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석 교수의 교회론3:21세기 교회의 방향 찾기 (기독신문)
최홍석 교수의 교회론:21세기 교회의 방향 찾기 (기독신문)
③올바른 영성을 찾아서
①오직 계시 의존적 사고로
②성도를 온전케하는 일에 먼저 관심을
③올바른 영성을 찾아서
모든 시대의 기독교회는 나름대로의 영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초대교회는 초대교회 나름대로의 독특한 영성을 지녔고,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역시 그러하며, 21세기의 교회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문제는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성경적인 영성운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21세기의 한국 교회는 분별하면서 추구해가야 한다는 데 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가 요즈음 교계에 유행어처럼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성’이란 말은 주후 5세기 즈음 수도원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가톨릭 교회를 통해 이어져왔으며, 지난 세기 후반부터 개신교회 내에서도 관심이 일어나더니, 그보다 십 수년 후인 70년대 말 또는 80년대 초부터 한국 개신교 안에 서서히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적 배경을 가진 이 용어가 개신교 목회 영역에 전래되면서 많은 혼란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설상가상 혼란이 더해 진 것은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런 움직임들을 접했을 때, 그와 연관된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규명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교회성장이란 일념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방법론적 도입을 시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의 교회는 자조적인 반성과 더불어 가톨릭적 영성과 개신교적 영성 사이의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신학적 규명 없이 무분별한 도입이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통찰력이 요구된다. 한국 교회 역사 역시 세계 교회 역사의 지류이므로 영성 운동과 관련하여 범세계적 관점에서 시대별로 일괄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주후 2세기경에는 복음이 타 문화권, 특별히 헬라 문화권과 접촉하게 되면서 복음과 문화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사도행전적 공동체의 영성과는 다른 영성이 헬라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물질을 죄악시하는 이원론적 고행주의,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등이 그 특징이었다.
그 후, 우리는 또한 동-서방 교회에 존재했던 서로 다른 영성을 발견하게 된다. 죄로부터의 구속, 죄사함으로서의 십자가, 법정적 칭의 등을 중시했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의 부활, 역동적 성화, 또한 인간의 신화(神化) 등을 동방 교회는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삶 속에서 ‘예수 기도’로 알려져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짧은 문구의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렸고, 예배시 성상(聖像)을 사용했으며, 침묵하는 일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영성을 지니게 되었다.
다음으로 수도원 운동에서의 영성을 말할 수 있다. 원래 수도원 운동은 영육 이원론적 도피 성향 때문에 나타났으나, 후기로 가면서 당시 가톨릭 교회 체제에 대한 평신도의 항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여하튼 여러 변화들을 통해 중세 수도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의 경건이 아니라, 거리로 나아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풀고자 했던 13세기의 탁발 교단과 14세기의 ‘오늘의 헌신’(Divotio moderna)과 같은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도회의 이상은 초기의 도피적 성향과는 달리 세상을 섬기고 변혁하는 쪽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 후 종교개혁기에 이르러서는 때로 한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던 이전의 영성이 성경의 관점에 의해 조정되어 조화와 균형을 되찾게 되었다. ‘오직 은혜로써, 오직 믿음으로써, 오직 성경으로써’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율법주의적인 공로사상이 배격되었으며, 사제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만인제사장의 원리가 표방되었고, 이원론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성속 일치, 그에 따른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윤리 등의 출현으로 비로소 기독교 영성은 전인적이며 포괄적인 시각을 지닌 통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브래들리 홀트는 영성을 가리켜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는 인생을 산책으로 비유하면서 영성을 정의한 것이다. 만일 인생을 경주로 비유한다면 기독교 영성이란 성령 안에서 달려가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이란 다름 아닌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산책하거나 달리는 자는 그 사람 자체, 전인(全人)이 산책하거나 달리는 것이지, 그의 감성만 산책하는 일에 관여하고 지성과 의지는 정지되는 것이 아니듯이 기독교적 영성이란 삶의 일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전인과 연관된 통전성을 지니게 된다. 즉 위로는 하나님, 안으로는 자기 자신, 옆으로는 다른 사람들, 아래로는 온 세상, 모든 관계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 필요
개혁신학적 전통에서 영성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성경 용어는 ‘경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인들 가운데 경건이란 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건에 찌들어 있다’는 비아냥거리는 표현도 있다. 이 말 속에는 강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드러난다. 앞뒤가 꽉 막힌, 독선적인 고집불통, 편협한 비판적 성향, 창조질서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보다 엄격한 규율 준수에 대한 의무감으로 짓눌리는 종교적 형태 등.
