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7)
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7) by 이천우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방언의 은사로 인해서 생겨지는 문제와 그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정리를 해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자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오순절 교파 계통을 통해 성령 세례는 곧 방언이라는 공식을 세워 유행의 운동처럼 온 교회에 퍼트려 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교회가 이제는 교파를 초월해서 마치 기독교 신앙의 기준은 방언인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례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 교회 한 목회자는 교인들이 다 방언을 하는데 목사인 자신이 방언을 못해서 되겠느냐고 고민하는 경우도 실제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드물게 몇 몇 교회 빼놓고는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부요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방언을 받아야 체면이 서고 자랑거리가 생기는지 방언! 방언! 하고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도 방언의 은사를 받는데 사람이 되어서 주는 방언도 못 받느냐"며 방언의 은사를 받을 것을 촉구하는 희한한 방언 공장 기도원도 있으며, 부흥회나 그런 식의 집회에는 의례껏 은사 집회라 하며 방언 부대를 동원하여 마치 방언의 은사를 자기가 주는 것처럼 "방언 받으라!"고 소리치고, 그래도 안되면 "아멘!", "주여!", "할렐루야!"를 몇 백 번 반복하라는 등, 영어로 기도하라는 등 인위적인 연습과 훈련 방식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 굉장한 신앙의 증표처럼 유행되어 버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의 공통점을 보면 집회를 통해서 체험하는 자들이 많은데 흥분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분위기를 성령 충만한 뜨거운 상태라면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하는 방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방언을 성령 세례, 중생, 심지어는 구원의 증거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이런 방언에는 이단도 사이비도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관이나 영생교나 그 외 사이비, 이단들도 이런 똑같은 방언을 체험하고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한 것은 이런 방언에 열중하는 교회의 교인들일수록 신앙이 건전치 못하다는 점이며, 복음 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신비적이고 감정적인 신앙들이며, 요란한 집회나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복잡하고 어렵게 여기는 신앙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먼저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으면 다 풀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은 그것을 원리적으로 풀지 않고 당장 느낀 체험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입장만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을 더 야기 시키고 있으며 서로 자기 입장이나 체험 등을 고집하며 다투는 것입니다. 그 중에 방언의 은사는 문제가 많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내주해 계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뜻에 따라 교회 된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7-11절 참조). 또한 성령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한복음 16장 13-14절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다시피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이 가진 갈망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유행되어진 이 방언은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방언을 하는 것으로 자기 자랑삼습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믿음의 삶으로 돌아가고 자라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교인들을 그런 체험에만 묶어놓고 집착하게 합니다. 마치 방언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양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구할 가장 큰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 믿음 생활에 최고로 여기고 신앙의 푯대로 삼는 것에 진정 참된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핵심이 오히려 방언 운동 때문에 흐려지고 복음적인 건전한 기독교 신앙이 초점을 잃고 말아 버리는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릇된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참된 신앙과 인본주의 신앙이, 말씀으로 구분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변화의 모습과 열매의 신앙으로 분별되는 것이 방언하고 못하고로 구분 지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이 땅에 수많은 순진한 교인들을 참으로 사모해야 할 것을 바로 사모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믿음이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진리 중심의 신앙을 갈망하며 힘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반복적인 그런 몇 마디를 하게 하는데 빠져들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달려야 할 것에, 참 중심해야 할 것에서 비껴 엉뚱한 것에 빠지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요즘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방언을 보면 오순절기에 있은 성령 강림 때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2장 1-11절) 여기서 사도들이 말한 다른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의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는 각국에 퍼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로 개종한 여러 족속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수많은 각처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이 거주하며 살던 나라나 지방의 말로 말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도들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러 오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기 위해 사도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나타내신 은사가 방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주로 갈릴리 사람들로 다른 나라나 각 지방 말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에게 증거 되어 전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령은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모인 무리에게 증거하도록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살던 나라와 지방의 말로 말하게 하신 것이 다른 방언이었던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 담겨진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되고 많은 교인들이 그토록 받아 보려는 방언들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어디 나라 어디 지방의 말도 아닙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신비한 종교 따위에서나 나오는 주술이나 주문 같은 이상한 말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인데 또한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나라나 지방 말이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은사로 사용 된 곳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방언 외에도 다양한 은사가 각 성도를 통하여 나타났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사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는 더욱 믿음이 상승하는 성숙한 상태에 있지를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 19절).