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유주의 이단들에 대한 성경적 반박
4. 자유주의 이단들에 대한 성경적 반박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315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서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81).
씨 에취 다드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ta- 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오스카 쿨만
“그 동일한 구속(救贖)의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saga)들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성경적 반박>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성경의 확실성과 신빙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이 말씀은 성경 기자들이 증인들이었고 성경의 내용들이 증거적 성격을 지님을 말해준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확증하시는 표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확증의 표들을 지니고 있다.
2.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다드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자존적(自存的)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폴 틸리히(Paul Tillich)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 35).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 .”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이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을 지키라.” 바울 사도는 사도들의 교훈[즉 신약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22:18, 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이처럼 강력하게 증거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3.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바르트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다드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나의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아니, 축획적(逐劃的) 영감을 증거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은 성경의 영감이 단어의 복수형 혹은 단수형에까지 미침을 보인다.
시편 19:7, 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의 이러한 네 가지 성격, 특히 그 완전성, 및 그것의 독특한 목적은 성경의 무오성에 맞고, 성경의 유오성에 맞지 않는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중차대한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책이 불확실하고 오류투성이일 수 있단 말인가?
4.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다드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23).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 일관하지 않다”(Ibid., p. 24).
틸리히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Systematic Theology, I,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174).
<성경적 반박>
창세기 6-8, 19장, 노아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다섯 장으로 된 이 짧은 예레미야 애가서에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약14회 나온다.
나훔 1:2, 3,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성경의 이 명백한 말씀을 어떻게 부인하며 달리 해석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옥의 교리는 주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아무도 이 진리를 변경시킬 수 없다.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은 확실히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성경이 증거하는 이 마지막 형벌을 부정하는 자가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단인가?
5.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드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79).
니이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틸리히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Systematic Theology, I, 252).
본훼퍼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 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판넨베르크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성경적 반박>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의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 내용이다. 창조를 믿지 못하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세계와 인류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창조를 믿는 믿음은 기본적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울 사도는 창조의 진리를 밝히 가르쳤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Beyond Tragedy, pp. 13-14).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후 역사적 인물 예수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Systematic Theology, II, 94).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육신(成肉身)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근본적 진리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부정함은 기독교의 지엽적인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육신하지 않으신 예수는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성육신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적, 이단적 영의 활동이다.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이 말씀이 증거한 대로,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요 적그리스도들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바르트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써 사람, 곧 진짜 사람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5, footnote).
니이버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Beyond Tragedy,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불트만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리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The Gos- pel of John, pp. 62, 63).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p. 50).
판넨베르크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72).
“그러므로,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Ibid., p. 7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 .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그리고 매우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자라면 어찌 이렇게 자세하고 확실한 증언을 부정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1:26-38, “. .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 .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니라.” 누가복음도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애매 모호하지 않다. 성경의 이 증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다른 어느 증거는 믿겠는가? 자유주의는 믿음 없는 사두개파적 오류일 뿐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초자연주의 수납의 시금석이다.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 사건과 그의 신성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35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요한복음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 .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 . . .” 이 표현은 그의 신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인적 존재가 단순히 인간 부모의 육신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15:47, “. . .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표현도 위의 말씀과 비슷하며, 이것은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8.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불트만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로부터 취해져 예수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motif),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 John, pp. 118, 119).
틸리히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Systematic Theology, II, 107).
예레미아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말씀들이 그 사실을 보인다.
사도행전 10:38, 3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주의 제자들은 그 기적들에 대한 산 증인들이었다.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믿는다면,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다 믿을 수 있다. 앞에서도 열거했지만, 성경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다드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Ibid., p. 59).
니이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Systematic Theology, II, 176).
<성경적 반박>
속죄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속죄의 성경적 의미는 ① 제사(속상 贖償; expiation), ② 구속(救贖, redemp- tion), ③ 유화(宥和, 진노를 가라앉게 함; propitiation), ④ 화목(re- conciliation) 등의 성경적 용어에서 나타나며, 속죄의 요점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 즉 피택자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것이다. 속죄의 진리는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지만 다음 구절들은 대표적인 것들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속죄 사역이었다.
로마서 3:24, 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피택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죄의 이치는 대리적 형벌로 인한 공의의 만족에 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죽으심, 즉 속죄의 죽으심이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단번 속죄의 십자가이었다. 그는 2000년 전에 피택자들의 속죄를 다 이루셨다.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신자들은 법적으로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거룩하여졌고 완전하여졌다.
베드로전서 1: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죄 문제의 해결은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함뿐이다.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피는 피택자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값이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불트만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틸리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Sys- tematic Theology, II, 1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순간에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Ibid., II, 154).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즉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Ibid., II, 15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155).
판넨베르크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면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Ibid., p. 98).
