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 성령님의 은사-방언(2)
제 7장 / 성령님의 은사-방언(2) - 고린도전서 14장 1-33절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889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장 30절)
성령 세례(침례)
오순절파들의 대다수가 방언이 성령 세례(침례)나 성령께 능력을 받은 필수적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 세례(침례)나 성령 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방언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유익한 척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서, 에베소서 교회의 모임에서 성령 세례(침례)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의해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행 2:4/ 10:46/ 19:6). 그러한 표적이 따랐던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사도행전의 경우를 주목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경우를 연구해 볼 때에, 각 경우마다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오순절에는 사태의 긴박함이 그 이유이다. 오순절 절기는 주위의 많은 나라로부터 유대인의 큰 무리를 끌어 모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고, 복음의 기초적 사실들은 완성되었다. 성령 강림이 표적을 동반하면서 온 도시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만일 거대한 무리가 복음화되고 이 중요한 사건들을 그들에게 전하려면,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방언의 은사가 없이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15개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께서는 은사를 부어 주셨고, 이 나라들을 최초의 복음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 후의 사건들 중에서는, 이와 같은 경우가 반복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가이사랴에서의 이유는 다르다. 여기에서 방언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베드로가 순종치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주어졌다. 그의 태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를 그대로 대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베드로와 교회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부어 주셨던 방언의 은사를 은혜로이 다시 한 번 베푸셨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복음적인 의미도 없었다.
에베소의 유대인 형제들은 그들이 받은 세례(침례) 요한의 세례(침례)로부터 시작된 그 후의 사건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구속의 사실이라든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동일한 방언의 은사로 예루살렘 교회의 경험과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가운데 열린 첫 열매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오순절의 복음 증거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각 경우의 방언 은사의 목적은, 성령의 은사나 성령 충만의 증거로서가 아닌, 각 경우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축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가이사랴, 에베소에서 은사는 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부어졌다는 것과, 각 경우에 동일한 모임에서 동시에 주어졌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 소위 오순절교회라고 불려지는 "오랜동안 성령을 사모하여 기다린 모임"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각 경우에 은사는 선별되거나 특별히 준비된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모인 회중에게 주어졌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방언이 성령 세례(침례)와 능력을 받은 유일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방언을 모든 영적인 은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다른 어느 것보다도 방언을 더 구해야 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 반대가 되는 방향이다. 예언은 방언을 능가하여 어디에서나 주어졌고, 그는 방언을 가장 낮은 단계의 은사로 분류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어떤 영적 은사들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좋고, 더 열심히 간구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언을 간절히 사모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고하면서, 방언에 대해서는 금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어떠한 다른 은사에 대해서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으라고 지적하지 않았으며 이와같은 제한과 규제를 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고전 14:19).
"방언"의 목적
이 은사는 그와 같이 엄격한 규제가 요구되고, 너무나 남용되기 쉬우며 거짓 것의 위험이 있으므로, 방언이 실제로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성령께서 주셨다는 사실과 함께 방언이 그 원래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제한 가운데 사용될 때 그것은 불필요하지도 무용(無用)하지도 않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통역의 은사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정당화 할 수 없을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증명해 주었고,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던 때에 성령에 영감된 말을 확증하고 확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자기의 사역자와 함께 증거하셨다(히2:4). 그것은 예배와 경배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사용될 때에 유익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것을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지혜를 공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은사를 다스리는 규칙
그러한 황홀경의 언어가 격려받을 필요는 없지만 잊혀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데에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는 이 은사의 실제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황홀한 경지와 정신병적 증세와 자기 최면은 매우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 날 진정한 방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려면, 그 진실성은 성경의 요구에 순종하는가에 의해 입증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은 "적당하고 질서있게"(고전 14:40)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방언이 허락되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다음의 사실들이 나타난다.