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곁에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고린도전서 14장 5-13절). 방언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함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거니와 통역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없이 방언의 은사만 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서 있었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올바르게 사용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제각각 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으로 서로 나서서 말함으로써 질서 없이 은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뜻과는 다르게 은사가 남용되고 오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무질서해졌고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방언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여 이런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방언과 그리고 그것을 통역하는 말이 지닌 신비로움에서 믿지 않는 자가 듣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자기 자랑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않습니다. 정말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앙이 말씀 중심이 아닌 것이 쉽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복음이 진리에서 이탈되어 있으며 방언 한다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입은 자인양 자랑하고 그 행하는 것으로 의를 삼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보면 너무나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을 놓치고 남만큼 능숙하게 방언 못해서 안달이니 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진짜 방언
복음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워필드(B.B.Warfield)는 초대 교회 때 있었던 각종 기적 은사 - 병고침, 능력, 예언과 영 분변 형식의 지식, 방언과 통역의 구변의 능력 - 는 사도 시대로 끝났다고 합니다. 기적 은사는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짓는 특징으로서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성령의 은사로 각 나라와 지방의 말로 들리게 했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냈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신비한 방언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 한정된 것이었기에 그 이후 시대에서는 중단되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개혁교회)는 방언은 - 다른 기적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 성경 계시와 연관되어 있는 은사이기에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습니다. 하기야 오늘날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을 볼 때 사도들이 말했던 다른 방언의 경우만 생각하더라도 이 시대는 외국어를 배울 수도 있고 그 나라 말을 미리 배워서 선교사로 가고 하니까 옛 초대 교회 때처럼 각 나라 말과 지방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나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상황은 없어진 셈입니다. 또한 이제는 방송의 매개체가 발전하여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이 동시에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들려진다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사도 시대에 필요했던 방언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방언 한다는 요즘 어떤 모습에서도 사도들이 했던 다른 방언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한 방언의 경우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서를 통해 규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 원하면 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데다가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안는 자들을 위해 표적을 나타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행해지지 않는 한, 또한 질서 있게 행해지지 않는 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교회만이 아니라 사이비와 이단도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방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상식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령께서 교회이건, 사이비이건, 이단이건 가리지 않고 방언의 은사를 주십니까? 그렇게 기독교, 비기독교를 초월해서 나타나지는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까? 교인을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좇게 하여 배도의 길을 가게 하는 사이비와 이단에도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비록 기독교로 한정할지라도 한 개인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고,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방언 하게 해 주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받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표식으로 방언 하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 의 삼고 자기를 자랑하게 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교회가 성령께 구할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은사 문제를 다루면서 사실 우리가 성도로서 해야 할 진짜 방언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이 되는 말, 은혜가 되는 말, 선한 말, 영적 유익을 주는 말, 새 노래, 신령한 찬미 등을 성경은 교회가 해야 할 방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진짜 방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20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받아야 할 신령한 언어 생활입니다. 이 언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이요 성도끼리는 은혜를 끼치고 영적 유익을 주는 말이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선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그 은혜와 생명을 누구에게나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성도는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신령한 말을 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또한 그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말인 참 하나님 나라의 방언을 사모하는 자는 얼마나 있으며 이것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워져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사의 원리
