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이비의 내면세계
[특집 심층칼럼]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이비의 내면세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님들과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올려진 글이 장문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워온 가치관의 원천과 관련된 행간에 숨겨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할 필요가 있으며 의문이 계시면 토론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뉴저지 하나임 교회의 성도님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취한 것이 아닌 인간의 사상과 언어와 감성에 중독되어 고통을 받는 분들은 반드시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4개월 전에 신학과 사상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서울의 A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로부터 몇 권의 책과 자료를 전해 받았다. 그 친구를 아끼는 주위의 목회자들이 사이비사상을 전하는 멧세지니 그와 멀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하였다.
본인으로서는 판단이 잘 되지 않아서 거듭 고민을 하다가 어릴 때 같이 신앙훈련을 받았던 내가 기억이 나서 관련 자료를 보냈다는 것이다. 친한 친구의 부탁이기도 하여 시간을 내서 자료를 읽게 되었다. 마침 A목사님이 근처에 강연회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기에 들어보기도 하고 잠깐 시간을 내어주셔서 식사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나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사람의 평생과 철학과 사상과 가치관을 몇 권의 설교집과 나눔을 통해서 수 개월내에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며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의 언어는 생각의 결과이고 생각은 곧 내재된 가치관과 배경을 보여주는 단면이기에 인내를 가지고 숨은 의미를 느끼고 분석해보았다.
그 분의 저서들에는 지성과 감성적인 매력적인 글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에서 오는 지적욕구와 더불어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전달하는 언어자체와 의미는 매우 이상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데, 무엇인가 딱 집어서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마 비치의 광활한 하얀 백사장, 푸른 바다, 파아란 하늘 아래서 한편의 시나 수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독특한 무엇인가 있었다.
설교집을 읽는 동안 시간이 갈수록 성경적인 진리를 사랑하는 나의 사고와 가치관과 충돌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글 속에서 티벳승 달라이 라마, 베트남승 틱낫한의 멧세지와 성경말씀을 비빔밥처럼 혼합하면서 풀어나가는 그의 지성과 감성의 넓은 폭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수 많은 책과 명상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들로 채워져 있었다.
예를 들어보겠다
“통렌(tonglen)이란 말은 내보내고 들여보낸다는 뜻이랍니다. 호흡에 맞추어 숨을 들여마실 때에 세상의 온갖 무겁고 어둡고 더러운 것을 자기 몸에 들여보내고 내 쉴 때에는 반대로 가볍고 환하고 깨끗한 것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무겁고 어둡고 더러운 것을 내놓고 가볍과 환하고 깨끗한 것을 마시려 하는 게 세상이므로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참된 보살도라는 논리더군요. 그렇게 호흡을 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를 기대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또 다른 부분을 인용해 본다.
“저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오래 전부터 품고 살았습니다. 좋은 소원을 품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 소원을 내려놓아야겠습니다. 제가 그런 소원을 품고 있는 한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사람은 깨끗해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물론 저에게 이것은 그대의 허물이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에 대한 저의 대답은 예수님의 말투를 빌려서 조금 황송하긴 합니다만 이 한 마디입니다. -그건 당신의 말이외다-“
내가 정리할 수 있었던 A목사님의 멧세지에 대한 결론적인 소견은 “진리와 거짓을 가름하는 객관적인 인간의 기준은 없다는 것이며 다만 나를 아는 것과 나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닌 모두가 옳다” 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A목사님의 글을 종합하면, 지금의 시대가 진리는 없으며 진리라고 일컫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이다.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고 사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간사상이 우리와 가정과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그 진리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진리라고 믿고 있으니 진리이며, 반대로 믿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개인의 생각도 진리이니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A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지성들이 티벳승이자 노벨평화상수상자인 달라이라마, 틱 낫한, 문다카 우파니샤드, 라마나 마하르쉬에 열광하는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유는 지금의 시대사조와 분위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에 젖어잇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종교를 미신으로 공격하였던 모더니즘(modernism)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을 관용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다. 가능한 쉽게 풀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야구 심판의 예를 들어보겠다.
(a) 모더니즘 이전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b) 모더니즘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c)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내가 볼이라고 하고 싶으면 볼, 스트라이크라고 하고 싶으면
스트라이크라고 판단할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경적인 절대 진리를 지켜야 산다는 시대에 그러한 진리를 배웠던“사람”들이 청교도적인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와 결탁하여 종교이념화되어 종교재판 및 종교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죽어가는 시대가 있었다.
이러다 결국, 인간의 진보와 발전과 이성을 믿고서는 과학과 역사를 통해서 해석하는 것이 지고의 선이라는 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미신이며, 특히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진화론이 교육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이지만 절대진리의 존재를 믿었다.
