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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칼빈과 종교개혁

칼빈과 종교개혁
정성구 교수
 
칼빈주의는 요한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은 이 사상을 모두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상의 중요한 해설가였다.
 
칼빈은 어거스틴 교리의 부흥을 일으켰고 실제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바울신학의 부흥에 불과한 것이다. 어쨌든 성경의 내용과 어거스틴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적용시킨 사람은 요한 칼빈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란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칼빈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은 칼빈과 종교개혁에 대해서 간략히 생각해 봄으로써 칼빈주의 운동의 뿌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데이킨(A. Dakin)이 지적한 대로 칼빈은 근대 서양문명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해낸 진취적인 프로테스탄트교를 창설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리들을 종합해서 포괄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네바에서 교회조례(敎會條例, an ecclesiastical order)를 만들었고, 그후 이 조례가 장로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칼빈의 영향은 유럽사회의 삶의 모든 영역에 직접 간접으로 미치게 되었다. 우선은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칼빈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실제로 루터(M. Luther)와 쯔빙글리(Zwingli)가 사라진 후였다. 그는 1509년 7월 10일 불란서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노용(Noyon)에서 출생했다.
 
칼빈의 부친인 제라드 칼빈(Grerad Calvin)은 야심 많고 근면했으며, 노용의 주교의 비서와 수도원 참사회의 공증인으로도 일했다. 그리고 칼빈의 어머니 제인 리 프랜스(Jeanne Le France)는 경건한 생활과 미모로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칼빈에게 신앙적인 영향은 깊이 줄 수가 없었다. 칼빈은 카페데스 사립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귀족층의 자녀들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그의 경험이 후에 그를 귀족층의 풍채를 띤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칼빈은 14세에 파리대학 신학부에 입학했으며, 여기서 종교개혁에 호의적인 길라우메 콥(Guilaume Cop)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또 함께 공부하던 먼 친척뻘인 올리베탄(P. R. Olivetan)은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로서 요한 칼빈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교수로는 언어학자인 코디어(Cordier)인데 그는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유명했고 칼빈에게 효과적이면서 유용한 공부습관을 길들여 주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종교개혁 정신을 칼빈에게 불어넣어준 사람이다.
 
그런데 칼빈은 1528년에 B. A학위를 취득했고 올레안스(Orleans)대학으로 옮기면서 법학으로 전과하였다. 이때 칼빈은 종교개혁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헬라어의 권위자인 볼마르(M. Wolmar)교수 아래서 배웠다.

칼빈은 교수댁에 머무는 동안 장차 헬라어에 정통하도록 훈련을 받은 것이다. 1529년 볼마르 교수가 보르께스 대학으로 초빙되자 칼빈도 학교를 옮겨가고 거기서 유명한 법학교수인 알시아티(A. Alciati)를 만나게 된다. 위의 두 교수들은 장차 칼빈이 종교개혁자가 되도록 훈련시킨 중요한 인물이었다.
 
결국 칼빈이 법학을 공부한 것은 조직적인 판단력과 교회조직을 위해서 유익했다. 그후에 칼빈은 자신의 소원대로 다시 고전을 공부하게 되었고, 1531년 파리대학에 다시 등록하였다. 이 기간동안 칼빈은 헬라어 교수인 데네스(Danes)와 히브리어 교수인 바타블(Vatable)의 도움으로 최초의 작품인 클라멘티아(De Clamenti ) 주석을 펴냄으로 그의 학문적 재질과 소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로마카톨릭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칼빈이 언제 회개하고 개종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제네바시를 카톨릭교회의 영역으로 복귀시키려고 시도했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인 “사도레토에 대한 대답”(Reply to Sadoleto, 1539)에서 그의 개심이 약간 언급되었다.
 