은사란 은혜란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혜택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은혜와 좀 구분해서 말한다면 은사는 예수를 믿는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각각 특별한 특기나 재능이나 어떤 역할을 주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봉사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넓은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재능과 특별한 역할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령의 은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해 쓰여지고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영적 유익과 그리스도를 위해 합력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세상에서 특별한 재능이나 특기를 가졌다고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써주고 직분 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의만 나타내어 자랑하게 할 뿐 정작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성악을 전공한다고 해서 성가대 지휘자나 대원으로 무조건 쓰는 경우나 학교 선생이라고 해서 교회학교를 일선으로 맡기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성령이 주시는 교회 안에 은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각자 교회 안에 주어졌지만 그것을 주신 성령은 같고 또한 은사의 직임은 여러 가지나 섬기는 주인은 한 분인 주님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일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장 4-6절). 그러니까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은사의 원리는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보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익은 영적 유익으로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우는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한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비한 능력이나 특기나 역할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세상 일반적인 자기를 위한 재능이요 아니면 교회를 혼란케 하려는 사탄이 준 능력이나 역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무지한 자가 많고 어린아이 같은 자가 많지만 사도 시대의 교회 중 하나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랬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려 합니다. 특히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원리를 보면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교인들에게 골고루 각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남이 가진 은사를 저마다 가지려고 인간적으로 애쓴 것을 봅니다. 특히 남보다 위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가르치는 은사와 남으로부터 집중 받고 놀랍고 신비롭게 여겨지는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특히 오늘날 오순절 계통의 교인들처럼 너나 나나 다 가져보려는 방언의 은사 등을 자기도 가져서 나타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병 고치는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린도전서 12장 29-30절). 성령은 교회 중에 사도나 교사를 따로 세우셨고 또한 능력, 병 고치는 은사, 각종 방언하는 은사를 교인들 모두에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가르치는 능력을 은사로 주셔서 직분을 맡게 해 주신 자만이 가르치는 일을 하여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가르치는 직분에 서겠다고 하니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잘못된 신앙으로 실족케 하는 혼란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적이고 자기의 욕망적인 목회자나 교사들이, 지도자들이 교회에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많고 교회들이 외적이고 세속적이고 인간적 중심의 모습들이 많은 것은 성령의 은사로 신앙의 지도자가 된 자들보다 자기가 원해서 된 자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는 오순절 계통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모든 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증표인양 저마다 받으려고 합니다. 전에는 주로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교인들은 의례 방언을 다 받아야 하는 것으로 몰아세웠었는데 이제는 점점 더 확산되어서 교회들마다 방언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너도 나도 방언을 받으려고 하며, 방언을 받기 위해서 별 수단을 다 쓰다 보니까 인위적인 것, 거짓된 것, 이교도적인 것들이 남발되고 기독교 신앙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정작 교인들 모두가 똑같이 함께 받아야 할 은사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은사로서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모해야 하며 갖추어야 할 것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이런 은사를 사모하지는 않고 성령이 주시지도 않는 은사를 자랑하려고 하며 자기를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들만 많으니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자기가 나타나지고 자랑되어지고 영광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지체에게 주신 선물이요 역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필요를 따라 각 지체에게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은사들, 가령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은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잘못된 교인들은 죄다 자기 욕심이나 자기 중심의 뜻대로 남에게 나타나지는 은사만 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모든 교인들이 너나 나나 방언의 은사를 모두 받아 보려고 난리 법석인 것에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들이 다 방언 하는데 목사인 나마 못한다고 고민하는 목회자도 있을 정도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은 은사를 마치 도깨비의 요술 방망이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주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의 은사를 받아보려고 갈망하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과 신앙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원이나 특별집회는 은사 공장이 되고 이름 난 부흥강사들은 이런 은사를 마구 퍼주는 은사 제조사가 되어 있고 수많은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기도 그런 은사를 가져보려고 그런 곳을 열심히 찾곤 합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모두가 다 요구하고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성경은 참으로 사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말함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이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모습들이요 참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푯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면서 거기에 걸맞는 합당한 자로 향상해 나가는 모습이 없이 그 어떤 능력의 은사, 남이 알아주고 놀라운 은사를 가지면 무엇합니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고 거치는 사탄의 역할뿐인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이 가진 직분, 특기, 능력, 그런 은사를 따르려 억지를 부리지 말고 먼저 더 큰 은사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모하고 그런 향기로운 자가 되도록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글은 황부일 목사의 '방언의 은사에 대해'와 '은사의 원리'를 한 편으로 묶어서 올린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방언의 은사로 인해서 생겨지는 문제와 그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 방언의 은사를 성경적으로 정리를 해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자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오순절 교파 계통을 통해 성령 세례는 곧 방언이라는 공식을 세워 유행의 운동처럼 온 교회에 퍼트려 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교회가 이제는 교파를 초월해서 마치 기독교 신앙의 기준은 방언인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례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 교회 한 목회자는 교인들이 다 방언을 하는데 목사인 자신이 방언을 못해서 되겠느냐고 고민하는 경우도 실제 있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드물게 몇 몇 교회 빼놓고는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부요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방언을 받아야 체면이 서고 자랑거리가 생기는지 방언! 