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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이란

신지학이란
자료출처
http://kr.dcinside10.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religion&sn=on&ss=off&sc=off&keyword=오컬트  

신지학입문 (An Outline of Theosophy)
저자: C.W. 리드비터
번역: 김은경

1. 서론

신지학이란?

인류는 위대하고 근원적인 진실, 즉 신의 존재와 본질 그리고 신과 인간과의 관계 및 인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오랫동안 토의하고 논쟁하고 질문해왔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견해는 극단적으로 달라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고 상대방의 신념을 비웃었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 없이 대중 속에 뿌리깊게 심어진 에매한 추측을 통해 형성된 주장으로, 잘못 세워진 전제에서 차용된 불합리한 추론 덩어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때때로 납득할 수 없으며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주장은 위와 같은 주장과 다양한 종교의 근간이 된다.
이처럼 일반적인 견해로 굳어진 현상은 부자연스럽지는 않을지라도 결코 진실은 아니다. 세상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명백한 사실들이 많이 있다. 신지학은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에서와 같이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의 과제일 뿐이다. 신지학을 종교로 볼 수는 없지만, 고대의 철학이 종교와 관련을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신지학은 종교에 반하지 않는다. 종교를 해명할 뿐이다. 신성의 관점에서 무가치하고 신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불합리한 모든 것을 부정하며, 합리적인 것이라면 개개의 사항이나 혹은 전부를 받아들여 설명하고 강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한다.
신지학은 이와 같은 가장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진실(이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진실의 위대한 체를 말한다)을 보여준다.
신지학은 모든 다양한 종교에 대해서 고려하고 각각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신앙의 조항들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량한 사람이라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자질을 계발하고 그리고 어떤 악을 피해야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처럼 실제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는 힌두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와 회교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가 똑같이 가르친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신지학을 우주에 관한 지성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지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지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그것은 명백한 과학으로 연구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의문을 품고 수고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온 바로는 신지학은 자연에 관한 위대한 사실로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우주 한 모퉁이에 대한 개략적인 도식이다.
 
신지학이 알려지게 된 경로
이러한 도식이 알려지게 된 경위를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지식을 발견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발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 세계적으로 특정한 어떤 곳에서 일시적으로 잊혀진 적은 있었을지라도 언제나 인류에게 알려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신의 계획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고도로 진화한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특정한 어느 한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된 나라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제자가 있었다. 세상에는 광범위한 원리가 언제나 알려져 있었고 제자들은 그 광범위한 원리를 이끌어낸 특별한 근본 법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도로 진화한 사람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신지학의 가르침은 그러한 인물들의 영감을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서양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때때로 무지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진실은 이미 오래 전에 공표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지식의 소유자들이 부당하게 침묵을 지킴으로 세상으로부터 이 지식을 은폐시키려 했다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 지식은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견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이제 와서야 겨우 이러한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유럽 전역은 극단적인 미신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미함과 편협한 맹신에 대해서 반발이 일어나자 그 반동으로 무신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또 다른 맹신과 편협함일 뿐이다. 이제 겨우 우리들 중의 몇몇 겸손하고 도리를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시인하고 최근에서야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한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인 탐구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신지학 협회는 이들이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위대한 진리를 읽고 배우고 내적으로 숙고할 수 있도록 대중적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협회의 임무는 그런 가르침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불쾌한 영원의 유죄선고를 내리는 부족하고 교만한 선교사와 같은 환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자신의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에 대한 앎은 우리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보다 수월하게 견딜 수 있게 하고 죽음에 편안하게 직면하게 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램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개요는 수 천년 동안에 걸쳐 널리 알려져 왔으며 지금도 알려져 있다. 자부심에 찬 서구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며, 우리들 앞에 그런 지식의 단편이 제시되면 비웃는다.
다른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혼에 대한 과학도 자신의 전 생애를 그 지식을 탐구하고자 바친 사람만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을 아데프트라고 부른다. 그들은 완벽한 관찰력을 얻기 위한 내적인 힘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컬트적인 연구와 현대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연구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과학적인 연구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그 수단과 방법을 향상시키는데 투여하지만, 오컬트적인 연구에서는 관찰자를 발전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관찰 방법
이러한 것을 계발시킬 수 있는 자세한 사항을 설명하려고 하면 이러한 입문 소책자로는 감당할 수 없다. 신의 전체적인 도식에 대해서는 다른 신지학 저서에 이미 충분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전적으로 진동의 문제라고만 언급하겠다.
외부 세계에서 사람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오감의 진동을 통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감 외에 어떤 감각에 민감하다면, 그는 보통 사람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즉, 흔히 말하는 천리안이 되는 것이다.
천리안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시각보다 조금 더 확장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묘한 진동에 보다 더 민감해지면 그렇게 계발된 여러 가지 기능을 통해 그의 의식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되면, 비록 실제로는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새로운 부분일 뿐이지만, 그의 눈앞에 보다 정묘한 물질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에 대해서 평생동안 배우게 된다. 비록 이러한 우주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기능을 계발하면, 그와 같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그런 관찰을 반복할 수 있으며 타인의 관찰과 비교하고 정리해서 법칙과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모든 일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없이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필자가 앞서 말한 아데프트는 이러한 것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행하여 왔었으며, 우리 신지학도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라 많은 노력을 해왔다. 우리들이 탐구한 결과는 아데프트에 의해 주어진 지식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상당히 보완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되면, 가장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전적으로 새로운 거대한 지식의 체가 우리에게 열린다. 그렇게 되면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서서히 해결되고 신비롭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명확해진다.
지금까지는 아래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분리되어 연결되지 않은 파편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는 진실의 작은 부분만을 보았기 때문에 신비롭게 느껴졌지만 위에서 바라보게 되면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논쟁을 일삼아왔던 많은 의문들, 예를 들면 '인간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가'와 같은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다. 이러한 지식은 또한 지금까지 교회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천국, 지옥, 연옥 등에 대한 참다운 설명을 해주고 이치에 맞고 질서정연한 신의 계획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무지를 제거하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게 해준다.
이제부터 이러한 신의 계획을 설명해 보겠다.
 

