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저저 옥성호씨 인터뷰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저저 옥성호씨 인터뷰
1. 이번에 방언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3편 <엔부기: 엔테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손꼽아 기다리던 독자들로서는 왜 갑자기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완결하지 않고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엔부기’의 큰 주제를 세 가지로 잡고 있었습니다. 음악, 신비주의 그리고 은사주의입니다. 은사부분에 있어서는 방언과 신유 그리고 가능하면 예언부분을 다루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를 놓고 준비하던 중 차츰차츰 은사부분에 대해서는 망설여지더군요. 무엇보다 교단에 관계없이 너도 나도 소위 말하는 ‘성령운동’에 몰입한 오늘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너무 많은 ‘적’을 만들것 같아서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주석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너무 두꺼운 2부 마부기보다 더 두꺼운 책을 만들면 안돼지....”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은사 부분은 포기했더랍니다. 사 놓았던 은사 관련 책들도 유혹이 되지 않도록 저 멀리 치워놓았고요.
그러던 중 2007년 여름이 좀 지나서인가요? ‘하늘의 언어’를 읽은 후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제가 읽은 책들 중에서 그렇게 제게 큰 충격을 준책은 몇 권 없을 것입니다. 물론....부정적인 면에서의 충격입니다. 제가 주변에서 수도 없이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생생하게 알았습니다. 연이어 손기철 장로님의 ‘성령님 고맙습니다’, 손기철 장로님이 멘토로 삼는다는 마헤쉬 챠브다의 ‘방언체험’을 비롯해 그 외 여러 권의 번역된 방언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굳이 ‘하늘의 언어’에 실린 내용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방언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얘기 수준’이라는 점을 깨닫고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어떻게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이토록 잠잠할 수 있는지, 논쟁조차 벌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깊은 자괴감을 느끼던 중 깨달았지요. 교회 안의 사람들이 다 나 같아서 그렇다는 점을 말입니다. 엔부기에 쓰려고 했다가 반발이 무서워 포기했던 저나 베스트셀러와 대세가 주는 위압감에 가만히 있는 많은 사람들이나 결국 다르지 않더라는 것이지! 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제 잘못을 깨닫고...본격적으로 방언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 이번 책의 제목이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입니다. 이 제목은 기존의 김우현 PD가 쓴 ‘하늘의 언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앞에서 서술했듯이 제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예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은, ‘그건 하늘의 언어가 아니다.’였는데 너무 도발적이고 부정적(?)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목을 의문문으로 바꾸었습니다. 따라서 김 감독님의 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옥성호 형제님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무엇인지요? 책의 주제와 핵심을 간단히 말해줄 수 있습니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내가 방언하고 이런저런 효과가 있었으니 내게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지를 갖고 태클 걸지 말라”는 태도를 한번만 접고 성경을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곧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될 ‘존 맥아더, 천국을 말하다’의 추천사를 제가 얼마 전에 썼습니다. 그 책에 대해서 제가 한 마디 한다면 참 ‘따분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이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책들은 자신들이 직접 천국에 갔다 왔다는 주장들과 함께 각종 희한한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맥아더 목사님의 책은 오로지 성경이 말한 천국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으니 그런 책들에 비해서 어떻게 따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추천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천국에 관한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교과서에 불과하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 갔다 온 사람들이 쓴 각종 희한한 체험담이다. 마치 수험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 집어준 예상 문제집! 이듯이 말이다.”
방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악세사리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수많은 방언 책들을 한번 보세요.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중심으로 한 서너 개의 구절을 장식용으로 붙이고 나머지는 세상에서 듣고 보도 못한 얘기들로 채워놓았습니다. 한번만이라도....그런 주관적 체험을 벗어나서 성경이 방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진지하게 보자는 것이 제 책의 요지입니다.
4. 조심스런 질문이지만 ‘방언기도’에 대한 체험이 있으신지요? 있다면 언제 어떤 계기로 ‘방언체험’을 하게 되었는지요? ‘방언체험’을 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방언체험’은 옥성호 형제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군요. 지금은 과거의 ‘방언체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요?
