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원장 사재 털어 운영 ‘칼빈박물관’ 종교개혁 역사·열정 생생
정성구 원장 사재 털어 운영 ‘칼빈박물관’ 종교개혁 역사·열정 생생
국내 그리스도인 10명 중 7명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추종자들이다. 그의 교리를 채택한 장로교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올해는 칼뱅이 탄생한 지 500주년. 신학자들마다 칼뱅을 기념하는 세미나를 잇따라 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500주년이라는 숫자보다는 칼뱅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오늘날 한국 교회, 나아가 한국 사회는 칼뱅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에 위치한 칼빈박물관. 한국칼빈주의연구원(원장 정성구 박사) 건물 지하에 있는 박물관에는 칼뱅과 종교개혁 관련 자료 1만여 종이 빼곡히 차 있다. 칼뱅이 나이 27세에 쓴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신명기를 본문으로 한 200여편의 설교와 욥기를 본문으로 한 160여편의 설교는 ‘탁월한 강해설교가’란 그의 명성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밖에 이그나시우스 크리소스톰 등 16세기에 인쇄된 수십종의 교부들 저서는 백과사전보다 두꺼운 표지와 너덜너덜한 표지가 세월의 흔적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칼뱅에겐 스승이었던 마르틴 루터의 저서와 비텐베르크대학 성당 정문에 붙였던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과 칼뱅의 제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저서 등 종교개혁과 관련한 자료들도 상당수다.
도대체 고서 중의 고서인 이 책들이 이 조그마한 박물관으로 옮겨온 사연은 뭘까. 1964년 당시 총신대 신학생이던 정성구는 보수신학의 거목 박윤선 목사의 뜻에 따라 서울 동산교회에서 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박 목사의 칼뱅주의 사상에 매료됐다. 이후 유학을 간 곳도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네덜란드의 자유대학. 이곳에서 정성구는 칼뱅 관련 논문을 쓰는 것과 동시에 귀국 후 칼뱅주의 사상을 보급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관련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귀국 후 총신대 교수를 맡으면서는 칼뱅 자료 수집이 본격화됐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됐기 때문이다. 1주일에 두세 번은 인사동과 청계천 고서점을 헤집고 다녔다. 부산, 대구 등 전국을 안 다닌 곳이 없다. 미국 출장을 가서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은 근처의 고서점. 현지 목회자의 안내로 고서점을 다 둘러본 다음에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정도였다.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 칼뱅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다. 때론 칼뱅 책을 사기 위해 빵 한 조각과 물 한 병으로 하루를 꼬박 버틴 적도 있다. 최소한 지구를 2바퀴는 돌았을 거란 게 정 박사의 설명이다.
"학문의 전쟁은 자료전쟁이고, 자료가 있는 곳에 진정한 학문이 꽃 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료수집은 내 필생의 사역이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 박사가 처음부터 칼뱅연구원이니 박물관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칼뱅 자료를 제법 모았던 84년, 정 박사는 한신대 대학원생의 방문을 접했다. "칼뱅의 원전과 자료는 총신대 정성구 교수에게 가면 구할 수 있으니 찾아가 보라"며 주임교수가 추천했다는 것이다. 교단을 달리하던 교수가 자신을 추천한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정 박사는 그동안 칼뱅의 자료를 독점하려 했던 자세를 뉘우치고 모든 자료를 한국 교회에 공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듬해 7월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을 설립했다. 정박사는 연구원을 위해 자신 소유로 되어 있던 충북 영동군 60여만㎡(21만 평)의 임야를 팔아 건물을 빌리고, 월급과 특강 등의 사례비를 칼빈주의연구원에 쏟아부었다.
