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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의 생애와 사상
John Calvin 칼빈탄생 500주년 특집 
칼빈의 생애와 사상(1)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2009년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탄생한지 정확히 500년 되는 해이다. 오늘과 같은 경제 위기에다 교회의 위기까지 맞고 있는 이때에,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사상과 삶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는데 있다. 종교개혁의 사상 가운데 핵심은 근원으로 돌아가는(ad Fontes) 운동이다. 르네상스 운동은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바로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곧 신학의 타락과 변질에서 왔으며, 신학의 세속화와 합리주의 즉 그것은 과학적인 잣대로 성경의 진리를 모두 부셔버리고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여 이른바 신학이 종교학으로 변질되어 혼합주의적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한 자유주의 사상을 교회의 강단에서 전파되니 사람들은 이제 그런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어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런데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방법으로 강단은 더욱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오락 프로그램과 절묘하게 섞어서 이른바 엔터테인먼트 기독교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 강단은 만담과 웃음거리로 만들어 즐겁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정도이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교회는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사상 즉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잠재력 개발이 복음인 양 선전되고 있다. 이런 책들이 지금도 서점에 널리 깔려 있다. 한국 교회도 여기에 질세라 아주 적극적으로 따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칼빈 탄생 500 주년!
금년이 하필 칼빈 탄생 500주년이 아니라고 해도,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과 삶은 오늘처럼 방향키를 잃고 방황하는 교회들에게 늘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것이 틀림없다.
칼빈은 실제로는 종교개혁의 제2세대로서, 기왕에 있었던 종교개혁자들 예컨대 루터와 쯔빙글리 등의 사상과 그의 동료들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해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교회사학자 필립 샵은 말하기를 "루터는 단단한 바위산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킨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칼빈은 지난 천년기에 있어서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16세기 교회의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을 사용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하였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었다.
 
그런데 칼빈도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병약하고 고독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부름 받은 겸손한 종이었다. 우선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소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을 해석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유럽의 고급 언어인 라틴어를 자기의 모국어였던 불어보다 더 자유스럽게 구사할 줄 아는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씀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경건의 사람이었다. 또한 법학도로서 쌓은 논리적 사고와 당대의 유행하던 수사학적인 말과 글 솜씨 등은 가히 위대한 종교 개혁자요, 교의 신학자요, 성경 주석가이며 목회자요, 강해 설교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인가 1536년 그는 27세의 나이로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오로지 성경으로만 해설한 위대한 작품이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었다. 그는 이 '기독교 강요'를 수정 보안하여 1559년에 오늘 우리가 읽는 완성된 작품을 만들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판이 된지 금년 473년이 흘렀건만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대답이 없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너무나 성경적인 하나님 중심의 경건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 초판본 속표지에는 이 책이 '경건의 대전'이라고 했다. 우리가 칼빈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일차 자료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 강요'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의 '성경주석'이다. 칼빈은 계시록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성경을 주석했다. 이 주석은 목양의 현장을 생각하고 목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는 그의 '설교집'이다. 칼빈은 강해 설교의 왕이다. 특히 그는 연속 강해 설교의 대가였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강단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제네바에서 전후 27년 가까이 말씀의 종으로 살았다. 그는 1주일에 6, 7회의 설교를 하면서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복음으로 새 생명을 주었다.
 
넷째는 그의 '편지'이다. 칼빈은 설교사역과 교수사역과 교회개혁사역의 그 바쁜 틈에도 교회의 지도자들과 국왕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써서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알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변증했다.
 
다섯째는 칼빈의 '신학 논문'이다. 칼빈은 신학 논쟁이 있을 때마다 논문을 써서 발표했고 이것은 다시 책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16세기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접하지 않고는 신학을 공부했다 할 수 없고 칼빈의 성경 주석과 설교집을 읽지 않고는 개혁주의적 목회를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칼빈은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칼빈의 작품을 잘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성경적 세계관을 세우는데도 결정적이다. 현대 사상과 세계의 구조 즉, 자유민주주의 체계와 경제 시스템은 칼빈의 영향 때문이며 서구 역사의 정신적 기조는 결국 칼빈에게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칼빈을 모르면 민주주의를 바로 안다고 할 수 없고, 칼빈을 모르면 서구 문화의 기틀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칼빈 탄생 500주년의 의미는 단지 교회나 신학의 과제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미친다고 하겠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영국의 퓨리탄, 스코틀랜드의 요한 낙스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회, 불란서 휴그노파, 화란의 개혁교회, 특히 19세기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된 칼빈주의 부흥운동은 영국의 퓨리탄 운동과 함께 미국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칼빈은 일생동안 교회의 개혁자였지만 그는 또한 진실한 목회자요 대 강해설교자였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크게 사역한 것은 1559년에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였다. 그는 이 대학을 세우면서 기도하기를 "이 학교가 경건과 학문이 있는 대학이 되게"해 달라고 했다. 그의 꿈은 이루어져서 유럽 각국의 교회 개혁의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첫해는 161명이 공부하러 오더니 10년 후에는 그 열배인 1600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여기서 배출한 인물들이 졸업하고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의 개혁을 이루었다. 교육의 성과는 그렇게 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게르만 민족에게만 영향을 끼쳤으나 칼빈의 사상은 전 유럽,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학의 센터일 뿐 아니라 선교의 센터이기도 했다.
 