그런데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과 과학이 세상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에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모든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체계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객곽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과거의 신념이 무너지고 결국 “진리는 없다” 는 신념이 퍼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모든 문화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서 진리는 주어진 자료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반응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발견하지 않는다. 내가 곧 진리의 원천이다” 라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예수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 다는 성경적인 절대진리를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라고 맹비판하는 뉴에이지즘이나 다원주의사상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더니즘은 종교를 미신이라고 공격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종교를 용인하고, 심지의 모든 종류의 미신까지 존중하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영적 활동을 다 인정해 주는 관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이즘 시대에 세칭 진보적이며 자유롭고 지성적인 목회자들의 공통된 태도는 바로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맹공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술 담배문제, 이혼문제, 동성애문제 등 도덕을 판단하는데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포스트모던이즘에 젖어 있는 목회자들은 도덕이란 단지 개인의 심리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나는 이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해” 라는 말은 포스트모던이즘의 목회자들에게는 “나는 이러한 도덕적인 편견을 갖고 있어” 라는 말과 똑 같다.
따라서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결혼관, 부부생활, 이혼문제, 주초문제, 동성애문제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향해서 늘 등장하는 상투적인 말이 바로 편협한 기독교 독선주의자, 또는 바리새인, 율법주의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도덕을 객관적인 준칙이 아닌 개인의 편견과 독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진리로 믿는 것이 있으면 혼자서만 조용히 믿으면 된다” 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회자들의 사상인 것이다.
따라서 언론이나 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하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도 괜찮다는 생각응 잘못이라는 것이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신념이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사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권리와 법에 명시되어진 셈이며,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없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는 사상 속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관용도 없고, 독선적이며 편견적인 면도 있었다. 인종차별, 엘리트주의, 편협한 교리주의와 같은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책임이 있다. 다른 교파와 종교에 속한 사람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은 본질상 이성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만약 법과 종교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욕망에 이끌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와는 금지된 선악을 아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감추인 매력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보다 더 좋게 여겼다.
그런데, 인간을 그대로 놓아두면, 내재된 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르기 보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 쉽상이다. 도덕의 근본원리가 해체된 상황에서는 모든 행위를 관용하자는 분위가 팽배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영성 및 내적치유세미나에서 사람들은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어, 그것은 나의 일부야, 내가 가장 좋게 느껴지는 것을 하라” 고 듣고 있으며 그러한 가르침이 대단히 매력적이며 치유적이고 감성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는데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있는 목회자들 또는 영성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사고패턴은 “좋게 느끼면 있는 그대로 행하라! 좋게 느끼면 그것이 곧 너에게 옳은 것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며 건강한 심령이다.” 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자아”가 하나님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가 상처를 받든지,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 속에서 아무 일이나 서슴없이 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경험한 것이 곧 진실인데, 당신이 뭔데 판단하고 상관하는 것이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릇된 사조의 가르침을 받은 개인들은 이제 가정과 교회에는 반드시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사고로 인하여 상처를 치유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즉, 가르치는 목회자로서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처음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고 받는 Bad Cycle에 말려 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어떤 사건과 사상을 판단을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분열하지 말고 연합해야 한다”, “개인적인 편견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관용해야 한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죄와 비양심과 비도덕성을 지적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이 하는 편협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이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 는 말씀을 먼저 내세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관, 무분별한 관용, 육체적인 즐거움, 이기적인 개인주의 따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인 분위기 탓이다.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강력한 증인과 교회의 거룩이 필요하건만 이제 우리는 편협과 독선과 판단만 하는 사랑과 관용이 없는 사람으로 몰아 부칠 때 마음이 소심해지고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속에 휘말린 이 시대는 이제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는 사고 방식에 젖어, 그만 세속적인 가치관이 제멋대로 번성하도록 방치하고, 다른 복음이 버젓이 교회 안에 자라고 있는데도. 아무나 나서서 경종을 울리지 않고 있으며, 도처에 만연된 거짓선생과 거짓 목자들의 정체를 밝히것도 어려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목소를 높여 진리를 수호하는 보기 거친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잘못을 용인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 교회는 종종 추한 모습을 보여왔다. 불필요한 교리논쟁과 도덕성과 인간적인 갈등과 대립도 적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분열과 다툼과 불필요한 갈등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적 가치관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세속화된 가치관과 사상에 대하여 분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전하면서 마음에는 온갖 욕망이 가득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이면서도 거룩한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생각이 조금 돌아가는 분들은 조금씩 눈치를 챌 것이다. 이 시대와 사회와 교회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의 정당한 분별과 판단조차도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으로 몰아부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 속에 깊이 젖어 있으며 이러한 사상을 가진 악한 교사, 거짓교사, 거짓 목회자들이 성경적 절대 진리를 가지고 믿고 따르는 우리를 혼돈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터모더니즘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인간은 그대로 놓아두면 항상 인격적인 믿음과 영적인 지혜와 신앙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르기 보다는 결국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죄성으로 인한 인간의 욕망에 따라 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간음행위를 영(혼)이 연합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이 아닌 영(혼)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에서 흘러나오는 음행을 피해라고 음행이 넘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거듭 권면하였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죄가 죄로 보이지 않게 하는 대단히 악한 사상이다. 포스트머너니즘은 지옥을 지옥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고, 음행을 음행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며, 가정파괴를 가정파괴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교묘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이혼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느냐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반작용과 부작용과 반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를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의 관계, 성령이 교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이 1%라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혼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한 1%의 신앙인격마저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맺어주신 모든 가정들이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특이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된 인격적인 말씀은 무시하면서, 지성적이며, 매력적이며, 감성적인 상담전문가의 말과 사상과 매력적인 표현을 더 절대시하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갈망(욕망)은 이 정도로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수많은 여성들을 상담하는 상담전문가가 도를 닦는 도인이나 수도사가 아닌 이상, 자신을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고 따르는 감성적이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그대로 놓아둘리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 수회는 순수한 상담치료를 목적으로 만난 일종의 치료목적의 관계가 수십회를 넘어가면서 남성인 상담전문가와 여성인 환자의 관계는 치료목적을 넘어서 나이 차이가 난다면 좋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좋은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 또는 좋은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능상 이성(理性)으로 시작하였다가 감정이 개입되는 관계로 전환되는 것은 필수적인 현상이다.