그리고 1557년에 출판된 시편주석에서도 몇마디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나 칼빈이 즉시 로마카톨릭교회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칼빈은 청교도가 되기를 원한 것이지 분리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칼빈은 카톨릭교회에 머물면서 교회개혁을 시도하였고 복음주의자들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으로 성경공부 그룹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칼빈에게 드디어 갈등의 시기는 오고 결단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칼빈이 개심한 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파리대학의 철학교수였던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이 학장으로 부임케 되었다. 그의 취임사에서 콥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노선을 따라서 당시의 교회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나 이 취임사의 내용이 평소 칼빈이 주장하던 것과 꼭 같았기 때문에 니콜라스 콥과 칼빈이 서로 공모하여 그런 취임사를 작성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것은 칼빈에게 첫번째 시련이었고 양자택일의 기로였다. 그런데 칼빈은 로마 카톨릭과 결연하고 개혁자들의 노선에 선 것이다. 프랑스왕이 루터파 잔당을 발본하는 데 동조하자 칼빈은 파리를 탈출하여 다시 노용으로 돌아왔다.
 
1534년 10월 17일 과격한 복음주의자인 안토니 마르크르트(Antonie Marcourt)는 천주교의 미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시키고 있고,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은 적그리스도들이라는 플래카드를 파리 시내 곳곳에 붙여 놓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박해가 파리 전역에 시작되었고 칼빈은 왕의 근거없는 비난에 분노하였다. 칼빈은 누명을 쓰고 물러날 수 없었다. 그래서 칼빈은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바젤에서 「기독교강요」의 서문에서 후렌시스 Ⅰ세에게 보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을 일요목연하게 서술하여 놓고 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목적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신앙을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동료들의 오명을 벗기고 로마카톨릭교도들이 개혁주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강요」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온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리의 해석서이다.

이 책이 나옴으로 칼빈은 어느날 갑자기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후 이 책은 영어와 화란어 등으로 번역되어 유럽 각국에 침투되어 깊은 영향을 주었다. 또 이 책은 100여년 동안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표준교과서가 되었고, 1559년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내용은 바꾸어지지 아니하고, 내용이 확대되고 다듬어져서 최종판은 초판에 비해 거의 다섯배에 이르게 됐다

이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칼빈은 1536년 7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여행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그를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놓았으니, 파렐(Farel)을 통해서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을 맞게 되었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된다. 그전에 이미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1535년 8월 8일에는 후일 칼빈의 주요 일터가 되었던 성·피에레(St. Pierre) 성당에서 최초의 개신교식 설교를 행하였다. 그리고 1535년 8월 10일 “200인 위원회”는 로마 카톨릭식의 미사를 중지시켰고, 동년 11월에 개혁운동이 제네바시 총회에 의해서 비준되었다.

총회의 결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법에 따라 살 것을 선포하였고, 모든 미사와 우상과 형상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사실 이러한 제네바의 분위기는 강력한 종교개혁의 의지와 실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던 때였다. 바로 이때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제네바를 운명의 장소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파렐을 통해서 칼빈을 제네바에서 포로로 만드신 것이다.
 
그는 후일 회상하기를, “내가 파렐의 조언과 간청 때문에 제네바에 가게 된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 가지 않게 되면, 나를 체포하여 강제로 제네바로 가게하실 하나님의 엄한 명령 때문에 제네바로 가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그후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칼빈은 그의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초작업으로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의 헌법이 되었다. 이것은 회중찬송가 도입을 규정하고 찬양예배를 도와줄 성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이 조항들에는 정부는 교회의 결정사항을 옹호하고 뒷받침해 주어야 할 것도 명시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종교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칼빈은 1537년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이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에 걸림돌이 되었고, 고의적으로 적대하는 세력이 생겨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칼빈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애초에 바젤로 가서 학문에만 전력을 기울이려 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스트라스부르크로 가게 된다. 그는 여기서 3년남짓(1538∼1541)머무는 동안 문법학교에서 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성경에 대한 강의를 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로마서 주석을 썼고 앞서 말한대로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 1477∼1547)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과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내었다.