대학교의 한 수련회에서 은사를 가장 중시하는 한 강사로부터 엄청 많이 맞았었습니다. 방언하라고요. 기도하는데 얼마나 등을 때리면서 저를 괴롭혔는지.....아이고,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밤 얼마나 방언을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 밤 ‘개구리 방언’, ‘살모사 방언’, ‘돈키호테 방언’ 등등 이름도 처음 듣는 이상한 방언들을 다 하더라고요. 정말로 개나 소나 다 하는데 나는 안 되니까 미칠 것 같았습니다. 맞으면서도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방언 한번 해 보려고요. 시키는 것을 다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어린 마음에 당시 ‘그 유명한 아빠도 못하는 방언을 내가 해서 아빠 코를 눌러줘야겠다’라는 생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남들은 다 하는데 나는 안 되더라고요....정말 좌절감만을 맛본 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10년이 흐른 후 뉴욕에서 신유와 방언 쪽에 유명한 한 권사님 집에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밤에 그 권사님이 저를 붙잡고 앉아서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하자고 하더군요. 사실 과거의 쓴 경험도 있고 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신기하게 방언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쉽게 말입니다. 그 권사님으로부터 ‘제대로 받았다’라는 확인을 받고 방에 가서도 또 한참 했는데 잘 되더라고요. 그 뒤로 심심하면 가끔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쓰는 동안은 방언 생각만 하니까 잠이 들면 꿈에서도 방언만 했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잠잠합니다.
방언이 제 신앙생활에 미친 영향은......간단히 얘기하면 의구심만 더 생기게 했지요. “왜 사람들은 이걸 대단하게 생각할까? 정신과 입술이 따로 노는데 도리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나? 참 기독교는 이상한 종교다...” 당시, 이런 의구심만 더 들었습니다. 저의 경험을 통해 볼 때 방언은 일정수준의 스트레스와 주도자에 대한 신뢰가 증폭될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옥성호 형제님은 이 책에서 현대 방언에 대해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엇인지요?
상황적 증거와 성경적 증거가 있습니다. 이 얘기하면 책을 안 읽을 것 같아서 그냥 이 질문은 뛰어 넘겠습니다. 한 두 문장 읽고 행여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6. 만일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는 옥성호 형제님의 결론이 맞다면 현실적으로 오순절 교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또한 현재 방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방언을 보급하려고 방언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을 해 주어야 하는지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패커 박사 같은 분도 방언을 ‘기도형태’의 하나로 인정하자고 말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이 방언도 하나의 감정적 표출로 받아들이자는 분들의 주장이 일면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방언은 그러기에는 너무도 그 안에 많은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특히 말씀에 대해서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발을 디디자마자 방언과 같은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접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그 위험이 주는 수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분들은 ‘신비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고 앉아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형식상의 학교 수업이라면 ‘랄랄라’를 통해 느끼는 체험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 주는 진짜 수업인 셈이지요.
저는 방언에 집착하는 많은 분들이 사실상 마음 속 깊숙이 감춰진 믿음에 대한 회의랄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랄까....누르고 눌러도 순간순간 고개를 쳐드는 이런 근본적인 회의를 잠재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방언과 같은 신비 체험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책 전체를 통해서 논증했지만 오늘날의 방언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방언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양 말하면서 보급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중지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상에 선물 달라고 집단으로 모여 떼쓰는 것이 믿음입니까? 당장 중지되어야 합니다.
7. 옥성호 형제님과 같은 방언관을 가진 분들을 흔히 ‘은사중지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분들을 ‘은사지속론자’라고 부릅니다. 이 두 입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요? 그리고 각각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참고할 만한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 입장의 차이를 빚는 가장 큰 이유는 오순절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원론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차이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함께 각각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책은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Stanley N. Gundry Series editor, Wayne A. Grudem, General editor. Zondervan입니다.(부흥과개혁사 2008년 발간예정)
8. 앞으로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또는 한국교회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예상하고 계신지요?
글쎄요....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방언과 관련한 지금의 상황에 분명 우려를 갖고 있을 수많은 목회자들이 침묵과 무관심이 결코 답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데에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장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떠드는 방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모든 성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장식품으로 전락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성령님이 교회에서 무시 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교회에서 무시 받는 경우는 오로지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나의 체험에 밀려나는 그때입니다.