교육을 통해서 인물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로서 그것을 진작부터 깨달았다. 유럽 각국에서 제네바 아카데미로 몰려온 청년들은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하고 경건한 훈련을 받고 모두 개혁주의자들이 되어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종교 개혁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울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만들었고, 요한네스 보겔만은 돌트 총회의장이 되고 여기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요한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를 공격하고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 개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이토록 위대한 칼빈의 탄생 500주년은 방황하는 현대인과 고민하는 오늘의 교회에 놀라운 도전과 새로운 이정표를 던져주고 있다. 필자가 세운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의 부속 '칼빈박물관'은 세계 유일의 칼빈 박물관이다. 관람객들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40년 동안 칼빈의 자료들 모으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칼빈박물관을 세운 것은 칼빈의 위대성을 예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병약하고 고독하고 불행했던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하리만큼 병약했다. 그는 위장병에다 기관지 천식에다 신경통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며 하루에 한 끼 정도의 식사를 하고 늘 잔기침을 하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사람 칼빈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연약한 자를 들어서 주님의 교회를 개혁했으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금년 이 시리즈를 통해서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에 우리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고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디아스포라 교회와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주장한 철저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그의 정신이 오늘의 교회에 재현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부흥되기를 소원한다.
 
칼빈이 나타난 16세기의 분위기(2)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시대가 영웅을 낳을 수도 있고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칼빈의 경우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하지만 칼빈에게는 영웅적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세속적인 야심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잘 준비된 한 사람 칼빈을 그의 영광과 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도구로 쓰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16세기의 분위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그 시대의 배경을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도 그 시대상을 살펴 보면 더 정확히 이해할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그리고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세워졌다. 초대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도 그 생명력은 꺾이지를 않았다. 초대 교회는 박해 중에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걸출한 교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폴리갑, 져스틴 마터, 클레멘트, 아다나시우스, 암부로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이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 했다. 그들의 성경 강해, 설교, 그리고 교리적 체계는 가히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혹독한 박해가 오히려 복음을 더욱 힘 있게 붙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서부터 점점 교회는 세속화되고 박해 때 지켜오던 순수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점점 사라져서 형식 종교, 그리고 의식 종교로 전락하면서 말씀의 종교 복음적 기독교는 점차 힘을 잃고 변질되어 갔다. 그런데 그러한 형식적 교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도리어 비복음적이고, 이교적인 예배까지 받아 드리고 마리아숭배, 성인숭배, 성물숭배를 하는 가톨릭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황의 칙령과 전승이 성경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약 120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어 성경적 기독교는 다른 종교로 변질되었다. 밤이 깊으면 별빛은 더욱 찬란해 진다고 했던가? 그런 와중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경건한 수도사들이 성경을 필사하거나 번역하면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의 르네상스 운동과 맞물리면서 성경의 근원으로 돌아가려(ad Fontes)는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시민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개혁의 열망이 고조되었다.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함으로써 사제 중심의 교회에 평신도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독일의 마인쯔에서 구텐베르그(Gutenberg)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종교개혁의 뒷받침이 되었다. 사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은 오늘날의 인공위성 통신망, 컴퓨터 또는 인터넷 보다 더 위력적인 혁신의 도구였다. 우선 성경이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자기 나라 말로 출판됨으로 일반 대중들이 성경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천년의 세월 동안 묻어두었던 교부들의 원전이 인쇄되어 나옴으로서 교부신학과 신앙이 부흥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달리 말하면 교부신학의 부흥이자, 성경의 재발견이며 강단의 개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다 16세기의 개혁자는 옛날부터 내려온 수사학(Rhetoric)의 영향을 받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저술들을 집필해서 출판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수사학은 어떻게 하면 말과 글을 논리적으로 써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으로서, 16세기의 수사학의 부흥도 종교개혁을 뒷받침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칼빈은 앞서 루터와 그의 동지 개혁자들이 펼쳐온 개혁의 분위기와 역사적 정황과 문헌을 적절히 사용해서 교회 개혁의 체계적인 교리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준비된 인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민한 지성과 영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도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칼빈이 한 세기 전에 나왔더라면 그는 이토록 놀라운 개혁주의 학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6세기의 역사적, 사회적, 교회적, 분위기에다 선배 종교 개혁자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연구하는 중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즉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의 커다란 구조가 칼빈을 칼빈되게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웨스턴 신학교 학장이었고 대칼빈학자였던 존 헤셀링크(I. John Hesselink) 박사의 말과 같이 그래서 종교개혁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개혁(Reformed according to the Word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http://blog.daum.net/kkho1105/3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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