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5)
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5) by 이천우
개혁주의 교회와 (신)오순절주의자들과의 (방언)은사에 대한 차이는 왜 생기게 되었는지를 방언에 관련된 기록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에서 본대로 이때의 방언은 가깝게는 마가복음 16장 15-8절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의 성취에 따른 표적으로, 멀게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맺은 언약의 성취(렘 31:31-34), 그리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표적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로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것이며, 이로 인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에게 세례가 베풀어져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단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며 적용되는 특성만을 보고 모든 사람에게 반복적 사건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이 그러하듯이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가 지니는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성령 강림이 어떤 일로서 일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 표적으로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계시적 성격으로서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러 차례 있었던 성령 세례가 주어졌을 시에 함께 나타난 방언도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를 회개하고 구원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표적으로 보여 알게 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만 행해진, 성령 세례 받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진 방언입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방언을 교회적 은사 차원에서 보면서도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를 들어서 '믿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따르는 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표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계시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으로서의 표적이요 이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든지 원하고 구하면 경험하게 하고 그 능력을 소유하여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도 방언이 행해졌는데 왜 오늘날에는 방언이 은사로 주어져서 행해지지 않겠느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표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은사 방언은 각기 그것이 주어진 독특한 목적과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두 방언이 서로 다른 점은 표적 방언은 성령의 능력이 이적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어느 한 때 나타나진 것이지만, 방언 은사는 성령의 능력이 성도 안에 내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 - 은사를 행하여 교회를 섬겨 봉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신앙고백과 증거를 나누어 서로 신앙을 세워 나감 - 을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방언 은사는 표적 은사와는 달리 여러 은사와 함께 교회에 주어졌는데 그 은사들은 개인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란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는 각 은사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예배 정황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26-33) 이 말씀은 사도 시대에 고린도에서 행해지던 평상적인 예배였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만이 아니라 계시(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 방언, 통역을 행하였습니다. 예배에 이처럼 은사가 행해진 것은 이 모든 것, 곧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해 그들 안에 성령께서 친히 계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선물이 곧 여러 은사를 나타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따라서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과 여러 은사들은 이처럼 특별히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여러 은사를 나타내 주셨을까요? 사도 시대는 선지자 시대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문서화되는 기간으로 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성경 기록자였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성경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밝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구원받는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서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하여 나타내 주는 일을 했으며, 그 예언의 역사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선지자에 의해서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가 예언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입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위에 세워진 '교회'에 의해 증거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증거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 신앙을 전승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곧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기록한 성경에서 사도들이 가진 신앙을 전승 받아 계승해 나가는 일을 합니다.
성경 기록이 종결 될 때까지 하나님은 교회에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통해 봉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여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성경 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교회 안에는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은사가 계속해서 베풀어질 필요가 남아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에게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교회의 온전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그러한 은사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행해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이제는 성경에 의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권위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증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알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충족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성경 외에 다른 것에서 은사를 찾는다고 하면 그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모든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표적으로 주시기도 하셨고, 은사로 주시기도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표적과 은사의 완결로 주신 것이 성경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도 시대의 교회 이후인 이제는 은사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은사의 종류(은사의 종류는 고린도전서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은사 외에도 더 많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는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 시대의 교회를 특징 짓는 것으로서의 역할과 목적을 띠고 있었으므로, 사도가 맡은 사명을 다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하여 필요했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만들어 가시는 계시적이고 이적적인 성격을 띤 은사도 함께 중단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은사 그 자체와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마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대표적인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 등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을 통해서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었듯이, 이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각 지체된 자가 성령으로 난 자임을 서로 확인케 하고 또한 서로 돌보아주어서 온전하게 몸을 만들어 가게 하는데 서로 유익을 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은사는 그것이 필요시에 각 사람에게 특징 있게 주어져 나타나져서 서로 섬김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며 교회에 덕을 세워나가는 일로 있었으며, 이러한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을 두신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고전 12:27-28).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들, 다음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 남을 돕는 사람들, 함께 교회를 섬겨 가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사람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는 모두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가 될 수 있거나 선지자가 될 수 있거나 교사가 될 수 있거나 이적을 행할 수 있거나 병을 고칠 수 있거나 방언을 할 수 있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교회를 온전히 섬겨갈 수 있도록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할 역할에 따라 각각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으로서 말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사를 직분의 성격 속에서 다룬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기능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누리는 유익 안에서 은사를 사용한 그들 자신들이 함께 기쁨을 지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점차 계시적인 성격을 띤 표적의 차원에서 고린도교회의 은사에서 보듯이 봉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 세상에 점차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각 구성원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섬겨가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그대로 남아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난 자는 누구나 교회를 섬기는 재능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함께 만들어져 가는 일에 그 재능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엡 4:1-16). 이것은 말입니다. 본능적으로 행해지며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 의 식 속에서 말입니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여러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여러 은사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고, 여러 은사들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 온전하지 못한 이 모든 은사들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은사들이 보여 주어 말해 주려고 했던 일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서 은사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랑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 가장 큰 은사는 성경입니다. 