100년 논쟁: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하나, 은사 문제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은사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지붕 아래 너무 많은 부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복음주의 운동이 잡종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대답은 너무 다양합니다. 그러나 크게 찬성, 반대의 두 가지 상반된 견해로 나뉩니다.
먼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오늘날 중지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은사 중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또다 반대편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오늘도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은사 지속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런 양편의 상반된 주장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예외로 하고 '기적적 은사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된 두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은사 중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개혁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개혁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교파로 말하면 대부분 '장로교'에 속한 이들이며, 개혁파 침례교도 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의 침례교 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은사 지속주의' 입장에는 크게 3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구오순절 운동, 신오순절 운동(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빈야드 능력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구오순절 운동이란 1901년부터 시작된 현대 오순절 교단을 말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2)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 능력을 받는 체험이며, 모든 신자들은 이 성령세례 받기를 추구해야 한다. (3)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다.”
따라서 오순절 운동의 핵심은 바로 '방언'입니다. 오순절 운동은 제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가 바로 '방언'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기 원한다는 것은 곧 '방언 받기'를 원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장 강력하게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방언'이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을 일명 '방언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순절파를 '방언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오순절교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신오순절 운동은 '은사주의 운동'이라 부릅니다. 1960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기존의 오순절 교단 외의 전통적인 다른 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에 그대로 머물면서 오순절교단의 '성령 운동'에 동조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말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의 모든 은사가 오늘날 지속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능력 체험이라든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반드시 '방언'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3의 물결은 1980년대 풀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와 빈야드 교회의 목회자 존 윔버가 중심이 된 성령 운동입니다. 이는 구오순절 운동을 성령 운동의 제1물결, 신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을 성령 운동의 제2물결이라 명명하며 자신들의 '표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 운동을 제3의 물결이라 지칭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의 물결은 구오순절 운동과 신오순절 운동과 같이 '은사 지속주의' 입장을 함께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고 방언도 크게 강조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복음 전도에 있어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성령 운동과 차별화됩니다. 제3의 물결 성령 운동은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능력 운동'이라 이름 해도 좋을 것입니다.
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대중적 대변을 하게 될 옥성호의 방언론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주류요, 대세였습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초대 교회 교부들인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견해였으며,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였으며, 존 오웬, 토머스 왓슨, 매튜 헨리 등의 청교도들의 견해였으며,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나 조지 휫필드의 견해였으며, 19세기 위대한 설교자들인 스펄전과 존 라일의 견해였으며,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인 워필드 등의 견해였습니다.
'은사 지속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19세기까지 주로 이단이나 열광주의적 사이비 집단이 취한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구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이 확산되면서 '은사 지속론 견해'는 크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활약으로 은사 지속론의 입장도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근거와 해석을 바탕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와 관련된 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은사 중지에 대한 입장'과 '은사 지속에 대한 입장'으로 나누어져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방언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은사 지속주의 견해'를 지닌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씌어진 책들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방언 신학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 품 있습니다. 이는 방언 은사의 중지에 대한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옥성호 형제의 책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씌어진 몇 권의 원서가 있지만 한국에는 거의 소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최초로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옥성호 형제의 이 책은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대중적으로 '현대의 방언이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증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셋, 옥성호가 이런 방언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는가
이번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와는 달리 구체적인 성경 본문 해석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성호 형제는 이 책에서 많은 학자들과 토론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을 한 학자들의 글에 대해서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들의 성경 해석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 삼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호 형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해를 둘러싼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름대로 분석, 평가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건전한 성경 해석을 도출해 나갑니다.
