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 비판
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 비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기를 원하는 운동'이다. 교회의 연합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슬로건이요 목표이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원은 흔히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로 본다. 그 운동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단체로 구체화 되었다. WCC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열매요 주요 수단이 되었다.
WCC는 창립 당시부터 그 지도층에 죤 베넷, 브롬리 옥스남, 헨리 반 듀센, 추첸 차오, 대주교 죄더블롬, 윌리암 템플 등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하였고 보수적 교회들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를 비성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세계적으로 이런 비판적 안목이 다시 약화되는 감이 있다. 그렇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죽지 않고 활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영향은 하나님의 교회를 더 어지럽히고 부패시키고 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20세기 개신교 신학과 교회의 자유화의 열매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악을 바로 인식하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전통적 이해를 거부하고 왜곡시켰기 때문에, 그 산물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 개념은 성경적 일체 개념으로부터 떠나갈 수 있는 만큼 멀리 떠나가 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 개념의 오류는 다음의 두 질문의 답을 찾을 때 확실히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가 무엇인가?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은 무엇인가?
교회 일체성의 기초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가 무엇인가? 이 운동은 어떤 기초 위에서 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WCC가 공식적으로 진술하는 어떤 내용들은 그럴 듯하다. WCC는 자신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그러므로 한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향한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 또 WCC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서 '한 신앙' 혹은 '사도적 신앙'을 말하고 있고 때로는 주후 4세기의 정통적 신조인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제안하기도 한다.
이런 진술들은 겉보기에 건전하고 성경적인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에큐메니칼 자료들을 읽는 자는 이러한 공식적 진술들은 단지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고 전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실제로 '신학적 포용주의'를 교회의 일체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전체적인 관찰에서와 개별적 주제들의 관찰에서 드러난다.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관찰
전체적으로 관찰할 때,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기독교계 안에 존재하는 각종 신학 사상들을 비판 없이 용납하고 있다. WCC의 총무이었던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WCC안의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말하기를,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다"고 하였다. 역시 WCC의 총무이었던 유진 카슨 블레이크는 "연합된 교회는 그 공동성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성 때문에) 신앙의 신학적 작성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교와 전도'라는 제목의 1983년의 한 에큐메니칼 선언서에서 WCC는 그 자신의 공동적 신앙의 다각적 표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더욱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다양성의 포용을 정당화하고 포용적 신조의 작성을 추구하고 교회들 간의 상호 인정과 성찬 교제와 선교에서의 협동 등을 제안하고 강조한다. 이 모든 사례들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를 확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포용주의는 바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근본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교리들로 표현되며 신학은 그 교리들의 논리적, 체계적 진술이다. 기독교는 참된 진리와 교리에 기초하고 있고 따라서 기독교회의 일체성은 참된 교리와 신학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워필드가 말했듯이, "신약성경의 기독교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성실에 기초할 수 없다." 또 마틴 로이드 죤스가 강조했듯이,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
더욱이, 교회는 바른 교리를 지키고 이단들을 배격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딤후 1:13; 롬 16:17; 딛 3:10; 요일 4:1; 유 3). 그러므로 교회는 아무 교리나 아무 신학이나 비평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교리적 무관심주의는 기독교회의 뿌리를 파괴시키는 자살 행위이다.
특히,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메이천의 비평대로 기독교와 근본이 다른 비(非)속죄적 이방 사상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단 정도가 아니고, 메이천의 말대로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 신학이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를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다. 현대 교회는 심히 배교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 속에서 신학적 포용주의는 자유주의 이단 신학을 포용하는 것밖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신학적 포용주의--개별적 관찰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전체적 관찰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적 주제들의 관찰에서도 드러난다.
1. 성경관
우선, 그것은 WCC의 성경관에서 드러난다. WCC는 1980년에 출판한 성경: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그 권위와 해석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성경 속에 신학적 다양성과 심지어 때때로 상호 모순이 있으며 성경의 역사는 순수한 역사가 아니고 해석된 역사이며 성경은 객관적 신적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앙적, 파괴적 성경관은 용납할 수 없는 이단 사상이다. 루터교회와 영국교회를 포함하여 전통적 개신교회들은 일치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는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와 신빙성과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이단이다. 성경이 부정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폐할 수 없다"(요 10:35).
