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와 찬양운동의 이단적기원과 신학적 비판(2)
경배와 찬양운동의 이단적기원과 신학적 비판(2)
이남규
개혁파 예배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이 시대에도 잣대로 남아 있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1)
따라서 개혁자들에 의해 가톨릭의 미신적 요소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타파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개혁가들은 모든 미신들을 타파하려고 애썼다. 쯔빙글리의 경우 로마가톨릭적 예배 요소를 배제하고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525년 ‘독일어 예배 의식’(Deutsche Liturgie)의 의하면 예배에서 음악마저도 페지하였다고 한다2). 칼빈에 의하면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3). 칼빈은 강요에서 2계명을 해석하면서 미신적 의식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미련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한 합당한 경배를-즉, 자기가 제정하신 영적경배를-따르게 하신다"4) 이렇게 칼빈은 미신적 예배를 탈피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로 나아가기 위해 2계명을 근거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배를 말한다.
이처럼 개혁교회는 예배의 방식까지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제네바성경(1560)은 예배에 대한 개혁주의입장을 반영하는 주석을 책에 포함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15장 9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에는 다음과 같은 주가 붙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따라서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고 그의 말씀에 기인하지 않은 모든 좋은 의도들을 혐오하실 것이다(God will not be honoured according to man's fantasy, but detesteth all good intentions which are not grounded on his word.)". 하이델베그 요리문답 96문도 같은 선에서 고백한다. ”문 : 하나님은 2계명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답 : 우리가 하나님을 그 어떤 방식으로 모방하여 만들거나 그의 말씀가운데 명하신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경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Question 96. What does God require in the second commandment? Answer. That we in nowise make any image of God, nor worship him in any other way than he has commanded in his word.). 그리고 이 규정은 대요리문답에서 확증한다. “109문 제 이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답 : 제 이 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일이 없는, 그 어떠한 종교적인 예배를 창안하거나, 권장하거나, 명령하거나, 이용하거나, 어느 정도이든 인정하는 모든 행위이다. 사이비 종교를 관용하는 일, 마음속으로 하든지, 아니면 어떤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하든지, 삼위의 하나님을, 혹은 그 가운데 어느 위이든 하나님을 대표하는 형상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 형상이나 그 형상이 대변하는 신에게 예배하는 모든 일, 가짜 신을 만들고 거거에 절하거나 섬기는 일이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창안하고 취했든지, 아니면 고대로부터 있었던 관습에서라거나 경건에서라거나 무슨 좋은 의향에서라는 등, 무슨 다른 구실을 붙여서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를 가감하여 예배를 부패하게 만드는 모든 미신적인 일은 금하시는 죄이다. 그 밖에 성직매매, 신성모독,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와 규례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반대하는 등등의 행위이다.(Question 109: What are the sins forbidden in the second commandment? Answer: The sins forbidden in the second commandment are, all devising, counseling, commanding, using, and anywise approving, any religious worship not instituted by God himself; tolerating a false religion; the making any representation of God, of all or of any of the three persons, either inwardly in our mind, or outwardly in any kind of image or likeness of any creature: Whatsoever; all worshiping of it, or God in it or by it; the making of any representation of feigned deities, and all worship of them, or service belonging to them; all superstitious devices, corrupting the worship of God, adding to it, or taking from it, whether invented and taken up of ourselves, or received by tradition from others, though under the title of antiquity, custom, devotion, good intent, or any other pretense: Whatsoever; simony; sacrilege; all neglect, contempt, hindering, and opposing the worship and ordinances which God has appointed.)”.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대로 예배의 방법이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 곧 성경에 제한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전통이다. 그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예배규정이 성경이 보증하는 내용과 성경이 금하지 않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것과는 다르다. 거짓예배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개혁주의는 루터와 다르다. 루터에게 있어서 거짓예배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지하는 내용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이 금하는 것 뿐 아니라 보증하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면 그것은 거짓예배가 된다. 따라서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에서 교회관습(ecclesiastical rites)에 대한 부분에서 인간이 만든 관습을 허용한다. “15조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관습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들과 또 어떤 거룩한 날들과 축제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날들 가운데서 교회의 평화와 질서에 공헌할 수 있는 것들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구원받는데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면서 지키게 한다(those rites are to be observed which may be observed without sin, and are proitable for tranquillity and good order in the Church; such as are set holidays, feasts, and such like. Yet concerning such things, men are to be admonished that consciences are not to be burdened as if such service were necessary to salvation)”5). 루터는 1526년의 라틴어 찬송이 독일 민요가락의 찬송으로 대치하였고, 쯔빙글리나 칼빈과 달리 오르간을 계속 사용하였다. 독일 코랄 가사는 전통적인 가톨릭성가(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과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적 민요 등을 개신교용으로 개작한 것, 그리고 새로이 창작한 것 등이 있었고, 곡조 역시 전래의 가톨릭성가곡과 옛 종교민요 그리고 일반의 세속 곡조도 채용하는 외에 새로 창작도 하였는데 대체로 부르기 쉽고 선율적인 곡이 많았다.