그러나 경건의 올바른 의미는 그렇지 않다. 경건이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함으로 이루어 가는 삶의 양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경건이란 인생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경건을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경건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부터 나와 너, 나와 세상의 관계로 발전되어간다. 바로 이 진전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긍휼을 베푸는 일과 자신을 지켜 세속의 악으로부터 멀리하는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경건이란 그릇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삶의 양상들은 그 모두가 하나의 예외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경건이란 어떤 특정인들만의 독점물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소유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공유물이다, 그런데 비록 공유되는 것일지라도 각자에게 드러나는 양상은 형형색색이다.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규격화해서 다른 양상들을 그 틀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더더구나 흑백논리로 타인을 비평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마음을 강조하는 명상적 형태의 경건도 있을 수 있고, 감성을 강조하는 열정적 형태를 띤 경건도 있을 수 있으며, 의지를 강조하는 행동지향적인 경건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능동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경건도 있을 수 있고, 보다 수동적이고 개인적 양상의 경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들의 옳고 그름을 절대 가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양성과 강조점의 차이는 인정될 수 있으나, 그 뿌리가 잘못된 영성은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항상 말씀의 빛 아래서 어느 양상이 보다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형태인가를 분별해 내는 작업을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나아가는 도중에 때로 어떤 점들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교정되기도 할 것이다.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경건’에 영성의 내용 모두 담겨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과연 건강한 영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 동안 영성을 지나치게 내면화하여 기독교 영성이 지니는 다면적 의미를 일면적 구조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원론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하고 경건을 내면의 문제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주일 하루 예배당 안에서의 일들만을 중요시하고 엿새 동안의 노동과 삶의 예배를 평가절하 시키지는 않았는지, 세속적 가치관을 복음으로 변혁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영향으로 교회의 구조를 다분히 관료주의적 성향의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들이기보다 현세적인 무사안일과 입신양명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는지, 신전의식(神前意識)보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목회 실적(?)을 높이려는 시도는 없었는지, 오직 은총이 아닌 공적사상이 목회 프로그램 속에 유입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혹시나 이 모든 현상들이 우리의 영성 형성에 있어서 성경 외적인 요인들, 즉 유교, 불교, 샤마니즘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지 우리 의식의 심층구조를 스스로 분석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체면 중시 성향 및 위계적 가치관, 현실 도피적 무위사상(無爲思想), 제재기복적(除災祈福的) 성향 등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기독교의 옷을 갈아입고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영성을 세속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할 때 21세기의 교회는 주님의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갈 것이다.
최홍석 교수(총신대신대원·조직신학)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0-03-15
http://blog.daum.net/kkho1105/3844
③올바른 영성을 찾아서
①오직 계시 의존적 사고로
②성도를 온전케하는 일에 먼저 관심을
③올바른 영성을 찾아서
모든 시대의 기독교회는 나름대로의 영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초대교회는 초대교회 나름대로의 독특한 영성을 지녔고,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역시 그러하며, 21세기의 교회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문제는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성경적인 영성운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21세기의 한국 교회는 분별하면서 추구해가야 한다는 데 있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가 요즈음 교계에 유행어처럼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성’이란 말은 주후 5세기 즈음 수도원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가톨릭 교회를 통해 이어져왔으며, 지난 세기 후반부터 개신교회 내에서도 관심이 일어나더니, 그보다 십 수년 후인 70년대 말 또는 80년대 초부터 한국 개신교 안에 서서히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적 배경을 가진 이 용어가 개신교 목회 영역에 전래되면서 많은 혼란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설상가상 혼란이 더해 진 것은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런 움직임들을 접했을 때, 그와 연관된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규명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교회성장이란 일념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방법론적 도입을 시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의 교회는 자조적인 반성과 더불어 가톨릭적 영성과 개신교적 영성 사이의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신학적 규명 없이 무분별한 도입이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통찰력이 요구된다. 한국 교회 역사 역시 세계 교회 역사의 지류이므로 영성 운동과 관련하여 범세계적 관점에서 시대별로 일괄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주후 2세기경에는 복음이 타 문화권, 특별히 헬라 문화권과 접촉하게 되면서 복음과 문화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사도행전적 공동체의 영성과는 다른 영성이 헬라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물질을 죄악시하는 이원론적 고행주의,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등이 그 특징이었다.
그 후, 우리는 또한 동-서방 교회에 존재했던 서로 다른 영성을 발견하게 된다. 죄로부터의 구속, 죄사함으로서의 십자가, 법정적 칭의 등을 중시했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의 부활, 역동적 성화, 또한 인간의 신화(神化) 등을 동방 교회는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삶 속에서 ‘예수 기도’로 알려져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짧은 문구의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렸고, 예배시 성상(聖像)을 사용했으며, 침묵하는 일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영성을 지니게 되었다.
