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8)
요약 권영배 (2009.05.18 ~ 06.12)
목 차
추천의 글 - 100년 논쟁 :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
글을 열며 : 말씀이냐 체험이냐
1부. 사도행전의 방언
01 방언의 첫 번째 등장 : 오순절 사건
02 방언의 두 번째 등장 :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03 방언의 세 번째 등장 : 고넬료의 회심 사건
04 방언의 네 번째 등장 :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05 사도행전 방언 사건의 결론 :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2부. 고린도전서의 방언
01 고린도전서 방언 이해를 위한 배경
02 고린도전서 12장 : 은사의 본질
03 고린도전서 13장 :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04 고린도전서 14장 : 방언의 본질과 역할
3부. 오늘날의 방언
01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02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글을 닫으며 :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부록 : 예언의 은사
추천의 글
100년 논쟁 :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하나, 은사 문제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은사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지붕 아래 너무 많은 부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복음주의 운동이 잡종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대답은 너무 다양합니다. 그러나 크게 찬성, 반대의 두 가지 상반된 견해로 나뉩니다.
첫째, ‘은사 중지주의’(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오늘날 중지되었다고 믿는 사람들)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개혁주의 신학’(장로교, 개혁파 침례교)과 ‘세대주의 신학’(미국의 침례교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둘째, ‘은사 지속주의’입장에는 크게 3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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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구오순절 운동 (1901년 오순절 교단) |
②신오순절 운동 (1960년대 은사주의 운동) |
③제3의 물결운동 (빈야드 능력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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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 (1)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2)성령세례는 회심 이후 능력을 받는 체험이며, 모든 신자들은 이 성령세례 받기를 추구해야 한다. (3)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다 ◆오순절 운동의 핵심 : 방언 제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가 ‘방언’이므로 예수 믿고 가장 강력하게 사모하고 추구해야할 것. 그래서 오순절 운동을 ‘방언운동’(방언파=오순절교단)이라고 함. |
◆기존의 전통적인 다른 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에 그대로 머물면서 오순절교단의 ‘성령운동’에 동조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 ◆성령의 모든 은사가 오늘날 지속된다는 것에는 동의 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능력 체험이라든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반드시 ‘방언’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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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피터 와그너 교수와 빈야드교회 목회자 존 윔버가 중심이 된 성령운동. ◆제1물결(구오순절운동), 제2물결(신오순절운동), 제3물결(표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운동) ◆‘은사 지속주의’입장은 취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고, 방언도 크게 강조하지 않으며,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성령 운동과 차별화되며, 능력 운동 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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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대중적 대변을 하게 될 옥성호의 방언론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주류요, 대세였습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초대 교회 교부들인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견해였으며,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였으며, 존 오웬, 토마스 왓슨, 매튜 헨리 등의 청교도들의 견해였으며,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나 조지 휫필드의 견해였으며, 19세기 위대한 설교자들인 스펄전과 존 라일의 견해였으며,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인 워필드 등의 견해였습니다.
‘은사 지속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19세기까지 주로 이단이나 열광주의적 사이비 집단이 취한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구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이 확산되면서 ‘은사 지속론 견해’는 크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활약으로 은사 지속론의 입장도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근거와 해석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와 관련된 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은사 중지에 대한 입장’과 ‘은사 지속에 대한 입장’으로 나누어져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방언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은사 지속주의 견해’를 지닌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씌어진 책들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방언 신학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옥성호 형제의 이번 책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셋, 옥성호가 이런 방언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는가
이번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와는 달리 구체적인 성경 본문 해석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토론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을 한 학자들의 글에 대해서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들의 성경 해석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 삼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호 형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해를 둘러싼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름대로 분석, 평가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건전한 성경 해석을 도출해 나갑니다. 이 정도의 성경 해석에 대한 토론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성도의 신학적 소양과 실력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이렇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만한 권위나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 공부 역시 반드시 신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저술하기 위해 성호 형제가 읽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석과 관련된 책들과 은사 문제, 또는 구체적으로 방언과 예언에 관련된 책은 그리 적은 수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목회를 하는 목사 중에서 ‘방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현재 이책을 저술한 성호 형제 만큼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성호 형제는 방언에 대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국내외의 어떤 사람보다 방언과 은사분야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미 전문가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 문제는 성경 연구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호 형제는 소위 현대 ‘방언 기도’에 대한 체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리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호 형제가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경은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우리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방언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아래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부터 바른 진리를 수호할 ‘진리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2~3세기 초대 교회에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교철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기독교를 변호했던 ‘변증가’들과 기독교 내부의 이단과 여러 불건전한 분파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을 지켜 냈던 ‘논쟁가’들이 큰 역할 감당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 루터와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로이드 존스 등과 같은 영적 거장들은 한결같이 ‘진리 전쟁’의 최전선에서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고 수호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진리를 위한 ‘논쟁가’의 계보를 잇는 훌륭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신학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성호 형제가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의 문제점을 바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토론하고 논쟁하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넷, 방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자
아마도 이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에 이어 또 다시 한국 교회에 큰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리라 예상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현재 ‘방언 반대’, ‘방언 찬성’, ‘방언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3부류의 사람 모두 큰 유익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방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 일고 있는 ‘방언 열풍’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왜 오늘날의 방언 운동이 문제가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분들에게 이 책은 성경이 방언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둘째, ‘방언 찬성’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에 속해 있든,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 은사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있든 이미 오늘날의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왜 ‘방언’에 대해 문제삼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언 체험을 성경말씀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후에도 자신의 방언 체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방언을 금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는 동기를 줄 것입니다.