2. 신조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신조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이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분열된 기독교 세계의 화해를 위한 접촉점으로 제안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신조의 시대 제약성와 부정확성을 주장하며 심지어 어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단적이다. 신조는, 만일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바르게 반영한다면, 객관적이고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물론이거니와, 17세기의 개신교회의 교파적 신조들은 그것들이 성경에 근거할진대 영속적 타당성을 가진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시의 언어적 성격을 부정하는 사상은 매우 파괴적인 이단 사상이다.
3. 복음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복음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은 복음을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며 시대 제한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어떤 것이며 교회는 복음 자체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다 이단적이다. 기독교 복음은 고정 불변적이며 영원하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1:8, 9의 증거대로 사도들에 의해 선언된 내용이며 교회들에 의해 받아진 내용이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과 더불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순수한' 복음을 가진다. 또 복음은 교리적 내용을 가진다. 고든 클락의 말과 같이,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4. 신앙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신앙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은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경험이라고 주장하며 또 신앙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단적이다. 참된 신앙은 지식을 포함한다. 칼빈의 말대로, "지식이 없는 곳에 신앙도 없다." 더욱이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의 복음도, 성경도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다.
5.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WCC와 천주교회는 매우 가깝고 서로 우호적이다.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하기를, "[WCC와 천주교회의 관계는] 모든 종류의 우호적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이다"고 하였다.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까지 있다. 또 현대 은사운동은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우호적 태도는 이단적이다. 개신교회는 전통적으로 루터와 칼빈과 더불어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단체로 간주해왔다. 천주교회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여전히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마리아를 '보혜사, 중보자'로, 기도의 대상으로 높이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정죄하고 미사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죽음을 주장한다. 이런 교리들은 다 이단이다.
종교적 포용주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타종교들을 포용하려는 경향까지 있다. WCC의 타종교들과의 대화 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한 대표적 예이다. 그는 1985년 WCC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제목의 그의 책에서 명백히 기독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 자매이며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하며 따라서 타종교인들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비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구약 역사에서 보듯이, 참 종교가 부패할 때마다 이방종교의 포용이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요(딤전 2:5)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심(요 14:6)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요 그가 곧 적그리스도이다.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성 개념의 오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일체성이 표현들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주장하는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이 무엇인가? 3가지 표현들이 제시되고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선교와 성례와 조직체이다.
선교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일체성의 표현으로 선교를 강조한다. 사실, 선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의 개념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그것은 전도뿐 아니라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한다. 1980년 WCC의 멜본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는,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 요소이다"고 선언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복음 전도 자체도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서에서, WCC는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또한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적 선교 개념은 독특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주의를 동반한다. 사실, WCC는 그 헌법에서 자신의 한 기능을 "인간적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의 파괴, 그리고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대한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1980년 WCC의 멜본 선교대회의 사회적 관심은 매우 컸으므로, 자유주의적 인사인 데이빗 스토우는 말하기를, "멜본은 사회 활동에 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슈들에 촛점을 맞추었다"고 했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에 의하면,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기본적 문제이므로 정의와 평화의 사회는, 데이빗 스토우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 혹은 약간 부드럽게 표현하여 '중앙 설계 경제'의 사회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러한 사회적 이상과 함께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사회적 관심은,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투쟁에 참여해야 함을 주장하는 사회적 행동주의로 나아간다. 1968년 WCC의 웁살라 총회는, 인류의 갱신은 "지역 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1980년 멜본 선교대회도 비슷하게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은 가난한 자들에게 유리한 판결로 온다. 이 판결은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묶는 권세들을 전복시키도록 투쟁할 수 있게 만든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하며 따라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말한다.
WCC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1970년 이후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인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에게 1992년 9월말 현재 1,007만불 이상을 지원하였다.
