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영적 황무지
독일 영적 황무지
[신화석 목사의 세계일주 선교여행 (27) 독일] 루터의 개혁 사라진 ‘영적 황무지’
선교팀은 체코 플젠을 출발,7시간만에 독일의 포르츠하임에 도착했다. 포르츠하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2시간 떨어져 있는 도시로 금세공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군비를 지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1945년 연합군은 포르츠하임에 20분간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때 사망자가 1만8000여명에 달했다.
현지인 율리히 이리온 목사와 함께 사역을 펼치기 앞서 선교팀은 독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기독교역사 선교상황 등에 대한 강의를 먼저 들었다.
한반도의 1.6배에 달하는 독일의 총인구는 8200만명에 이른다. 인종분포를 보면 게르만족 91.5%,터키인 2.4% 순이며 종교상황은 기독교 36.4%,가톨릭 34.6%,이슬람교 3.7% 등이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가톨릭 교세를 앞선다. 하지만 터키인의 증가로 독일 전역에 약 3000개의 모스크가 있다.
독일 교회는 크게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인 에카데(EKD)와 자유교회,독립교회,오순절교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군소교회의 연합체도 있다. 독일은 자유주의 신학의 발상지로 진보신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에카데에 속한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걷고 있다.
한 현지인 목회자는 에카데 소속의 목사 대부분이 거듭나지 않은 명목상 크리스천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독일에서 40년간 사역한 박옥희 선교사는 “에카데 내에도 영적 갈급함,복음에 대한 뜨거움이 있는 성도와 목회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생명력 있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교회들은 대부분 자유교회와 독립교회에 속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국가 교회 성도는 매년 100만명이 줄고 있지만 자유교회나 독립교회는 매우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독일은 마르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의 토양을 세계 교회에 제공했다. 하지만 현재 독일 교회는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 선교팀은 독일 교회를 접하면서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갱신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한 루터는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한 농부의 자녀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던 중 1505년 스스로 사제가 될 것을 결심,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된 그는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12년 비텐베르크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교수사역을 시작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성의 교회 문에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이로 인해 루터는 교황청의 소환을 받았다.
1521년 4월16일 보름스에 도착한 그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17∼18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대화를 나눈 뒤 종교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석에서 회유하자 루터는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Here I Stand)라는 말을 남겼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한 루터는 그곳에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것이 최초로 독일어로 발간된 신약성경이다. 1534년 루터는 최초로 구약성경을 포함한 독일어 성경을 완성한 뒤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인쇄,배포했다. 루터의 돌출 행동은 교권과 전통,세속 정치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선지자적 몸짓이었다. 교권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루터를 파문,끊임없이 위협했다. 독일의 신앙 개혁 정신은 정치 및 사회 개혁을 요구하던 시대상황과 맞물려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루터의 외침은 현재 독일에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지 교회 목회자 및 일반 성도들에게 루터에 대해 묻자 그를 신앙 개혁자로서는 인정하면서도 반개혁적인 모습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목격했다.
우리는 다른 이의 개혁,다른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기 전 자신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지,예수님과 같은 삶의 열매를 찾아볼 수 있는지를 되새겨봐야 한다. 자기 성찰과 자기 개혁은 동시에 수행돼야 한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볼 줄 아는,그리고 그 들보를 빼낼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타자를 비판하기 앞서 자기 자신을 성경으로 비춰보는 훈련이 우선시된다.
개혁을 주장했던 독일 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부족을 회개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본회퍼 기념교회의 경우 원래 등록 성도는 4000명에 달하지만 주일 출석은 고작 20∼30명에 불과했다.
선교팀은 포르츠하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사역지를 옮겼다. 프랑크푸르트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일 최대의 상업도시이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약 3000명 거주하고 있으며 17개의 한인교회가 있다. 선교팀은 한인교회 목회자들을 초청,세미나 및 독일 선교를 위한 좌담회를 가졌다.
한인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에 현지인 선교를 감당할 선교사들을 더 많이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지만 또 다시 성령의 불이 붙을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화석 목사는 프랑크푸르트의 시온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마태복음 7장을 본문으로 해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란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신 목사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며 “예수의 씨앗이 심겨진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 후 성도들과 머나먼 이국에서 동족간 끈끈한 정을 느끼며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독일에서의 사역은 안타까움과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세계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독일 교회가 500년이 지난 지금 영적 황무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비성경적 설교와 교육이 독일 교회의 위기를 부채질했던 것을 보면서 선교팀은 한 현지인 목회자의 지적을 잊을 수 없었다. “독일로 신학공부하러 오지 마세요. 복음을 전하러 오세요.”
