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칼빈 (33)
설교자 칼빈 (33)
정 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종교개혁자 칼빈은 설교자이다. 교회사에 가장 걸출한 강해 설교자는 요한 칼빈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삶의 현장에 적용시켰던 강해설교의 왕이다. 특히 칼빈은 연속강해설교의 대가이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설교자로서의 영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예컨대 그의 욥기서 설교는 159편이나 있다. 칼빈은 참으로 방대한 설교를 한데다 그 깊이에 있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영감을 가진 설교자가 분명하다.
하나님 중심의 강해 설교자
그러면 칼빈의 설교자로서의 생활을 잠시 살펴보자. 칼빈은 1536년 27세에 제네바 셍 삐에레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설교자로서 사명에 새로운 동기 부여는 제네바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벍으로 가서 그곳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됨으로 본격화 되었다. 거기서 칼빈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2년간의 설교는 하나의 시도요 실험이라면 스트라스벍의 설교생활은 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그리고 체험적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트라스벍까지 피난 온 모국의 형제자매들의 상한 마음을 감싸주기 위해서 설교했다. 그런데 그 자신 또한 제네바 교회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왔기에 설교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영적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벍의 3년간의 피난민 목회가 그를 더욱 설교자로서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했다. 다시 제네바 교회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칼빈의 설교가 오늘 우리 한국식의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부흥 설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인기 있는 설교도 아니고 대중을 선동하는 설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성경의 본뜻을 정확히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설교였다. 루터의 설교가 남성적이고 부흥적이라면 칼빈의 설교는 해석적이고 의지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당시 성도들은 천년 만에 성경적인 설교를 듣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종교개혁은 설교를 통해서였다. 신학은 학자들과의 논쟁이지만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으로서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칼빈의 설교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 중심의 설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경적 설교였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설교보다는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만족시켜주는 설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는 세월이 갈수록 대중들의 호응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칼빈마저도 설교에 많은 부담감을 갖고 낙심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지일관 연속강해설교를 고집했다.
특히 1554-55까지 1년 사이에 칼빈은 너무 낙심해서 설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한 교회에서 20여 년 동안 설교한데다 칼빈의 목회행정 특히 종교회의(Consistory)를 통한 성도들의 윤리를 바로 세우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적 성도들에게 많은 반발을 일으키고 그 반발이 칼빈의 설교에 제동을 걸었다. 더구나 칼빈은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엄청난 내부적 반대에 부딪히면서 설교의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복음적 교회건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뿐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말씀 증거에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나 칼빈이 교회의 어려움과 그리고 주변의 세력들을 의식하고 그들과 영합하고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를 했다면 오늘의 개혁교회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석 설교이나 깊은 연구와 기도로 연속 강해설교를 했다
물론 칼빈은 그의 설교를 자신이 직접 원고를 작성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가 아니고 그는 깊은 성경원어연구와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들의 삶과 성경을 깊이 묵상한 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강단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설교할 때 그의 설교를 속기하도록 했다. 칼빈은 속기 비서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설교 속기는 주로 불란서에서 피난 온 데니스 라구니에(Danis Raguenier)였다. 그는 11년간이나 칼빈의 설교를 필기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가 지금까지 보존된 설교만 2,025편에 달한다.
칼빈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주일 아침과 오후, 평일에는 월, 수, 금 등에 설교했다.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강해설교로서 주일 오전에는 신약을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월, 수, 금에는 구약을 강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욥기 159편, 신명기 200편의 강해설교를 했다. 칼빈은 부활절에서 10월 초까지는 아침 6-7시, 겨울에는 7-8시에 모였다. 그러니 칼빈은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인적인 목회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칼빈은 자기 설교를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어떤 때는 논문 대신에 설교가 출판된 일도 있었다. 우리는 신학자, 주석가로서 칼빈 못지않게 설교자로서 칼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http://blog.daum.net/kkho1105/2131
정 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종교개혁자 칼빈은 설교자이다. 교회사에 가장 걸출한 강해 설교자는 요한 칼빈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삶의 현장에 적용시켰던 강해설교의 왕이다. 특히 칼빈은 연속강해설교의 대가이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설교자로서의 영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예컨대 그의 욥기서 설교는 159편이나 있다. 칼빈은 참으로 방대한 설교를 한데다 그 깊이에 있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영감을 가진 설교자가 분명하다.
하나님 중심의 강해 설교자
그러면 칼빈의 설교자로서의 생활을 잠시 살펴보자. 칼빈은 1536년 27세에 제네바 셍 삐에레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설교자로서 사명에 새로운 동기 부여는 제네바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벍으로 가서 그곳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됨으로 본격화 되었다. 거기서 칼빈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2년간의 설교는 하나의 시도요 실험이라면 스트라스벍의 설교생활은 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그리고 체험적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트라스벍까지 피난 온 모국의 형제자매들의 상한 마음을 감싸주기 위해서 설교했다. 그런데 그 자신 또한 제네바 교회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왔기에 설교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영적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벍의 3년간의 피난민 목회가 그를 더욱 설교자로서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했다. 다시 제네바 교회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칼빈의 설교가 오늘 우리 한국식의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부흥 설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인기 있는 설교도 아니고 대중을 선동하는 설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성경의 본뜻을 정확히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설교였다. 루터의 설교가 남성적이고 부흥적이라면 칼빈의 설교는 해석적이고 의지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당시 성도들은 천년 만에 성경적인 설교를 듣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종교개혁은 설교를 통해서였다. 신학은 학자들과의 논쟁이지만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으로서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칼빈의 설교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 중심의 설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경적 설교였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설교보다는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만족시켜주는 설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는 세월이 갈수록 대중들의 호응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칼빈마저도 설교에 많은 부담감을 갖고 낙심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지일관 연속강해설교를 고집했다.
특히 1554-55까지 1년 사이에 칼빈은 너무 낙심해서 설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한 교회에서 20여 년 동안 설교한데다 칼빈의 목회행정 특히 종교회의(Consistory)를 통한 성도들의 윤리를 바로 세우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적 성도들에게 많은 반발을 일으키고 그 반발이 칼빈의 설교에 제동을 걸었다. 더구나 칼빈은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엄청난 내부적 반대에 부딪히면서 설교의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복음적 교회건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뿐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말씀 증거에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나 칼빈이 교회의 어려움과 그리고 주변의 세력들을 의식하고 그들과 영합하고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를 했다면 오늘의 개혁교회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석 설교이나 깊은 연구와 기도로 연속 강해설교를 했다
물론 칼빈은 그의 설교를 자신이 직접 원고를 작성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가 아니고 그는 깊은 성경원어연구와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들의 삶과 성경을 깊이 묵상한 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강단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설교할 때 그의 설교를 속기하도록 했다. 칼빈은 속기 비서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설교 속기는 주로 불란서에서 피난 온 데니스 라구니에(Danis Raguenier)였다. 그는 11년간이나 칼빈의 설교를 필기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가 지금까지 보존된 설교만 2,025편에 달한다.
칼빈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주일 아침과 오후, 평일에는 월, 수, 금 등에 설교했다.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강해설교로서 주일 오전에는 신약을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월, 수, 금에는 구약을 강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욥기 159편, 신명기 200편의 강해설교를 했다. 칼빈은 부활절에서 10월 초까지는 아침 6-7시, 겨울에는 7-8시에 모였다. 그러니 칼빈은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인적인 목회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칼빈은 자기 설교를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어떤 때는 논문 대신에 설교가 출판된 일도 있었다. 우리는 신학자, 주석가로서 칼빈 못지않게 설교자로서 칼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http://blog.daum.net/kkho1105/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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