특히, 나의 권리와 가치관과 감정이 철저하게 존중받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 있는 상담전문가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전혀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결국, 지성과 인격적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인인 상담전문가의 아내도 피상담자들의 남편들도 그들의 만남을 누구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도리어 가정에서 아내들의 아름다운 변화와 인격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남편들의 입장은 아내들이 어떠한 순간에 무척이나 힘들어 하고 우울해 하는 일들이 있으면 상담전문가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권유할 정도였다.
사람의 심리에는 굉장히 독특한 면이 있다. 한국적인 가정의 패턴을 보면 생활이나 부부관계가 힘이 들 때는 오직 가정과 아이들과 남편만 운명적으로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내들이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능력이 생기면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삶이나 미모나 감정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의 여성들이 한 때 여성해방주의를 강력하게 부르짖으면서 가정살림과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문제없이 직업적인 소명으로 대수롭지 않게 상담활동을 해오던 남성 상담전문가가 어느날 자신의 환경적, 심리적인 불안 때문에 어떤 모성애에 대한 강한 갈망을 가지거나 반대로 여성 피상담자들은 어떤 강한 부성애를 추구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서로가 만날 때 이제 상담센터에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으로 이동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고, 좀더 발전하게 되면 상담을 주는 입장과 상담을 받는 입장에서 이제는 반대의 경우가 될 때도 있으며, 자신들이 좋다고 여기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는 특별한 친구나 연인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감성을 추구하고 스스로 좋게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인간관계 속으로 돌입하게 되면 이제 자신의 권리와 감정을 더 중시하게 때문에 아내로서 어떤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남편들이 귀찮게 보여지기 시작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 시대의 선악과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상담의 관계이지만 그 내면은 신비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알아주는 이중적인 관계로 만들어져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게 되면 이제는 상담전문가의 아내도, 피상담자들의 남편들도 쉽게 제재를 가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 다시 말하면 얼굴을 보지 않고, 말소리와 표정을 느끼는 만남이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고, 무엇인가 불안하며, 무엇인가 답답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과 공허감의 “상사병”, “상호중독적 관계”로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부작용인 삶의 의욕상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대인공포증과 혐오증에 시달리게 되어 성경을 깊이 묵상하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일시적으로 좋은 상담으로 인하여 가정이 회복되었다고 보았던 부부관계는 이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중독적 관계”로 인하여 내면의 삶은 황폐하게 되며 파괴일로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즉 포스트모던이즘 사상으로 인한 인간내면의 깊은 파멸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은 그대로 놓아두면 지성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도록 되어있다는 만고불변의 성경적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객관적인 절대진리의 기준이 가슴 속에서 사라진 채 개개인의 감정과 권리와 진실을 존중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실제적으로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현실들이다.
전술했단 상담전문가와 피상담자와의 관계 외에도 교회에서 지성적인 말씀과 자신의 강한 사상과 자아와 깊은 감성을 혼합하여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설교자와 지속적으로 들었던 교인들사이에도 똑 같은 "상호중독현상" 이 일어날 수 있다. 일단 "상호중독" 되었다가 어떤 환경적인 변화로 끊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 일종의 부작용으로 서로가 삶의 의욕이 저하되어지며 마음이 허전하고 황폐되어지며, 조그만 일에도 우울하거나 반대로 격한 감정적인 "반사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에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떠난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나며, 교파와 종교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 수 있는 "영성"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으며, 온갖 이단 사이비의 거짓교사와 선지자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시대에 미국과, 한국등에서 두 명 중에 한 명이 이혼하는 조류, 40-50%^이상의 부부들 이혼하고 있다. 즉,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과 느낌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혼외정사, 혼전순결의 무시, 성전환, 도덕의 타락, 스와핑, 동성연애자결혼허용, 술담배, 마리화나, 매춘, 마약, 동성연애자목수안수, 타종교인정, 다원주의, 뉴에이지사상 등이 창궐하고 있으며, 세칭 지성적이고 열려있다는 목회자들일수록 이러한 일에 대하여 품고, 허용하고 관용하고 품어주자는 분위기가 왜 형성되어 왔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관용해야 하며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일종의 진실로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는 인간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도 깊히 침투해 있다.
작금에 교회내에서도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여성들에게 상담해 주는 것이 무엇인 나쁘냐?”,“이혼한 사람이 목사안수 받는 것이 왜 나쁘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왜 나쁘냐?” 는 것에 대하여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서 권면하고 경계하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라고 덮어 본인들은 굉장히 사랑이 많고 의로운 척 하면서 영적무지와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당신들은 무죄한 스데반에게 돌을 친 유대인들, 창녀와 세리와 이방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인들과 율법사들과 같다”고 설교를 통해서 은근하게 암시하면서 항의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다.