5. 윤 회

시초에 혼은 보다 미세한 운동에는 영향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진동을 전할 수 있는 보다 조잡한 질료로 만들어진 옷을 둘러야만 한다. 그래야만 멘탈체, 아스트럴체, 육체를 계속해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탄생 혹은 윤회이며 물질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온갖 종류의 경험이 육체를 통해 거쳐간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교훈을 얻고 자신의 내부에 있던 자질들을 개발시켜나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응축되어, 걸치고 있던 옷들을 차례로 벗는다. 맨 처음에 벗어야 할 것이 물질 육체이다. 이와 같이 물질 육체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우리들은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무지함으로 인한 추측에서와 같이, 죽음이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다.
죽음이란 단지 한 가지의 노력으로부터 철수하되 그 결과물을 가지고 철수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의 휴식이 지나고 나면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보통 일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미 말해지는 바와 같이, 진정하며 보다 폭 넓은 세계에서 보면 단지 하루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어떤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보낸 하루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껏해야 70이나 80년 정도 지속되는 짧은 인생으로는 이 놀랍고 훌륭한 세계에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충분히 배울 수가 없다.
신은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모든 것을 배우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번 다시 돌아와서 인생이라고 하는 학창시절을 다양하게 거쳐야만 한다.
모든 교과를 다 배우기 전까지는 매번 올 때마다 다른 학급과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기초교육이 끝나고 상급반으로 진학을 하면, 보다 영예로운 과정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세속적인 과정의 학교교육 자격증을 획득한 후에 주어지는 참되고 신성한 삶의 과정이다.
이것이 윤회, 혹은 재생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고대 문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대다수의 인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흄(Hume)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죽지 않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영혼이 불멸이라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윤회는 철학에서 경청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이다."1)
막스 뮐러는 인도와 그리스의 영혼의 재생에 대한 이론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학설 밑에는 무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을 최대한 신학적인 용어를 배제해서 설명한다면 가장 가혹한 철학적 시험을 견디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2)
그가 사망한 후 출간된 그의 마지막 저술에서 이 위대한 동양학의 석학은 이 교리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헉슬리(Huxley)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화에 대한 교리와 마찬가지로 윤회도 이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추에 의해 제시되는 훌륭한 논쟁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3)
그러한 연유로 현대의 저술가들은 고대의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설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할만한 과제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을 무지한 자들에 의해 파생된 이론, 즉 인간의 영혼에 이르기까지 진화한 혼이 다시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퇴화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일단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면, 인간의 혼은 신지학 저술에서 원인체(causal body)라고 말하는 체 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를 저질렀다해도, 혹은 주어진 기회를 잘못 이용했다해도 더 낮은 자연계로 후퇴하지는 않는다.
만약 학교 생활에 태만했다면, 한 과목을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전체적 진보를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몇 해전에 이 교의의 본질이 어떤 잡지에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발표된 바 있다.
"한 소년이 학교에 갔다. 그는 아주 어렸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뿐이었다. 선생님은 가장 낮은 학급에 아이를 넣고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살생하지 마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그는 살생하지는 않았지만, 훔쳤다(그는 포악했다). 하루가 다 지나자(수염은 하얗게 변하고 밤이 찾아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말했다.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배웠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에 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아직 다 배우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오너라'.
다음 날, 소년은 다시 왔다. 그러자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소년을 좀 더 상급반에 넣고 과제를 주었다.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지 말아라'. '훔치지 말아라'. '남을 속이지 말아라'.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남의 것을 훔치고 다른 이들을 속였다.
