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해야할운동

방언 일시적 은사

방언 일시적 은사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조그만한 도시 고신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청년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알파코스를 도입하셔서 저희 교회는 매주일 성령님을 초청하며 은사가 풀어지기를 고대하는 교회에서 고민하고 신앙생활하는 중에 말씀을 읽다가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1절~22절의 방언에 대한 사도방울의 해석이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가 방언을 긍정적 은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나 합니다.

방언이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와 21절이 적절하게 연결이 되지 안네요^^ 그리고 사도행전의 방언들과도 적절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추천도서가 있으시면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파코스를 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단회적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으로 보는 관점이 오히려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본문을 깊이 있게 보지못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게 되 사도행전 강해를 듣지만 항상 아쉬움이 있어서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사역자가 사라지는 오늘날에 목사님의 설교와 복음 메세지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청년의 행실을 깨끗게 한다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좁은길을 가는 말씀의 사역자가 있어서 먼 학국땅에서도 인터넷으로 말씀을 함께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님에게...

 
답변 드립니다.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 간단하게 묘사하였지만, 은사주의 관점에서 알파코스를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전형적으로 교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알파코스의 신학적 문제점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저희 연구회 카페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 혹시 한국의 장로교단 중의 하나인 고신측에 속한 교회여서 고신교회라고 소개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알파코스는 한국의 주요 4대 교단(합동, 통합, 합신, 고신) 총회에서 불건전한 프로그램으로 규정하고 자체적으로 이단사이비연구협의회를 구성하여 면밀하게 조사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쓴 ‘개혁신학 관점에서 본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 실체’(부제:현대 교회 은사주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이라는 글을 꼭 참조해 보시길 바랍니다. 본 카페 <2차 공개강좌 : 교회론> 코너에 포스트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카페 검색창을 활용하시면 알파코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각설하고, 님의 물음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님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과 22절 내용이 본문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들과도 상호간의 의미 연결이 잘 안된다는 고충을 토로하셨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 을 가지고서 두 절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제기할만한 의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문맥과 이 두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원의적 메시지를 고려하면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방언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며, 나아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실체에 관한 허구성을 여실히 확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먼저 고전 14:21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이사야서의 일부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8:11, 12에서 따 온 것인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사야서 히브리어 본문 자체를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직접 번역하고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이 방언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은 22절 내용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하나의 근거와 예증으로서 21절에서 이사야서에 언급된 한 구절을 임의적으로 삽입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본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 앞에서 패역해가는 유다를 향해 북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을 경계 삼아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는 경고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이스라엘과 동일한 태도로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급기야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즉 유다의 압제자였던 앗수르의 말로서로 그들을 교훈하셨습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이 앗수르 언어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와 히브리인을 향해 이방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담은 신적 행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배역과 배도를 일삼는 유다에게 장차 나타나게 될 심판에 대한 일종의 표적이었습니다.

 
혹자는 21절을 마치 하나님께서 방언, 그것도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뜻을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이상한 방언을 허용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사야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의적 해석입니다. 유명한 구약 성경 주석자 레스키(Lenski)도 밝혔듯이, 이사야 히브리어 원문은 ‘방언의 은사’와도 하등 상관없는 구절입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본문을 ‘방언’과 관련해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방언은 무아지경의 뜻 모를 말이 아니라 뜻과 의미가 분명한 외국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2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언급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방언에 대해 율별난 관심을 가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를 질책하기 위하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방언에 관한 지나친 남용과 왜곡으로 교회의 본질적 자태로부터 멀어져 가는 교회를 향해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선지자의 글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방언을 가리켜,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이 바로 앞 절에서 인용한 이사야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언어를 통하여 계시를 전하신 것은 유대인든, 비유대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불신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신약 교회에 나타난 방언도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도 방언을 하나님의 뜻을 전달코자 하는 강력한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곧 신약의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섭리가 혈통적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미치고 있음을 기적적으로 보여주는 은사였습니다. 방언으로 인해 이제 모든 민족에게 모든 언어로 복음이 선포되고, 이해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방언과 신약의 방언과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방언은 불순종한 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표적이었다면, 신약의 방언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자들을 향한 축복의 상징으로서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방언은 구약에서 신약 시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방언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변화의 징표로서 방언은 표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 나타난 방언은 곧 그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 시대가 끝남에 따라 방언도 마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명료한 계획과 뜻이 표적이 아닌 말씀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기록되기 전까지 교회에 부어주신 잠정적인 은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표적들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표적는 표적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분명한 뜻이 전달되어지면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잠정적인 수단이기는 하였지만, 표적 자체가 항구적인 계시로서 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과 정통 교회 역사를 조금만 면밀히 살피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방언을 이해하였습니다. 칼빈은 방언과 신유와 같은 기적적인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 같이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한 것들이었으며, 사도 시대 이후에 사라졌다고 봅니다. 또한 사도행전이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의미를 구별할 수 있는 외국 언어로 봅니다. 따라서 통역의 은사 역시 신비한 언어를 해석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방 언어를 번역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방언은 모든 민족들이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복음을 선포하고 믿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과시와 허영에 빠져서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고린도전서 주석).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은사로서 예언을 강조합니다. 방언 은사의 종결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고전 14:22절의 ‘예언’마저도 가까운 장래나 먼 미래의 일을 거침없이 예고하는 초자연적 은사로서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는 이러한 방식의 예언 행위를 방언과 더불어 오늘날 교회에 가장 중요한 은사로 여깁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방언과 대비하여 강조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한 언어로 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일을 말합니다. 칼빈은 고린도 전서 주석을 통해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 당시까지만해도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은사로서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는 없거나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주석 12장, 기독교강요Ⅳ.3.4).

 
오늘날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예언은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즉 설교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선포됨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며, 믿음이 바르게 자라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좋은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저는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가장 좋은 성경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 방언에 대하여는 그들과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신약 시대에 경험했던 방언이 완전히, 전적으로 사라졌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방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확신을 갖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표적이 계시를 대체할 수 없듯이 방언이 예언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방언의 은사가 희미하게나마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본래적 역할과 기능을 절대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오늘날 현대 교회에 열풍처럼 번져가는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유심히 관찰해 볼수록 성경에 묘사된 방언과 그 어떤 의미있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현대 교회 안에 방언에 관심 있는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러한 은사를 통하여 어떤 종류의 교회와 신학과 신앙을 추구해 가는지를 살펴보세요. 그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겸손하게 진리 앞으로 나아와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지를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착념과 영적 분별과 영적 성숙이 동일한 믿음과 고백 가운데 교회와 성도를 하나 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보세요. 그리고 어떤 은사라도 자신의 의와 자랑의 수단으로 삼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의 덕과 성도간의 유익을 위하여 활용하는지 지켜보세요. 만약 이런 열매를 하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면... 그건 백프로(100%) 가짜 (방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참고할만한 추천도서를 소개해 달라고 하셨는데요. 찾아보는 중입니다. 조만간 별도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더불어 늘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Jun 17, 2009

주나그네 목사
[출처]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관한 답변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34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