모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일은 성령의 주권적인 권한이다(고전 12:11). 그러므로 그러한 은사를 권리로 요구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께 우리가 소유하게 될 영적 은사를 명령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큰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간구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고전 14:12).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눈에 띄는 은사에만 치중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어떠한 은사도 그 주된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10). 만일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공언하면서 덕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남용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공중 앞에서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통역이 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고전 14:28).
교회에서 방언은 두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해야 한다. 그들은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한꺼번에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방언을 제지해야 한다(고전 14:27).
만일 이 은사를 실행하는 것이 질서보다는 혼란을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주의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동료 신자들이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운동을 그 열매와 가능한 위험성에 비추어 보아서 감정을 해야만 한다. 가장 큰 위험성 중의 하나는, 주되고 핵심적인 것을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것보다 하위(下位)에 두려는 경향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높이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진리를 눈에 나타나는 영적 은사나 그러한 현상에서 나오는 경험보다 하위(下位)에 두기가 쉬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르침은 어떤 것이든 즉시 의심해야 한다.
이 가르침이 당면하는 몇 가지 위험성이 있다.
영적인 외식주의
물론 이것은 어떠한 그리스도인 모임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특별하고 독특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임에서 이것이 특별히 위험하다. 방언이 성례 세례(침례) 또는 성령 충만의 첫째 증거이고, 그것은 다른 교회보다도 오순절파 모임안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우월감을 낳을 수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저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신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살지요."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이러한 태도를 우리들이 개탄하는 것처럼 그들 중 더 영적인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가짜의 위험성
모든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남용되기 쉽고 가짜가 많다. 이교도나 이단 운동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이 현상이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탄은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을 저하시키고 모방하여 자기의 추악한 목적을 위하여 악용하기로 즐거워 한다. 육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은 매우 밀접한 상호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혼동하기 쉽다. 육신적인 열심과 환희가 영적인 열정으로 오인되기 쉽다.
분파주의적 경향
오순절 운동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점을 별로 숙고할 필요가 없다. 선교지와 국내에서, 운동 자체 내에서와 수 없는 전도 집회 내에서 분파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스스로를 탁월한 성령 운동으로 여기는 이 운동이 성령의 연합이 그 특징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분파적인 경향이 특징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점에 대해, 로마의 신자들에게 보낸 바울의 충고가 적절하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 16:17).
그러나 모든 오순절주의자들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구절을 이러한 모든 오순절주의 자들을 배척하는 말씀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감정적인 과열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가 감정적인 요소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면, 그 정반대의 위험성이 이 운동에 있다. 에프 더불류 로버트슨(F. W. Robert-son)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은 3가지 방법으로 인간과 연합될 수 있다 - 육체와의 연합, 이럴 때 당신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한다. 영혼과의 결합, 이럴 때에 당신은 소위 '방언'이란 것이 나타나는 고조된 감정을 경험한다. 지성과의 결합, 이 때에 당신은 예언을 하게 된다. '방언'의 경우에 사람이 그 사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정은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분명한 이해력이 황홀감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말하는 이가, 그것을 억제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감정에 빠지게 된다."이 황홀한 상태가 너무 즐겁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경쟁의식이 대단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의 모임에서처럼 화려한 쇼우적인 것에 대한 기호와 더불어, 그것이 최고의 추구 대상이 되었다. 꾸준히 선행을 계속하기에 힘쓰는 대신에 그들은 이 강렬한 감정을 전시하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억제할 수 없는 종교적인 감정이 이성과 분별력을 압도하였다. 단순한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이 영적인 열정으로 행세했다. 이와 동일한 경향이 종종 심각한 과열을 동반하면서 오순절 운동에 있어 왔다.
"이 운동의 변천과 성격을 전 세계적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했던 아더 티이 피어슨(Arthur T. Pierson)박사는 이 주제에 대해 접근할 때에 적용시켜야 될 그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간의 경험이 아닌 무오한 성경만이 궁극적인 항소원(抗訴阮)이 될 수 있다.
가장 추구되어야 할 은사는 우리의 생활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은사들이다. 모든 참된 영적 은사들은 화평과 조화를 증진시키는 것들이다.