또 칼빈은 목사로서 피난민교회의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하였다. 여기서의 경험이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하게 했고, 교인훈련, 성만찬, 회중찬송, 심방, 교회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마틴 부쳐(Martin Bucer)의 예배의식을 기초로 해서 칼빈의 예배형태는 예배의 부름, 죄의 고백과 기도, 죄사면의 선포, 십계명의 암송, 탄원, 감사, 헌신의 기도, 말씀선포, 사도신경의 암송, 축복기도로 이루어졌다. 이런 예배순서는 후일 개혁교회의 예배순서에 그대로 채용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칼빈은 이델레테 더 부레(Idelete de Bure) 부인과 결혼했으나 행복한 결혼은 불과 8년만에 끝나고 1549년 칼빈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한편 제네바는 칼빈을 추방한 후 지도력을 잃고 개혁운동은 갈팡질팡하였다. 칼빈이 떠난 후 1년이 채 못되어 이미 칼빈이 다시 와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 칼빈 없는 제네바는 무정부 상태가 판을 치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고 때마침 “사도레토에 대한 대답”이 가장 개혁주의 사상을 잘 표현한 위대한 작품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던 때였다.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가기로했다. 1541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 돌아왔다. 그리고 칼빈은 돌아오면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내 운명을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안 이상 나는 기꺼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두번째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생애가 끝나는 1564년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와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교회와 국가의 건설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의 건설이었다.
 
칼빈의 목회자요, 대설교가로서, 교수로서, 교회 행정가로서, 성경주석가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삶은 실로 초인적인 것이었다. 병약한 육체를 가지고 가정적인 불행을 딛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만을 위해 쏟고자 했던 칼빈의 강인한 의지에 모든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위원회에서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란 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초대교회의 조직체제를 잘 반영했는데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은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했던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폐기론자들과 방탕한 자들과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할 수 없었고, 그는 하나님이 힘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가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인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학자인 그의 제자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칼빈은 교수로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학생수는 불과 162명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요한 낙스의 지적대로 사도시대 이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학교였다. 칼빈은 그의 생애 중 27년간을 성 폐레(St. Pierre)교회에서 일주일에 5, 6회의 설교와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가 되어서 출판되었고, 유럽 각국에 설교집과 주석과 「기독교강요」가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불란서, 독일 등에 칼빈의 사상이 깊이 파고 들었다. 1559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그의 생전 에결정판이 나왔고, 이는 칼빈주의 사상의 주춧돌이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 사상의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붙든 위대한 성경 신학자이면서 목회자로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을 원리로 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며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에서 살기를 소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칼빈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을 개혁해 나갈 것을 부르짖고 실천에 옮겼다.
 
칼빈은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베자는 16년간 칼빈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칼빈에게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의 가장 아름다운 실례를 지켜보았다고 증거했다.
 
칼빈은 지식과 성품에 있어서도 위대한 분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신망이 두터웠고 동정심이 많았다 개인의 실수에 관해서는 용서와 관용을 베풀었으나 만약 하나님의 영광이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을 때는 용서치 않았다,
 
칼빈주의란 말은 물론 칼빈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칼빈주의는 칼빈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은총의 교리를 부활시킨 것이며, 사도바울의 신학과 신구약 66권을 단일사상체계로 조직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리이드 교수의 말처럼 장로교회는 어떤 사람이 칼빈주의를 비판하더라도 분개하지 않으며, 또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의 앞자리에 칼빈의 이름을 두기를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칼빈주의의 초석은 칼빈이 아니라 그가 믿었고 고백했던 성경적인 사상체계이며 또 성경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이다. 이제 이를 마감하면서 칼빈이 기독교회에 기여한 몇가지 점을 열거해 보기로 한다.
 
첫째, 칼빈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우리에게 심어준 셈이다. 칼빈은 성경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갔고, 성경의 충족과 권위를 확고히 믿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가 견지한 성경에 대한 절대의존의 입장은 칼빈주의를 빨리 확산시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둘째로, 칼빈의 업적은 장로회의 정치틀을 세운 것인데, 이것은 칼빈의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셋째로, 칼빈의 기여는 이른바 “시민사회”(Civil Society)에 관련된 그의 교리이다. 칼빈의 정치제도관을 이른바 성경정치(Bibliocracy)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정치형태가 어떠하든간에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고 국가의 최우선적 의미는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로, 칼빈이 강조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敬虔)이다. 또 칼빈이 그렇게도 경건한 삶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교정하려는 염원에서 비롯된다.

다섯째로, 칼빈의 공헌은 신학적 체계를 잡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엄밀히 말하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 신학의 재진술이다. 칼빈은 성경 자체가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의 주권, 믿음에 의한 구원, 예정론 등은 성경에 말하고 있는 대로의 진술이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차이는 제도화된 교회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칼빈의 영향은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어 각 나라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열매들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났고 각각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했다
http://blog.daum.net/kkho1105/3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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