칼빈에게 시편송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찬송이다6). 윌리엄구지는 목사와 회중이 함께 해야 할 의무로서 시편을 부를 것을 지도한다.
문 12. 목사와 회중에 의해서 어떤 경건의 의무가 행해져야 하는가?(What duties of piety are done by Miniser and people all together?)
답. 시편을 부릅니다(마 26:30). 시편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항상 행하여진 것인데, 유대의 성막, 성전, 회당뿐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에서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용하셨습니다(마26:30). 그것은 사도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엡5:19, 골3:16). 그리고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실행되었습니다(고전 14:15, 26)......(Singing Psalms. Mat 26:30. Singing of Psalmes was alwaies used by Gods people, not onely in the Tabernacle, Temple, and Synagogue of the Jewes, but also in Christian Churches. Christ used it with his Disciples. (Mat 26:30) It is enjoyned by the Apostle (Eph 5:19, Col 3:16) and it was practised by the primitive Church. ( I. Cor. 14. 15, 26.) ......)7)
이처럼 모든 의식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인 신약성경에서 승인되어야 하는데, 시편서가 이스라엘의 찬양이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어서 명백히 제정되거나 승인되었기 때문에 시편송만을 허용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초대교회에서 기악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었으므로 17세기 개혁교회는 기악을 거부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지도자 코튼도 악기와 함께 부르는 찬송은 예표적이며 의례적인 예배였으므로 중단되었고 심령과 음성으로 부르는 찬송이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심령에 기록된 덕성을 함양시키는 찬송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제단은 우리의 세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하며, 이런 원칙에 따라 시편을 번역할 때의 원칙이 평이함이 매끄러운 의역보다 선호되었다. 그들은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음악의 안정시키는 능력과 정신적 치료 효과까지 인정하였다. 그들은 음악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규례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8).
신학적 비판
① 예배의 규범으로서 성경을 부정함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규범이 무엇이가에 대한 고민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하여 효과적인 형식에 있어서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을 원한다. 성경을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떨어뜨리고 있다. 양동복은 경배와 찬양의 운동의 뿌리를 신약시대까지 끌고 올라간다. “바울은 신약시대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영적노래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노래들은 교회에서 여러 목적으로 불리던 찬송과는 좀 다르게 감정적인 효과가 있는 단순한 노래였다. 역사적으로 부흥운동이 있을 때는 언제나 새로운 워십 음악이 태동되곤 했다. 이러한 프레이즈 앤 워십은 루터의 개혁운동, 웨슬리나 구세군의 부흥운동 그리고 오순절 운동과 1960-70년대 미국의 카리스마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9). 이런 식으로 “경배와 찬양”이 이미 초대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초대교회 예배가운데 은사중심의 예배와 찬양 중심의 예배가 있었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은 바울당시에 교회 내에 신비주의가 있었다는 가정 하에 엡 5:19, 골 3:16의 신령한 노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ψαλμος, ωδε, υμνος 의 사용례를 볼 때 뚜렷한 차이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시편의 교호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Septuagint에서 시편의 서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ψαλμος ωδης(29, 47, 67, 74, 86, 91), εν υμνοις ψαλμος τω Δαυιδ(6, 66) 등이 있다10). 그럼에도 초대교회 내에 신비주의가 있었다는 주장 등은 신약성경이 노스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혼합주의의 결과라는 자유비평학자들의 주장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결국 경배와 찬양을 주장하기위해 성경의 권위를 땅에 던져버리게 된다.