하루가 다 지나자, 그의 수염은 하얗게 변하고 밤이 찾아왔다. 그의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심을 배워야 한다. 다 배우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오너라.'
또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어린 소년은 다시 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전보다 더 높은 반에 넣고 다음과 같은 과제를 주었다.
'훔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탐내지 말라'. 그는 훔치지 않았지만 속이고 탐냈다.
그리고 하루가 다 지나자 그의 수염은 하얗게 되고 밤이 찾아왔다. 선생님(그는 신이다)은 말했다.
'훔치지 않는 것은 배웠지만 다른 것은 배우지 못했구나. 얘야, 내일 다시 오너라.'
이것이 내가 세상이라는 책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들의 얼굴과 별들로 가득한 하늘을 펼쳐서 읽은 것이다."4)
나는 이 자리에서, 윤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논쟁거리들을 제시해서 그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다. 그에 관해서는 필자보다 훨씬 뛰어난 문장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집필한 신지학 저술에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인생은 윤회라는 가설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윤회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만족할만한 가설이 나올 때까지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다른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증명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선량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신이 전능하며 사랑 그 자체라는 사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조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변에 만연해 있는 침통한 슬픔과 고뇌를 바라보며 그것은 신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러한 슬픔과 고뇌를 미리 예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니면 신은 우리가 생각하듯 사랑 그 자체가 아니거나 아예 인간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느낀다.
신지학은 신이 전능하며 사랑 그 자체라는 믿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윤회라는 기본 교의를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조화시킬 수 있다.
신의 완벽한 힘과 사랑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유일한 가설은 깊게 들여다 볼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 거친 여러 생의 체험을 통해 원시인의 상태에서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러한 과거의 여러 생에서 우리들은 선행과 악행을 모두 행하였으며 그러한 행위 하나 하나는 예외 없이 냉정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적절한 결과를 가져온다. 선행에는 언제나 행복과 더 좋은 기회가 따르고 악행에는 항상 비통함과 제약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제약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혹은 아직 영혼이 어리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견디어 내야할 슬픔이나 고통이 있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운명은 그들이 이전에 한 선악의 행위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결과인 것이다. 만물은 신성한 법칙 아래 최후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윤회라는 이 위대한 진실만큼이나 강한 반론에 부딪힌 다른 신지학의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보다 더 우리를 격려하는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진보할 시간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만큼이나 완벽해질 수 있는 시간과 기회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 삶에서 수 없이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으며, 그러한 모든 고통과 슬픔을 또 다시 겪어나가야 한다는 제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유쾌한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 간에 움츠러들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윤회는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이론은 우리를 상당히 격려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만약 그처럼 많은 전생을 보냈다면 어째서 단 하나의 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직도 차원이 낮은 한 두 가지의 외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피를 가지고 전생의 삶을 기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외피는 전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혼은 전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속한 모든 계를 완전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생의 모든 기억은 혼에 저장되어 있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적인 자질로서 표현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낮은 차원의 매체가 아니라 영혼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하면 그가 걸어온 진실하고 광범위한 삶의 모든 역사가 마치 책처럼 그의 앞에 펼쳐지게 된다.
이 주제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은 베산트 여사의 소책자인 「윤회(Reincarnation)」와 앤더슨 박사의 「윤회(Reincarnation)」 그리고 「고대의 지혜(The Ancient Wisdom)」의 윤회에 관한 장에 충분히 나와 있다. 특히 「고대의 지혜」에 나와있는 윤회에 관한 부분은 각별히 주의해서 읽어야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7. 죽 음

