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 진리의 사각지대
관상기도 진리의 사각지대
관상(레노바레)도입은 기독교 망치는 첩경
관상(레노바레)도입은 기독교 망치는 첩경
기독교에 이슈가 되는 관상기도가 한국교회 중심부에 포진을 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음에도(위 사진 : <지구촌침례교회 이동원목사>촛불을 켜고, 종을 치며 성령을 부른다), 일부 엘리트층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관상기도가 높은 경지의 성숙한 기도인 냥, 그동안 찾지 못한 보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고 있으니 한심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방종교들과 가톨릭의 관상기도가 혼합된 진리의식이 흐릿한 영성신학자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일부가 환영을 하는 것이야말로 개탄할 사건이다. 혹여 이를 적용하여 가시적인 현상으로 그 어떤 변화가 있다손치더라도 이는 성령님이 자기 뜻대로 나누어주신 믿음 은사의 결과이거나 성령의 열매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상기도는 기독교의 기도 문화가 전혀 아니다. 사실인즉 관상기도의 이론과 실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이다. 이는 성경에서 배설물로 표현된 초등학문에 속하는 것이 기독교형의 영성이라는 명분에 너울을 쓴 것으로 이 가면은 미혹의 수단으로 속이기 위한 위장이다.
관상기도의 철학이 담긴 이론들은 여호와를 아는 참 지식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관상기도의 이론과 실제가 도입되지 못하도록 경계는 물론 각 교단과 노회는 관상기도나 레노바레를 검증하는 헌의안을 총회에 상정하여 그 결과를 속히 산하 교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아래의 글은 김삼 목사의‘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에서 일부 인용한 것으로(림헌원목사) 관상기도의 정체에 대한 동향을 잘 알려주고 있어서 한국교회 보호를 위하여 공유할 정보로서 유익하여 본지에 게재함을 밝힌다 (편집자 주).
“관상 담론에서 유의할 것 한 가지는 관상영성은 신교 관상가들의 입바른 주장과는 달리 성경 진리 즉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복음을 초월하여 하는 묵상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기독교로부터 가톨릭·정교회·불교(티벳불교·일본불교·선불교 포함)·도교·힌두교 등 종파·종교 간 대화 및 에큐메니컬리즘의 촉매가 되고 있다.
관상기도의 텃밭에서는 모든 종파, 더 나아가 모든 종교가 허물없이 어울리는 게 상식화 돼 있다. 따라서 성경 진리와 영적 분별을 염두에 두면서 관상에 호기심을 갖거나 탐닉하는 성도의 복음 정신은 관상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컨대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이 은둔해 있던 겟세마니 수도원에 티벳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까지 와서 머튼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등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현재 신교계의 관상기도는 복음에다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금치 못한다. 신교계 관상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신교계 관상가들이 교회와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논리도 피해 가지 못한다.
관상을 강조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토머스 머튼, 존 메인, 리처드 포스터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한국의 L목사, 미주의 K목사나 아무 차이가 없다. 더욱이 비슷한 형태의 기도를 해온 힌두교도·불교도·도교인·유교인들도 별 부담 없이 한데 어울린다는 것이다.”
선불교 요소 첨가된 관상기도
2006 년 11월 4일 메릴랜드 세인트마크장로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의 제목은 ‘관상 실천으로서의 선(禪, zen)-정의의 길’. 프로그램 소개문엔 일본 불승 바수이 토쿠쇼의 말까지 곁들였다. “그대의 참 본성을 깨우칠 때 그대의 많은 고유의 덕목들을 나타내고 남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게 된다.”
명색이 장로교회 워크숍에서 선불교(zen buddhism)의 관상을 소개하고 참여자들 전원이 가부좌 자세로 좌선 실습, 걷기 명상을 한 뒤, “선(禪)이 우리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온정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는 한 삶의 길을 보충해 줄 수 있음”을 가르쳤다. ‘선(禪)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의 자연신과 별 다름 없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소개문은 또 가톨릭 사제인 라벗 케네디의 책, <선 정신,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삶에서의 선(禪)의 위치>에서 다음 글을 인용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승 아래서의 선(禪) 실천이 기독교 삶에 결합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 체험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신심을 우리의 머리만이 아닌 우리의 전인에 뿌리박게 해줄 수 있다.”
이 홍보문은 “우리 다함께, 이 선의 요소를 통해 그런 결속을 기르도록 힘써 봅시다”로 매듭짓고 있다. 독자는 무심코 읽을지 모르지만 필자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불교식 좌선을 하면, 불도의 영이 속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 영이 성령이 보내시는 선한 영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도 성남시 분당구 G교회 L목사 부부는 바로 이런 단체의 ‘영성 지도’를 따라 ‘경건한’ 휴가를 보냈다. L목사는 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보낸 시간의 정적이 태고의 고요 속에 영혼의 평안을 회복시켜줬고, 주변의 모든 낯선 얼굴들이 넉넉한 우정의 샘물이 됐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한껏 관상 홍보(?)를 했다.
그 후 L목사는 카자흐스탄의 발 빠른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변화의 하나로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이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은 ‘관상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관상의 은총’이라. 다원 종교적, 진리 방임적 관상영성은 이런 ‘치유’도 해준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요, 독수리 같은 스테미너 회복의 길이라는 성경 말씀(시 103:5; 느 8:10)의 교훈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관상기도 추종자들에게 ‘우리는 하나다’란 의식부터 작용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가톨릭 수도원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한국 개신교 관상기도 추종자들에겐 가톨릭의 터전도 ‘나의 장’이지 ‘남의 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세계 종교를 하나가 되도록 할 수 있으며, 마침내 개신교를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에 동참하게 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탁월한 웅변술로 주장하고 설교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자아적기도요, 자기 확신일 뿐이다. 그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대화가 아니고 자아를 향한 깊은 자아 최면 상태에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확신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신비주의이며 인본주의적 기도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과 나라고 하는 자아는 분명히 다르고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관상기도를 자아가 의식하는 사고 즉 자기 마음과의 대화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며 그 사고 자체를 하나님 안에서 얻는 안식이며 높은 경지에 이른 기도라고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 마음과의 대화라고 하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비성경적인 기도관이다. 자아의식을 향한 자아 최면은 소위 도인들(힌두교, 불교, 가톨릭 등)이 실행하는 인본주의적 행태이다.
이제 개신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도박이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하지만 솔직히 한국 교회들도 자성해야 한다.
그동안 입술로만 부르짖는 기도는 열심 내어 왔지만 마음으로 부르짖는 깊은 기도와 묵상(묵상은 기도가 아님,‘말씀의 내용을 갖고 집중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지켜 행하려는 마음의 몸부림’, 수1:8)의 훈련은 너무나 전무하여 무게감(중량감과 고상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도에 관하여 성경적인 개혁과 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자료출처:http://www.chptp.org/ 기독교이단대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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