[비평]
에큐메니칼 인사들은 물론, 오늘날 죤 스토트 같은 복음주의자들까지 받아들이는 이러한 사회 정치적 선교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선교'(宣敎)라는 영어 단어(mission)는 '특수한 임무' 혹은 '사명'이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의 특수한 임무 즉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은 근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고(눅 5:32) 또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또 그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고 증거하셨다(요 6:38-40).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의 일에 힘쓰셨고(마 4:23; 9:35) 또 그는 자신이 전도의 일을 위해 오셨다고 표현하셨다(막 1:38).
전도와 영혼 구원이 그의 주요한 관심이셨기 때문에, 그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전도의 특별한 임무 즉 사명을 주셨다. 마태복음 28:19과 마가복음 16:15과 누가복음 24:47과 사도행전 1:8은 그 사명이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임을 증거한다.
로버트 글로버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라는 그의 책에서 매우 정당하게 강조하여 말하기를,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 . . . 초대 교회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들과 문제들을 직면했지만, 사회 복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어떤 변명도 없이 개인 구원의 유일한 복음을 전파했다"고 했다.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선교가 "영원한 구원의 증거와 제시"임을 바르게 말했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사회정치활동은 결코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사회정치활동에 관계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왕을 삼으려는 무리를 피해 떠나가셨고(요 6:15), 형의 유업을 나눠달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셨다(눅 12:13, 14). 또 그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다(요 18:3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하신 적이 없으셨고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초대 교회도 세속 사회의 갱신을 위한 어떤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인 전도에 충실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을 사회활동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적절치 않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은 단지 그의 전도 사역의 동반물이었다. 그는 크신 긍휼과 신적 능력의 주님이셨다. 그의 병고치심은 그 긍휼과 능력의 증거이었다. 더욱이 그는 주로 그의 주위에 있거나 그를 믿고 따랐던 자들의 병들을 고쳐주셨다. 그것은 결코 전도의 일과 대등한 의미에서나 혹은 종속적 의미일지라도 어떤 독립적 활동으로서 사회활동이었거나 또는 세상의 모든 병자들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확실히 그의 사명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초대 교회의 구제 활동을 사회활동의 예로 간주하지만, 그것도 적절치 않다. 사도행전 2, 4, 6장 등이 보이는 교회의 구제는 주로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불리웠고(고후 8:4; 9:1)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로 이루어졌다.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은 교회로서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께서 명하신 일이나 뜻하신 일이 아니다. 주께서는 교회의 제한된 헌금을 오직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결코 그것을 교육 사업, 고아원 사업, 양노 사업 등의 자선 사업에 쓰기를 원치 않으신다. 사회정치활동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또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독특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주의도 정당하지 못하다. 가난 혹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성급하게 자본주의 사회 구조 자체를 악으로 정죄해서도 안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적어도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선한 원리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가 경제적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자유를 유린했고 특히 종교적 자유를 지극히 통제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경제적 불평등보다 더 무서운 사회악이다.
근본적으로, 사회 문제는 사회의 구조 자체에 있지 않고 인간의 부패된 죄악성에 있다. 이 부패성이 있는 한 공평하고 평화로운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또 사회 갱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고 그들과 함께 투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자를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명했다(출 23:3; 레 19:15). 또 성경은 과격한 혁명적 사회 변혁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 개량이나 개혁을 위한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로, 전도를 통한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경이 보이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이다. 진정한 사회 개량은 사람의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악한 마음이 악한 사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사회구조적 변화보다 앞서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집과 교회를 세상 속에서 이상적 사회의 모범들로 만들어야 한다. 중생한 공동체가 이상적이지 못할 때, 중생치 못한 세속 사회를 이상적이게 만들려는 시도는 주제 넘는 일일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의무들에서 사회 개량을 위해 성실해야 한다. 정직과 사랑의 모범으로써 불신자들에게 감화를 주어, 불신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의의 삶을 설득하며, 사회의 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수단을 사용하여 사회 구조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 경제, 법률, 교육, 신문 방송, 음악, 예술, 출판 등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세속 사회의 점진적 개선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성례
에큐메니칼 운동이 강조하는 교회 일체성의 두번째 표현은 성례이다. 그러나 1982년 WCC가 50년간의 연구의 결실로 출판한 세례, 성찬, 목회라는 제목의 문서에 나타난 성례관은 매우 성례주의적이다. 즉, 성례 자체가 구원을 전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주의는 개신교회의 복음주의적 성격을 포기하고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는 오류이다.
