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논단] 기독인의 역할과 사명..( 최홍석)|
[기독논단] 기독인의 역할과 사명..
인터넷 시대라고 한다. 서로간의 관계망이 이루어진 시대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특징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인간소외 현상은 더 심각해져 간다. 인간 상호간의 인격적 유대는 점점 약화되어 가는 듯 하다. 배금논리에 따라 인간을 수단화하는 현상,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풍조, 지배하며 군림하려는 사단적 욕망의 발현, 이익을 챙길 수만 있다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아니하는 삶의 행태, 세속 중심의 사고와 무신적 상황 등 이러 저러한 죄악의 모습들은 양상만 달리했지 여전히 그 위세는 등등하다.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현상들에 대해 예민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성경적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를 가지고 태어나 그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 물론 타락 이후 죄로 어두워졌지만 - 이 있다(롬1:19).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므로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롬1:20). 이렇게 볼 때 무신론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한다(롬1:20). 그럼에도 무신론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롬1:18)고 할 때 ‘막는’이란 말은 억누른다는 의미의 카테코에서 나왔다. 진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불의로 억압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무신론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불의한 행위와 부도덕한 상태,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내면의 고통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창1:26-28).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인데 무엇이 닮았는가?
성경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닮아 인간 또한 인격적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한다. 지성적 구조, 감성적 능력, 의지적 요소들이 다 하나님을 닮은 것들이다.
여기에 성경은 특별히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을 지니도록 인간이 지음 받았음을 말한다(엡4:24, 골3:10). 이를 신학적으로 원의(justitia originalis)라 부른다. 인간은 원의를 소유하도록 지음 받았다. 따라서 그의 본래적 신분은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의를 유지하며, 거룩을 지켜야 했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적, 감성적, 의지적 능력들과 더불어 그것들을 올바로 기능하게 하는 원의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원의는 삼중 관계 속에서 작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 나와 너의 윤리적 관계, 피조물과의 청지기적 관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원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구조적인 능력들은 남아 있었지만 그 본래적 기능은 전혀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타락 전의 인류는 지 정 의의 능력들을 참된 지식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타락 후 변화가 왔다.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능력은 남아 있지만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능력을 행사한다. 참된 지식 대신 오류로 가득찬 지식을 따라 의 대신 불의한 방향으로, 거룩 대신 불결한 내면성을 가지고 행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닫혀졌다. 이것이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 교리이다.
피조물과의 관계와 나와 너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음과 착취와 인간 소외 현상으로 특징 지워지는 세속 문화를 보면서 성경의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삼중적 질서에 이상이 생겼다. 그와 함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 전혀 바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대 가운데서 삼중 관계를 바로 세우고 잘못된 방향을 교정시킬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복음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전혀 없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사명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주변적인 데에서 근본적인 문제로 돌려야 한다.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 앞에 나아가며 나아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도피하려는 현대인들의 내면적 고통이 도전 받게 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인간은 섬기는 종으로 성령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 그 때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을 것이다.
최홍석 교수 기자 등록일 2002-07-15
http://blog.daum.net/kkho1105/3843|
인터넷 시대라고 한다. 서로간의 관계망이 이루어진 시대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특징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인간소외 현상은 더 심각해져 간다. 인간 상호간의 인격적 유대는 점점 약화되어 가는 듯 하다. 배금논리에 따라 인간을 수단화하는 현상,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는 풍조, 지배하며 군림하려는 사단적 욕망의 발현, 이익을 챙길 수만 있다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아니하는 삶의 행태, 세속 중심의 사고와 무신적 상황 등 이러 저러한 죄악의 모습들은 양상만 달리했지 여전히 그 위세는 등등하다.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현상들에 대해 예민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성경적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를 가지고 태어나 그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 물론 타락 이후 죄로 어두워졌지만 - 이 있다(롬1:19).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므로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롬1:20). 이렇게 볼 때 무신론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한다(롬1:20). 그럼에도 무신론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롬1:18)고 할 때 ‘막는’이란 말은 억누른다는 의미의 카테코에서 나왔다. 진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불의로 억압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무신론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불의한 행위와 부도덕한 상태,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내면의 고통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창1:26-28).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인데 무엇이 닮았는가?
성경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닮아 인간 또한 인격적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한다. 지성적 구조, 감성적 능력, 의지적 요소들이 다 하나님을 닮은 것들이다.
여기에 성경은 특별히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을 지니도록 인간이 지음 받았음을 말한다(엡4:24, 골3:10). 이를 신학적으로 원의(justitia originalis)라 부른다. 인간은 원의를 소유하도록 지음 받았다. 따라서 그의 본래적 신분은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의를 유지하며, 거룩을 지켜야 했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적, 감성적, 의지적 능력들과 더불어 그것들을 올바로 기능하게 하는 원의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원의는 삼중 관계 속에서 작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 나와 너의 윤리적 관계, 피조물과의 청지기적 관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원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구조적인 능력들은 남아 있었지만 그 본래적 기능은 전혀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타락 전의 인류는 지 정 의의 능력들을 참된 지식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타락 후 변화가 왔다.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능력은 남아 있지만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능력을 행사한다. 참된 지식 대신 오류로 가득찬 지식을 따라 의 대신 불의한 방향으로, 거룩 대신 불결한 내면성을 가지고 행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닫혀졌다. 이것이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 교리이다.
피조물과의 관계와 나와 너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음과 착취와 인간 소외 현상으로 특징 지워지는 세속 문화를 보면서 성경의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삼중적 질서에 이상이 생겼다. 그와 함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 전혀 바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대 가운데서 삼중 관계를 바로 세우고 잘못된 방향을 교정시킬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복음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전혀 없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사명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주변적인 데에서 근본적인 문제로 돌려야 한다.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 앞에 나아가며 나아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도피하려는 현대인들의 내면적 고통이 도전 받게 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인간은 섬기는 종으로 성령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 그 때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을 것이다.
최홍석 교수 기자 등록일 2002-07-15
http://blog.daum.net/kkho1105/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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