방언! 하고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도 방언의 은사를 받는데 사람이 되어서 주는 방언도 못 받느냐"며 방언의 은사를 받을 것을 촉구하는 희한한 방언 공장 기도원도 있으며, 부흥회나 그런 식의 집회에는 의례껏 은사 집회라 하며 방언 부대를 동원하여 마치 방언의 은사를 자기가 주는 것처럼 "방언 받으라!"고 소리치고, 그래도 안되면 "아멘!", "주여!", "할렐루야!"를 몇 백 번 반복하라는 등, 영어로 기도하라는 등 인위적인 연습과 훈련 방식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 굉장한 신앙의 증표처럼 유행되어 버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의 공통점을 보면 집회를 통해서 체험하는 자들이 많은데 흥분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분위기를 성령 충만한 뜨거운 상태라면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하는 방언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방언을 성령 세례, 중생, 심지어는 구원의 증거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이런 방언에는 이단도 사이비도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관이나 영생교나 그 외 사이비, 이단들도 이런 똑같은 방언을 체험하고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한 것은 이런 방언에 열중하는 교회의 교인들일수록 신앙이 건전치 못하다는 점이며, 복음 중심적인 신앙이 아니라 신비적이고 감정적인 신앙들이며, 요란한 집회나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복잡하고 어렵게 여기는 신앙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먼저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으면 다 풀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은 그것을 원리적으로 풀지 않고 당장 느낀 체험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입장만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을 더 야기 시키고 있으며 서로 자기 입장이나 체험 등을 고집하며 다투는 것입니다. 그 중에 방언의 은사는 문제가 많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내주해 계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뜻에 따라 교회 된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7-11절 참조). 또한 성령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한복음 16장 13-14절 참조),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다시피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이 가진 갈망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유행되어진 이 방언은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방언을 하는 것으로 자기 자랑삼습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믿음의 삶으로 돌아가고 자라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교인들을 그런 체험에만 묶어놓고 집착하게 합니다. 마치 방언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양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구할 가장 큰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 믿음 생활에 최고로 여기고 신앙의 푯대로 삼는 것에 진정 참된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핵심이 오히려 방언 운동 때문에 흐려지고 복음적인 건전한 기독교 신앙이 초점을 잃고 말아 버리는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릇된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참된 신앙과 인본주의 신앙이, 말씀으로 구분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변화의 모습과 열매의 신앙으로 분별되는 것이 방언하고 못하고로 구분 지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이 땅에 수많은 순진한 교인들을 참으로 사모해야 할 것을 바로 사모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믿음이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진리 중심의 신앙을 갈망하며 힘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반복적인 그런 몇 마디를 하게 하는데 빠져들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달려야 할 것에, 참 중심해야 할 것에서 비껴 엉뚱한 것에 빠지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요즘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방언을 보면 오순절기에 있은 성령 강림 때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2장 1-11절) 여기서 사도들이 말한 다른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의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는 각국에 퍼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로 개종한 여러 족속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수많은 각처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이 거주하며 살던 나라나 지방의 말로 말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도들이 전하는 것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러 오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기 위해 사도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나타내신 은사가 방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주로 갈릴리 사람들로 다른 나라나 각 지방 말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에게 증거 되어 전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령은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모인 무리에게 증거하도록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살던 나라와 지방의 말로 말하게 하신 것이 다른 방언이었던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 담겨진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되고 많은 교인들이 그토록 받아 보려는 방언들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어디 나라 어디 지방의 말도 아닙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신비한 종교 따위에서나 나오는 주술이나 주문 같은 이상한 말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인데 또한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나라나 지방 말이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은사로 사용 된 곳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방언 외에도 다양한 은사가 각 성도를 통하여 나타났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사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는 더욱 믿음이 상승하는 성숙한 상태에 있지를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 19절).