이 정도의 성경 해석에 대한 토론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성도가 이 정도 신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성호 형제의 신학적 소양과 실력에 감탄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과연 이렇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만한 권위나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라는 미신입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 공부 역시 반드시 신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과목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보통 우리는 수강하는 한 과목을 약 3개월 동안 10∼13시간 정도 강의를 듣게 됩니다.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사실 약 200∼300페이지 정도의 책 한 권 분량이 됩니다. 즉 한 과목을 수강했다는 것은 곧 한권의 책 속에 담긴 지식의 분량을 배운 것입니다. 한 권의 책속에 담긴 지식을 강의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은 한 과목에 해당됩니다. 결국 3년 동안 신학대학원을 공부한다는 것은 약 60개의 과목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즉 60권 정도의 책을 읽는 분량을 강의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학으로 책 1권을 잘 마스터 하면 한 강좌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서가 곧 공부하는 것입니다. 관련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곧 관련 분야의 전공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저술하기 위해 성호 형제가 읽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석과 관련된 책들과 은사 문제, 또는 구체적으로 방언과 예언에 관련된 책은 그리 적은 수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목회를 하는 목사 중에서 '방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현재 이 책을 저술한 성호 형제만큼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성호 형제는 방언에 대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국내외의 어떤 사람보다 방언과 은사 분야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미 전문가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 문제는 성경 연구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호 형제는 소위 현대 '방언 기도'에 대한 체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리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호 형제가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경이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우리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방언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아래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부터 바른 진리를 수호할 '진리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2∼3세기 초대 교회에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교 철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기독교를 변호했던 '변증가'들과 기독교 내부의 이단과 여러 불건전한 분파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을 지켜 냈던 '논쟁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고 난 다음에도 수많은 이단과 분파들과의 논쟁을 통해 바른 신학을 지켜 냈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 종교개혁 당시 한쪽으로는 로마 가톨릭과 다른 한 쪽에서는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 종교개혁과 양 전선에서 성경의 진리를 논쟁했던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 그리고 이후 시대 시대마다 당대의 잘못된 이단들과 사이비 집단들의 사상에 대해 진리 전쟁을 벌였던 17세기 존 오웬과 같은 청교도들,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스펄전, 20세기 로이드 존스 등과 같은 영적 거장들은 한결같이 '진리 전쟁'의 최전선에서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고 수호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진리를 위한 '논쟁가'의 계보를 잇는 훌륭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신학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성호 형제가 우리 시대의 바른 신학의 보루로서,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의 문제점을 바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토론하고 논쟁하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넷, 방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자
아마도 이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에 이어 또다시 한국 교회에 큰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리라 예상됩니다. 소위 '오늘날의 랄랄라 방언 기도가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이 한국 교회의 쟁점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는 분명한 입장을 취했거나 '잘 모르겠다'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모든 사람이 다시 한 번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동안 방언 문제에 대해 안개 낀 것처럼 희미했던 부분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 기도를 해도 되는가? 방언 기도가 신앙생활에 유익한가?'라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것입니다. 즉 이 책을 읽고 나면 '방언 문제에 대한 중립'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라도 이제 분명하게 '방언 찬성' 혹은 '방언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현재 '방언 반대', '방언 찬성', '방언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3부류의 사람 모두 큰 유익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방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 일고 있는 '방언 열풍'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왜 오늘날의 방언 운동이 문제가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분들에게 이 책은 성경이 방언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특별히 장로교 목회자들로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성도들을 지도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성도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이며, 왜 오늘날의 '방언 체험'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닌지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 '방언 찬성'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에 속해 있든,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 은사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있든 이미 오늘날의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왜 개혁파에 속한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문제삼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언 체험을 성경 말씀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후에도 자신의 방언 체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방언을 금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는 동기를 줄 것입니다.
셋째는 '방언 중립'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깊이 연구해 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오늘날 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런 입장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방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앞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방언 은사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진리는 분명 '예'와 '아니오'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잠정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있지만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방언'에 대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촉매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백금산 목사 추천의 글
옥성호
지은이 옥성호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에 소재한 The 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2000년부터 특허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한국의 벤처기업 ‘위즈도메인’에서 미국 지사를 맡아 현재까지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워싱턴에 있는 아이비엠(IBM)에 이르기까지 북미에 위치한 세계적 기업들을 상대로 국제적 세일즈 경험을 쌓았다. 20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깊이 깨달은 후 세상에 물든 교회에 떨어진 폭탄으로 일컬어지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탈고했다. 그 후 책읽기 노하우를 정리한 ‘드디어 스승을 만났다’를 출간했다. 사랑의 교회 대학부에서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앞으로 급변하는 21세기 속에서 복음의 본질과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꼭 필요한 책들을 쓰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는 옥성호의 글은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의 ‘옥성호의! 교회&세상 읽기’에서 접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7777
1. 이번에 방언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3편 <엔부기: 엔테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손꼽아 기다리던 독자들로서는 왜 갑자기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완결하지 않고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엔부기’의 큰 주제를 세 가지로 잡고 있었습니다. 음악, 신비주의 그리고 은사주의입니다. 은사부분에 있어서는 방언과 신유 그리고 가능하면 예언부분을 다루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를 놓고 준비하던 중 차츰차츰 은사부분에 대해서는 망설여지더군요. 무엇보다 교단에 관계없이 너도 나도 소위 말하는 ‘성령운동’에 몰입한 오늘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너무 많은 ‘적’을 만들것 같아서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주석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너무 두꺼운 2부 마부기보다 더 두꺼운 책을 만들면 안돼지....”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은사 부분은 포기했더랍니다. 사 놓았던 은사 관련 책들도 유혹이 되지 않도록 저 멀리 치워놓았고요.