교회에 가장 큰 은사로 오랜 역사 속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문서로 기록해 오셨던 성경을 사도에 이르러서 그 기록을 완성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는 교회를 섬깁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시대 교회에 주어졌던 은사들은 종류별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은사 그 자체와 은사의 속성은 여전히 교회 안에 남아 있습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는 이제 은사는 '섬김'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교회를 섬기는 은사(재능)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도의 신앙 성장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는 성도의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지간에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적으로 섬겨 돕는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적성에 맞추어서 적성에 맞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헌신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 속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섬김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사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사주의' 이 자체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만, 오순절식 은사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식의 은사는 사도 시대 교회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지 나타내십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과 성도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란 공적인 성격이 온 세상에 드러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것을 계속해서 행사하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은사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첫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어 종결된 후에도 계시의 방편으로 행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시의 유일한 방편으로는 성경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로서 병 고침도 있고 귀신 쫓아냄도 있다고 하면 방언도 있을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지혜의 말씀이며, 지식의 말씀이며, 믿음이며, 방언이며, 통역이며, 예언입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하는 '언어'와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하는 가장 신비의 언어로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도들에게 내적 조명이 되어(마음에 비추임이 됨) 밝히 말해지고 교제(성령과의 교통)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드러냄을 위한 필요에 의해 일정한 때에 한시적으로 행해져왔으나, 이제 성경의 기록이 완성 된 후에는 그 역할과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중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습니다. 맥클로드(Donald Macleod)는 방언, 예언이 계시적인 은사라고 하면서 방언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정경이 형성되는 동안에 교리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였고, 그러나 계시가 완성되어진 후에는 방언은 교사들의 성경 해석으로 대치되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둘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사도 이후의 시대에도 이적의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은사에서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과 더불어 이적의 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인 능력 행사가 아닙니다. 병 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사람들에게 말하여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 기간에서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메시야성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시대 이후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세우신 교회가 어떤 것인지가 온 세상에 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의 능력을 행하여 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생명의 왕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사람에게 죽음과 죄 아래 있는 현상적인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다스려 가시는 능력을 보이시면서 알게 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들 중에서 이적의 능력과 관련한 것들은 중지되었습니다.
셋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유일한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경과 더불어서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된 성도들의 다양한 재능이 교회를 섬겨 가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방언의 은사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은사는 관심이 없고 방언만을 구하는 것은 구해지고 안 구해지고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개혁주의 교회와 (신)오순절주의자들과의 (방언)은사에 대한 차이는 왜 생기게 되었는지를 방언에 관련된 기록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에서 본대로 이때의 방언은 가깝게는 마가복음 16장 15-8절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의 성취에 따른 표적으로, 멀게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맺은 언약의 성취(렘 31:31-34), 그리고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표적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로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것이며, 이로 인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에게 세례가 베풀어져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단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며 적용되는 특성만을 보고 모든 사람에게 반복적 사건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이 그러하듯이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가 지니는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성령 강림이 어떤 일로서 일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 표적으로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계시적 성격으로서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러 차례 있었던 성령 세례가 주어졌을 시에 함께 나타난 방언도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를 회개하고 구원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표적으로 보여 알게 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만 행해진, 성령 세례 받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진 방언입니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방언을 교회적 은사 차원에서 보면서도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를 들어서 '믿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따르는 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표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계시적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으로서의 표적이요 이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든지 원하고 구하면 경험하게 하고 그 능력을 소유하여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도 방언이 행해졌는데 왜 오늘날에는 방언이 은사로 주어져서 행해지지 않겠느냐 합니다.
사도행전에서의 표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은사 방언은 각기 그것이 주어진 독특한 목적과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두 방언이 서로 다른 점은 표적 방언은 성령의 능력이 이적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어느 한 때 나타나진 것이지만, 방언 은사는 성령의 능력이 성도 안에 내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 - 은사를 행하여 교회를 섬겨 봉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신앙고백과 증거를 나누어 서로 신앙을 세워 나감 - 을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방언 은사는 표적 은사와는 달리 여러 은사와 함께 교회에 주어졌는데 그 은사들은 개인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란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는 각 은사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예배 정황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26-33) 이 말씀은 사도 시대에 고린도에서 행해지던 평상적인 예배였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만이 아니라 계시(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지식), 방언, 통역을 행하였습니다. 예배에 이처럼 은사가 행해진 것은 이 모든 것, 곧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해 그들 안에 성령께서 친히 계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선물이 곧 여러 은사를 나타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들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기능은 그 은사들을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따라서 당연히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과 여러 은사들은 이처럼 특별히 사도 시대의 교회를 구별하는 특징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사도 시대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여러 은사를 나타내 주셨을까요? 사도 시대는 선지자 시대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문서화되는 기간으로 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성경 기록자였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성경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밝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구원받는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서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하여 나타내 주는 일을 했으며, 그 예언의 역사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선지자에 의해서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는 선지자가 예언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입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위에 세워진 '교회'에 의해 증거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증거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 신앙을 전승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곧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기록한 성경에서 사도들이 가진 신앙을 전승 받아 계승해 나가는 일을 합니다.