② 신중심이기보다 인간중심
하나님의 임재라는 신비주의적 최면적 효과라는 기능적 목적을 위해서 곡들이 만들어 질 때 그 효과를 맛볼 인간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중심이란 문제는 그들 자신의 앨범을 통한 상업적목적, 스타숭배, 예수를 사랑하는가 예수음악을 사랑하는가, 공연시 감정으로 결신시키려는 점, 대중취향의 음악을 좇는 점 등 다양하게 그들 내부에서 비판하고 있다11).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이 문제를 빠져나오기 힘들고 오히려 이런 문제를 합리화하기가 쉬울 것이다.
③ 성장주의
왜 한국에 경배와 찬양이 유행하였는가? 답은 간단하다. 성장을 위해서다. 하고 있는 교회가 거대교회인 온누리 교회였고, 수천 명이 모여서 하는 그 성장을 소망하며 한국교회가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성장 앞에서 성경으로 검증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④ 에큐메니칼 운동
이것은 대부분의 유명한 찬양단체가 초교파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퀘이커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은사주의아래서 가톨릭과 함께한 존윔버와 개신교에 영향을 끼친 가톨릭 사제 마이클탈보트의 예에서 볼 수 있다.
⑤ 비진리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의 당연한 결과로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마저 포기하고야 만다. 결국 한국장로교란 거대 교단은 받고 있는 신앙고백을 포기해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며
미국에서 1970년 전후를 시작한 찬양예배 형태가 20년 후에야 1990년대에 와서야 절반가까이가 받아들인 것12)을 볼 때에, 한국교회에 수년이 안 되어서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퍼져나간 것은 한국교회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초기 선교사들이 비록 퓨리탄형의 인물들이었음에도 공동성경 번역,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합동운동이 있었으며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3). 1905년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모여 <찬숑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이때에 262곡 중 155편이 미국장로교 찬송가에서 84편이 미국부흥회용 노래집에서 뽑은 것이었다14). 미국부흥회용 노래집은 가스펠송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장로교는 처음부터, 감리교와 함께 하였고 찬송가에 미국 가스펠송을 포함한 채로 출발한 것이다.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찬송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학이 다른데 그 신학을 담아내야 할 찬송가는 같다는 것은 찬송을 폄하한 처사라 할 것이다. 이렇게 교파를 초월하여서 전국적으로 경배와 찬양운동이 뿌리를 내린 것은 한국교회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로교란 간판을 내어 걸었지만 장로교전통의 예배규범과 방식이 가르쳐지거나 확고히 적용되지 못한 채로, 경배와 찬양이란 운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제라도 장로교전통의 예배형태와 그 근간이 되는 신학이 소개되고 교육되어서 한국교회에 예배개혁의 모습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1) 기독교강요, I. vi. 1.
2) 김영재, “한국교회의 예배와 개혁주의 전통”, 신학정론(1991. 7) pp.184-185.
3) 기독교강요, I.xx.32.
4) 기독교강요, II. viii. 17.
5) Michael Bushell, The songs of zion(Pennsylvania : C&C, 1993), p. 110.
6) 시편 118편 1-4절 주석중 “He again resumes the order which he observed in Psalm 116:1; for, after exhorting the children of Abraham, who had been separated from the Gentiles by the election of God, and also the sons of Aaron, who, by virtue of the priesthood, ought to take the precedence in conducting the psalmody, he directs his discourse to the other worshippers of God; because there were many hypocrites among the Israelites, who, occupying a place in the Church, were yet strangers to it. This is not inconsistent with David's here speaking by the spirit of prophecy, respecting the future kingdom of Christ. That kingdom, no doubt, extended to the Gentiles, but its commencement and first-fruits were among God's chosen people.”(trans. by The Rev. James Anderson. Baker Book House)
7) William Gouge, The Sabbaths Sanctification(London : 1641), II. "Directions for santifying it", p. B3.
8) Horton Davies, 청교도예배(The worship of the American Puritans 1629-1730),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4), pp. 137-156.
9) 양동복, p.331.
10) Michael Bushell, pp. 85-87.
11) 양동복, pp.546-563.
12) 위의 책, p. 330.
13) 김영규, 17세기개혁신학, p.5-6.