그러던 중 2007년 여름이 좀 지나서인가요? ‘하늘의 언어’를 읽은 후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제가 읽은 책들 중에서 그렇게 제게 큰 충격을 준책은 몇 권 없을 것입니다. 물론....부정적인 면에서의 충격입니다. 제가 주변에서 수도 없이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생생하게 알았습니다. 연이어 손기철 장로님의 ‘성령님 고맙습니다’, 손기철 장로님이 멘토로 삼는다는 마헤쉬 챠브다의 ‘방언체험’을 비롯해 그 외 여러 권의 번역된 방언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굳이 ‘하늘의 언어’에 실린 내용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방언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얘기 수준’이라는 점을 깨닫고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어떻게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이토록 잠잠할 수 있는지, 논쟁조차 벌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깊은 자괴감을 느끼던 중 깨달았지요. 교회 안의 사람들이 다 나 같아서 그렇다는 점을 말입니다. 엔부기에 쓰려고 했다가 반발이 무서워 포기했던 저나 베스트셀러와 대세가 주는 위압감에 가만히 있는 많은 사람들이나 결국 다르지 않더라는 것이지! 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제 잘못을 깨닫고...본격적으로 방언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 이번 책의 제목이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입니다. 이 제목은 기존의 김우현 PD가 쓴 ‘하늘의 언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앞에서 서술했듯이 제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예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은, ‘그건 하늘의 언어가 아니다.’였는데 너무 도발적이고 부정적(?)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목을 의문문으로 바꾸었습니다. 따라서 김 감독님의 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옥성호 형제님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무엇인지요? 책의 주제와 핵심을 간단히 말해줄 수 있습니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내가 방언하고 이런저런 효과가 있었으니 내게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지를 갖고 태클 걸지 말라”는 태도를 한번만 접고 성경을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곧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될 ‘존 맥아더, 천국을 말하다’의 추천사를 제가 얼마 전에 썼습니다. 그 책에 대해서 제가 한 마디 한다면 참 ‘따분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이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책들은 자신들이 직접 천국에 갔다 왔다는 주장들과 함께 각종 희한한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맥아더 목사님의 책은 오로지 성경이 말한 천국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으니 그런 책들에 비해서 어떻게 따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추천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천국에 관한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교과서에 불과하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 갔다 온 사람들이 쓴 각종 희한한 체험담이다. 마치 수험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 집어준 예상 문제집! 이듯이 말이다.”
방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악세사리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수많은 방언 책들을 한번 보세요.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중심으로 한 서너 개의 구절을 장식용으로 붙이고 나머지는 세상에서 듣고 보도 못한 얘기들로 채워놓았습니다. 한번만이라도....그런 주관적 체험을 벗어나서 성경이 방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진지하게 보자는 것이 제 책의 요지입니다.
4. 조심스런 질문이지만 ‘방언기도’에 대한 체험이 있으신지요? 있다면 언제 어떤 계기로 ‘방언체험’을 하게 되었는지요? ‘방언체험’을 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방언체험’은 옥성호 형제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군요. 지금은 과거의 ‘방언체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요?