포스터모더니즘 속에서 객관적인 도덕기준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혼율이 50%나 되며, 주초문제나 혼전순결, 혼외정사, 동성애에 대한 판단이 이제 전근대적인 정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말씀의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를 무너뜨리고서, "그것은 당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 하면서 계속적으로 권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죄한 자를 핍박하는자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의 불의를 감추고 싶은 사람들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 무조건 관용과 개인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이미 깊이 젖어있는 어린 영혼들의 감성에 간절히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호소에 어린 영혼들은 어느 사이에 교회내에서 성경적인 거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이성문제, 이혼문제, 술담배문제, 인격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을 바리새파나 율법사와 같은 정죄와 판단으로 무죄한 스데반을 돌로 치고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악한 사람들과 같다는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이념화의 방향성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어린 영혼뿐만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신앙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조차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성도들이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성경적인 기준과 통찰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지난 죄들을 숨기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교역자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고 나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는 사람들의 최고의 변명 무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들고 치려는 자들을 보고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구절이다. 즉 이것은 어떻든지 간에 무조건 사랑으로 덮어주고 관용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무식한 어부인데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곧 바로 어부직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부족하고 허물이 있으니 서로 용납하고 관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허물 많고 약점이 많으며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실격인 베드로가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누구라도 포용하고 누구라도 용서하고 누구라도 관용하자고 할 수 있는 은혜시대의 성령공동체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성령을 속이고서 재산을 전부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모습은 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랑공동체이면서, 거룩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이즘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이 가지는 리더쉽의 특징은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에게 맹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관대하고 감성적이며 관용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차별에 가까울 정도로 (1)사람들을 고립시키고, (2) 사람들을 위협하고, (3) 사람들을 이용하는 3원칙 속에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만약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그 당시 사도 베드로 앞에 있었더라면 사랑없음과 무관용을 격하게 항의했을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돌 맞아 죽을 간음한 여인도 변호하시고 살리셨으며, 창녀와 세리와 친구가 되셨고, 그 현장에 당신도 있었으며, 더욱이 베드로 당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결점이 많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당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전부도 아닌 일부의 땅을 숨겼다고 해서 죽음을 선언한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라면서 베드로의 과거 실수와 판단을 맹렬하게 성토할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인본주의, 개인주의, 타락한 도덕관과 가치관과 죄악들은 21세기에 갑작스럽게 도래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아시대의 사람의 타락, 아브라함, 모세, 사사, 열왕, 포로시대, 예수님이 오셨던 유대사회 그리고 사도들과 교회들의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똑 같이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보다는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가치관 판단을 진리로 여겼던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이 범람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세상의 문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사회, 심지어 교회도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와 사상에 젖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말씀을 지키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며, 바리새적이고 율법적이며, 종교적인 의를 내세우는 자로 매도하고 있는 시대와 사조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선교, 전도생활, 성경읽기, 이혼금지, 주초금지, 혼전순결유지, 혼외정사금지, 동성애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부 독선적인 종교적인 편견으로 취급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 시대는 많은 목회자들 중에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간음을 하여도, 술을 마셔도, 담배를 피워도, 주일을 함부로 범해도, 세속적인 유행가를 즐겨 불러도 아무도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도리어 그러한 목회자들이 가슴이 열려 있고, 째째하지 않으며, 지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분위기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서 높은 성경적인 가치기준을 내 세우고서 사랑과 더불어 거룩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나 정죄를 일삼는 사람들로 매도를 당하는 시대이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우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세속화되고, 음란하며, 본능에 따라 살게 되어 결국에는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시대사조에 휘말려 들어가 내 영혼이 다치게 된다.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그러한 사조 속에 있는 개인의 영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부부관계는 황폐해지며, 자녀와의 관계는 더 이상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영적권위를 내세우지 못하는 어둠의 시대에 접어 들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영혼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는 순전한 인격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들이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단 사이비 사상에 깜박 속아 넘어가기 쉽상이다.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속은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조와 사상이면서, 겉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위장하고서 악한 사상과 그릇된 가치관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들로서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영육간에 건강하게 되는 방법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인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혜사 성령님께 날마다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누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 속에 깊이 잠길 때만이 세상과 죄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삶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사상과 중독상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과 말씀으로 새교회가 충만해지고, 주안에서 뜨겁세 사랑하는 동시에 거룩을 회복할 때, 지체된 우리의 모습과 가정들은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가치가 있으며, 가장 생명이 풍성하다는 인식을 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사상에서 벗아 날 수 있을 것이다.
병 속에 들어 있는 나쁜 공기를 빼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을 채우면 저절로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악한 사조와 중독된 사상을 빼는 방법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육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기본인 말씀을 말씀 그대로 먹는 말씀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체내의 시계가 작동하여 울음을 터뜨리면서 젖을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갈급함으로 말씀을 먹고 싶은 갈망을 달라고 보혜사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말씀의 무기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외우고 묵상하면서 나의 사상과 가치관을 다시 한번 재점검하고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출처: 복음과 희망/개혁성도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godgod/7157559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님들과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올려진 글이 장문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들이 배워온 가치관의 원천과 관련된 행간에 숨겨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할 필요가 있으며 의문이 계시면 토론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뉴저지 하나임 교회의 성도님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취한 것이 아닌 인간의 사상과 언어와 감성에 중독되어 고통을 받는 분들은 반드시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4개월 전에 신학과 사상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서울의 A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로부터 몇 권의 책과 자료를 전해 받았다. 그 친구를 아끼는 주위의 목회자들이 사이비사상을 전하는 멧세지니 그와 멀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하였다.