다음으로 수도원 운동에서의 영성을 말할 수 있다. 원래 수도원 운동은 영육 이원론적 도피 성향 때문에 나타났으나, 후기로 가면서 당시 가톨릭 교회 체제에 대한 평신도의 항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여하튼 여러 변화들을 통해 중세 수도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의 경건이 아니라, 거리로 나아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풀고자 했던 13세기의 탁발 교단과 14세기의 ‘오늘의 헌신’(Divotio moderna)과 같은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도회의 이상은 초기의 도피적 성향과는 달리 세상을 섬기고 변혁하는 쪽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 후 종교개혁기에 이르러서는 때로 한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던 이전의 영성이 성경의 관점에 의해 조정되어 조화와 균형을 되찾게 되었다. ‘오직 은혜로써, 오직 믿음으로써, 오직 성경으로써’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율법주의적인 공로사상이 배격되었으며, 사제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만인제사장의 원리가 표방되었고, 이원론에 대한 극복으로서의 성속 일치, 그에 따른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윤리 등의 출현으로 비로소 기독교 영성은 전인적이며 포괄적인 시각을 지닌 통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브래들리 홀트는 영성을 가리켜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는 인생을 산책으로 비유하면서 영성을 정의한 것이다. 만일 인생을 경주로 비유한다면 기독교 영성이란 성령 안에서 달려가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이란 다름 아닌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산책하거나 달리는 자는 그 사람 자체, 전인(全人)이 산책하거나 달리는 것이지, 그의 감성만 산책하는 일에 관여하고 지성과 의지는 정지되는 것이 아니듯이 기독교적 영성이란 삶의 일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전인과 연관된 통전성을 지니게 된다. 즉 위로는 하나님, 안으로는 자기 자신, 옆으로는 다른 사람들, 아래로는 온 세상, 모든 관계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 필요
개혁신학적 전통에서 영성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성경 용어는 ‘경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인들 가운데 경건이란 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건에 찌들어 있다’는 비아냥거리는 표현도 있다. 이 말 속에는 강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드러난다. 앞뒤가 꽉 막힌, 독선적인 고집불통, 편협한 비판적 성향, 창조질서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보다 엄격한 규율 준수에 대한 의무감으로 짓눌리는 종교적 형태 등.
그러나 경건의 올바른 의미는 그렇지 않다. 경건이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함으로 이루어 가는 삶의 양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경건이란 인생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경건을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경건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부터 나와 너, 나와 세상의 관계로 발전되어간다. 바로 이 진전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긍휼을 베푸는 일과 자신을 지켜 세속의 악으로부터 멀리하는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경건이란 그릇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삶의 양상들은 그 모두가 하나의 예외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경건이란 어떤 특정인들만의 독점물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소유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공유물이다, 그런데 비록 공유되는 것일지라도 각자에게 드러나는 양상은 형형색색이다.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규격화해서 다른 양상들을 그 틀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더더구나 흑백논리로 타인을 비평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마음을 강조하는 명상적 형태의 경건도 있을 수 있고, 감성을 강조하는 열정적 형태를 띤 경건도 있을 수 있으며, 의지를 강조하는 행동지향적인 경건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능동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경건도 있을 수 있고, 보다 수동적이고 개인적 양상의 경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들의 옳고 그름을 절대 가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양성과 강조점의 차이는 인정될 수 있으나, 그 뿌리가 잘못된 영성은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항상 말씀의 빛 아래서 어느 양상이 보다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형태인가를 분별해 내는 작업을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해 나아가는 도중에 때로 어떤 점들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교정되기도 할 것이다.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경건’에 영성의 내용 모두 담겨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과연 건강한 영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 동안 영성을 지나치게 내면화하여 기독교 영성이 지니는 다면적 의미를 일면적 구조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원론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하고 경건을 내면의 문제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주일 하루 예배당 안에서의 일들만을 중요시하고 엿새 동안의 노동과 삶의 예배를 평가절하 시키지는 않았는지, 세속적 가치관을 복음으로 변혁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영향으로 교회의 구조를 다분히 관료주의적 성향의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들이기보다 현세적인 무사안일과 입신양명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는지, 신전의식(神前意識)보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목회 실적(?)을 높이려는 시도는 없었는지, 오직 은총이 아닌 공적사상이 목회 프로그램 속에 유입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혹시나 이 모든 현상들이 우리의 영성 형성에 있어서 성경 외적인 요인들, 즉 유교, 불교, 샤마니즘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지 우리 의식의 심층구조를 스스로 분석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체면 중시 성향 및 위계적 가치관, 현실 도피적 무위사상(無爲思想), 제재기복적(除災祈福的) 성향 등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기독교의 옷을 갈아입고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영성을 세속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할 때 21세기의 교회는 주님의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갈 것이다.
최홍석 교수(총신대신대원·조직신학)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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