예레미야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New Testament Theology,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성경적 반박>
4복음서는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꺼꾸로 읽는 자들이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인정되셨다’는 말은 ‘확실하게 증거되셨다, 선언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의 당연한 결론이요 확증이었다. 하나님이 죽음 아래 얽매이실 수 있는가? 그는 인성으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신성으로는 3일 만에 다시 사셨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믿음의 내용이다. 이 믿음 없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 중의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결국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자가 아닌가?
덧붙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그의 부활을 부정하면 그의 승천도, 그의 재림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을 사도신경에 고백된대로 믿고 고백한다.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바르트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Church Dogmatics, III. ii. 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다드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The Romans,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쿨만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concentration, 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extra-biblical)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판넨베르크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 70).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궁극적 운명의 상태 및 처소와, 현실적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누가복음 13:23, 24,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멸망할 자들이 있을 것인가? 예,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악인의 궁극적 운명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미워하시며, 악인에 대해 그 악에 상응하는 최종적 형벌을 예비하셨다.
12.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Beyond Tragedy, p. 290).
틸리히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I,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409).
쿨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5).
<성경적 반박>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죽음에 대한 묘사(‘영혼이 몸을 떠난다,’ “열조들에게 돌아간다”), ②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 ③ 부활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 ④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6:19-31, “. .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 . .”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니이버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Beyond Tragedy, p. 21).
불트만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틸리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Systematic Theology, II, 16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4:30, 42,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특징적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친히 외치는 소리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 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때 그러하리니.”
베드로후서 3:3, 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4. 사람의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니이버
“몸의 부활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dy, p. 290).
판넨베르크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The Apostles's Creed, p. 104).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요한복음 5:28, 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린도전서 15:51,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5.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니이버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Ibid., p. 294).
틸리히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Systematic Theology, II, 78).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418).
판넨베르크
“지옥의 개념은, 수 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The Apostles' Creed, p. 91).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3:39, 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추수 때는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을 부정하는가? 마귀가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2:5-16, “. . .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 .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자유주의자들이 이렇게 명확한 진리를 부정하다니,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1: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성경의 최종적 진리는 심판의 진리이다.
16. 성경이 윤리의 규범임을 부정한다.
바르트
“사람은 자유의 은사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본훼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성경적 반박>
성경이 신앙과 생활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진리는 기독교의 기초이다. 이것은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 등 만국 교회가 고백하는 기본적 신조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에덴 동산의 뱀의 주장과 똑같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신적 권위의 말씀이요, 온전함의 표준이다.
마태복음 5:18, 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구약의 도덕법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고 여전히 타당성을 가진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 사도들의 글들은 교회가 지켜야 할 내용들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하지 아니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의하며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사도들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은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할 악으로 간주되었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행위의 법칙이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315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서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81).
씨 에취 다드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ta- 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오스카 쿨만
“그 동일한 구속(救贖)의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saga)들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성경적 반박>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성경의 확실성과 신빙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이 말씀은 성경 기자들이 증인들이었고 성경의 내용들이 증거적 성격을 지님을 말해준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확증하시는 표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확증의 표들을 지니고 있다.
2.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다드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자존적(自存的)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폴 틸리히(Paul Tillich)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 35).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 .”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이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을 지키라.” 바울 사도는 사도들의 교훈[즉 신약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22:18, 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이처럼 강력하게 증거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3.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바르트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다드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나의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아니, 축획적(逐劃的) 영감을 증거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은 성경의 영감이 단어의 복수형 혹은 단수형에까지 미침을 보인다.
시편 19:7, 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의 이러한 네 가지 성격, 특히 그 완전성, 및 그것의 독특한 목적은 성경의 무오성에 맞고, 성경의 유오성에 맞지 않는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중차대한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책이 불확실하고 오류투성이일 수 있단 말인가?
4.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다드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23).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 일관하지 않다”(Ibid., p. 24).
틸리히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Systematic Theology, I,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174).
<성경적 반박>
창세기 6-8, 19장, 노아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다섯 장으로 된 이 짧은 예레미야 애가서에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약14회 나온다.
나훔 1:2, 3,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성경의 이 명백한 말씀을 어떻게 부인하며 달리 해석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옥의 교리는 주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아무도 이 진리를 변경시킬 수 없다.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은 확실히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성경이 증거하는 이 마지막 형벌을 부정하는 자가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단인가?
5.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드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79).
니이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틸리히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Systematic Theology, I, 252).
본훼퍼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 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판넨베르크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성경적 반박>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의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 내용이다. 창조를 믿지 못하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세계와 인류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창조를 믿는 믿음은 기본적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울 사도는 창조의 진리를 밝히 가르쳤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Beyond Tragedy, pp. 13-14).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후 역사적 인물 예수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Systematic Theology, II, 94).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육신(成肉身)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근본적 진리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부정함은 기독교의 지엽적인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육신하지 않으신 예수는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성육신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적, 이단적 영의 활동이다.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이 말씀이 증거한 대로,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요 적그리스도들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바르트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써 사람, 곧 진짜 사람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5, footnote).
니이버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Beyond Tragedy,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불트만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리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The Gos- pel of John, pp. 62, 63).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p. 50).
