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석 교수의 교회론:21세기 교회의 방향 찾기 (기독신문)|
최홍석 교수의 교회론:21세기 교회의 방향 찾기 (기독신문)
②성도를 온전케하는 일에 먼저 관심을
21세기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어야 한다(엡4:11~12). 그 점을 우리는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면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삼 년간 눈물로 각 사람을 돌보며 목회했던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복음의 사역을 위탁하였다(딤전1:3). 한 세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에 진입한 이 땅의 교회들 역시 복음의 위임과 계승의 과제를 안고 있다. 복음의 위임이란 관점에서 볼 때 디모데서는 21세기의 교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그럼에도 영속성 또한 분명히 있다. 당시 에베소교회를 어지럽혔던 요인들 중의 한 가지는 무엇보다 잘못된 사상들이었다. 혼합주의적 성향을 지닌 이원론적 영지주의(gnosticism),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했던 퇴폐적인 유대주의(딤전1:3~7), 혼인을 금하고 어떤 식물을 먹지 말라고 했던 잘못된 금욕주의(딤전4:1~5) 등이 그 예들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경험하는 혼란 역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잘못된 사상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샤머니즘, 뉴 에이지 운동, 극단적 이기주의, 배금사상, 향락적 세속주의, 인본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세속적 가치관과 사조들이 교회를 위협하며 넘실거린다.
디모데서가 현대에도 연속성을 지니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상황은 바뀌고 시간은 흘렀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며, 복음 역시 불변하고, 구원의 방법 또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디모데서에 나타난 바울의 목회훈을 살펴보는 일은 21세기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영적 밤은 더욱 깊어 간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면 하루아침에 당장 무슨 변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세인들은 떠들어대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해 아래는 결코 새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전1:9). 정보화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가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매스컴에서 야단할지라도 결코 요동해서는 안 된다. 고속 정보망이 구축되고 천문학적 수치의 정보들이 유통될지라도 인간이 변하지 않고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천년이 올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개선되기는커녕, 새벽이 가까워올수록 어둠이 더해 가듯 영적인 밤은 깊어만 갈 것이다.
미래학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나 내다보는 것은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고도의 정보 지식사회가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사라호 태풍보다 더 무서운 정보 홍수에 인간성은 깊은 함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불건전한 사상들이 정보망을 통해 유통될 것이며, 건전한 가치관을 전수해야 할 교육은 점차 그 명맥 잇기가 어려울 것이다. 영적 그레샴 법칙은 극에 달할 것이며, 그러한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비인간화 현상들이 촉발될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혼미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미 이러한 영적 상황들을 예고하고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며, 그때에 극단적인 자기 사랑과 배금사상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딤후3:2). 온통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역행하게 된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 되는 길(마16:24)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 지식의 증가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 관계가 개선되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와 그 내면은 이전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딤후3:2~4).
어느 때에나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계22:11),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셨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비관적이다. 새 천년이 되어지면 영적인 밤은 더욱 깊어 갈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정신을 차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준비해야 한다.
믿음과 양심에 기초한 사랑을
바울이 디모데를 경계(교훈)한 목적은 사랑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했다(딤전1:5).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었지만(5절), 이 사랑 속에 담겨지는 것들은 여러 가지였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 21세기의 교회들이 맞추어야 할 사역의 초점 역시 여기에 있다.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 이 표현 속에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부터’라는 개념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까닭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은 모두 거짓이 없는 믿음의 단짝들이기 때문이다(딤전3:9, 딛1:15).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이 있기 마련이요, 믿음이 없는 곳에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문맥(딤전1장)을 살펴보면, 사도는 표현 방식을 달리하여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19절)고 했는데, 그것은 곧 ‘사랑을 가지라’(딤전1:5)는 궁극적 목적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과 선한 양심에서만 참된 사랑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값싼 은총 아닌 윤리적 책임 따르는 은총을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는 일은 은총과 책임의 문제다. 교회는 더 이상 값싼 은총을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은총에는 심각한 책임이 수반된다는 복음적 진리를 바로 선포해야 한다(빌1:27). 기독교 윤리의식 부재 현상과 같은 부끄러운 치부는 21세기 교회에서 사라지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마땅히 목회자 스스로부터
이 모든 일들은 타인만을 향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목회자 자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한 것이다(딤전4:16). 목회자들이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읽기 쉽고, 설교하기 위해 삶을 관찰하기 쉽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목회자 자신도 목회사역의 대상 중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자신을 살피면서 공적주의(to do)보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일(to be)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일이 깊이 요구된다. 그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했노라 [원문에 과거형임을 주목]’(마6:23)는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지금 여기서부터 피해야 한다.