대학교의 한 수련회에서 은사를 가장 중시하는 한 강사로부터 엄청 많이 맞았었습니다. 방언하라고요. 기도하는데 얼마나 등을 때리면서 저를 괴롭혔는지.....아이고,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밤 얼마나 방언을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 밤 ‘개구리 방언’, ‘살모사 방언’, ‘돈키호테 방언’ 등등 이름도 처음 듣는 이상한 방언들을 다 하더라고요. 정말로 개나 소나 다 하는데 나는 안 되니까 미칠 것 같았습니다. 맞으면서도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방언 한번 해 보려고요. 시키는 것을 다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어린 마음에 당시 ‘그 유명한 아빠도 못하는 방언을 내가 해서 아빠 코를 눌러줘야겠다’라는 생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남들은 다 하는데 나는 안 되더라고요....정말 좌절감만을 맛본 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10년이 흐른 후 뉴욕에서 신유와 방언 쪽에 유명한 한 권사님 집에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밤에 그 권사님이 저를 붙잡고 앉아서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하자고 하더군요. 사실 과거의 쓴 경험도 있고 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신기하게 방언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쉽게 말입니다. 그 권사님으로부터 ‘제대로 받았다’라는 확인을 받고 방에 가서도 또 한참 했는데 잘 되더라고요. 그 뒤로 심심하면 가끔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쓰는 동안은 방언 생각만 하니까 잠이 들면 꿈에서도 방언만 했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잠잠합니다.
방언이 제 신앙생활에 미친 영향은......간단히 얘기하면 의구심만 더 생기게 했지요. “왜 사람들은 이걸 대단하게 생각할까? 정신과 입술이 따로 노는데 도리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나? 참 기독교는 이상한 종교다...” 당시, 이런 의구심만 더 들었습니다. 저의 경험을 통해 볼 때 방언은 일정수준의 스트레스와 주도자에 대한 신뢰가 증폭될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옥성호 형제님은 이 책에서 현대 방언에 대해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무엇인지요?
상황적 증거와 성경적 증거가 있습니다. 이 얘기하면 책을 안 읽을 것 같아서 그냥 이 질문은 뛰어 넘겠습니다. 한 두 문장 읽고 행여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6. 만일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는 옥성호 형제님의 결론이 맞다면 현실적으로 오순절 교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또한 현재 방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방언을 보급하려고 방언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을 해 주어야 하는지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패커 박사 같은 분도 방언을 ‘기도형태’의 하나로 인정하자고 말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이 방언도 하나의 감정적 표출로 받아들이자는 분들의 주장이 일면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방언은 그러기에는 너무도 그 안에 많은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특히 말씀에 대해서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발을 디디자마자 방언과 같은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접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그 위험이 주는 수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분들은 ‘신비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고 앉아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형식상의 학교 수업이라면 ‘랄랄라’를 통해 느끼는 체험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 주는 진짜 수업인 셈이지요.
저는 방언에 집착하는 많은 분들이 사실상 마음 속 깊숙이 감춰진 믿음에 대한 회의랄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랄까....누르고 눌러도 순간순간 고개를 쳐드는 이런 근본적인 회의를 잠재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방언과 같은 신비 체험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책 전체를 통해서 논증했지만 오늘날의 방언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방언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양 말하면서 보급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중지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주시는 선물입니다. 세상에 선물 달라고 집단으로 모여 떼쓰는 것이 믿음입니까? 당장 중지되어야 합니다.
7. 옥성호 형제님과 같은 방언관을 가진 분들을 흔히 ‘은사중지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분들을 ‘은사지속론자’라고 부릅니다. 이 두 입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요? 그리고 각각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참고할 만한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 입장의 차이를 빚는 가장 큰 이유는 오순절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원론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차이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함께 각각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책은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Stanley N. Gundry Series editor, Wayne A. Grudem, General editor. Zondervan입니다.(부흥과개혁사 2008년 발간예정)
8. 앞으로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또는 한국교회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예상하고 계신지요?
글쎄요....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방언과 관련한 지금의 상황에 분명 우려를 갖고 있을 수많은 목회자들이 침묵과 무관심이 결코 답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데에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장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떠드는 방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모든 성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장식품으로 전락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성령님이 교회에서 무시 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교회에서 무시 받는 경우는 오로지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나의 체험에 밀려나는 그때입니다.