조직체
에큐메니칼 운동이 강조하는 교회 일체성의 세번째 그리고 궁극적 표현은 조직체이다.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적 교회를 갈망한다. 한 세계 교회는 1961년 WCC 뉴델리 총회가 "하나의 완전히 묶여진 교제"라고 표현한 그것이요 1975년 나이로비 총회가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라고 부른 그것이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선언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동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비평]
그러나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세계 교회 개념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이단적, 자유주의적 구성원들을 배제하지 않고 기독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교리에 기초한다. 교회의 일체라는 슬로건이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록 교회 연합 운동이 모든 이단자들을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 교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선택, 속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등의 중요한 교리들에 관하여 무지나 오해를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한 세계 교회는 어떤 교회 회원들의 양심을 강박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충실한 고백을 포기하든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인간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적 교회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두는 무서운 전제주의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치 않는 자마다 교만해지고 남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제주의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던 옛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며 신앙의 자유의 귀한 유산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결론
마지막으로, 성경을 믿는 교회와 신자들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취해야 할 성경적 태도는 명백하다. 그것은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악을 배격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WCC에 관련된 한국의 기장, 기감, 기성, 통합측 장로교단 안의 성경을 믿는 교회와 신자들은 이 악을 대항하여 힘써 싸우고 이 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신측, 합동측 등 보수적 교회들도 보수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위태롭게 하는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메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 사실들을 부정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글 :추맥정
출처:참좋은군사 http://jix777.egloos.com/10410252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기를 원하는 운동'이다. 교회의 연합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슬로건이요 목표이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원은 흔히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로 본다. 그 운동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단체로 구체화 되었다. WCC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열매요 주요 수단이 되었다.
WCC는 창립 당시부터 그 지도층에 죤 베넷, 브롬리 옥스남, 헨리 반 듀센, 추첸 차오, 대주교 죄더블롬, 윌리암 템플 등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하였고 보수적 교회들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를 비성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세계적으로 이런 비판적 안목이 다시 약화되는 감이 있다. 그렇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죽지 않고 활동하고 있으며 그것의 영향은 하나님의 교회를 더 어지럽히고 부패시키고 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20세기 개신교 신학과 교회의 자유화의 열매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악을 바로 인식하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교회의 '일체성'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전통적 이해를 거부하고 왜곡시켰기 때문에, 그 산물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 개념은 성경적 일체 개념으로부터 떠나갈 수 있는 만큼 멀리 떠나가 있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 개념의 오류는 다음의 두 질문의 답을 찾을 때 확실히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가 무엇인가?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은 무엇인가?
교회 일체성의 기초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가 무엇인가? 이 운동은 어떤 기초 위에서 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WCC가 공식적으로 진술하는 어떤 내용들은 그럴 듯하다. WCC는 자신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그러므로 한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향한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 또 WCC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서 '한 신앙' 혹은 '사도적 신앙'을 말하고 있고 때로는 주후 4세기의 정통적 신조인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제안하기도 한다.
