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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비평: 은사운동에 대해

4. 비평: 은사운동에 대해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335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계속성 혹은 회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을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 계시적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성경말씀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22, 23). 물론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오랫 동안 대체로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 등은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계시의 말씀으로 그의 일을 진행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신자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성실한 순종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의문된다. 기독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은사들을 계속 경험하여 왔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었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선,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였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렇다면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들은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하지만, 다 이단들 혹은 불건전한 단체들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거의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들이 외국어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반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글로싸라는 말은 50회 사용되었고 이 말과 비슷한 말인 디알렉토스는 단지 6회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라숀(114회)은 헬라어 70인역에서 91회 가량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2번만 디알렉토스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사파(176회)는 대부분 ‘입술’(케일로스)로 번역되고 5회는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아람어 릿솬(7회)은 전부 글로싸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원어는 단순히 ‘언어’라는 뜻이다.
더구나, 방언이라는 말은 빈번히 글로싸이(방언들)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것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마가복음 16: 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1, “그들이 우리의 방언들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원문 직역). 사도행전 10:46, “이는 방언들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들도 하고 예언도 하니.”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어떤 전문가들의 증거이다. 도날드 버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 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미쉬간 대학교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들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ichard C. Schwab, Let the Bible Speak about Tongues, p. 108).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들이나 이단 종파들 속에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몬타누스파들은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 장로들도 유타주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하였다(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이 다 하나님이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22-25일 미국 루이지아나주 뉴올리안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 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체험케 하려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 세례요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Dennis W. Costella, “Deceiving and Being Deceived,” Foundation, July-Sept. 1987, p. 9).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된 행위이다. 그러한 활동은 결코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분명한 표가 없다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오늘날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혹은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Schab, pp. 104-108; Burdick; Gromacki, pp. 44-49).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이 아니고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마지막으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했다(쿠르트 코흐, 사단의 전술전략, 22-101쪽).
더욱이,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한 마디의 말씀이나 한 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지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John MacArthur, The Charismatics, p. 151).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소위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잠언 25:14,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원문).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킨다. 강조점이 말씀에서 경험으로 이동된다. 성경 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 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靈性)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경험이나 행사가 아니다. 은사는 결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성경의 대표적 한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아이라고 지적되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짐 배커(Jim Bakker)와 지미 스웨거(Jimmy Swaggart)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다. 또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지교회 부흥’의 주역이라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의 브라운스빌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세 명의 중심지도자들은 많은 분량의 토지를 샀고 부요한 집들을 지었거나 짓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교회 목사 죤 킬패트릭은 31만불짜리 호화 자동차로 여행을 하고 34만불짜리 호화 주택을 지었다. 전도자 스티븐 힐은 알라바마주의 공식 가격 847,931불짜리 거의 5만평 가량의 땅을 샀다. 브라운스빌의 학교 사역 책임자 마이클 브라운은 727,360불의 값이 나가는 집을 짓고 있다고 보도된다. (Pensacola News Journal; Bob Jones University, What in the World; Calvary Contender, 1998년 12월 1일.)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7:22, 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그 어떤 은사들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삶임을 밝히 증거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 시절의 것이었으나(고전 13:8-12), 신구약 성경말씀은 성숙한, 온전한 것이다(10절).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으로, 성경말씀의 연구로, 그 말씀을 믿고 사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깨닫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된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감
넷째로,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분별력 있게 배격하지 않는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오히려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1987년 성령과 세계 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했다(Costella, pp. 16, 27).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물론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 예로서 1993년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인 한신대, 감신대, 연대 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크리스챤 저널, 1993년 5월호, 96쪽).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선교회는 1998년 6월 21-26일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라는 주제로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연사들에는 팻 로벗슨, 베니 힌 등이다(Dallas Morning News, 1998년 5월 30일). . . . 카리스마지 1998년 4월호에 의하면, 선교사 마틴 롬바도는 1월에 로마에서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그와 그 외의 은사주의자들은 이태리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롬바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천주교인들에게 쏟아부으시는 것을 본다. 은사주의 천주교 무리들이 각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베니 힌의 지난해 방문 이후 그러하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어울려 그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날을 볼 계획이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일.)
천주교회는 1965년 제2 바티칸 회의 때부터 은사운동을 후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이후 약 일억명 가량으로 추정된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갱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주교회 내에서의 이 ‘갱신’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1999년 7월호는 말하기를, 필라델피아 근교 프리젠테이션 BVM 천주교회는 ‘갱신’의 단계를 넘어서 ‘은사주의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 특징은 방언을 말하기, 거룩한 웃음, 예배 악단, 춤추는 수녀들, 및 바닥에 납작 업드린 방문객들 등이라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이전에 천주교회 신부이었던 바트 브루어는 이렇게 말한다: “은사운동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 . . 의문할 여지가 없는 목적들을 위해 온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두 운동들은 동일한 밭고랑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많은 은사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령을 통해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이 사라지고 무의미하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머리가 될] 거대한 한 세계교회를 향한 현재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은사운동으로부터 기세를 얻고 있다.” (Jeffrey Khoo,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W. A. 크리스웰과 더불어,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인정하는 추천의 글들을 실었다(Christian News, 1996년 5월 20일, 3쪽; Gist, 1996년 봄호).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에이지 연례대회에서,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 간의 조찬기도모임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1998년 11월호). 뉴에이지 운동가들과 몰몬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1999년 6월호).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19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의 말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오순절파에서 성장했던 오우 탤미쥐 스펜스(O. Talmadge Spenc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항상 신봉하는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첫째로, 현존하는 계시들을 성경과 대치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높은 영적 증거들을 위한 품질 증명으로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말세를 위해 성경보다 더 후의 계시를 위한 길이 되었다.” 그는 첨가하여 말하기를, “현재의 모든 오순절 운동들은 로마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빌리 그레이엄 사역을 지지하고 그것들과 교제한다”(Staightway, 1999년 5-6월호;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5일.)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현대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현대교회의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성령의 일이겠는가, 악령의 일이겠는가?
 
결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이러한 영적인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현재 수동태 명령형)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교회에 불어닥친 영적 혼란의 추가적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마땅히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에가 아니다. 역사상 빈번히 그러했듯이, 교회의 영적 침체는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경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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