100년 논쟁: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하나, 은사 문제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은사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지붕 아래 너무 많은 부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복음주의 운동이 잡종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대답은 너무 다양합니다. 그러나 크게 찬성, 반대의 두 가지 상반된 견해로 나뉩니다.
먼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오늘날 중지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은사 중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또다 반대편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오늘도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은사 지속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런 양편의 상반된 주장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예외로 하고 '기적적 은사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된 두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은사 중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개혁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개혁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교파로 말하면 대부분 '장로교'에 속한 이들이며, 개혁파 침례교도 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의 침례교 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은사 지속주의' 입장에는 크게 3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구오순절 운동, 신오순절 운동(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빈야드 능력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구오순절 운동이란 1901년부터 시작된 현대 오순절 교단을 말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2)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 능력을 받는 체험이며, 모든 신자들은 이 성령세례 받기를 추구해야 한다. (3)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다.”
따라서 오순절 운동의 핵심은 바로 '방언'입니다. 오순절 운동은 제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가 바로 '방언'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기 원한다는 것은 곧 '방언 받기'를 원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장 강력하게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방언'이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을 일명 '방언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순절파를 '방언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오순절교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신오순절 운동은 '은사주의 운동'이라 부릅니다. 1960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기존의 오순절 교단 외의 전통적인 다른 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에 그대로 머물면서 오순절교단의 '성령 운동'에 동조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말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의 모든 은사가 오늘날 지속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능력 체험이라든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반드시 '방언'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3의 물결은 1980년대 풀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와 빈야드 교회의 목회자 존 윔버가 중심이 된 성령 운동입니다. 이는 구오순절 운동을 성령 운동의 제1물결, 신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을 성령 운동의 제2물결이라 명명하며 자신들의 '표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 운동을 제3의 물결이라 지칭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의 물결은 구오순절 운동과 신오순절 운동과 같이 '은사 지속주의' 입장을 함께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고 방언도 크게 강조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복음 전도에 있어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성령 운동과 차별화됩니다. 제3의 물결 성령 운동은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능력 운동'이라 이름 해도 좋을 것입니다.
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대중적 대변을 하게 될 옥성호의 방언론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주류요, 대세였습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초대 교회 교부들인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견해였으며,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였으며, 존 오웬, 토머스 왓슨, 매튜 헨리 등의 청교도들의 견해였으며,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나 조지 휫필드의 견해였으며, 19세기 위대한 설교자들인 스펄전과 존 라일의 견해였으며,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인 워필드 등의 견해였습니다.
'은사 지속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19세기까지 주로 이단이나 열광주의적 사이비 집단이 취한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구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이 확산되면서 '은사 지속론 견해'는 크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활약으로 은사 지속론의 입장도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근거와 해석을 바탕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와 관련된 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은사 중지에 대한 입장'과 '은사 지속에 대한 입장'으로 나누어져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방언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은사 지속주의 견해'를 지닌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씌어진 책들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방언 신학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 품 있습니다. 이는 방언 은사의 중지에 대한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옥성호 형제의 책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씌어진 몇 권의 원서가 있지만 한국에는 거의 소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최초로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옥성호 형제의 이 책은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대중적으로 '현대의 방언이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증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셋, 옥성호가 이런 방언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는가
이번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와는 달리 구체적인 성경 본문 해석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성호 형제는 이 책에서 많은 학자들과 토론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을 한 학자들의 글에 대해서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들의 성경 해석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 삼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호 형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해를 둘러싼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름대로 분석, 평가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건전한 성경 해석을 도출해 나갑니다.
