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5.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322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분석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196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몬트리얼 보고서는 전통(Tradition)과 성경을 분리시키며, 교회는 실제로 복음 자체를 의미하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단지 복음에 관한 증언들을 의미하는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The Bible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21).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우리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적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Ibid., p. 3).
2.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명제적 진술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복음은 살아있는 실재(혹은 존재, a living reality)인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전통의 내용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달하는 실재는 명제적 형식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Ibid., p. 27),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복음 자체 . . . 즉 교회의 생명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Ibid., p. 19). 플레스만-반 리어는 그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기를, “따라서 전통(Tradition)은 단번에 고정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 교리들의 총체로서 이해되지 않았고,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에서의 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Ibid., p. 2).
3.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셋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선포는 항상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Ibid., p. 20). 또한 1981년의 오뎃사 보고서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복음의 ‘헬라주의화’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대주의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결코 ‘화학적으로 순수한’(chemically pure)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핵심으로 돌아간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이와 비슷하게 진술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이미 많은 다른 문화들과 오랜 세기 동안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 시점에서 문화적으로 제한된 기독교를 다른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Gathered for Life, p. 33).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넷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신약의 글들 자체는 전통의 계속적 과정과 그것의 재해석을 증거한다. ‘복음은 동일한 복음으로 남기 위하여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 . . 만일 신약 시대의 기간에 신앙의 작성과 재작성의 계속적 과정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이 과정이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고 동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postolic Faith Today, p. 252).
비평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복음을 받았고 지금 소유하고 있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사도는 그들에게 확정적, 불변적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소유로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전파할 복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만일 그들이 전파할 내용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면, 무엇을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주의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명백한 오류이다.
2.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실재(존재, 인격)이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 교리와 인격(살아있는 실재) 간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제시된 그 인격이시다. 예수께 관한 교리적 진술들은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고전 15:3, 4). 그러므로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견해는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의 주요한 요점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복음은 파괴된다”고 했다(Commen- tary on the Galatians, p. 31). 고든 클락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의 어떤 대립도, 지적 신앙에 대한 어떤 무시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실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명제들의 진실성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신비적 경험의 상징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Gordon Clark,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pp. 107-8).
3.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는 생각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8, 9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정죄는 순수하고 영원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에서 칼빈은 “복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관찰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 서신은 바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 mans, p. xiii).
만일 우리가 복음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옷 입었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문화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거룩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문화 속에서 그의 영원한 진리들을 사람에게 주실 수 없는가? 사실, 만일 어떤 특정한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인간의 모든 진술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래서 어떤 순수하고 영원한 진술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 생각은 명백히 오류이다.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의 내용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 9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이 그로부터 받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밝히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사도의 선포와 더불어 영구히 고정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바른 복음관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1:8, 9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한 번 복음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취소되지 못할 것이다. . . .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무 것도 더해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수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Lectures on Galatians, pp. 55, 56). 그러므로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처럼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로버트 댑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포용주의적 견해 즉 소위 ‘넓은 교회주의’(Broad Churchism)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신실한 증거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유형교회는 증거적 단체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두개적 멸시나 불성실만이 이 견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Robert Dabney, “What Is Christian Union?” Discussions: Evangelical and Theological, II, 440).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322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분석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196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몬트리얼 보고서는 전통(Tradition)과 성경을 분리시키며, 교회는 실제로 복음 자체를 의미하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단지 복음에 관한 증언들을 의미하는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The Bible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21).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우리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적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Ibid., p. 3).
2.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명제적 진술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복음은 살아있는 실재(혹은 존재, a living reality)인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전통의 내용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달하는 실재는 명제적 형식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Ibid., p. 27),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복음 자체 . . . 즉 교회의 생명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Ibid., p. 19). 플레스만-반 리어는 그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기를, “따라서 전통(Tradition)은 단번에 고정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 교리들의 총체로서 이해되지 않았고,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에서의 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Ibid., p. 2).
3.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셋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선포는 항상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Ibid., p. 20). 또한 1981년의 오뎃사 보고서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복음의 ‘헬라주의화’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대주의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결코 ‘화학적으로 순수한’(chemically pure)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핵심으로 돌아간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이와 비슷하게 진술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이미 많은 다른 문화들과 오랜 세기 동안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 시점에서 문화적으로 제한된 기독교를 다른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Gathered for Life, p. 33).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넷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신약의 글들 자체는 전통의 계속적 과정과 그것의 재해석을 증거한다. ‘복음은 동일한 복음으로 남기 위하여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 . . 만일 신약 시대의 기간에 신앙의 작성과 재작성의 계속적 과정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이 과정이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고 동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postolic Faith Today, p. 252).
비평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복음을 받았고 지금 소유하고 있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사도는 그들에게 확정적, 불변적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소유로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전파할 복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만일 그들이 전파할 내용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면, 무엇을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주의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명백한 오류이다.
2.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실재(존재, 인격)이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 교리와 인격(살아있는 실재) 간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제시된 그 인격이시다. 예수께 관한 교리적 진술들은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고전 15:3, 4). 그러므로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견해는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의 주요한 요점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복음은 파괴된다”고 했다(Commen- tary on the Galatians, p. 31). 고든 클락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의 어떤 대립도, 지적 신앙에 대한 어떤 무시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실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명제들의 진실성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신비적 경험의 상징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Gordon Clark,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pp. 107-8).
3.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는 생각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8, 9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정죄는 순수하고 영원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에서 칼빈은 “복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관찰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 서신은 바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 mans, p. xiii).
만일 우리가 복음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옷 입었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문화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거룩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문화 속에서 그의 영원한 진리들을 사람에게 주실 수 없는가? 사실, 만일 어떤 특정한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인간의 모든 진술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래서 어떤 순수하고 영원한 진술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 생각은 명백히 오류이다.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의 내용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 9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이 그로부터 받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밝히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사도의 선포와 더불어 영구히 고정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바른 복음관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1:8, 9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한 번 복음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취소되지 못할 것이다. . . .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무 것도 더해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수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Lectures on Galatians, pp. 55, 56). 그러므로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처럼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로버트 댑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포용주의적 견해 즉 소위 ‘넓은 교회주의’(Broad Churchism)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신실한 증거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유형교회는 증거적 단체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두개적 멸시나 불성실만이 이 견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Robert Dabney, “What Is Christian Union?” Discussions: Evangelical and Theological, II, 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