성경 기록이 종결 될 때까지 하나님은 교회에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통해 봉사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여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성경 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교회 안에는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은사가 계속해서 베풀어질 필요가 남아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에게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교회의 온전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그러한 은사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행해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종결되어 완성되고서는 이제는 성경에 의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풍성함에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권위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증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알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충족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성경 외에 다른 것에서 은사를 찾는다고 하면 그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모든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표적으로 주시기도 하셨고, 은사로 주시기도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표적과 은사의 완결로 주신 것이 성경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도 시대의 교회 이후인 이제는 은사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은사의 종류(은사의 종류는 고린도전서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은사 외에도 더 많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는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 시대의 교회를 특징 짓는 것으로서의 역할과 목적을 띠고 있었으므로, 사도가 맡은 사명을 다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하여 필요했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만들어 가시는 계시적이고 이적적인 성격을 띤 은사도 함께 중단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은사 그 자체와 은사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마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대표적인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 등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을 통해서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었듯이, 이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각 지체된 자가 성령으로 난 자임을 서로 확인케 하고 또한 서로 돌보아주어서 온전하게 몸을 만들어 가게 하는데 서로 유익을 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은사는 그것이 필요시에 각 사람에게 특징 있게 주어져 나타나져서 서로 섬김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며 교회에 덕을 세워나가는 일로 있었으며, 이러한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을 두신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고전 12:27-28).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들, 다음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 남을 돕는 사람들, 함께 교회를 섬겨 가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사람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는 모두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가 될 수 있거나 선지자가 될 수 있거나 교사가 될 수 있거나 이적을 행할 수 있거나 병을 고칠 수 있거나 방언을 할 수 있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교회를 온전히 섬겨갈 수 있도록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각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할 역할에 따라 각각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직분으로서 말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사를 직분의 성격 속에서 다룬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기능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누리는 유익 안에서 은사를 사용한 그들 자신들이 함께 기쁨을 지닐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 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점차 계시적인 성격을 띤 표적의 차원에서 고린도교회의 은사에서 보듯이 봉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 세상에 점차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각 구성원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섬겨가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교회(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그대로 남아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난 자는 누구나 교회를 섬기는 재능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함께 만들어져 가는 일에 그 재능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엡 4:1-16). 이것은 말입니다. 본능적으로 행해지며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 의 식 속에서 말입니다.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여러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여러 은사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고, 여러 은사들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 온전하지 못한 이 모든 은사들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은사들이 보여 주어 말해 주려고 했던 일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서 은사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랑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 가장 큰 은사는 성경입니다. 교회에 가장 큰 은사로 오랜 역사 속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문서로 기록해 오셨던 성경을 사도에 이르러서 그 기록을 완성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는 교회를 섬깁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시대 교회에 주어졌던 은사들은 종류별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은사 그 자체와 은사의 속성은 여전히 교회 안에 남아 있습니다. 사도 시대 교회 이후에는 이제 은사는 '섬김'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교회를 섬기는 은사(재능)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도의 신앙 성장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는 성도의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지간에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적으로 섬겨 돕는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적성에 맞추어서 적성에 맞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헌신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 속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섬김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은사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사주의' 이 자체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만, 오순절식 은사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식의 은사는 사도 시대 교회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지 나타내십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과 성도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란 공적인 성격이 온 세상에 드러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것을 계속해서 행사하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은사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첫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성경 기록이 완성되어 종결된 후에도 계시의 방편으로 행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시의 유일한 방편으로는 성경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로서 병 고침도 있고 귀신 쫓아냄도 있다고 하면 방언도 있을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지혜의 말씀이며, 지식의 말씀이며, 믿음이며, 방언이며, 통역이며, 예언입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거하는 '언어'와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하는 가장 신비의 언어로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도들에게 내적 조명이 되어(마음에 비추임이 됨) 밝히 말해지고 교제(성령과의 교통)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드러냄을 위한 필요에 의해 일정한 때에 한시적으로 행해져왔으나, 이제 성경의 기록이 완성 된 후에는 그 역할과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중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습니다. 맥클로드(Donald Macleod)는 방언, 예언이 계시적인 은사라고 하면서 방언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정경이 형성되는 동안에 교리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였고, 그러나 계시가 완성되어진 후에는 방언은 교사들의 성경 해석으로 대치되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둘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사도 이후의 시대에도 이적의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은사에서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과 더불어 이적의 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인 능력 행사가 아닙니다. 병 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사람들에게 말하여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 기간에서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메시야성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시대 이후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세우신 교회가 어떤 것인지가 온 세상에 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의 능력을 행하여 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생명의 왕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사람에게 죽음과 죄 아래 있는 현상적인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다스려 가시는 능력을 보이시면서 알게 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은사들 중에서 이적의 능력과 관련한 것들은 중지되었습니다.
셋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유일한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경과 더불어서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된 성도들의 다양한 재능이 교회를 섬겨 가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방언의 은사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은사는 관심이 없고 방언만을 구하는 것은 구해지고 안 구해지고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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