‘할 일’보다 ‘일할 사람’을 먼저
교회 안에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할지라도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은 일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일할 사람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주께서도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에 관해 말씀하셨다(마7:17~18, 눅6:43).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혀지므로 교회의 사역은 나무의 품질을 바꾸는 일, 즉 변화되어야 할 인간 본성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1세기 교회의 급선무는 인간의 문제, 곧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복음의 일꾼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어야 한다(딤전3:1~13).
바른 직분자 없이 교회 거룩 없다
사도는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에 대해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복음의 진리를 분별할 능력과 함께 가르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가정을 신앙으로 잘 인도하여야 하며, 불신 사회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이 기준을 따라 직분자 세우는 일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직분을 감당케 해야 한다(딤전3:10). 큰 교회에서는 매년 수백 명의 제직들이 임명된다. 수백 명이 되든 단지 몇 사람이 되든 현실적으로 직분 세우는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거룩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사도는 여기서 감독(장로)들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이 조건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으로 여기면서 21세기의 교회는 회중의 영적 성숙에 최우선의 관심을 가지고 교육적인 사명을 다 해야 한다.
회중의 영적 성숙은 직분자의 섬김에서
회중의 영적 성숙은 앞서 언급한 직분자들의 역할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약성경이 교회 안의 직분을 가리킬 때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식탁에서의 섬김’이란 본래적 의미를 지닌 디아코니아(diakonia)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을 본질로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섬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눅22:27), 아무도 그리스도의 섬김에 동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이 섬김을 통하여 직분자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엡4:11~12). 직분자들의 섬김을 통하여 전체 회중의 영적 성숙은 가능하게 된다.
21세기의 교회들은 유혹이 많고 변화무쌍한 삶의 정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 먼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교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모든 직분자들은 이 방향을 따라 섬겨야 하며, 그것은 곧 교회 직분들의 존재 이유다.
최홍석 교수
< 총신신대원·조직신학 >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0-03-08
http://blog.daum.net/kkho1105/3845
②성도를 온전케하는 일에 먼저 관심을
21세기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어야 한다(엡4:11~12). 그 점을 우리는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면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삼 년간 눈물로 각 사람을 돌보며 목회했던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복음의 사역을 위탁하였다(딤전1:3). 한 세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에 진입한 이 땅의 교회들 역시 복음의 위임과 계승의 과제를 안고 있다. 복음의 위임이란 관점에서 볼 때 디모데서는 21세기의 교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그럼에도 영속성 또한 분명히 있다. 당시 에베소교회를 어지럽혔던 요인들 중의 한 가지는 무엇보다 잘못된 사상들이었다. 혼합주의적 성향을 지닌 이원론적 영지주의(gnosticism),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했던 퇴폐적인 유대주의(딤전1:3~7), 혼인을 금하고 어떤 식물을 먹지 말라고 했던 잘못된 금욕주의(딤전4:1~5) 등이 그 예들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경험하는 혼란 역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잘못된 사상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샤머니즘, 뉴 에이지 운동, 극단적 이기주의, 배금사상, 향락적 세속주의, 인본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세속적 가치관과 사조들이 교회를 위협하며 넘실거린다.
디모데서가 현대에도 연속성을 지니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상황은 바뀌고 시간은 흘렀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며, 복음 역시 불변하고, 구원의 방법 또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디모데서에 나타난 바울의 목회훈을 살펴보는 일은 21세기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영적 밤은 더욱 깊어 간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면 하루아침에 당장 무슨 변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세인들은 떠들어대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해 아래는 결코 새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전1:9). 정보화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가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매스컴에서 야단할지라도 결코 요동해서는 안 된다. 고속 정보망이 구축되고 천문학적 수치의 정보들이 유통될지라도 인간이 변하지 않고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천년이 올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개선되기는커녕, 새벽이 가까워올수록 어둠이 더해 가듯 영적인 밤은 깊어만 갈 것이다.
