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ecumenical)에 대하여
'에큐메니칼'(ecumenical)에 대하여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1266
(이 글은 영남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인 임병선 전도사님의 질문에 대한 이광호 목사님의 답신입니다)
임병선 전도사님, 반갑습니다. 고신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영남신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하시면서 에큐메니칼적인 수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전도사님이 졸업한 고신대학에서 저는 여러 해동안 강의를 해왔고 그 학교에는 저와 가까운 교수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동시에 영남신학대학에서도 여러 해동안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그 학교에도 가깝게 지내는 교수님들이 몇분 계십니다.
제가 이 점을 미리 언급하는 이유는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고 있는 고신대학과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하고 있는 영남신학대학의 신학적 입장이 상당부분 차이가 나는 것을 제가 가까이서 체감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사님께서는 현재 신학수업을 하는 가운데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방식'을 배우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에 대해 직접적인 말씀을 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칼적인 사고 방식'이라는 언어자체가 '사상' 혹은 '주의'(ism)을 나타내는 이데올로기적 내음을 담고 있어서 자칫 소모적 논쟁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사님께서는 저로부터 저의 비판적 견해를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나, 막연한 비판 보다는 '에큐메니칼'에 대한 저의 평소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됩니다.
우선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의 원래적 의미는 '보편교회'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하나'여야 한다는 본질적 입장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아 이 말은 우리가 마땅히 수용해야 할 언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특성' 중 하나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상이하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 예를들어 어린아이들이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면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이해됩니다만, 북한사람들이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면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며 경직된 언어로 이해되게 됩니다. 이처럼 '에큐메니칼'의 원래 의미는 위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의미였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큐메니칼'이라 하게 되면 'WCC적 에큐메니칼'을 의미하게 됩니다.
저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말하는 바 의미를 알고 그 사상을 따르며 지지하는 이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땅히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상을 뒤로한 채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학적이 아닌 낭만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싸우고 분리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위의 두 번째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저 역시 '에큐메니칼 운동'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매우 인본주의적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양한 운동들을 함으로써 외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지만 사실은 더욱 분리하는 모습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는 방법이나 범위를 정하는데 이미 분열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에큐메니칼의 범주에 넣게 되는 경향성을 띠게 되며, 그 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며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특성은 에큐메니칼 사상이 중심적 사상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의 자기중심적 욕구일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전도사님께서 잘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인위적인 결단이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학적 소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동의나 합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됨'은 우리가, 하나이신 하나님과 하나이신 성령과 하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인간들이 의식이나 노력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말씀 속에 있는 삶을 살게 될 때 저절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기본적으로 형제들의 약속이나 합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모여 단합을 꾀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를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각 자녀들이 부모님께 도리를 다하여 효도하게 되면 나머지는 부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시대는 모든 것이 급변하는 사회이며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사회입니다. 인간게놈에 대한 연구의 결과, 컴퓨터를 비롯한 초첨단과학의 발전, 거기에서 발생되는 인간들의 가치관의 변화 등 실로 내일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특이한 현대사회에 처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그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며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인본주의적인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유동적인 사회 질서 가운데 살고 있는 교회가 역시 유동적인 '에큐메니칼'을 추구하게 된다면 결국 기준이 없어질 뿐 정답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로 인해 멸망에 빠진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해석하여 유동적인 사회에 대한 탈피를 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 계시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이 필요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WCC적 에큐메니즘은 인위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동안 성경의 위치를 격하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 대신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사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고정된 틀에서부터 인간사회의 유동성으로 그 자리를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로서의 존재적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역할하는 현상적 교회로 역할바꿈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전도사님, 저는 지금 저와 다른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에 대해 어떤 비판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은 단순한 하나의 사상이 아니어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나름의 신학을 소유하기는 하되 역사 가운데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사상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 곧 신학사상의 기초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사님께서 저에게 보내신 서신 가운데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많은 생각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실 때 전도사님은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 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쩌면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 예상했던 바 그대로의 답변수준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가 이루어졌으니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혹 기회가 되면 학교에서 한번 만나 서로의 생각들을 진지하게 나누어 보기를 기대합니다. 겨울 방학 알차게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0. 12. 12
이광호 목사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1266
(이 글은 영남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인 임병선 전도사님의 질문에 대한 이광호 목사님의 답신입니다)
임병선 전도사님, 반갑습니다. 고신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영남신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하시면서 에큐메니칼적인 수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전도사님이 졸업한 고신대학에서 저는 여러 해동안 강의를 해왔고 그 학교에는 저와 가까운 교수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동시에 영남신학대학에서도 여러 해동안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그 학교에도 가깝게 지내는 교수님들이 몇분 계십니다.
