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이 주로 나온다. 그러나 사무엘에서부터 선지자를 제시하는 것은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부터 나온다.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메시야적 통치이다. 그러나 이 예언의 1차적 적용대상은 다윗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선지자적 사역에 사무엘을 포함시킨 것은 각 시대마다 그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한다. 구약에 대해, 메시야에 대해 명백히 말하는 곳 뿐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구약 전 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볼 수 있다.
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 하신다. 그러나 직접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별로 없다. 그래서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증언이라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만 증언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는 시각에서 볼 때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게 취급되기도 하나 더 깊은 의도는 신,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책으로 이해되기 위한 구체적 길이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것이다.
3:25ff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의 대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착성, 관계를 말하는데, 이를 단순히 설교적 효과를 위해서라고 보는 이도 있다. 설교적 의도도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폰라드가 주장한 것으로서 즉, 설교적 의도란 설교적 효과를 위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서 말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인가가 문제가 아니고 Kerygmatic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3:26 그러나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라는 말은,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한 보편적 언약의 축복을 말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Priority를 말하는 것이다. 롬 2장, 이스라엘을 철저히 깨뜨림, 롬 9장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 말함, 롬 1:16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자는 구절이 있는 같은 장에서도 유대인이 먼저라는 말이 나온다.
유대인의 우선성의 내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잘못하면 세대주의가 되고 또는 유대인 우선성을 말하는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 유대인이 대규모로 회개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세대주의는 앞의 모든 성경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육적 이스라엘의 왕국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철폐하고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말했다. 새 이스라엘을 교회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와 같이 해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이스라엘로 보는 것이 문맥에서 좋은 것 같다.
옛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날들’에서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 바울 서신 자체가 두 가지를 말한다. “이방인, 유대인의 구별이 완전 철폐”와 동시에 먼저는 “유대인에게”라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유대인을 말할 필요없다. 옛 이스라엘은 해소되어 버렸으므로 더 이상 말할 필요없다고 종결지워 버리다. 그러면 “먼저는 유대인에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행 3:26의 그를 먼저 너희에게 보내셨다. 초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니다. 이는 현재적,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의미이다. 3:19은 재림과 관련해서 해석하고 3:20절은 초림으로 번역함으로 3:26은 현재적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의미로 본다. 이 때는 복음전파로 인해 우리에게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 이는 설교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특별한 회중에게 입으로 말씀,복음을 전하므로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먼저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복음전파의 우선성을 말한다. 이는 너희에게 전파되었다(부정과거). 베드로 사도가 이미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부정과거형을 사용한 것이다.
이후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방인의 사도라 하는 바울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도, 회당에 찾아가 유대인에게 먼저 전하고 그 다음 이방인에게 간다.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므로 회당에서 복음 전함이 자연스러운 순서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유대인에게의 복음 전파의 우선성과 관련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복음 전파의 우선성은 잠정적인가? 지속적인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대인의 복음 전파는 해소되어 버릴 것인가?
행 15장 예루살렘회의의 결정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잠정적 결정으로 해소되어 버릴 것으로 이해한다. 당시 유대인에게 너무 혐오스러운 것만을 금령으로 정한다. 이와같은 예루살렘회의와 관련하여 유대인의 복음 전파도 잠정적인 것인가? 예루살렘회의의 결정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대인을 의식하고 한 잠정적인 결정이기 보다는 레위기를 의식하고 한 가결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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