미래학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나 내다보는 것은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고도의 정보 지식사회가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사라호 태풍보다 더 무서운 정보 홍수에 인간성은 깊은 함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불건전한 사상들이 정보망을 통해 유통될 것이며, 건전한 가치관을 전수해야 할 교육은 점차 그 명맥 잇기가 어려울 것이다. 영적 그레샴 법칙은 극에 달할 것이며, 그러한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비인간화 현상들이 촉발될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혼미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미 이러한 영적 상황들을 예고하고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며, 그때에 극단적인 자기 사랑과 배금사상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딤후3:2). 온통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역행하게 된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 되는 길(마16:24)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 지식의 증가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 관계가 개선되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와 그 내면은 이전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딤후3:2~4).
어느 때에나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계22:11),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셨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비관적이다. 새 천년이 되어지면 영적인 밤은 더욱 깊어 갈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정신을 차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준비해야 한다.
믿음과 양심에 기초한 사랑을
바울이 디모데를 경계(교훈)한 목적은 사랑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했다(딤전1:5).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었지만(5절), 이 사랑 속에 담겨지는 것들은 여러 가지였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 21세기의 교회들이 맞추어야 할 사역의 초점 역시 여기에 있다.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 이 표현 속에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부터’라는 개념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까닭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은 모두 거짓이 없는 믿음의 단짝들이기 때문이다(딤전3:9, 딛1:15).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이 있기 마련이요, 믿음이 없는 곳에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문맥(딤전1장)을 살펴보면, 사도는 표현 방식을 달리하여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19절)고 했는데, 그것은 곧 ‘사랑을 가지라’(딤전1:5)는 궁극적 목적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과 선한 양심에서만 참된 사랑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값싼 은총 아닌 윤리적 책임 따르는 은총을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는 일은 은총과 책임의 문제다. 교회는 더 이상 값싼 은총을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은총에는 심각한 책임이 수반된다는 복음적 진리를 바로 선포해야 한다(빌1:27). 기독교 윤리의식 부재 현상과 같은 부끄러운 치부는 21세기 교회에서 사라지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마땅히 목회자 스스로부터
이 모든 일들은 타인만을 향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목회자 자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한 것이다(딤전4:16). 목회자들이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읽기 쉽고, 설교하기 위해 삶을 관찰하기 쉽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목회자 자신도 목회사역의 대상 중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자신을 살피면서 공적주의(to do)보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일(to be)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일이 깊이 요구된다. 그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했노라 [원문에 과거형임을 주목]’(마6:23)는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지금 여기서부터 피해야 한다.
‘할 일’보다 ‘일할 사람’을 먼저
교회 안에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할지라도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은 일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일할 사람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주께서도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에 관해 말씀하셨다(마7:17~18, 눅6:43).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혀지므로 교회의 사역은 나무의 품질을 바꾸는 일, 즉 변화되어야 할 인간 본성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1세기 교회의 급선무는 인간의 문제, 곧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복음의 일꾼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어야 한다(딤전3:1~13).
바른 직분자 없이 교회 거룩 없다
사도는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에 대해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복음의 진리를 분별할 능력과 함께 가르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가정을 신앙으로 잘 인도하여야 하며, 불신 사회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이 기준을 따라 직분자 세우는 일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직분을 감당케 해야 한다(딤전3:10). 큰 교회에서는 매년 수백 명의 제직들이 임명된다. 수백 명이 되든 단지 몇 사람이 되든 현실적으로 직분 세우는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거룩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사도는 여기서 감독(장로)들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이 조건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으로 여기면서 21세기의 교회는 회중의 영적 성숙에 최우선의 관심을 가지고 교육적인 사명을 다 해야 한다.
회중의 영적 성숙은 직분자의 섬김에서
회중의 영적 성숙은 앞서 언급한 직분자들의 역할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약성경이 교회 안의 직분을 가리킬 때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식탁에서의 섬김’이란 본래적 의미를 지닌 디아코니아(diakonia)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을 본질로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섬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눅22:27), 아무도 그리스도의 섬김에 동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이 섬김을 통하여 직분자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엡4:11~12). 직분자들의 섬김을 통하여 전체 회중의 영적 성숙은 가능하게 된다.
21세기의 교회들은 유혹이 많고 변화무쌍한 삶의 정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 먼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교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모든 직분자들은 이 방향을 따라 섬겨야 하며, 그것은 곧 교회 직분들의 존재 이유다.
최홍석 교수
< 총신신대원·조직신학 >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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