이런 진술들은 겉보기에 건전하고 성경적인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에큐메니칼 자료들을 읽는 자는 이러한 공식적 진술들은 단지 형식적인 말에 불과하고 전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실제로 '신학적 포용주의'를 교회의 일체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전체적인 관찰에서와 개별적 주제들의 관찰에서 드러난다.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관찰
전체적으로 관찰할 때,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기독교계 안에 존재하는 각종 신학 사상들을 비판 없이 용납하고 있다. WCC의 총무이었던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WCC안의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말하기를,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다"고 하였다. 역시 WCC의 총무이었던 유진 카슨 블레이크는 "연합된 교회는 그 공동성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성 때문에) 신앙의 신학적 작성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교와 전도'라는 제목의 1983년의 한 에큐메니칼 선언서에서 WCC는 그 자신의 공동적 신앙의 다각적 표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더욱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다양성의 포용을 정당화하고 포용적 신조의 작성을 추구하고 교회들 간의 상호 인정과 성찬 교제와 선교에서의 협동 등을 제안하고 강조한다. 이 모든 사례들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를 확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포용주의는 바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근본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교리들로 표현되며 신학은 그 교리들의 논리적, 체계적 진술이다. 기독교는 참된 진리와 교리에 기초하고 있고 따라서 기독교회의 일체성은 참된 교리와 신학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워필드가 말했듯이, "신약성경의 기독교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성실에 기초할 수 없다." 또 마틴 로이드 죤스가 강조했듯이,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
더욱이, 교회는 바른 교리를 지키고 이단들을 배격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딤후 1:13; 롬 16:17; 딛 3:10; 요일 4:1; 유 3). 그러므로 교회는 아무 교리나 아무 신학이나 비평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 교리적 무관심주의는 기독교회의 뿌리를 파괴시키는 자살 행위이다.
특히,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메이천의 비평대로 기독교와 근본이 다른 비(非)속죄적 이방 사상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단 정도가 아니고, 메이천의 말대로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 신학이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를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 속에 들어와 있다. 현대 교회는 심히 배교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 속에서 신학적 포용주의는 자유주의 이단 신학을 포용하는 것밖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신학적 포용주의--개별적 관찰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전체적 관찰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적 주제들의 관찰에서도 드러난다.
1. 성경관
우선, 그것은 WCC의 성경관에서 드러난다. WCC는 1980년에 출판한 성경: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그 권위와 해석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성경 속에 신학적 다양성과 심지어 때때로 상호 모순이 있으며 성경의 역사는 순수한 역사가 아니고 해석된 역사이며 성경은 객관적 신적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앙적, 파괴적 성경관은 용납할 수 없는 이단 사상이다. 루터교회와 영국교회를 포함하여 전통적 개신교회들은 일치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는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와 신빙성과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이단이다. 성경이 부정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폐할 수 없다"(요 10:35).
2. 신조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신조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이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분열된 기독교 세계의 화해를 위한 접촉점으로 제안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신조의 시대 제약성와 부정확성을 주장하며 심지어 어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단적이다. 신조는, 만일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바르게 반영한다면, 객관적이고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물론이거니와, 17세기의 개신교회의 교파적 신조들은 그것들이 성경에 근거할진대 영속적 타당성을 가진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시의 언어적 성격을 부정하는 사상은 매우 파괴적인 이단 사상이다.
3. 복음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복음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은 복음을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며 시대 제한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어떤 것이며 교회는 복음 자체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다 이단적이다. 기독교 복음은 고정 불변적이며 영원하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1:8, 9의 증거대로 사도들에 의해 선언된 내용이며 교회들에 의해 받아진 내용이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과 더불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순수한' 복음을 가진다. 또 복음은 교리적 내용을 가진다. 고든 클락의 말과 같이,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4. 신앙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신앙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지도자들은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경험이라고 주장하며 또 신앙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단적이다. 참된 신앙은 지식을 포함한다. 칼빈의 말대로, "지식이 없는 곳에 신앙도 없다." 더욱이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의 복음도, 성경도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다.
5.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WCC와 천주교회는 매우 가깝고 서로 우호적이다.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하기를, "[WCC와 천주교회의 관계는] 모든 종류의 우호적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이다"고 하였다.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까지 있다. 또 현대 은사운동은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우호적 태도는 이단적이다. 개신교회는 전통적으로 루터와 칼빈과 더불어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단체로 간주해왔다. 천주교회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여전히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마리아를 '보혜사, 중보자'로, 기도의 대상으로 높이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정죄하고 미사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죽음을 주장한다. 이런 교리들은 다 이단이다.