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는 겸손과 온유한 성품으로 이끌어 준다.
자기 이익과 자기 영광을 위해 추구한 모든 은사는 미혹이며 함정이다. 인간의 모든 부당한 욕심은 하나님의 땅의 지고(至高)함과 조화되지 않는다. 나뉘고 흩어지는 경향은 그 정당성이 의심받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사탄의 책략과 거짓 것을 찾아 내도록 항상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인 교훈
대답해야 할 한 가지 질문이 남아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신봉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보살펴 주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사역과 오순절의 의미,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개인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충분하고 확신한 가르침을 일러 주어야 한다.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때에 우리는 그들을 그러한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러한 중요한 면에 대한 가르침을 그들이 훨씬 더 성장할 때까지 연기시켜서는 안된다. 그들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다. 어린 개종자는 놀라우리 만큼 많은 영적 진리를 흡수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을 우리 교회 안에서 정규적인 과정으로 가르친다면, 오류가 훨씬 줄어들고 보다 빠른 성숙에 이를 것을 확신한다.
신자들이 오순절 운동에 이끌리고, 거기에 매혹되는 곳에서는, 육신적인 무기가 아닌 영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정면 공격은 그들을 구해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그 속으로 몰아 넣기 쉽다. 한 번은 저자가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분열되려는 교회에서 몇 번의 설교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었다. 그 설교 중에 저자는 오순절주의를 언급하지도, 그 운동에 대한 어떤 간접적인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성령님과 성령께서 어떻게 신자들의 경건 생활과 봉사 생활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가에 대한 분명하고 긍정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성령께서 말씀을 증거하셨고, 아무도 오순절파 교회에 더 이상 합세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황홀경과 능력의 경험에 대한 약속에 매혹되었을 때에 그들을 바로 잡는 방법은, 성경을 보여 주고 성령이 삶을 지배하실 때에 거룩함과 기쁨과 전도에 능력이 있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이 결코 성령 충만을 받아 본 일이 없다면, 우리의 첫번째 의무는 먼저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소위 바울의 "제일 좋은 길"에 대한 교훈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보여줄 수있을 것이다.
바울의 위대한 사랑의 송가는 우연히 고린도전서에 위치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고상한 주제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도입된 것이며, 그 목적이 분명하게 이야기되어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기가 막히게 볼만한 영적인 은사들 보다도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길, 가장 고귀한 은사라도 순수한 사랑의 영이 동기가 되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영적으로 무가치할 것이다. 바울이 권고하였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 그러나 신령한 것이 없이 사랑만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맺음말
신약 성경은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을 보여 준다 -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 그리고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 우리는 안타깝게도 신자가 성숙에 이르지 못하거나 성숙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종종 본다. 성경은 그러한 실패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치료를 위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앞의 각 장들은 이 모든 계층의 필요를 채워주며, 하나님과 좀더 가깝게 동행하기를 더 간절히 원하는 열망을 만족시켜 주려는 목적으로 쓰여 졌다.
이 책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흥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하고 깊은 경험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영적인 퇴보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실패하게 된 과정을 다시추적해 보며 그의 보다 충만한 은혜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이미 얻었다는 생각을 주지 않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를 열정적으로 목표하게 한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었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운 섭리와 분별력있는 훈련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그의 무한한 인내와, 시험 가운데서 함께 하시며 힘있게 하시는 약속에 의해 우리는 겸손케 되었다.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관심, 거룩한 존경심과 평안함을 주는 확신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무한한 보호와 은혜로 지키고 계시다는 위로가 되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려서 그의 영광과 위엄, 그의 숭고한 생애와 죽음의 승리를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 우리는 제자도(弟子道)에 대한 주님의 엄격한 조건들을 들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왕처럼 다스리는 삶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를 굴복시킨다.