셋째는 ‘방언 중립’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깊이 연구해 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오늘날 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런 입장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방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앞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방언 은사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진리는 분명 ‘예’와 ‘아니오’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잠정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있지만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방언’에 대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촉매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자에게 드리는 글
‘옥성호가 왜 갑자기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실 독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3부작 중 마지막 남은 3편『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하루빨리 발간되기를 바라던 독자들은 ‘왜『엔부기』부터 먼저 마무리를 하지 중간에 다른 주제를 다루는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합니다. 처음『엔부기』의 목차를 구상할 때,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로 ‘방언과 신유’ 등의 은사문제를 다룰 계획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책을 읽고 연구할수록 ‘오늘날의 방언운동’이 비성경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한 방언을 지지하는 물결이 너무 거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부터 방언을 강조하면서 출발했던 오순절 운동에 속한 ‘순복음 교단’에서부터 ‘장로 교단’에 이르기까지, 정통 교단에서부터 각종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이르기까지 방언 열풍에 휩싸이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방언에 대한 저의 입장은 분명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년 전만했더라도 최소한 장로교로부터는 방언에 대한 저의 입장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대조차 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습니다. ‘방언 문제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너무 많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방언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엔부기』의 내용 중에서 은사 부분을 제외하고 신비주의와 노래 운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습니다. 팔복으로 유명한 김우현 감독이 쓴『하늘의 언어』가 출간되자마자 놀라운 속도로 대부분의 기독교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의 수위를 차지했으며, 연달아 방언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결국『엔부기』중 한 장에서 다루려던 ‘방언’에 대한 내용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아예 정면으로 승부를 보게 되었습니다.『하늘의 언어』를 비롯한 방언을 강조하는 여러 권의 책이, ‘방언’ 문제를 결코『엔부기』의 한 장으로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주제일수록 모호하게 다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부담스런 주제들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 싸울 일도 없고 논쟁할 일도 없습니다. 모호한 태도는 동의할 것도 없지만 거부할 것도 없는 셈이지요. 어쩌면 방언에 대한 많은 교회의 태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방언에 몰두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방언을 부정하자니 부담스럽고 또 방언을 100%받아들이자니 부작용이 너무 만만찮고! 따라서 방언에 대해 적당한 원론적인 선에서 주의를 주면서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바로 오늘 많은 목회자들의 태도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이 평화의 모습이고 바른 태도일까요? 무관심으로 인한 표면상의 평화는 결코 바른 평화가 아닙니다.
이 책은 방언에 대한 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위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책입니다. 은사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방언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게 되면 방언이 교회 또는 개인 신앙에 있어서 차지해야 할 바른 위치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작은 시도입니다.
아마도 이 책으로 인해 한국 교회 안에 ‘방언 논쟁’이 일어나리라 예상됩니다.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논리와 이론이 사라진 싸움판은 잘못된 곳이지만 논리와 이론으로 최선을 찾는 과정인 논쟁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논쟁이 있을 수 없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논쟁이 없다면 오히려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 세상에서 3년간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은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놓고 논쟁하셨습니다.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한 과정 중에 논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논쟁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 그 논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논쟁을 진행할 때는 반드시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복음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한 우리는 다 형제 자매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이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방언에 대해 저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도 형제로서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사랑이 빠진 논쟁은 말 그대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들을 이론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성경보다 체험이 주는 실제성에 더 기울어진 분들이 이 책을 통해 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도전을 얻기 바랄 뿐입니다. 그 다음은 성령께서 하실 몫입니다.
제가 제기하는 이 논쟁의 목적은 말씀의 가르침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논쟁하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논쟁합니다. 제대로 순종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로 깨달을 때 말씀에 바르게 순종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은 저를 일어서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이 책을 비생산적 논쟁의 산물로 보는 대신 순종을 소망하는 믿음의 열매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타협에 의한 일치가 아닌 순종에 의한 일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이 견지하는 입장에 읽는 분 모두가 다 동의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대 하나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이 성경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방언 문제에 대해 ‘과연 성경은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의 마음 속에 타 오르기 바랍니다.