종교적 포용주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타종교들을 포용하려는 경향까지 있다. WCC의 타종교들과의 대화 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한 대표적 예이다. 그는 1985년 WCC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제목의 그의 책에서 명백히 기독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 자매이며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하며 따라서 타종교인들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비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구약 역사에서 보듯이, 참 종교가 부패할 때마다 이방종교의 포용이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요(딤전 2:5)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심(요 14:6)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요 그가 곧 적그리스도이다.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회 일체성 개념의 오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일체성이 표현들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주장하는 교회 일체성의 표현들이 무엇인가? 3가지 표현들이 제시되고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선교와 성례와 조직체이다.
선교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일체성의 표현으로 선교를 강조한다. 사실, 선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의 개념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그것은 전도뿐 아니라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한다. 1980년 WCC의 멜본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는,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 요소이다"고 선언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복음 전도 자체도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서에서, WCC는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또한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적 선교 개념은 독특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주의를 동반한다. 사실, WCC는 그 헌법에서 자신의 한 기능을 "인간적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의 파괴, 그리고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대한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1980년 WCC의 멜본 선교대회의 사회적 관심은 매우 컸으므로, 자유주의적 인사인 데이빗 스토우는 말하기를, "멜본은 사회 활동에 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이슈들에 촛점을 맞추었다"고 했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에 의하면,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기본적 문제이므로 정의와 평화의 사회는, 데이빗 스토우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 혹은 약간 부드럽게 표현하여 '중앙 설계 경제'의 사회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러한 사회적 이상과 함께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사회적 관심은,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투쟁에 참여해야 함을 주장하는 사회적 행동주의로 나아간다. 1968년 WCC의 웁살라 총회는, 인류의 갱신은 "지역 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했다. 1980년 멜본 선교대회도 비슷하게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은 가난한 자들에게 유리한 판결로 온다. 이 판결은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묶는 권세들을 전복시키도록 투쟁할 수 있게 만든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하며 따라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말한다.
WCC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1970년 이후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인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에게 1992년 9월말 현재 1,007만불 이상을 지원하였다.
[비평]
에큐메니칼 인사들은 물론, 오늘날 죤 스토트 같은 복음주의자들까지 받아들이는 이러한 사회 정치적 선교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선교'(宣敎)라는 영어 단어(mission)는 '특수한 임무' 혹은 '사명'이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의 특수한 임무 즉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은 근본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고(눅 5:32) 또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또 그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고 증거하셨다(요 6:38-40).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의 일에 힘쓰셨고(마 4:23; 9:35) 또 그는 자신이 전도의 일을 위해 오셨다고 표현하셨다(막 1:38).
전도와 영혼 구원이 그의 주요한 관심이셨기 때문에, 그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전도의 특별한 임무 즉 사명을 주셨다. 마태복음 28:19과 마가복음 16:15과 누가복음 24:47과 사도행전 1:8은 그 사명이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임을 증거한다.
로버트 글로버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라는 그의 책에서 매우 정당하게 강조하여 말하기를,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 . . . 초대 교회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들과 문제들을 직면했지만, 사회 복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어떤 변명도 없이 개인 구원의 유일한 복음을 전파했다"고 했다.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선교가 "영원한 구원의 증거와 제시"임을 바르게 말했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사회정치활동은 결코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사회정치활동에 관계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왕을 삼으려는 무리를 피해 떠나가셨고(요 6:15), 형의 유업을 나눠달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셨다(눅 12:13, 14). 또 그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다(요 18:3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하신 적이 없으셨고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초대 교회도 세속 사회의 갱신을 위한 어떤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인 전도에 충실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을 사회활동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적절치 않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은 단지 그의 전도 사역의 동반물이었다. 그는 크신 긍휼과 신적 능력의 주님이셨다. 그의 병고치심은 그 긍휼과 능력의 증거이었다. 더욱이 그는 주로 그의 주위에 있거나 그를 믿고 따랐던 자들의 병들을 고쳐주셨다. 그것은 결코 전도의 일과 대등한 의미에서나 혹은 종속적 의미일지라도 어떤 독립적 활동으로서 사회활동이었거나 또는 세상의 모든 병자들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확실히 그의 사명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초대 교회의 구제 활동을 사회활동의 예로 간주하지만, 그것도 적절치 않다. 사도행전 2, 4, 6장 등이 보이는 교회의 구제는 주로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불리웠고(고후 8:4; 9:1)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로 이루어졌다.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은 교회로서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께서 명하신 일이나 뜻하신 일이 아니다. 주께서는 교회의 제한된 헌금을 오직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결코 그것을 교육 사업, 고아원 사업, 양노 사업 등의 자선 사업에 쓰기를 원치 않으신다. 사회정치활동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또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독특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주의도 정당하지 못하다. 가난 혹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성급하게 자본주의 사회 구조 자체를 악으로 정죄해서도 안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적어도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선한 원리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가 경제적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자유를 유린했고 특히 종교적 자유를 지극히 통제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경제적 불평등보다 더 무서운 사회악이다.