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곁에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고린도전서 14장 5-13절). 방언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함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거니와 통역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없이 방언의 은사만 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서 있었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올바르게 사용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제각각 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으로 서로 나서서 말함으로써 질서 없이 은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뜻과는 다르게 은사가 남용되고 오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무질서해졌고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방언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여 이런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방언과 그리고 그것을 통역하는 말이 지닌 신비로움에서 믿지 않는 자가 듣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자기 자랑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않습니다. 정말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앙이 말씀 중심이 아닌 것이 쉽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복음이 진리에서 이탈되어 있으며 방언 한다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입은 자인양 자랑하고 그 행하는 것으로 의를 삼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보면 너무나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을 놓치고 남만큼 능숙하게 방언 못해서 안달이니 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진짜 방언
복음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워필드(B.B.Warfield)는 초대 교회 때 있었던 각종 기적 은사 - 병고침, 능력, 예언과 영 분변 형식의 지식, 방언과 통역의 구변의 능력 - 는 사도 시대로 끝났다고 합니다. 기적 은사는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짓는 특징으로서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성령의 은사로 각 나라와 지방의 말로 들리게 했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냈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신비한 방언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 한정된 것이었기에 그 이후 시대에서는 중단되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개혁교회)는 방언은 - 다른 기적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 성경 계시와 연관되어 있는 은사이기에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는 견해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습니다. 하기야 오늘날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을 볼 때 사도들이 말했던 다른 방언의 경우만 생각하더라도 이 시대는 외국어를 배울 수도 있고 그 나라 말을 미리 배워서 선교사로 가고 하니까 옛 초대 교회 때처럼 각 나라 말과 지방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나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상황은 없어진 셈입니다. 또한 이제는 방송의 매개체가 발전하여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이 동시에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들려진다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사도 시대에 필요했던 방언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방언 한다는 요즘 어떤 모습에서도 사도들이 했던 다른 방언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한 방언의 경우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서를 통해 규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 원하면 받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데다가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안는 자들을 위해 표적을 나타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행해지지 않는 한, 또한 질서 있게 행해지지 않는 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교회만이 아니라 사이비와 이단도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방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상식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령께서 교회이건, 사이비이건, 이단이건 가리지 않고 방언의 은사를 주십니까? 그렇게 기독교, 비기독교를 초월해서 나타나지는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까? 교인을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좇게 하여 배도의 길을 가게 하는 사이비와 이단에도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비록 기독교로 한정할지라도 한 개인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고,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방언 하게 해 주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받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표식으로 방언 하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 의 삼고 자기를 자랑하게 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교회가 성령께 구할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은사 문제를 다루면서 사실 우리가 성도로서 해야 할 진짜 방언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이 되는 말, 은혜가 되는 말, 선한 말, 영적 유익을 주는 말, 새 노래, 신령한 찬미 등을 성경은 교회가 해야 할 방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진짜 방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20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받아야 할 신령한 언어 생활입니다. 이 언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말이요 성도끼리는 은혜를 끼치고 영적 유익을 주는 말이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선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그 은혜와 생명을 누구에게나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성도는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신령한 말을 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또한 그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말인 참 하나님 나라의 방언을 사모하는 자는 얼마나 있으며 이것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워져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사의 원리