또한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들이 다시 한 번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의 영감을 주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 깨끗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활동, 그의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가 우리를 "성숙"으로 인도하는 데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와 더불어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 앞에 남김없이 굴복하는 삶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삶이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889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장 30절)
성령 세례(침례)
오순절파들의 대다수가 방언이 성령 세례(침례)나 성령께 능력을 받은 필수적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 세례(침례)나 성령 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방언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유익한 척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서, 에베소서 교회의 모임에서 성령 세례(침례)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의해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행 2:4/ 10:46/ 19:6). 그러한 표적이 따랐던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사도행전의 경우를 주목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경우를 연구해 볼 때에, 각 경우마다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오순절에는 사태의 긴박함이 그 이유이다. 오순절 절기는 주위의 많은 나라로부터 유대인의 큰 무리를 끌어 모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고, 복음의 기초적 사실들은 완성되었다. 성령 강림이 표적을 동반하면서 온 도시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만일 거대한 무리가 복음화되고 이 중요한 사건들을 그들에게 전하려면,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방언의 은사가 없이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15개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께서는 은사를 부어 주셨고, 이 나라들을 최초의 복음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 후의 사건들 중에서는, 이와 같은 경우가 반복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가이사랴에서의 이유는 다르다. 여기에서 방언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베드로가 순종치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주어졌다. 그의 태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를 그대로 대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베드로와 교회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부어 주셨던 방언의 은사를 은혜로이 다시 한 번 베푸셨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복음적인 의미도 없었다.
에베소의 유대인 형제들은 그들이 받은 세례(침례) 요한의 세례(침례)로부터 시작된 그 후의 사건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구속의 사실이라든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동일한 방언의 은사로 예루살렘 교회의 경험과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가운데 열린 첫 열매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오순절의 복음 증거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각 경우의 방언 은사의 목적은, 성령의 은사나 성령 충만의 증거로서가 아닌, 각 경우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축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가이사랴, 에베소에서 은사는 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부어졌다는 것과, 각 경우에 동일한 모임에서 동시에 주어졌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 소위 오순절교회라고 불려지는 "오랜동안 성령을 사모하여 기다린 모임"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각 경우에 은사는 선별되거나 특별히 준비된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모인 회중에게 주어졌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방언이 성령 세례(침례)와 능력을 받은 유일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방언을 모든 영적인 은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다른 어느 것보다도 방언을 더 구해야 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 반대가 되는 방향이다. 예언은 방언을 능가하여 어디에서나 주어졌고, 그는 방언을 가장 낮은 단계의 은사로 분류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어떤 영적 은사들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좋고, 더 열심히 간구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언을 간절히 사모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고하면서, 방언에 대해서는 금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어떠한 다른 은사에 대해서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으라고 지적하지 않았으며 이와같은 제한과 규제를 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고전 14:19).
"방언"의 목적
이 은사는 그와 같이 엄격한 규제가 요구되고, 너무나 남용되기 쉬우며 거짓 것의 위험이 있으므로, 방언이 실제로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성령께서 주셨다는 사실과 함께 방언이 그 원래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제한 가운데 사용될 때 그것은 불필요하지도 무용(無用)하지도 않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통역의 은사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정당화 할 수 없을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증명해 주었고,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던 때에 성령에 영감된 말을 확증하고 확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자기의 사역자와 함께 증거하셨다(히2:4). 그것은 예배와 경배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사용될 때에 유익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것을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지혜를 공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은사를 다스리는 규칙
그러한 황홀경의 언어가 격려받을 필요는 없지만 잊혀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데에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다. 그는 이 은사의 실제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황홀한 경지와 정신병적 증세와 자기 최면은 매우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 날 진정한 방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려면, 그 진실성은 성경의 요구에 순종하는가에 의해 입증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은 "적당하고 질서있게"(고전 14:40)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방언이 허락되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다음의 사실들이 나타난다.
모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일은 성령의 주권적인 권한이다(고전 12:11). 그러므로 그러한 은사를 권리로 요구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께 우리가 소유하게 될 영적 은사를 명령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큰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간구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고전 14:12).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눈에 띄는 은사에만 치중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어떠한 은사도 그 주된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10). 만일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공언하면서 덕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남용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공중 앞에서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통역이 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고전 14:28).