이 정도의 성경 해석에 대한 토론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성도가 이 정도 신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성호 형제의 신학적 소양과 실력에 감탄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과연 이렇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만한 권위나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라는 미신입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 공부 역시 반드시 신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과목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보통 우리는 수강하는 한 과목을 약 3개월 동안 10∼13시간 정도 강의를 듣게 됩니다.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사실 약 200∼300페이지 정도의 책 한 권 분량이 됩니다. 즉 한 과목을 수강했다는 것은 곧 한권의 책 속에 담긴 지식의 분량을 배운 것입니다. 한 권의 책속에 담긴 지식을 강의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은 한 과목에 해당됩니다. 결국 3년 동안 신학대학원을 공부한다는 것은 약 60개의 과목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즉 60권 정도의 책을 읽는 분량을 강의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학으로 책 1권을 잘 마스터 하면 한 강좌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서가 곧 공부하는 것입니다. 관련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곧 관련 분야의 전공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저술하기 위해 성호 형제가 읽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석과 관련된 책들과 은사 문제, 또는 구체적으로 방언과 예언에 관련된 책은 그리 적은 수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목회를 하는 목사 중에서 '방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현재 이 책을 저술한 성호 형제만큼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성호 형제는 방언에 대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국내외의 어떤 사람보다 방언과 은사 분야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미 전문가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 문제는 성경 연구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호 형제는 소위 현대 '방언 기도'에 대한 체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리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호 형제가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경이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우리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방언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아래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부터 바른 진리를 수호할 '진리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2∼3세기 초대 교회에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교 철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기독교를 변호했던 '변증가'들과 기독교 내부의 이단과 여러 불건전한 분파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을 지켜 냈던 '논쟁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고 난 다음에도 수많은 이단과 분파들과의 논쟁을 통해 바른 신학을 지켜 냈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 종교개혁 당시 한쪽으로는 로마 가톨릭과 다른 한 쪽에서는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 종교개혁과 양 전선에서 성경의 진리를 논쟁했던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 그리고 이후 시대 시대마다 당대의 잘못된 이단들과 사이비 집단들의 사상에 대해 진리 전쟁을 벌였던 17세기 존 오웬과 같은 청교도들,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스펄전, 20세기 로이드 존스 등과 같은 영적 거장들은 한결같이 '진리 전쟁'의 최전선에서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고 수호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진리를 위한 '논쟁가'의 계보를 잇는 훌륭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신학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성호 형제가 우리 시대의 바른 신학의 보루로서,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의 문제점을 바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토론하고 논쟁하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넷, 방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자
아마도 이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에 이어 또다시 한국 교회에 큰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리라 예상됩니다. 소위 '오늘날의 랄랄라 방언 기도가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이 한국 교회의 쟁점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는 분명한 입장을 취했거나 '잘 모르겠다'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모든 사람이 다시 한 번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동안 방언 문제에 대해 안개 낀 것처럼 희미했던 부분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 기도를 해도 되는가? 방언 기도가 신앙생활에 유익한가?'라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것입니다. 즉 이 책을 읽고 나면 '방언 문제에 대한 중립'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라도 이제 분명하게 '방언 찬성' 혹은 '방언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현재 '방언 반대', '방언 찬성', '방언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3부류의 사람 모두 큰 유익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방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 일고 있는 '방언 열풍'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왜 오늘날의 방언 운동이 문제가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분들에게 이 책은 성경이 방언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특별히 장로교 목회자들로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성도들을 지도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성도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이며, 왜 오늘날의 '방언 체험'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닌지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 '방언 찬성'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에 속해 있든,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 은사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있든 이미 오늘날의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왜 개혁파에 속한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문제삼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언 체험을 성경 말씀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후에도 자신의 방언 체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방언을 금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는 동기를 줄 것입니다.
셋째는 '방언 중립'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깊이 연구해 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오늘날 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런 입장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방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앞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방언 은사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진리는 분명 '예'와 '아니오'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잠정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있지만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방언'에 대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촉매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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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
지은이 옥성호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에 소재한 The 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2000년부터 특허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한국의 벤처기업 ‘위즈도메인’에서 미국 지사를 맡아 현재까지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워싱턴에 있는 아이비엠(IBM)에 이르기까지 북미에 위치한 세계적 기업들을 상대로 국제적 세일즈 경험을 쌓았다. 20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깊이 깨달은 후 세상에 물든 교회에 떨어진 폭탄으로 일컬어지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탈고했다. 그 후 책읽기 노하우를 정리한 ‘드디어 스승을 만났다’를 출간했다. 사랑의 교회 대학부에서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앞으로 급변하는 21세기 속에서 복음의 본질과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꼭 필요한 책들을 쓰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는 옥성호의 글은 부흥과 개혁사 홈페이지의 ‘옥성호의! 교회&세상 읽기’에서 접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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