본인으로서는 판단이 잘 되지 않아서 거듭 고민을 하다가 어릴 때 같이 신앙훈련을 받았던 내가 기억이 나서 관련 자료를 보냈다는 것이다. 친한 친구의 부탁이기도 하여 시간을 내서 자료를 읽게 되었다. 마침 A목사님이 근처에 강연회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기에 들어보기도 하고 잠깐 시간을 내어주셔서 식사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나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사람의 평생과 철학과 사상과 가치관을 몇 권의 설교집과 나눔을 통해서 수 개월내에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며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의 언어는 생각의 결과이고 생각은 곧 내재된 가치관과 배경을 보여주는 단면이기에 인내를 가지고 숨은 의미를 느끼고 분석해보았다.
그 분의 저서들에는 지성과 감성적인 매력적인 글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에서 오는 지적욕구와 더불어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전달하는 언어자체와 의미는 매우 이상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인 내용을 품고 있는데, 무엇인가 딱 집어서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마 비치의 광활한 하얀 백사장, 푸른 바다, 파아란 하늘 아래서 한편의 시나 수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독특한 무엇인가 있었다.
설교집을 읽는 동안 시간이 갈수록 성경적인 진리를 사랑하는 나의 사고와 가치관과 충돌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글 속에서 티벳승 달라이 라마, 베트남승 틱낫한의 멧세지와 성경말씀을 비빔밥처럼 혼합하면서 풀어나가는 그의 지성과 감성의 넓은 폭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수 많은 책과 명상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들로 채워져 있었다.
예를 들어보겠다
“통렌(tonglen)이란 말은 내보내고 들여보낸다는 뜻이랍니다. 호흡에 맞추어 숨을 들여마실 때에 세상의 온갖 무겁고 어둡고 더러운 것을 자기 몸에 들여보내고 내 쉴 때에는 반대로 가볍고 환하고 깨끗한 것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무겁고 어둡고 더러운 것을 내놓고 가볍과 환하고 깨끗한 것을 마시려 하는 게 세상이므로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참된 보살도라는 논리더군요. 그렇게 호흡을 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를 기대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또 다른 부분을 인용해 본다.
“저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오래 전부터 품고 살았습니다. 좋은 소원을 품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 소원을 내려놓아야겠습니다. 제가 그런 소원을 품고 있는 한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사람은 깨끗해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물론 저에게 이것은 그대의 허물이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에 대한 저의 대답은 예수님의 말투를 빌려서 조금 황송하긴 합니다만 이 한 마디입니다. -그건 당신의 말이외다-“
내가 정리할 수 있었던 A목사님의 멧세지에 대한 결론적인 소견은 “진리와 거짓을 가름하는 객관적인 인간의 기준은 없다는 것이며 다만 나를 아는 것과 나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닌 모두가 옳다” 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A목사님의 글을 종합하면, 지금의 시대가 진리는 없으며 진리라고 일컫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것이다.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고 사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간사상이 우리와 가정과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그 진리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진리라고 믿고 있으니 진리이며, 반대로 믿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개인의 생각도 진리이니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A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지성들이 티벳승이자 노벨평화상수상자인 달라이라마, 틱 낫한, 문다카 우파니샤드, 라마나 마하르쉬에 열광하는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유는 지금의 시대사조와 분위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에 젖어잇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종교를 미신으로 공격하였던 모더니즘(modernism)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을 관용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다. 가능한 쉽게 풀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야구 심판의 예를 들어보겠다.
(a) 모더니즘 이전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b) 모더니즘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c)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야구심판은 “투구에는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다.
나는 내가 볼이라고 하고 싶으면 볼, 스트라이크라고 하고 싶으면
스트라이크라고 판단할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경적인 절대 진리를 지켜야 산다는 시대에 그러한 진리를 배웠던“사람”들이 청교도적인 삶으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와 결탁하여 종교이념화되어 종교재판 및 종교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죽어가는 시대가 있었다.
이러다 결국, 인간의 진보와 발전과 이성을 믿고서는 과학과 역사를 통해서 해석하는 것이 지고의 선이라는 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미신이며, 특히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진화론이 교육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이지만 절대진리의 존재를 믿었다.
그런데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과 과학이 세상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에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모든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체계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객곽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과거의 신념이 무너지고 결국 “진리는 없다” 는 신념이 퍼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모든 문화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있어서 진리는 주어진 자료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반응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발견하지 않는다. 내가 곧 진리의 원천이다” 라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국 "예수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 다는 성경적인 절대진리를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라고 맹비판하는 뉴에이지즘이나 다원주의사상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더니즘은 종교를 미신이라고 공격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종교를 용인하고, 심지의 모든 종류의 미신까지 존중하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영적 활동을 다 인정해 주는 관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이즘 시대에 세칭 진보적이며 자유롭고 지성적인 목회자들의 공통된 태도는 바로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맹공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술 담배문제, 이혼문제, 동성애문제 등 도덕을 판단하는데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포스트모던이즘에 젖어 있는 목회자들은 도덕이란 단지 개인의 심리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나는 이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해” 라는 말은 포스트모던이즘의 목회자들에게는 “나는 이러한 도덕적인 편견을 갖고 있어” 라는 말과 똑 같다.