14) 양동복, p. 578
자료출처 http://cafe.daum.net/jbrta/5PJL/65
이남규
개혁파 예배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이 시대에도 잣대로 남아 있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1)
따라서 개혁자들에 의해 가톨릭의 미신적 요소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타파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예배에 있어서 개혁가들은 모든 미신들을 타파하려고 애썼다. 쯔빙글리의 경우 로마가톨릭적 예배 요소를 배제하고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525년 ‘독일어 예배 의식’(Deutsche Liturgie)의 의하면 예배에서 음악마저도 페지하였다고 한다2). 칼빈에 의하면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3). 칼빈은 강요에서 2계명을 해석하면서 미신적 의식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미련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한 합당한 경배를-즉, 자기가 제정하신 영적경배를-따르게 하신다"4) 이렇게 칼빈은 미신적 예배를 탈피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로 나아가기 위해 2계명을 근거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배를 말한다.
이처럼 개혁교회는 예배의 방식까지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제네바성경(1560)은 예배에 대한 개혁주의입장을 반영하는 주석을 책에 포함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15장 9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에는 다음과 같은 주가 붙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따라서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고 그의 말씀에 기인하지 않은 모든 좋은 의도들을 혐오하실 것이다(God will not be honoured according to man's fantasy, but detesteth all good intentions which are not grounded on his word.)". 하이델베그 요리문답 96문도 같은 선에서 고백한다. ”문 : 하나님은 2계명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답 : 우리가 하나님을 그 어떤 방식으로 모방하여 만들거나 그의 말씀가운데 명하신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경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Question 96. What does God require in the second commandment? Answer. That we in nowise make any image of God, nor worship him in any other way than he has commanded in his word.). 그리고 이 규정은 대요리문답에서 확증한다. “109문 제 이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답 : 제 이 계명에서 금하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일이 없는, 그 어떠한 종교적인 예배를 창안하거나, 권장하거나, 명령하거나, 이용하거나, 어느 정도이든 인정하는 모든 행위이다. 사이비 종교를 관용하는 일, 마음속으로 하든지, 아니면 어떤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하든지, 삼위의 하나님을, 혹은 그 가운데 어느 위이든 하나님을 대표하는 형상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 형상이나 그 형상이 대변하는 신에게 예배하는 모든 일, 가짜 신을 만들고 거거에 절하거나 섬기는 일이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창안하고 취했든지, 아니면 고대로부터 있었던 관습에서라거나 경건에서라거나 무슨 좋은 의향에서라는 등, 무슨 다른 구실을 붙여서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를 가감하여 예배를 부패하게 만드는 모든 미신적인 일은 금하시는 죄이다. 그 밖에 성직매매, 신성모독,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와 규례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반대하는 등등의 행위이다.(Question 109: What are the sins forbidden in the second commandment? Answer: The sins forbidden in the second commandment are, all devising, counseling, commanding, using, and anywise approving, any religious worship not instituted by God himself; tolerating a false religion; the making any representation of God, of all or of any of the three persons, either inwardly in our mind, or outwardly in any kind of image or likeness of any creature: Whatsoever; all worshiping of it, or God in it or by it; the making of any representation of feigned deities, and all worship of them, or service belonging to them; all superstitious devices, corrupting the worship of God, adding to it, or taking from it, whether invented and taken up of ourselves, or received by tradition from others, though under the title of antiquity, custom, devotion, good intent, or any other pretense: Whatsoever; simony; sacrilege; all neglect, contempt, hindering, and opposing the worship and ordinances which God has appointed.)”.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대로 예배의 방법이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 곧 성경에 제한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전통이다. 그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예배규정이 성경이 보증하는 내용과 성경이 금하지 않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것과는 다르다. 거짓예배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개혁주의는 루터와 다르다. 루터에게 있어서 거짓예배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지하는 내용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이 금하는 것 뿐 아니라 보증하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면 그것은 거짓예배가 된다. 따라서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에서 교회관습(ecclesiastical rites)에 대한 부분에서 인간이 만든 관습을 허용한다. “15조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관습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들과 또 어떤 거룩한 날들과 축제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날들 가운데서 교회의 평화와 질서에 공헌할 수 있는 것들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구원받는데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면서 지키게 한다(those rites are to be observed which may be observed without sin, and are proitable for tranquillity and good order in the Church; such as are set holidays, feasts, and such like. Yet concerning such things, men are to be admonished that consciences are not to be burdened as if such service were necessary to salvation)”5). 루터는 1526년의 라틴어 찬송이 독일 민요가락의 찬송으로 대치하였고, 쯔빙글리나 칼빈과 달리 오르간을 계속 사용하였다. 독일 코랄 가사는 전통적인 가톨릭성가(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과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적 민요 등을 개신교용으로 개작한 것, 그리고 새로이 창작한 것 등이 있었고, 곡조 역시 전래의 가톨릭성가곡과 옛 종교민요 그리고 일반의 세속 곡조도 채용하는 외에 새로 창작도 하였는데 대체로 부르기 쉽고 선율적인 곡이 많았다.
