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종 칼빈(6)
고난의 종 칼빈(6)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필자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안에 있는 칼빈박물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1시간의 해설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가 40년 동안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의 자료를 모아서 칼빈박물관을 만든 것은 칼빈의 위대성을 예찬하고 칼빈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가장 병약하고 연약한 한 사람 칼빈을 하나님께서 그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들어내기 위함입니다"라고 한다.
사실 칼빈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공부는 많이 했지만, 그는 사실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만큼 환자였다. 병원도 약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위장병, 기관지천식, 신경통, 두통 등등 온갖 합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생애 후반에는 하루의 한 끼의 식사도 겨우 할 정도의 병약한 사람이었고 침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디 그 뿐인가 칼빈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평생지고 간 고통과 고난의 삶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설교였다. 주일에 두 번 평일에 네 번 정도로 강해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많은 설교를 모두 강해설교로 하되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목회적 관심과 가톨릭과 이단을 물리치는 메시지를 만드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필자도 40년 동안의 목사로서 또는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살아왔지만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칼빈은 끊임없이 그에게 도전해오는 가톨릭주의자들의 공격과 당시에 망나니 같은 자유주의자(리버틴)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논문을 쓰고 공개장소에서 논적들에게 논리는 논리로, 사상은 사상으로 맞서 싸워서 이겨야 했다. 피를 말리는 이론전에서 그는 늘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논쟁에 패한 자들은 칼빈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뱉었고 때로는 테러를 피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사실 칼빈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은 이단과 가톨릭과 자유주의자만 아니었다. 제네바 의회지도자들 또는 말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나 칼빈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칼빈을 배척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의 설교자로 개혁자로 일하기 시작한 후에 2년 동안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칼빈은 불란서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제네바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방어를 위해서 사사건건 문제제기를 하고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실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낯선 한 불란서인이었고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칼빈은 철저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하고 제네바 시의회를 통해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제네바에서의 2년의 삶 중에 결국은 시의회의 결의로 칼빈은 추방당한다. 목회자로서 개혁의 지도자로서 추방 결정을 받은 칼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시의회에는 칼빈을 지지하는 세력보다 반칼빈파들이 득세하여 투표로서 결정한 것이다. 그 사건은 인간적인 모멸감, 자책감, 허탈감이 칼빈을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과 조직의 명수인 칼빈도 반대파의 득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칼빈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신앙의 절개와 진리의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이 반대자들로부터는 엄청난 공격의 자료가 되었고 칼빈은 융통성이 없고 자비가 없는 자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버그로 피난을 갔다. 칼빈은 원래 조용하게 학문 활동 곧 저술활동을 좋아 했으니만큼 스트라스버그에서 오래 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도 칼빈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새로운 일감이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즉 불란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위한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3년 동안 더 성숙한 목회자로 설교자로 성숙되어 갔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보완하고 여러 책을 집필했다. 따지고 보면 칼빈에게는 제네바의 추방이란 아픔을 안고 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감을 맡기시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 된 것이다.
한편,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무질서의 천국이 됐다. 본래 제네바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미지와는 퍽 달랐다. 이 도시는 본래 상업도시로서 외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인구 2만 명이 채 못 되는 도시에 온갖 불법, 탈법, 사치, 음란, 퇴폐의 도시였다. 칼빈이 의회를 장악하고 교회를 힘있게 목회할 때는 엄격한 훈련프로그램과 권징을 통해 질서를 잡아갔으나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축출한지 3년 만에 다시 그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들은 칼빈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한번 추방된 후 다시 청빙받기는 칼빈이 처음이라고 본다. 칼빈의 가슴앓이는 또 어떠했을까? 그러나 칼빈이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http://blog.daum.net/kkho1105/3507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필자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안에 있는 칼빈박물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1시간의 해설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가 40년 동안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의 자료를 모아서 칼빈박물관을 만든 것은 칼빈의 위대성을 예찬하고 칼빈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가장 병약하고 연약한 한 사람 칼빈을 하나님께서 그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들어내기 위함입니다"라고 한다.
사실 칼빈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공부는 많이 했지만, 그는 사실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만큼 환자였다. 병원도 약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위장병, 기관지천식, 신경통, 두통 등등 온갖 합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생애 후반에는 하루의 한 끼의 식사도 겨우 할 정도의 병약한 사람이었고 침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디 그 뿐인가 칼빈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평생지고 간 고통과 고난의 삶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설교였다. 주일에 두 번 평일에 네 번 정도로 강해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많은 설교를 모두 강해설교로 하되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목회적 관심과 가톨릭과 이단을 물리치는 메시지를 만드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필자도 40년 동안의 목사로서 또는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살아왔지만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칼빈은 끊임없이 그에게 도전해오는 가톨릭주의자들의 공격과 당시에 망나니 같은 자유주의자(리버틴)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논문을 쓰고 공개장소에서 논적들에게 논리는 논리로, 사상은 사상으로 맞서 싸워서 이겨야 했다. 피를 말리는 이론전에서 그는 늘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논쟁에 패한 자들은 칼빈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뱉었고 때로는 테러를 피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사실 칼빈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은 이단과 가톨릭과 자유주의자만 아니었다. 제네바 의회지도자들 또는 말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나 칼빈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칼빈을 배척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의 설교자로 개혁자로 일하기 시작한 후에 2년 동안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칼빈은 불란서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제네바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방어를 위해서 사사건건 문제제기를 하고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실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낯선 한 불란서인이었고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칼빈은 철저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하고 제네바 시의회를 통해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제네바에서의 2년의 삶 중에 결국은 시의회의 결의로 칼빈은 추방당한다. 목회자로서 개혁의 지도자로서 추방 결정을 받은 칼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시의회에는 칼빈을 지지하는 세력보다 반칼빈파들이 득세하여 투표로서 결정한 것이다. 그 사건은 인간적인 모멸감, 자책감, 허탈감이 칼빈을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과 조직의 명수인 칼빈도 반대파의 득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칼빈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신앙의 절개와 진리의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이 반대자들로부터는 엄청난 공격의 자료가 되었고 칼빈은 융통성이 없고 자비가 없는 자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버그로 피난을 갔다. 칼빈은 원래 조용하게 학문 활동 곧 저술활동을 좋아 했으니만큼 스트라스버그에서 오래 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도 칼빈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새로운 일감이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즉 불란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위한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3년 동안 더 성숙한 목회자로 설교자로 성숙되어 갔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보완하고 여러 책을 집필했다. 따지고 보면 칼빈에게는 제네바의 추방이란 아픔을 안고 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감을 맡기시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 된 것이다.
한편,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무질서의 천국이 됐다. 본래 제네바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미지와는 퍽 달랐다. 이 도시는 본래 상업도시로서 외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인구 2만 명이 채 못 되는 도시에 온갖 불법, 탈법, 사치, 음란, 퇴폐의 도시였다. 칼빈이 의회를 장악하고 교회를 힘있게 목회할 때는 엄격한 훈련프로그램과 권징을 통해 질서를 잡아갔으나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축출한지 3년 만에 다시 그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들은 칼빈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한번 추방된 후 다시 청빙받기는 칼빈이 처음이라고 본다. 칼빈의 가슴앓이는 또 어떠했을까? 그러나 칼빈이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http://blog.daum.net/kkho1105/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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