근본적으로, 사회 문제는 사회의 구조 자체에 있지 않고 인간의 부패된 죄악성에 있다. 이 부패성이 있는 한 공평하고 평화로운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또 사회 갱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고 그들과 함께 투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자를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명했다(출 23:3; 레 19:15). 또 성경은 과격한 혁명적 사회 변혁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 개량이나 개혁을 위한 성경적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로, 전도를 통한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경이 보이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이다. 진정한 사회 개량은 사람의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악한 마음이 악한 사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사회구조적 변화보다 앞서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집과 교회를 세상 속에서 이상적 사회의 모범들로 만들어야 한다. 중생한 공동체가 이상적이지 못할 때, 중생치 못한 세속 사회를 이상적이게 만들려는 시도는 주제 넘는 일일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의무들에서 사회 개량을 위해 성실해야 한다. 정직과 사랑의 모범으로써 불신자들에게 감화를 주어, 불신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의의 삶을 설득하며, 사회의 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수단을 사용하여 사회 구조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 경제, 법률, 교육, 신문 방송, 음악, 예술, 출판 등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세속 사회의 점진적 개선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성례
에큐메니칼 운동이 강조하는 교회 일체성의 두번째 표현은 성례이다. 그러나 1982년 WCC가 50년간의 연구의 결실로 출판한 세례, 성찬, 목회라는 제목의 문서에 나타난 성례관은 매우 성례주의적이다. 즉, 성례 자체가 구원을 전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주의는 개신교회의 복음주의적 성격을 포기하고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는 오류이다.
조직체
에큐메니칼 운동이 강조하는 교회 일체성의 세번째 그리고 궁극적 표현은 조직체이다.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적 교회를 갈망한다. 한 세계 교회는 1961년 WCC 뉴델리 총회가 "하나의 완전히 묶여진 교제"라고 표현한 그것이요 1975년 나이로비 총회가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라고 부른 그것이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선언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동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비평]
그러나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세계 교회 개념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이단적, 자유주의적 구성원들을 배제하지 않고 기독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교리에 기초한다. 교회의 일체라는 슬로건이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록 교회 연합 운동이 모든 이단자들을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 교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선택, 속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등의 중요한 교리들에 관하여 무지나 오해를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한 세계 교회는 어떤 교회 회원들의 양심을 강박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충실한 고백을 포기하든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인간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적 교회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두는 무서운 전제주의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치 않는 자마다 교만해지고 남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제주의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던 옛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며 신앙의 자유의 귀한 유산을 잃지 말아야 한다.
결론
마지막으로, 성경을 믿는 교회와 신자들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취해야 할 성경적 태도는 명백하다. 그것은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악을 배격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WCC에 관련된 한국의 기장, 기감, 기성, 통합측 장로교단 안의 성경을 믿는 교회와 신자들은 이 악을 대항하여 힘써 싸우고 이 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신측, 합동측 등 보수적 교회들도 보수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위태롭게 하는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메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 사실들을 부정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글 :추맥정
출처:참좋은군사 http://jix777.egloos.com/1041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