칼빈에게 시편송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찬송이다6). 윌리엄구지는 목사와 회중이 함께 해야 할 의무로서 시편을 부를 것을 지도한다.
문 12. 목사와 회중에 의해서 어떤 경건의 의무가 행해져야 하는가?(What duties of piety are done by Miniser and people all together?)
답. 시편을 부릅니다(마 26:30). 시편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항상 행하여진 것인데, 유대의 성막, 성전, 회당뿐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에서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용하셨습니다(마26:30). 그것은 사도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엡5:19, 골3:16). 그리고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실행되었습니다(고전 14:15, 26)......(Singing Psalms. Mat 26:30. Singing of Psalmes was alwaies used by Gods people, not onely in the Tabernacle, Temple, and Synagogue of the Jewes, but also in Christian Churches. Christ used it with his Disciples. (Mat 26:30) It is enjoyned by the Apostle (Eph 5:19, Col 3:16) and it was practised by the primitive Church. ( I. Cor. 14. 15, 26.) ......)7)
이처럼 모든 의식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인 신약성경에서 승인되어야 하는데, 시편서가 이스라엘의 찬양이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어서 명백히 제정되거나 승인되었기 때문에 시편송만을 허용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초대교회에서 기악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었으므로 17세기 개혁교회는 기악을 거부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지도자 코튼도 악기와 함께 부르는 찬송은 예표적이며 의례적인 예배였으므로 중단되었고 심령과 음성으로 부르는 찬송이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심령에 기록된 덕성을 함양시키는 찬송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제단은 우리의 세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하며, 이런 원칙에 따라 시편을 번역할 때의 원칙이 평이함이 매끄러운 의역보다 선호되었다. 그들은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음악의 안정시키는 능력과 정신적 치료 효과까지 인정하였다. 그들은 음악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규례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8).
신학적 비판
① 예배의 규범으로서 성경을 부정함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규범이 무엇이가에 대한 고민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하여 효과적인 형식에 있어서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을 원한다. 성경을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떨어뜨리고 있다. 양동복은 경배와 찬양의 운동의 뿌리를 신약시대까지 끌고 올라간다. “바울은 신약시대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영적노래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노래들은 교회에서 여러 목적으로 불리던 찬송과는 좀 다르게 감정적인 효과가 있는 단순한 노래였다. 역사적으로 부흥운동이 있을 때는 언제나 새로운 워십 음악이 태동되곤 했다. 이러한 프레이즈 앤 워십은 루터의 개혁운동, 웨슬리나 구세군의 부흥운동 그리고 오순절 운동과 1960-70년대 미국의 카리스마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9). 이런 식으로 “경배와 찬양”이 이미 초대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초대교회 예배가운데 은사중심의 예배와 찬양 중심의 예배가 있었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은 바울당시에 교회 내에 신비주의가 있었다는 가정 하에 엡 5:19, 골 3:16의 신령한 노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ψαλμος, ωδε, υμνος 의 사용례를 볼 때 뚜렷한 차이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시편의 교호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Septuagint에서 시편의 서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ψαλμος ωδης(29, 47, 67, 74, 86, 91), εν υμνοις ψαλμος τω Δαυιδ(6, 66) 등이 있다10). 그럼에도 초대교회 내에 신비주의가 있었다는 주장 등은 신약성경이 노스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혼합주의의 결과라는 자유비평학자들의 주장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결국 경배와 찬양을 주장하기위해 성경의 권위를 땅에 던져버리게 된다.