글을 열며 : 말씀이냐 체험이냐
방언 열풍 :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세상 모든 일이 두부 자르듯 정확하게 잘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의 가치 판단과 세상의 가치 판단이 충돌하는 영역은 점점 더 늘어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을 힘들게 하는 것이 성경과 세상의 충돌만은 아닙니다. 같은 성경을 믿는 신자들 간의 충돌이 사실은 더 크고 심각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성경 속에는 딱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많은 개념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기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상충된 주제가 서로 충돌하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는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이처럼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대상까지도 막상 파고들어가면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주제가 가득 찬 성경 안에서 명확하게 정의 내려진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방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무엇이다.’라고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 내려져 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2).
즉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라는 정의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고린도전도, 로마서, 에베소서, 그리고 베드로후서 등 네 군데에 걸쳐 방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이 중에서 방언이 언급된 곳은 고린도전서가 유일합니다. 따라서 만약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방언은 참으로 쉽게 정의 할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성경들 속에 언급된 은사들에 대한 정의는 성경 주석 학자마다 다 다릅니다. 한 예로 믿음의 은사를 비롯해서 많은 은사에 대해 바울은 전혀 설명하거나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정의를 내린 유일한 은사가 바로 방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모든 은사에 있어서만은 서로 의견이 다르고 충돌할 수 있어도 방언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신학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만큼 신학적 견해가 극과 극으로 충돌하는 은사도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런 위험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이 방언에 대해서만은 정말로 예외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특정 은사에 대해 고린도전서 14장처럼 자세히 설명한 곳은 없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한 특정 은사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처럼 경계의 대상이 된 적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언은 바울로부터 실로 특별한 관심과 대접을 받은 은사였습니다.
방언이 가진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이미 고린도 교회에서부터 발견한 바울은 방언을 분명히 정의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행동 지침까지 명시합니다. 바울이 방언을 그토록 특별하게 취급한 이유는 단 하나, 방언이 잘못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전혀 설명하지 않은 다른 많은 은사들보다 방언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단지 다른 은사들보다 잘못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의도한 만큼 성경을 통해 방언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바울이 그토록 심혈을 쏟아 설명한 방언에 대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주관적 견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직까지 성경이 정의하는 방언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과 본질에 비춰서 파악된 위치와 역할을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방언이 신앙생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방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가장 프로그래머티즘적인 은사, 방언
제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썼듯이 마케팅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이 들어와 자리잡은 데는 ‘효과가 있으면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라는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입니다. 교회의 마케팅과 관련해서 하나의 잘못된 전제가 바탕에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근거해서 무조건 사람들을 교회 속에 끌어다 모으면 된다는 잘못된 전제 말입니다. 기본 전제가 잘못되면 그에 따르는 다른 확신들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를 우리는 방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방언을 적극 지지하는 많은 사람의 경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을 주의 깊게 살피기에는 방언이 주는 효과에 이미 너무 깊이 취해 있습니다. 이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오해가 마케팅을 부추기듯 많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방언에 빠져들게 하는 잘못된 전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이 못하는 한 우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언제라도 범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입으로는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말씀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나의 체험을 검증하는 대신 나의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왜곡합니다. 입으로는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말씀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온다』라는 책을 쓴 하비 콕스Harvey Cox의 말대로 오늘날 교회 안의 현실은 말씀과 체험의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콕스는 결국 오래지 않아 체험이 말씀을 밀어 내고 더 이상 교리에 얽매인 교회가 아니라 개인마다 자유로운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의 예상은 이미 현실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말씀과 체험의 싸움은 생각만큼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 말씀 속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문자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고정관념으로 제한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을 문자로 가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듯 하는 말입니까? 그러나 사탄은 정말 교묘합니다. 사탄은 성경의 권위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까지도 기꺼이 동원하려 합니다.
체험과 성경의 싸움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려고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지 말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제한하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결국 말씀 너머에 있는 체험을 믿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일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데 왜 나를 말씀으로 제한하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을 제한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체험을 제한해서 화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싸움의 중심에 있습니다. 체험 아래에 말씀이 놓이는지 말씀 아래에 체험이 놓이는지를 놓고 벌이는 큰 영적 전투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치열해질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성경이 정의하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이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말씀에 비추어 나의 체험을 해석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 사이의 상관관계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약 3년간 머물던 AD 55년경에 씌어졌고, 사도행전은 AD 65년경에 씌어졌다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따라서 방언이 등장한 최초의 성경은 사도행전이 아닌 고린도전서입니다. 게다가 최초로 성경에 등장한 방언은 권장할 대상으로서의 은사가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서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 사건들을 살펴보는 거울로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유일한 성경 구절일 뿐 아니라 방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통해 방언의 본질을 해석하기보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해석하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받아야 하며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순종해야 하는 한편, 성경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다고 묘사된 것들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묘사하는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 안에 설명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을 제공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다른 곳에 나오는 교리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담고 있는 수많은 사건은 예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1부. 사도행전의 방언
01 방언의 첫 번째 등장 : 오순절 사건(행2:1~22)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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