교회에서 방언은 두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해야 한다. 그들은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한꺼번에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방언을 제지해야 한다(고전 14:27).
만일 이 은사를 실행하는 것이 질서보다는 혼란을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주의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동료 신자들이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운동을 그 열매와 가능한 위험성에 비추어 보아서 감정을 해야만 한다. 가장 큰 위험성 중의 하나는, 주되고 핵심적인 것을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것보다 하위(下位)에 두려는 경향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높이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진리를 눈에 나타나는 영적 은사나 그러한 현상에서 나오는 경험보다 하위(下位)에 두기가 쉬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르침은 어떤 것이든 즉시 의심해야 한다.
이 가르침이 당면하는 몇 가지 위험성이 있다.
영적인 외식주의
물론 이것은 어떠한 그리스도인 모임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특별하고 독특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임에서 이것이 특별히 위험하다. 방언이 성례 세례(침례) 또는 성령 충만의 첫째 증거이고, 그것은 다른 교회보다도 오순절파 모임안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우월감을 낳을 수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저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신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살지요."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이러한 태도를 우리들이 개탄하는 것처럼 그들 중 더 영적인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가짜의 위험성
모든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남용되기 쉽고 가짜가 많다. 이교도나 이단 운동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이 현상이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탄은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을 저하시키고 모방하여 자기의 추악한 목적을 위하여 악용하기로 즐거워 한다. 육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은 매우 밀접한 상호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혼동하기 쉽다. 육신적인 열심과 환희가 영적인 열정으로 오인되기 쉽다.
분파주의적 경향
오순절 운동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점을 별로 숙고할 필요가 없다. 선교지와 국내에서, 운동 자체 내에서와 수 없는 전도 집회 내에서 분파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스스로를 탁월한 성령 운동으로 여기는 이 운동이 성령의 연합이 그 특징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분파적인 경향이 특징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점에 대해, 로마의 신자들에게 보낸 바울의 충고가 적절하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 16:17).
그러나 모든 오순절주의자들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구절을 이러한 모든 오순절주의 자들을 배척하는 말씀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감정적인 과열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가 감정적인 요소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면, 그 정반대의 위험성이 이 운동에 있다. 에프 더불류 로버트슨(F. W. Robert-son)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은 3가지 방법으로 인간과 연합될 수 있다 - 육체와의 연합, 이럴 때 당신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한다. 영혼과의 결합, 이럴 때에 당신은 소위 '방언'이란 것이 나타나는 고조된 감정을 경험한다. 지성과의 결합, 이 때에 당신은 예언을 하게 된다. '방언'의 경우에 사람이 그 사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정은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분명한 이해력이 황홀감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말하는 이가, 그것을 억제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감정에 빠지게 된다."이 황홀한 상태가 너무 즐겁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경쟁의식이 대단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의 모임에서처럼 화려한 쇼우적인 것에 대한 기호와 더불어, 그것이 최고의 추구 대상이 되었다. 꾸준히 선행을 계속하기에 힘쓰는 대신에 그들은 이 강렬한 감정을 전시하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억제할 수 없는 종교적인 감정이 이성과 분별력을 압도하였다. 단순한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이 영적인 열정으로 행세했다. 이와 동일한 경향이 종종 심각한 과열을 동반하면서 오순절 운동에 있어 왔다.
"이 운동의 변천과 성격을 전 세계적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했던 아더 티이 피어슨(Arthur T. Pierson)박사는 이 주제에 대해 접근할 때에 적용시켜야 될 그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간의 경험이 아닌 무오한 성경만이 궁극적인 항소원(抗訴阮)이 될 수 있다.
가장 추구되어야 할 은사는 우리의 생활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은사들이다. 모든 참된 영적 은사들은 화평과 조화를 증진시키는 것들이다.
참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는 겸손과 온유한 성품으로 이끌어 준다.