판넨베르크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72).
“그러므로,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Ibid., p. 7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 .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그리고 매우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자라면 어찌 이렇게 자세하고 확실한 증언을 부정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1:26-38, “. .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 .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니라.” 누가복음도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애매 모호하지 않다. 성경의 이 증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다른 어느 증거는 믿겠는가? 자유주의는 믿음 없는 사두개파적 오류일 뿐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초자연주의 수납의 시금석이다.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 사건과 그의 신성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35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요한복음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 .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 . . .” 이 표현은 그의 신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인적 존재가 단순히 인간 부모의 육신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15:47, “. . .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표현도 위의 말씀과 비슷하며, 이것은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8.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불트만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로부터 취해져 예수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motif),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 John, pp. 118, 119).
틸리히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Systematic Theology, II, 107).
예레미아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말씀들이 그 사실을 보인다.
사도행전 10:38, 3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주의 제자들은 그 기적들에 대한 산 증인들이었다.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믿는다면,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다 믿을 수 있다. 앞에서도 열거했지만, 성경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다드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Ibid., p. 59).
니이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Systematic Theology, II, 176).
<성경적 반박>
속죄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속죄의 성경적 의미는 ① 제사(속상 贖償; expiation), ② 구속(救贖, redemp- tion), ③ 유화(宥和, 진노를 가라앉게 함; propitiation), ④ 화목(re- conciliation) 등의 성경적 용어에서 나타나며, 속죄의 요점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 즉 피택자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것이다. 속죄의 진리는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지만 다음 구절들은 대표적인 것들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속죄 사역이었다.
로마서 3:24, 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피택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죄의 이치는 대리적 형벌로 인한 공의의 만족에 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죽으심, 즉 속죄의 죽으심이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단번 속죄의 십자가이었다. 그는 2000년 전에 피택자들의 속죄를 다 이루셨다.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신자들은 법적으로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거룩하여졌고 완전하여졌다.
베드로전서 1: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죄 문제의 해결은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함뿐이다.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피는 피택자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값이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불트만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틸리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Sys- tematic Theology, II, 1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순간에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Ibid., II, 154).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즉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Ibid., II, 15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155).
판넨베르크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면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Ibid., p. 98).
예레미야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New Testament Theology,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성경적 반박>
4복음서는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꺼꾸로 읽는 자들이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인정되셨다’는 말은 ‘확실하게 증거되셨다, 선언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의 당연한 결론이요 확증이었다. 하나님이 죽음 아래 얽매이실 수 있는가? 그는 인성으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신성으로는 3일 만에 다시 사셨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믿음의 내용이다. 이 믿음 없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 중의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결국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자가 아닌가?
덧붙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그의 부활을 부정하면 그의 승천도, 그의 재림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을 사도신경에 고백된대로 믿고 고백한다.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바르트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Church Dogmatics, III. ii. 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다드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The Romans,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쿨만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concentration, 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extra-biblical)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판넨베르크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 70).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궁극적 운명의 상태 및 처소와, 현실적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누가복음 13:23, 24,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멸망할 자들이 있을 것인가? 예,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악인의 궁극적 운명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미워하시며, 악인에 대해 그 악에 상응하는 최종적 형벌을 예비하셨다.
12.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Beyond Tragedy, p. 290).
틸리히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I,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409).
쿨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5).
<성경적 반박>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죽음에 대한 묘사(‘영혼이 몸을 떠난다,’ “열조들에게 돌아간다”), ②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 ③ 부활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 ④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6:19-31, “. .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 . .”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니이버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Beyond Tragedy, p. 21).
불트만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틸리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Systematic Theology, II, 16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4:30, 42,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특징적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친히 외치는 소리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 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때 그러하리니.”
베드로후서 3:3, 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4. 사람의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니이버
“몸의 부활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dy, p. 290).
판넨베르크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The Apostles's Creed, p. 104).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요한복음 5:28, 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린도전서 15:51,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5.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니이버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Ibid., p. 294).
틸리히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Systematic Theology, II, 78).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418).
판넨베르크
“지옥의 개념은, 수 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The Apostles' Creed, p. 91).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3:39, 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추수 때는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을 부정하는가? 마귀가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2:5-16, “. . .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 .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자유주의자들이 이렇게 명확한 진리를 부정하다니,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1: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성경의 최종적 진리는 심판의 진리이다.
16. 성경이 윤리의 규범임을 부정한다.
바르트
“사람은 자유의 은사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본훼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성경적 반박>
성경이 신앙과 생활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진리는 기독교의 기초이다. 이것은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 등 만국 교회가 고백하는 기본적 신조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에덴 동산의 뱀의 주장과 똑같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신적 권위의 말씀이요, 온전함의 표준이다.
마태복음 5:18, 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구약의 도덕법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고 여전히 타당성을 가진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 사도들의 글들은 교회가 지켜야 할 내용들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하지 아니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의하며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사도들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은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할 악으로 간주되었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행위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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