따라서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결혼관, 부부생활, 이혼문제, 주초문제, 동성애문제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향해서 늘 등장하는 상투적인 말이 바로 편협한 기독교 독선주의자, 또는 바리새인, 율법주의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도덕을 객관적인 준칙이 아닌 개인의 편견과 독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진리로 믿는 것이 있으면 혼자서만 조용히 믿으면 된다” 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회자들의 사상인 것이다.
따라서 언론이나 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하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도 괜찮다는 생각응 잘못이라는 것이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신념이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사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권리와 법에 명시되어진 셈이며,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없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는 사상 속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관용도 없고, 독선적이며 편견적인 면도 있었다. 인종차별, 엘리트주의, 편협한 교리주의와 같은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책임이 있다. 다른 교파와 종교에 속한 사람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은 본질상 이성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만약 법과 종교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욕망에 이끌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와는 금지된 선악을 아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감추인 매력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보다 더 좋게 여겼다.
그런데, 인간을 그대로 놓아두면, 내재된 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르기 보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 쉽상이다. 도덕의 근본원리가 해체된 상황에서는 모든 행위를 관용하자는 분위가 팽배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영성 및 내적치유세미나에서 사람들은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어, 그것은 나의 일부야, 내가 가장 좋게 느껴지는 것을 하라” 고 듣고 있으며 그러한 가르침이 대단히 매력적이며 치유적이고 감성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는데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 속에 있는 목회자들 또는 영성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사고패턴은 “좋게 느끼면 있는 그대로 행하라! 좋게 느끼면 그것이 곧 너에게 옳은 것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며 건강한 심령이다.” 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자아”가 하나님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가 상처를 받든지,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관 속에서 아무 일이나 서슴없이 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경험한 것이 곧 진실인데, 당신이 뭔데 판단하고 상관하는 것이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릇된 사조의 가르침을 받은 개인들은 이제 가정과 교회에는 반드시 "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사고로 인하여 상처를 치유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즉, 가르치는 목회자로서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처음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고 받는 Bad Cycle에 말려 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어떤 사건과 사상을 판단을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분열하지 말고 연합해야 한다”, “개인적인 편견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관용해야 한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죄와 비양심과 비도덕성을 지적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이 하는 편협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이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 는 말씀을 먼저 내세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관, 무분별한 관용, 육체적인 즐거움, 이기적인 개인주의 따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인 분위기 탓이다.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강력한 증인과 교회의 거룩이 필요하건만 이제 우리는 편협과 독선과 판단만 하는 사랑과 관용이 없는 사람으로 몰아 부칠 때 마음이 소심해지고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속에 휘말린 이 시대는 이제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자”는 사고 방식에 젖어, 그만 세속적인 가치관이 제멋대로 번성하도록 방치하고, 다른 복음이 버젓이 교회 안에 자라고 있는데도. 아무나 나서서 경종을 울리지 않고 있으며, 도처에 만연된 거짓선생과 거짓 목자들의 정체를 밝히것도 어려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목소를 높여 진리를 수호하는 보기 거친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잘못을 용인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 교회는 종종 추한 모습을 보여왔다. 불필요한 교리논쟁과 도덕성과 인간적인 갈등과 대립도 적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분열과 다툼과 불필요한 갈등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적 가치관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세속화된 가치관과 사상에 대하여 분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전하면서 마음에는 온갖 욕망이 가득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이면서도 거룩한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생각이 조금 돌아가는 분들은 조금씩 눈치를 챌 것이다. 이 시대와 사회와 교회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의 정당한 분별과 판단조차도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으로 몰아부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 속에 깊이 젖어 있으며 이러한 사상을 가진 악한 교사, 거짓교사, 거짓 목회자들이 성경적 절대 진리를 가지고 믿고 따르는 우리를 혼돈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터모더니즘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인간은 그대로 놓아두면 항상 인격적인 믿음과 영적인 지혜와 신앙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르기 보다는 결국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죄성으로 인한 인간의 욕망에 따라 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간음행위를 영(혼)이 연합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이 아닌 영(혼)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에서 흘러나오는 음행을 피해라고 음행이 넘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거듭 권면하였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죄가 죄로 보이지 않게 하는 대단히 악한 사상이다. 포스트머너니즘은 지옥을 지옥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고, 음행을 음행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며, 가정파괴를 가정파괴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교묘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이혼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느냐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반작용과 부작용과 반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를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의 관계, 성령이 교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이 1%라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혼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한 1%의 신앙인격마저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맺어주신 모든 가정들이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특이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된 인격적인 말씀은 무시하면서, 지성적이며, 매력적이며, 감성적인 상담전문가의 말과 사상과 매력적인 표현을 더 절대시하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갈망(욕망)은 이 정도로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수많은 여성들을 상담하는 상담전문가가 도를 닦는 도인이나 수도사가 아닌 이상, 자신을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고 따르는 감성적이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그대로 놓아둘리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 수회는 순수한 상담치료를 목적으로 만난 일종의 치료목적의 관계가 수십회를 넘어가면서 남성인 상담전문가와 여성인 환자의 관계는 치료목적을 넘어서 나이 차이가 난다면 좋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좋은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 또는 좋은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능상 이성(理性)으로 시작하였다가 감정이 개입되는 관계로 전환되는 것은 필수적인 현상이다.