제가 이 점을 미리 언급하는 이유는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고 있는 고신대학과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하고 있는 영남신학대학의 신학적 입장이 상당부분 차이가 나는 것을 제가 가까이서 체감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사님께서는 현재 신학수업을 하는 가운데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방식'을 배우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에 대해 직접적인 말씀을 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칼적인 사고 방식'이라는 언어자체가 '사상' 혹은 '주의'(ism)을 나타내는 이데올로기적 내음을 담고 있어서 자칫 소모적 논쟁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사님께서는 저로부터 저의 비판적 견해를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나, 막연한 비판 보다는 '에큐메니칼'에 대한 저의 평소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됩니다.
우선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의 원래적 의미는 '보편교회'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하나'여야 한다는 본질적 입장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아 이 말은 우리가 마땅히 수용해야 할 언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특성' 중 하나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상이하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 예를들어 어린아이들이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면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이해됩니다만, 북한사람들이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면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며 경직된 언어로 이해되게 됩니다. 이처럼 '에큐메니칼'의 원래 의미는 위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의미였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큐메니칼'이라 하게 되면 'WCC적 에큐메니칼'을 의미하게 됩니다.
저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말하는 바 의미를 알고 그 사상을 따르며 지지하는 이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마땅히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상을 뒤로한 채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학적이 아닌 낭만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싸우고 분리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위의 두 번째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저 역시 '에큐메니칼 운동'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매우 인본주의적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양한 운동들을 함으로써 외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추는 일에 매진하지만 사실은 더욱 분리하는 모습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는 방법이나 범위를 정하는데 이미 분열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에큐메니칼의 범주에 넣게 되는 경향성을 띠게 되며, 그 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며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특성은 에큐메니칼 사상이 중심적 사상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의 자기중심적 욕구일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전도사님께서 잘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인위적인 결단이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학적 소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동의나 합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됨'은 우리가, 하나이신 하나님과 하나이신 성령과 하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인간들이 의식이나 노력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말씀 속에 있는 삶을 살게 될 때 저절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기본적으로 형제들의 약속이나 합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모여 단합을 꾀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를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각 자녀들이 부모님께 도리를 다하여 효도하게 되면 나머지는 부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시대는 모든 것이 급변하는 사회이며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사회입니다. 인간게놈에 대한 연구의 결과, 컴퓨터를 비롯한 초첨단과학의 발전, 거기에서 발생되는 인간들의 가치관의 변화 등 실로 내일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특이한 현대사회에 처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그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며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인본주의적인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유동적인 사회 질서 가운데 살고 있는 교회가 역시 유동적인 '에큐메니칼'을 추구하게 된다면 결국 기준이 없어질 뿐 정답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로 인해 멸망에 빠진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해석하여 유동적인 사회에 대한 탈피를 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 계시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이 필요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WCC적 에큐메니즘은 인위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동안 성경의 위치를 격하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 대신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사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고정된 틀에서부터 인간사회의 유동성으로 그 자리를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로서의 존재적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역할하는 현상적 교회로 역할바꿈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전도사님, 저는 지금 저와 다른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에 대해 어떤 비판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은 단순한 하나의 사상이 아니어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나름의 신학을 소유하기는 하되 역사 가운데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사상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 곧 신학사상의 기초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사님께서 저에게 보내신 서신 가운데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많은 생각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실 때 전도사님은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 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쩌면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 예상했던 바 그대로의 답변수준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가 이루어졌으니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혹 기회가 되면 학교에서 한번 만나 서로의 생각들을 진지하게 나누어 보기를 기대합니다. 겨울 방학 알차게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0. 12. 12
이광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