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2)
방언에 대한 구속사적 고찰(2) by 이천우
교회 내에서 방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다루어진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신앙 교리적 문제로 인해 분쟁 속에 놓였습니다. 파당, 음행, 결혼, 우상제물, 성찬, 은사, 부활에 관한 오해 곧, 무지로 인해서였습니다. 이 중에서 방언은 은사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가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해를 끼치는 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부터 14장에 걸치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방언 문제를 다룹니다. 그만큼 방언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 언급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신령한 것 - 은사 ; 특별한 재능 - 에 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도가 되기 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는데 지금도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인데, 그렇거든 다음의 사실을 잘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그들이 받은 신령한 은사를 인하여 예수는 주이심을 신앙고백 하는 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함께 주님의 모이신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선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상에 이끌려서 신령한 은사를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그들의 내세우는 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이 됩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에 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방언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방언의 공통점은 그 성격이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게 하여서 무엇인가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에는 각기 독특한 특징을 짓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이 사도행전에서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나, 성령이 임한(성령 세례를 받음) 표적(이적)으로서의 방언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은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은사 방언」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에 의해서 되어졌습니다. 말하자면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롬 8:15-16).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자연적인 육적 재능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주어진 재능이기 때문에 '은사', 곧 신령한 재능, 특별한 재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입니다. 이는 거듭나면서 타고나는 재능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마다 은사를 지니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에 대한 첫 번째 이해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써 주어졌다는 것이 은사에 대한 두 번째 이해입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직임 입니다. 은사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재능으로 주어졌으며, 그 재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 교회적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섬기는 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셨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한 성령에게서 왔다는 말입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직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들은 다 한 주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직임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인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으로서 일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직임은 어떤 일을 위해 기능,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각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세워 나가는 일로써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는 은사는 개인 표적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으로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은 누군가가 복음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또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알아가도록, 또는 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권면이나 조언을 해 주는 일을 하는 재능을 말합니다. 마치 노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보듯이 말입니다. 그분들이 해 주는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산 체험에서 나오는 산 지식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터득된 지식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믿고 함께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일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삶에 대한 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지혜를 공급해 주게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재능을 이름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 곧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계시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 를 깨닫고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 어떠한 큰 일이 행해질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바라보며 따르는 것을 이름입니다(참조. 고전 13:2).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병 고치는 은사'란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이때에 병 고치는 은사는 그것이 개인에게 나타난 것이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병든 사람이 있어 고통을 겪고 있음으로 해서 온 교회에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병 고치는 재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병든 자를 위해 섬겨 봉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온 교우가 병 고치는 은사의 나타남을 인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온 교우가 합력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더욱 전심전력합니다. 이처럼 병 고치는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시에 나타내시게 한 것입니다. 은사, 곧 재능과 직임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로써 있는 것이기에 성도가 필요로 할 때 나타나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그렇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어떤 한 개인에게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병 고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은사를 베푸신 것이지 한 개인의 능력으로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병 고치는 은사가 개인의 능력이 되며, 개인의 의와 자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셨습니다. '능력 행함'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이름인데 이는 사실 병 고치는 은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권세에서 행해진 것이었으며, 그리고 사도에게서 행해진 것으로서 곧 사도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요, 그 사도는 교회의 초석으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 세워 나가는 속에서 그 권세를 권위 있게 행사한 것이기에 교회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인데, 교회가 각 지역에서 세워진 이후부터는 때때로 어떤 사람에게 사도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셔서 그로 하여금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행해짐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병듦과 귀신들림은 죄의 현상적 사건으로서 있는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주어지는 것이며, 사단의 지배로 인한 억압의 고통의 현상으로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일로서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새로운 능력으로 임하는 현상으로서 이적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니까 고쳐주고 다시 병드시니까 또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도 귀신을 쫓아내 주었더니 다시 귀신들려 있고 그래서 또 쫓아내 주고 하는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의사의 능력으로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에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그가 성령에 의하여 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현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행해지는 것을 통해서 기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유익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한 능력을 각기 어떤 한 특정인에게만 행하여 나타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개만 그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능력이 나타나져야 할 자리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그 능력이 나타나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된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인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에서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지게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져 나타납니다. 그럴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병 고치는 능력, 이적 행하는 능력,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개인의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가 요구되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이 은사를 나타내셔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셔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만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영웅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豫言입니다만 預言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장차 있을 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맡기셔서 그에 관하여 미리 보고 그래서 앞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말하는 예언은 예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설교의 특성을 띱니다. 예언을 풀어서 자세히 그 뜻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 자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그들에게서 나타나집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은사가 직분으로 주어져 행해졌을 때 그들은 사도였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교사였습니다(고전 12:28).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자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인 각 나라 지방의 언어를 뜻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언어를 뜻합니다. 