특히, 나의 권리와 가치관과 감정이 철저하게 존중받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 있는 상담전문가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전혀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결국, 지성과 인격적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인인 상담전문가의 아내도 피상담자들의 남편들도 그들의 만남을 누구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도리어 가정에서 아내들의 아름다운 변화와 인격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남편들의 입장은 아내들이 어떠한 순간에 무척이나 힘들어 하고 우울해 하는 일들이 있으면 상담전문가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권유할 정도였다.
사람의 심리에는 굉장히 독특한 면이 있다. 한국적인 가정의 패턴을 보면 생활이나 부부관계가 힘이 들 때는 오직 가정과 아이들과 남편만 운명적으로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내들이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능력이 생기면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삶이나 미모나 감정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의 여성들이 한 때 여성해방주의를 강력하게 부르짖으면서 가정살림과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문제없이 직업적인 소명으로 대수롭지 않게 상담활동을 해오던 남성 상담전문가가 어느날 자신의 환경적, 심리적인 불안 때문에 어떤 모성애에 대한 강한 갈망을 가지거나 반대로 여성 피상담자들은 어떤 강한 부성애를 추구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서로가 만날 때 이제 상담센터에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으로 이동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고, 좀더 발전하게 되면 상담을 주는 입장과 상담을 받는 입장에서 이제는 반대의 경우가 될 때도 있으며, 자신들이 좋다고 여기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는 특별한 친구나 연인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감성을 추구하고 스스로 좋게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인간관계 속으로 돌입하게 되면 이제 자신의 권리와 감정을 더 중시하게 때문에 아내로서 어떤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남편들이 귀찮게 보여지기 시작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 시대의 선악과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상담의 관계이지만 그 내면은 신비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고 알아주는 이중적인 관계로 만들어져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게 되면 이제는 상담전문가의 아내도, 피상담자들의 남편들도 쉽게 제재를 가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 다시 말하면 얼굴을 보지 않고, 말소리와 표정을 느끼는 만남이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고, 무엇인가 불안하며, 무엇인가 답답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과 공허감의 “상사병”, “상호중독적 관계”로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부작용인 삶의 의욕상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대인공포증과 혐오증에 시달리게 되어 성경을 깊이 묵상하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일시적으로 좋은 상담으로 인하여 가정이 회복되었다고 보았던 부부관계는 이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중독적 관계”로 인하여 내면의 삶은 황폐하게 되며 파괴일로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즉 포스트모던이즘 사상으로 인한 인간내면의 깊은 파멸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간은 그대로 놓아두면 지성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도록 되어있다는 만고불변의 성경적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객관적인 절대진리의 기준이 가슴 속에서 사라진 채 개개인의 감정과 권리와 진실을 존중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실제적으로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현실들이다.
전술했단 상담전문가와 피상담자와의 관계 외에도 교회에서 지성적인 말씀과 자신의 강한 사상과 자아와 깊은 감성을 혼합하여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설교자와 지속적으로 들었던 교인들사이에도 똑 같은 "상호중독현상" 이 일어날 수 있다. 일단 "상호중독" 되었다가 어떤 환경적인 변화로 끊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 일종의 부작용으로 서로가 삶의 의욕이 저하되어지며 마음이 허전하고 황폐되어지며, 조그만 일에도 우울하거나 반대로 격한 감정적인 "반사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에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떠난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나며, 교파와 종교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 수 있는 "영성"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으며, 온갖 이단 사이비의 거짓교사와 선지자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시대에 미국과, 한국등에서 두 명 중에 한 명이 이혼하는 조류, 40-50%^이상의 부부들 이혼하고 있다. 즉, 포스터모더니즘의 사조 속에서 개인의 감정과 느낌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혼외정사, 혼전순결의 무시, 성전환, 도덕의 타락, 스와핑, 동성연애자결혼허용, 술담배, 마리화나, 매춘, 마약, 동성연애자목수안수, 타종교인정, 다원주의, 뉴에이지사상 등이 창궐하고 있으며, 세칭 지성적이고 열려있다는 목회자들일수록 이러한 일에 대하여 품고, 허용하고 관용하고 품어주자는 분위기가 왜 형성되어 왔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관용해야 하며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일종의 진실로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는 인간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도 깊히 침투해 있다.
작금에 교회내에서도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여성들에게 상담해 주는 것이 무엇인 나쁘냐?”,“이혼한 사람이 목사안수 받는 것이 왜 나쁘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왜 나쁘냐?” 는 것에 대하여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서 권면하고 경계하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라고 덮어 본인들은 굉장히 사랑이 많고 의로운 척 하면서 영적무지와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당신들은 무죄한 스데반에게 돌을 친 유대인들, 창녀와 세리와 이방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인들과 율법사들과 같다”고 설교를 통해서 은근하게 암시하면서 항의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다.