은사란 은혜란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혜택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은혜와 좀 구분해서 말한다면 은사는 예수를 믿는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각각 특별한 특기나 재능이나 어떤 역할을 주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봉사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넓은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재능과 특별한 역할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령의 은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해 쓰여지고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영적 유익과 그리스도를 위해 합력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세상에서 특별한 재능이나 특기를 가졌다고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써주고 직분 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의만 나타내어 자랑하게 할 뿐 정작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성악을 전공한다고 해서 성가대 지휘자나 대원으로 무조건 쓰는 경우나 학교 선생이라고 해서 교회학교를 일선으로 맡기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성령이 주시는 교회 안에 은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각자 교회 안에 주어졌지만 그것을 주신 성령은 같고 또한 은사의 직임은 여러 가지나 섬기는 주인은 한 분인 주님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일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장 4-6절). 그러니까 은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은사의 원리는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보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익은 영적 유익으로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우는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한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비한 능력이나 특기나 역할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세상 일반적인 자기를 위한 재능이요 아니면 교회를 혼란케 하려는 사탄이 준 능력이나 역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무지한 자가 많고 어린아이 같은 자가 많지만 사도 시대의 교회 중 하나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랬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려 합니다. 특히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원리를 보면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교인들에게 골고루 각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남이 가진 은사를 저마다 가지려고 인간적으로 애쓴 것을 봅니다. 특히 남보다 위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가르치는 은사와 남으로부터 집중 받고 놀랍고 신비롭게 여겨지는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특히 오늘날 오순절 계통의 교인들처럼 너나 나나 다 가져보려는 방언의 은사 등을 자기도 가져서 나타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병 고치는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린도전서 12장 29-30절). 성령은 교회 중에 사도나 교사를 따로 세우셨고 또한 능력, 병 고치는 은사, 각종 방언하는 은사를 교인들 모두에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가르치는 능력을 은사로 주셔서 직분을 맡게 해 주신 자만이 가르치는 일을 하여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가르치는 직분에 서겠다고 하니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잘못된 신앙으로 실족케 하는 혼란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적이고 자기의 욕망적인 목회자나 교사들이, 지도자들이 교회에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많고 교회들이 외적이고 세속적이고 인간적 중심의 모습들이 많은 것은 성령의 은사로 신앙의 지도자가 된 자들보다 자기가 원해서 된 자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는 오순절 계통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모든 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방언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증표인양 저마다 받으려고 합니다. 전에는 주로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교인들은 의례 방언을 다 받아야 하는 것으로 몰아세웠었는데 이제는 점점 더 확산되어서 교회들마다 방언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너도 나도 방언을 받으려고 하며, 방언을 받기 위해서 별 수단을 다 쓰다 보니까 인위적인 것, 거짓된 것, 이교도적인 것들이 남발되고 기독교 신앙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정작 교인들 모두가 똑같이 함께 받아야 할 은사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은사로서 그리스도인 모두가 사모해야 하며 갖추어야 할 것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이런 은사를 사모하지는 않고 성령이 주시지도 않는 은사를 자랑하려고 하며 자기를 나타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들만 많으니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자기가 나타나지고 자랑되어지고 영광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지체에게 주신 선물이요 역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필요를 따라 각 지체에게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은사들, 가령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 등등은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잘못된 교인들은 죄다 자기 욕심이나 자기 중심의 뜻대로 남에게 나타나지는 은사만 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모든 교인들이 너나 나나 방언의 은사를 모두 받아 보려고 난리 법석인 것에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들이 다 방언 하는데 목사인 나마 못한다고 고민하는 목회자도 있을 정도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은 은사를 마치 도깨비의 요술 방망이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주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의 은사를 받아보려고 갈망하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과 신앙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원이나 특별집회는 은사 공장이 되고 이름 난 부흥강사들은 이런 은사를 마구 퍼주는 은사 제조사가 되어 있고 수많은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기도 그런 은사를 가져보려고 그런 곳을 열심히 찾곤 합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모두가 다 요구하고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사모해야 할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성경은 참으로 사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1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말함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이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모습들이요 참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푯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면서 거기에 걸맞는 합당한 자로 향상해 나가는 모습이 없이 그 어떤 능력의 은사, 남이 알아주고 놀라운 은사를 가지면 무엇합니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고 거치는 사탄의 역할뿐인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이 가진 직분, 특기, 능력, 그런 은사를 따르려 억지를 부리지 말고 먼저 더 큰 은사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모하고 그런 향기로운 자가 되도록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글은 황부일 목사의 '방언의 은사에 대해'와 '은사의 원리'를 한 편으로 묶어서 올린 것입니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