② 신중심이기보다 인간중심
하나님의 임재라는 신비주의적 최면적 효과라는 기능적 목적을 위해서 곡들이 만들어 질 때 그 효과를 맛볼 인간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중심이란 문제는 그들 자신의 앨범을 통한 상업적목적, 스타숭배, 예수를 사랑하는가 예수음악을 사랑하는가, 공연시 감정으로 결신시키려는 점, 대중취향의 음악을 좇는 점 등 다양하게 그들 내부에서 비판하고 있다11).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이 문제를 빠져나오기 힘들고 오히려 이런 문제를 합리화하기가 쉬울 것이다.
③ 성장주의
왜 한국에 경배와 찬양이 유행하였는가? 답은 간단하다. 성장을 위해서다. 하고 있는 교회가 거대교회인 온누리 교회였고, 수천 명이 모여서 하는 그 성장을 소망하며 한국교회가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성장 앞에서 성경으로 검증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④ 에큐메니칼 운동
이것은 대부분의 유명한 찬양단체가 초교파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퀘이커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은사주의아래서 가톨릭과 함께한 존윔버와 개신교에 영향을 끼친 가톨릭 사제 마이클탈보트의 예에서 볼 수 있다.
⑤ 비진리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의 당연한 결과로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마저 포기하고야 만다. 결국 한국장로교란 거대 교단은 받고 있는 신앙고백을 포기해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며
미국에서 1970년 전후를 시작한 찬양예배 형태가 20년 후에야 1990년대에 와서야 절반가까이가 받아들인 것12)을 볼 때에, 한국교회에 수년이 안 되어서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퍼져나간 것은 한국교회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초기 선교사들이 비록 퓨리탄형의 인물들이었음에도 공동성경 번역,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합동운동이 있었으며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3). 1905년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모여 <찬숑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이때에 262곡 중 155편이 미국장로교 찬송가에서 84편이 미국부흥회용 노래집에서 뽑은 것이었다14). 미국부흥회용 노래집은 가스펠송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장로교는 처음부터, 감리교와 함께 하였고 찬송가에 미국 가스펠송을 포함한 채로 출발한 것이다.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찬송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학이 다른데 그 신학을 담아내야 할 찬송가는 같다는 것은 찬송을 폄하한 처사라 할 것이다. 이렇게 교파를 초월하여서 전국적으로 경배와 찬양운동이 뿌리를 내린 것은 한국교회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로교란 간판을 내어 걸었지만 장로교전통의 예배규범과 방식이 가르쳐지거나 확고히 적용되지 못한 채로, 경배와 찬양이란 운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제라도 장로교전통의 예배형태와 그 근간이 되는 신학이 소개되고 교육되어서 한국교회에 예배개혁의 모습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1) 기독교강요, I. vi. 1.
2) 김영재, “한국교회의 예배와 개혁주의 전통”, 신학정론(1991. 7) pp.184-185.
3) 기독교강요, I.xx.32.
4) 기독교강요, II. viii. 17.
5) Michael Bushell, The songs of zion(Pennsylvania : C&C, 1993), p. 110.
6) 시편 118편 1-4절 주석중 “He again resumes the order which he observed in Psalm 116:1; for, after exhorting the children of Abraham, who had been separated from the Gentiles by the election of God, and also the sons of Aaron, who, by virtue of the priesthood, ought to take the precedence in conducting the psalmody, he directs his discourse to the other worshippers of God; because there were many hypocrites among the Israelites, who, occupying a place in the Church, were yet strangers to it. This is not inconsistent with David's here speaking by the spirit of prophecy, respecting the future kingdom of Christ. That kingdom, no doubt, extended to the Gentiles, but its commencement and first-fruits were among God's chosen people.”(trans. by The Rev. James Anderson. Baker Book House)
7) William Gouge, The Sabbaths Sanctification(London : 1641), II. "Directions for santifying it", p. B3.
8) Horton Davies, 청교도예배(The worship of the American Puritans 1629-1730), 김석한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4), pp. 137-156.
9) 양동복, p.331.
10) Michael Bushell, pp. 85-87.
11) 양동복, pp.546-563.
12) 위의 책, p. 330.
13) 김영규, 17세기개혁신학, p.5-6.
14) 양동복, p. 578
자료출처 http://cafe.daum.net/jbrta/5PJL/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