자기 이익과 자기 영광을 위해 추구한 모든 은사는 미혹이며 함정이다. 인간의 모든 부당한 욕심은 하나님의 땅의 지고(至高)함과 조화되지 않는다. 나뉘고 흩어지는 경향은 그 정당성이 의심받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사탄의 책략과 거짓 것을 찾아 내도록 항상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인 교훈
대답해야 할 한 가지 질문이 남아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신봉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보살펴 주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사역과 오순절의 의미,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개인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충분하고 확신한 가르침을 일러 주어야 한다.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때에 우리는 그들을 그러한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러한 중요한 면에 대한 가르침을 그들이 훨씬 더 성장할 때까지 연기시켜서는 안된다. 그들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다. 어린 개종자는 놀라우리 만큼 많은 영적 진리를 흡수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을 우리 교회 안에서 정규적인 과정으로 가르친다면, 오류가 훨씬 줄어들고 보다 빠른 성숙에 이를 것을 확신한다.
신자들이 오순절 운동에 이끌리고, 거기에 매혹되는 곳에서는, 육신적인 무기가 아닌 영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정면 공격은 그들을 구해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그 속으로 몰아 넣기 쉽다. 한 번은 저자가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분열되려는 교회에서 몇 번의 설교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었다. 그 설교 중에 저자는 오순절주의를 언급하지도, 그 운동에 대한 어떤 간접적인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성령님과 성령께서 어떻게 신자들의 경건 생활과 봉사 생활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가에 대한 분명하고 긍정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성령께서 말씀을 증거하셨고, 아무도 오순절파 교회에 더 이상 합세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황홀경과 능력의 경험에 대한 약속에 매혹되었을 때에 그들을 바로 잡는 방법은, 성경을 보여 주고 성령이 삶을 지배하실 때에 거룩함과 기쁨과 전도에 능력이 있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이 결코 성령 충만을 받아 본 일이 없다면, 우리의 첫번째 의무는 먼저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소위 바울의 "제일 좋은 길"에 대한 교훈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보여줄 수있을 것이다.
바울의 위대한 사랑의 송가는 우연히 고린도전서에 위치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고상한 주제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도입된 것이며, 그 목적이 분명하게 이야기되어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기가 막히게 볼만한 영적인 은사들 보다도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길, 가장 고귀한 은사라도 순수한 사랑의 영이 동기가 되고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영적으로 무가치할 것이다. 바울이 권고하였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 그러나 신령한 것이 없이 사랑만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맺음말
신약 성경은 세 가지 유형의 그리스도인을 보여 준다 -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 그리고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 우리는 안타깝게도 신자가 성숙에 이르지 못하거나 성숙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종종 본다. 성경은 그러한 실패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치료를 위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앞의 각 장들은 이 모든 계층의 필요를 채워주며, 하나님과 좀더 가깝게 동행하기를 더 간절히 원하는 열망을 만족시켜 주려는 목적으로 쓰여 졌다.
이 책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흥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하고 깊은 경험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영적인 퇴보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실패하게 된 과정을 다시추적해 보며 그의 보다 충만한 은혜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이미 얻었다는 생각을 주지 않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를 열정적으로 목표하게 한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었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운 섭리와 분별력있는 훈련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그의 무한한 인내와, 시험 가운데서 함께 하시며 힘있게 하시는 약속에 의해 우리는 겸손케 되었다.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관심, 거룩한 존경심과 평안함을 주는 확신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무한한 보호와 은혜로 지키고 계시다는 위로가 되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려서 그의 영광과 위엄, 그의 숭고한 생애와 죽음의 승리를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 우리는 제자도(弟子道)에 대한 주님의 엄격한 조건들을 들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왕처럼 다스리는 삶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를 굴복시킨다.
또한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들이 다시 한 번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의 영감을 주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 깨끗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활동, 그의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가 우리를 "성숙"으로 인도하는 데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와 더불어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 앞에 남김없이 굴복하는 삶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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