선교팀은 무거운 마음으로 독일을 떠나야 했다. 18세기 신앙 부흥과 성결 운동,세계 선교에 불을 댕겼던 나라였던 영국이 어떻게 변모했을까를 궁금하게 여기며.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http://blog.daum.net/kkho1105/3384
[신화석 목사의 세계일주 선교여행 (27) 독일] 루터의 개혁 사라진 ‘영적 황무지’
선교팀은 체코 플젠을 출발,7시간만에 독일의 포르츠하임에 도착했다. 포르츠하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2시간 떨어져 있는 도시로 금세공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군비를 지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1945년 연합군은 포르츠하임에 20분간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때 사망자가 1만8000여명에 달했다.
현지인 율리히 이리온 목사와 함께 사역을 펼치기 앞서 선교팀은 독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기독교역사 선교상황 등에 대한 강의를 먼저 들었다.
한반도의 1.6배에 달하는 독일의 총인구는 8200만명에 이른다. 인종분포를 보면 게르만족 91.5%,터키인 2.4% 순이며 종교상황은 기독교 36.4%,가톨릭 34.6%,이슬람교 3.7% 등이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가톨릭 교세를 앞선다. 하지만 터키인의 증가로 독일 전역에 약 3000개의 모스크가 있다.
독일 교회는 크게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인 에카데(EKD)와 자유교회,독립교회,오순절교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군소교회의 연합체도 있다. 독일은 자유주의 신학의 발상지로 진보신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에카데에 속한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걷고 있다.
한 현지인 목회자는 에카데 소속의 목사 대부분이 거듭나지 않은 명목상 크리스천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독일에서 40년간 사역한 박옥희 선교사는 “에카데 내에도 영적 갈급함,복음에 대한 뜨거움이 있는 성도와 목회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생명력 있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교회들은 대부분 자유교회와 독립교회에 속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국가 교회 성도는 매년 100만명이 줄고 있지만 자유교회나 독립교회는 매우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독일은 마르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의 토양을 세계 교회에 제공했다. 하지만 현재 독일 교회는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다. 선교팀은 독일 교회를 접하면서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갱신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한 루터는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한 농부의 자녀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던 중 1505년 스스로 사제가 될 것을 결심,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된 그는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12년 비텐베르크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교수사역을 시작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성의 교회 문에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이로 인해 루터는 교황청의 소환을 받았다.
1521년 4월16일 보름스에 도착한 그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17∼18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대화를 나눈 뒤 종교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석에서 회유하자 루터는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Here I Stand)라는 말을 남겼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한 루터는 그곳에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것이 최초로 독일어로 발간된 신약성경이다. 1534년 루터는 최초로 구약성경을 포함한 독일어 성경을 완성한 뒤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인쇄,배포했다. 루터의 돌출 행동은 교권과 전통,세속 정치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선지자적 몸짓이었다. 교권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루터를 파문,끊임없이 위협했다. 독일의 신앙 개혁 정신은 정치 및 사회 개혁을 요구하던 시대상황과 맞물려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루터의 외침은 현재 독일에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지 교회 목회자 및 일반 성도들에게 루터에 대해 묻자 그를 신앙 개혁자로서는 인정하면서도 반개혁적인 모습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목격했다.
우리는 다른 이의 개혁,다른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기 전 자신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지,예수님과 같은 삶의 열매를 찾아볼 수 있는지를 되새겨봐야 한다. 자기 성찰과 자기 개혁은 동시에 수행돼야 한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볼 줄 아는,그리고 그 들보를 빼낼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타자를 비판하기 앞서 자기 자신을 성경으로 비춰보는 훈련이 우선시된다.
개혁을 주장했던 독일 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부족을 회개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본회퍼 기념교회의 경우 원래 등록 성도는 4000명에 달하지만 주일 출석은 고작 20∼30명에 불과했다.
선교팀은 포르츠하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사역지를 옮겼다. 프랑크푸르트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일 최대의 상업도시이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약 3000명 거주하고 있으며 17개의 한인교회가 있다. 선교팀은 한인교회 목회자들을 초청,세미나 및 독일 선교를 위한 좌담회를 가졌다.
한인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에 현지인 선교를 감당할 선교사들을 더 많이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지만 또 다시 성령의 불이 붙을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화석 목사는 프랑크푸르트의 시온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마태복음 7장을 본문으로 해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란 주제로 말씀을 선포했다. 신 목사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며 “예수의 씨앗이 심겨진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 후 성도들과 머나먼 이국에서 동족간 끈끈한 정을 느끼며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독일에서의 사역은 안타까움과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세계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독일 교회가 500년이 지난 지금 영적 황무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비성경적 설교와 교육이 독일 교회의 위기를 부채질했던 것을 보면서 선교팀은 한 현지인 목회자의 지적을 잊을 수 없었다. “독일로 신학공부하러 오지 마세요. 복음을 전하러 오세요.”
선교팀은 무거운 마음으로 독일을 떠나야 했다. 18세기 신앙 부흥과 성결 운동,세계 선교에 불을 댕겼던 나라였던 영국이 어떻게 변모했을까를 궁금하게 여기며.
정리=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http://blog.daum.net/kkho1105/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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