포스터모더니즘 속에서 객관적인 도덕기준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혼율이 50%나 되며, 주초문제나 혼전순결, 혼외정사, 동성애에 대한 판단이 이제 전근대적인 정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에서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말씀의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를 무너뜨리고서, "그것은 당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 하면서 계속적으로 권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죄한 자를 핍박하는자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의 불의를 감추고 싶은 사람들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 무조건 관용과 개인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이미 깊이 젖어있는 어린 영혼들의 감성에 간절히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호소에 어린 영혼들은 어느 사이에 교회내에서 성경적인 거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이성문제, 이혼문제, 술담배문제, 인격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을 바리새파나 율법사와 같은 정죄와 판단으로 무죄한 스데반을 돌로 치고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악한 사람들과 같다는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이념화의 방향성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어린 영혼뿐만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신앙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조차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성도들이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성경적인 기준과 통찰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지난 죄들을 숨기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교역자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고 나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는 사람들의 최고의 변명 무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들고 치려는 자들을 보고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구절이다. 즉 이것은 어떻든지 간에 무조건 사랑으로 덮어주고 관용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무식한 어부인데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곧 바로 어부직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부족하고 허물이 있으니 서로 용납하고 관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허물 많고 약점이 많으며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실격인 베드로가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누구라도 포용하고 누구라도 용서하고 누구라도 관용하자고 할 수 있는 은혜시대의 성령공동체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성령을 속이고서 재산을 전부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모습은 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랑공동체이면서, 거룩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이즘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이 가지는 리더쉽의 특징은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에게 맹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관대하고 감성적이며 관용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차별에 가까울 정도로 (1)사람들을 고립시키고, (2) 사람들을 위협하고, (3) 사람들을 이용하는 3원칙 속에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만약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그 당시 사도 베드로 앞에 있었더라면 사랑없음과 무관용을 격하게 항의했을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돌 맞아 죽을 간음한 여인도 변호하시고 살리셨으며, 창녀와 세리와 친구가 되셨고, 그 현장에 당신도 있었으며, 더욱이 베드로 당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결점이 많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당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전부도 아닌 일부의 땅을 숨겼다고 해서 죽음을 선언한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라면서 베드로의 과거 실수와 판단을 맹렬하게 성토할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인본주의, 개인주의, 타락한 도덕관과 가치관과 죄악들은 21세기에 갑작스럽게 도래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아시대의 사람의 타락, 아브라함, 모세, 사사, 열왕, 포로시대, 예수님이 오셨던 유대사회 그리고 사도들과 교회들의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똑 같이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보다는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가치관 판단을 진리로 여겼던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상이 범람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세상의 문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사회, 심지어 교회도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와 사상에 젖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말씀을 지키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며, 바리새적이고 율법적이며, 종교적인 의를 내세우는 자로 매도하고 있는 시대와 사조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선교, 전도생활, 성경읽기, 이혼금지, 주초금지, 혼전순결유지, 혼외정사금지, 동성애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부 독선적인 종교적인 편견으로 취급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 시대는 많은 목회자들 중에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간음을 하여도, 술을 마셔도, 담배를 피워도, 주일을 함부로 범해도, 세속적인 유행가를 즐겨 불러도 아무도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도리어 그러한 목회자들이 가슴이 열려 있고, 째째하지 않으며, 지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분위기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서 높은 성경적인 가치기준을 내 세우고서 사랑과 더불어 거룩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나 정죄를 일삼는 사람들로 매도를 당하는 시대이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우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세속화되고, 음란하며, 본능에 따라 살게 되어 결국에는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시대사조에 휘말려 들어가 내 영혼이 다치게 된다.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그러한 사조 속에 있는 개인의 영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부부관계는 황폐해지며, 자녀와의 관계는 더 이상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영적권위를 내세우지 못하는 어둠의 시대에 접어 들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영혼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는 순전한 인격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들이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단 사이비 사상에 깜박 속아 넘어가기 쉽상이다.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속은 포스트모던이즘의 사조와 사상이면서, 겉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위장하고서 악한 사상과 그릇된 가치관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들로서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영육간에 건강하게 되는 방법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인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혜사 성령님께 날마다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누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 속에 깊이 잠길 때만이 세상과 죄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삶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사상과 중독상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과 말씀으로 새교회가 충만해지고, 주안에서 뜨겁세 사랑하는 동시에 거룩을 회복할 때, 지체된 우리의 모습과 가정들은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가치가 있으며, 가장 생명이 풍성하다는 인식을 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사상에서 벗아 날 수 있을 것이다.
병 속에 들어 있는 나쁜 공기를 빼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을 채우면 저절로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악한 사조와 중독된 사상을 빼는 방법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육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기본인 말씀을 말씀 그대로 먹는 말씀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체내의 시계가 작동하여 울음을 터뜨리면서 젖을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갈급함으로 말씀을 먹고 싶은 갈망을 달라고 보혜사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말씀의 무기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외우고 묵상하면서 나의 사상과 가치관을 다시 한번 재점검하고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출처: 복음과 희망/개혁성도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godgod/7157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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