이 방언이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 차이가 있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나 다 같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알지 못하는 언어로 방언을 하게 하셨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 하는 자의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자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방언의 언어가 한 종류의 같은 언어가 아닌 방언 하는 자마다 전부 다르게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방언 하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비밀 곧, 하나님의 신비한 일에 관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은 그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14:4). 그러므로 그의 경건한 생활을 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유익을 주는 도움으로 표적을 보여주시는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때 여기서의 방언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방언 그 자체만 하는 것 가지고는 개인의 경건 생활을 도와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유익 외에는 교회 전체적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 전체가 거룩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기를 성장시킬 분입니다(고전 14:4).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곳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함으로써, 이후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내는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있은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이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 믿음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이때 은사를 받아 방언을 말하는 그 자신은 믿음이 강화되고 상승하는 유익을 얻지만, 이것이 다른 믿음의 형제들에게 동일한 유익을 이끌어내는 '표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방언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래서 방언이 믿음을 돕는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지만,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지금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로잡힘 속에서 하나님과 신비한 일에 관하여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의 '표적'을 보고 있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누리는 유익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예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편이 교회적으로는 훨씬 더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하기 때문에 아직 믿지 않는 자들뿐만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신자 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요,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양심이 찔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털어놓은 뒤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4:22-2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방언의 가치성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고전 14:9).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 은사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 '기도'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을 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그가 말하는 방언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은사도 받도록 같이 간구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같이 간구 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한다면 그는 영으로는 기도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도 같이 받아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도 기도 할 수 있어야 교회적으로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를 같이 받지 못했다면, 통역의 은사를 받은 다른 사람이 통역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통역자가 필요 없었지만,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방언은 각 나라 지방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인 알지 못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통역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찬송을 올리며, 감사 드릴 수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고전 14:15-17, 26-28).
이 모두는 방언 그 자체만 가지고는 유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하면 기도하든지, 찬송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로 하는 것인데, 그 은사에서 보여지고 있는 표적을 인하여서는 자기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영적 성장에는 도움이 받는 유익이 되지만 통역의 은사가 함께 행해지지 않고서는 교회적으로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방언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은 다른 은사와 더불어서, 그러니까 다른 은사 -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 와 합력하여서 개인의 신앙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시는 것으로서 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몸을 고르게 하는 것과 같이 교회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십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입니다. 은사는 철저히 교회론적 관계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교회 내에서 방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다루어진 일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신앙 교리적 문제로 인해 분쟁 속에 놓였습니다. 파당, 음행, 결혼, 우상제물, 성찬, 은사, 부활에 관한 오해 곧, 무지로 인해서였습니다. 이 중에서 방언은 은사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가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해를 끼치는 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부터 14장에 걸치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방언 문제를 다룹니다. 그만큼 방언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 언급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신령한 것 - 은사 ; 특별한 재능 - 에 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도가 되기 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는데 지금도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인데, 그럴 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인데, 그렇거든 다음의 사실을 잘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신령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그들이 받은 신령한 은사를 인하여 예수는 주이심을 신앙고백 하는 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함께 주님의 모이신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선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상에 이끌려서 신령한 은사를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그들의 내세우는 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이 됩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에 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방언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방언의 공통점은 그 성격이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게 하여서 무엇인가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에는 각기 독특한 특징을 짓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이 사도행전에서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나, 성령이 임한(성령 세례를 받음) 표적(이적)으로서의 방언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은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은사 방언」인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에 의해서 되어졌습니다. 말하자면 한 성령으로부터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롬 8:15-16).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자연적인 육적 재능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주어진 재능이기 때문에 '은사', 곧 신령한 재능, 특별한 재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입니다. 이는 거듭나면서 타고나는 재능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마다 은사를 지니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에 대한 첫 번째 이해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써 주어졌다는 것이 은사에 대한 두 번째 이해입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직임 입니다. 은사는 각 개인에게 있어서 재능으로 주어졌으며, 그 재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 교회적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섬기는 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셨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한 성령에게서 왔다는 말입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직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들은 다 한 주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직임을 주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인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으로서 일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직임은 어떤 일을 위해 기능,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각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세워 나가는 일로써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교회적 은사로 주어졌습니다.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는 은사는 개인 표적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으로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은 누군가가 복음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또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알아가도록, 또는 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권면이나 조언을 해 주는 일을 하는 재능을 말합니다. 마치 노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보듯이 말입니다. 그분들이 해 주는 말들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산 체험에서 나오는 산 지식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터득된 지식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믿고 함께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일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삶에 대한 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지혜를 공급해 주게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는 재능을 이름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 곧 장차 있을 일에 대한 계시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 를 깨닫고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 어떠한 큰 일이 행해질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바라보며 따르는 것을 이름입니다(참조. 고전 13:2).