정 박사는 현대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가 칼뱅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처럼 오늘날 글로벌 경제 위기 속 인류의 방향 역시 칼뱅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도 유럽도 한국도 청교도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인간의 탐욕과 허영, 철저한 인본주의와 유물주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 채 자기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탐심, 도덕적 타락 때문에 발생한 금융 위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 중심의 칼빈사상을 회복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연구원 3층은 지금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기 위한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1559년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제네바 대학 전신)를 세워 종교개혁자들을 유럽 각국에 파송한 것처럼 칼빈주의연구원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칼뱅과 정 박사의 열정을 배우기 위해 지금까지 해외에서만 300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국민일보 성남=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출처] 정성구 원장 사재 털어 운영 ‘칼빈박물관’ 종교개혁 역사·열정 생생 |작성자 예수뿐
http://blog.naver.com/sayjesus/80066057460
국내 그리스도인 10명 중 7명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추종자들이다. 그의 교리를 채택한 장로교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올해는 칼뱅이 탄생한 지 500주년. 신학자들마다 칼뱅을 기념하는 세미나를 잇따라 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500주년이라는 숫자보다는 칼뱅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오늘날 한국 교회, 나아가 한국 사회는 칼뱅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에 위치한 칼빈박물관. 한국칼빈주의연구원(원장 정성구 박사) 건물 지하에 있는 박물관에는 칼뱅과 종교개혁 관련 자료 1만여 종이 빼곡히 차 있다. 칼뱅이 나이 27세에 쓴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신명기를 본문으로 한 200여편의 설교와 욥기를 본문으로 한 160여편의 설교는 ‘탁월한 강해설교가’란 그의 명성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밖에 이그나시우스 크리소스톰 등 16세기에 인쇄된 수십종의 교부들 저서는 백과사전보다 두꺼운 표지와 너덜너덜한 표지가 세월의 흔적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칼뱅에겐 스승이었던 마르틴 루터의 저서와 비텐베르크대학 성당 정문에 붙였던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과 칼뱅의 제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저서 등 종교개혁과 관련한 자료들도 상당수다.
도대체 고서 중의 고서인 이 책들이 이 조그마한 박물관으로 옮겨온 사연은 뭘까. 1964년 당시 총신대 신학생이던 정성구는 보수신학의 거목 박윤선 목사의 뜻에 따라 서울 동산교회에서 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박 목사의 칼뱅주의 사상에 매료됐다. 이후 유학을 간 곳도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네덜란드의 자유대학. 이곳에서 정성구는 칼뱅 관련 논문을 쓰는 것과 동시에 귀국 후 칼뱅주의 사상을 보급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관련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귀국 후 총신대 교수를 맡으면서는 칼뱅 자료 수집이 본격화됐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됐기 때문이다. 1주일에 두세 번은 인사동과 청계천 고서점을 헤집고 다녔다. 부산, 대구 등 전국을 안 다닌 곳이 없다. 미국 출장을 가서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은 근처의 고서점. 현지 목회자의 안내로 고서점을 다 둘러본 다음에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정도였다.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 칼뱅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다. 때론 칼뱅 책을 사기 위해 빵 한 조각과 물 한 병으로 하루를 꼬박 버틴 적도 있다. 최소한 지구를 2바퀴는 돌았을 거란 게 정 박사의 설명이다.
"학문의 전쟁은 자료전쟁이고, 자료가 있는 곳에 진정한 학문이 꽃 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료수집은 내 필생의 사역이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 박사가 처음부터 칼뱅연구원이니 박물관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칼뱅 자료를 제법 모았던 84년, 정 박사는 한신대 대학원생의 방문을 접했다. "칼뱅의 원전과 자료는 총신대 정성구 교수에게 가면 구할 수 있으니 찾아가 보라"며 주임교수가 추천했다는 것이다. 교단을 달리하던 교수가 자신을 추천한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정 박사는 그동안 칼뱅의 자료를 독점하려 했던 자세를 뉘우치고 모든 자료를 한국 교회에 공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듬해 7월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을 설립했다. 정박사는 연구원을 위해 자신 소유로 되어 있던 충북 영동군 60여만㎡(21만 평)의 임야를 팔아 건물을 빌리고, 월급과 특강 등의 사례비를 칼빈주의연구원에 쏟아부었다.
정 박사는 현대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가 칼뱅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처럼 오늘날 글로벌 경제 위기 속 인류의 방향 역시 칼뱅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도 유럽도 한국도 청교도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인간의 탐욕과 허영, 철저한 인본주의와 유물주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 채 자기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탐심, 도덕적 타락 때문에 발생한 금융 위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 중심의 칼빈사상을 회복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연구원 3층은 지금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기 위한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1559년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제네바 대학 전신)를 세워 종교개혁자들을 유럽 각국에 파송한 것처럼 칼빈주의연구원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칼뱅과 정 박사의 열정을 배우기 위해 지금까지 해외에서만 300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국민일보 성남=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출처] 정성구 원장 사재 털어 운영 ‘칼빈박물관’ 종교개혁 역사·열정 생생 |작성자 예수뿐
http://blog.naver.com/sayjesus/8006605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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