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병 고치는 은사'란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이때에 병 고치는 은사는 그것이 개인에게 나타난 것이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병든 사람이 있어 고통을 겪고 있음으로 해서 온 교회에 근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병 고치는 재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병든 자를 위해 섬겨 봉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온 교우가 병 고치는 은사의 나타남을 인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온 교우가 합력하여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더욱 전심전력합니다. 이처럼 병 고치는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시에 나타내시게 한 것입니다. 은사, 곧 재능과 직임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로써 있는 것이기에 성도가 필요로 할 때 나타나지고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그렇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어떤 한 개인에게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병 고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은사를 베푸신 것이지 한 개인의 능력으로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병 고치는 은사가 개인의 능력이 되며, 개인의 의와 자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셨습니다. '능력 행함'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이름인데 이는 사실 병 고치는 은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권세에서 행해진 것이었으며, 그리고 사도에게서 행해진 것으로서 곧 사도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요, 그 사도는 교회의 초석으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 세워 나가는 속에서 그 권세를 권위 있게 행사한 것이기에 교회적 권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인데, 교회가 각 지역에서 세워진 이후부터는 때때로 어떤 사람에게 사도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셔서 그로 하여금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행해짐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병듦과 귀신들림은 죄의 현상적 사건으로서 있는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주어지는 것이며, 사단의 지배로 인한 억압의 고통의 현상으로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일로서 어떤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새로운 능력으로 임하는 현상으로서 이적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니까 고쳐주고 다시 병드시니까 또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도 귀신을 쫓아내 주었더니 다시 귀신들려 있고 그래서 또 쫓아내 주고 하는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의사의 능력으로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에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그가 성령에 의하여 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현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행해지는 것을 통해서 기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유익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한 능력을 각기 어떤 한 특정인에게만 행하여 나타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개만 그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능력이 나타나져야 할 자리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그 능력이 나타나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된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인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에서는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지게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행해져 나타납니다. 그럴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병 고치는 능력, 이적 행하는 능력, 이런 은사는 한 사람에게 개인의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가 요구되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이 은사를 나타내셔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셔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만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영웅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豫言입니다만 預言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장차 있을 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맡기셔서 그에 관하여 미리 보고 그래서 앞서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말하는 예언은 예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설교의 특성을 띱니다. 예언을 풀어서 자세히 그 뜻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 자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그들에게서 나타나집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은사가 직분으로 주어져 행해졌을 때 그들은 사도였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교사였습니다(고전 12:28).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자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주십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인 각 나라 지방의 언어를 뜻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언어를 뜻합니다. 이 방언이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 차이가 있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나 다 같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언어'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알지 못하는 언어로 방언을 하게 하셨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 하는 자의 방언은 방언을 말하는 자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방언의 언어가 한 종류의 같은 언어가 아닌 방언 하는 자마다 전부 다르게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방언 하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비밀 곧, 하나님의 신비한 일에 관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은 그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14:4). 그러므로 그의 경건한 생활을 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유익을 주는 도움으로 표적을 보여주시는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때 여기서의 방언에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방언 그 자체만 하는 것 가지고는 개인의 경건 생활을 도와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유익 외에는 교회 전체적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 전체가 거룩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기를 성장시킬 분입니다(고전 14:4).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곳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함으로써, 이후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내는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있은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이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닌 믿음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이때 은사를 받아 방언을 말하는 그 자신은 믿음이 강화되고 상승하는 유익을 얻지만, 이것이 다른 믿음의 형제들에게 동일한 유익을 이끌어내는 '표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방언의 내용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래서 방언이 믿음을 돕는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지만,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지금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로잡힘 속에서 하나님과 신비한 일에 관하여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의 '표적'을 보고 있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누리는 유익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예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편이 교회적으로는 훨씬 더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하기 때문에 아직 믿지 않는 자들뿐만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신자 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요,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양심이 찔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털어놓은 뒤에 무릎을 끓고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4:22-2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방언의 가치성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고전 14:9).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그 은사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 '기도'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고전 14:2). 이때 방언을 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그가 말하는 방언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은사도 받도록 같이 간구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같이 간구 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한다면 그는 영으로는 기도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도 같이 받아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도 기도 할 수 있어야 교회적으로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를 같이 받지 못했다면, 통역의 은사를 받은 다른 사람이 통역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 내에서 행해진 방언은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에 있은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통역자가 필요 없었지만,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방언은 각 나라 지방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인 알지 못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통역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로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찬송을 올리며, 감사 드릴 수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고전 14:15-17, 26-28).
이 모두는 방언 그 자체만 가지고는 유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하면 기도하든지, 찬송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로 하는 것인데, 그 은사에서 보여지고 있는 표적을 인하여서는 자기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영적 성장에는 도움이 받는 유익이 되지만 통역의 은사가 함께 행해지지 않고서는 교회적으로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방언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은 다른 은사와 더불어서, 그러니까 다른 은사 -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 와 합력하여서 개인의 신앙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시는 것으로서 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몸을 고르게 하는 것과 같이 교회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 온전히 만들어 가게 하십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입니다. 은사는 철저히 교회론적 관계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에서 있은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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