신지학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서 얻게 되는 중요한 결과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단순한 무지와 미신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불필요하게 겪어온 비애와 공포 및 불행은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들 사이에 번져있는 죽음에 대한 그릇되고 우매한 신앙은 지난 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을 끼쳤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앙을 불식하는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이로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과거의 생애 동안 철학적인 문제를 추구해오고 현재 신지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체 없이 그와 같은 이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비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통해 진화의 계획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진정한 위치를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 공포스럽고 어두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은 서양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 때문에 소름끼치는 공포가 수없이 많이 나타나서 거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을 정도가 되었고, 분별을 가질만한 사람들조차 비판 없이 답습해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며 불길함을 나타내는 모든 장치들(장례식 참례자, 깃털, 검은 벨벳과 비단 양복, 검은 테를 친 부고 용지 등)은 단지 이러한 것을 차용하는 사람들의 무지 이외에 아무 것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허구를 유치하고 어리석은 놀이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명복을 비는 사람들의 비통함은 친구와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이기심에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일시적인 이별의 쓰라림은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고통이 타계한 친구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이별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죽음은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여러 번 찾아왔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무시무시한 공포의 왕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우리들을 영광스럽고 고차원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황금의 열쇠를 품고있는 천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올바르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는 죽음 이 후에도 삶이 계속되고 있으며, 육체의 상실은 한 가지 의복을 벗어 던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복을 걸치고 있던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죽음이란 단순히 반 이상 물질계에 치우친 생활에서 전적으로 아스트럴적인 세계, 즉 훨씬 상위의 세계로 발전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비록 일시적으로는 헤어짐에 대해 커다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죽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커다란 이로움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그러한 이별조차 외견상의 것이지 진정한 이별이 아님을 안다.
그는 잠을 자면서 일시적으로 육체의 옷을 벗어 던지면 소위 죽었다고 하는 자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며 그들 곁으로 가서 예전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세계가 하나이며 신성한 법칙은 물질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는다.
어떤 세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한 베일 너머에서 발견될 어떤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도 않는다.
신지학 탐구자들의 저작을 통하여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체를 명료하고 충분히 도식화하여 이 물질계의 생활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진화에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주저함 없이 언제라도 그곳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고차원적인 생활에 대한 다양한 단계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러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인간이 죽어 가는 상황이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정확한 조건이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살아있는 실체로서 각자가 길러온 생각과 욕망은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에너지를 주입한 사람의 주위를 떠돌며 작용을 가한다.
그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몹시 완고하고 사악한 성격의 것이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상념들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아스트럴 세계의 거주자 중에서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 보통의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죽고 나면 쓸모 없이 되어 완전히 힘을 상실해버리고 모든 이성(理性)적인 관심은 전적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이 지상에서의 방종한 생활과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남에 대한 험담으로 보낸 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권태로운 생활에는 특정한 조건에서의 고통이 추가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생활할 때, 격렬한 육체적 욕망에 지배당했다면(예를 들어 식욕이나 성욕, 또는 폭음을 일삼는 경우), 사후 연옥의 고통을 많이 축적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물질 육체를 잃더라도 그러한 욕망과 열정까지 잃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과 열정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다. 아니, 오히려 행위로 이행되어야 하는 조잡한 물질의 무거운 분자가 없어지면 욕망과 열정은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사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이러한 욕망과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충족되지 않으며 충족될 수 없는 고통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욕망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스스로 소진해 버리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겪게 되면 지옥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운명이다. 그러나 여기에 명심해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그러한 운명은 자신이 자초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와 지속되는 기간도 자신이 정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상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러한 욕망이 어떤 강도에 이르도록 두었고 이제는 자신이 키워놓은 욕망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욕망을 제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만약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극복하기는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대항해서 싸워야할 괴물(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힘은 자신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피하거나 혹은 이러한 하급 욕망을 서서히 제거하지 않고 아스트럴 세계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욕망에 지배당한 채 또 다른 육체로 들어가 생을 시작하게 되어 주정뱅이나 호색가 또는 수전노로 태어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러한 욕망은 조절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사람에게 가르칠 수가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절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그 사람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한 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이미 내던져진 상태고 다른 기회는 잃어버린 후가 된다. 그렇게 되면 출구도 없는 악순환으로 들어서게 되고 진화는 상당히 지연된다.
신의 계획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스트럴 삶을 살면서 열정을 다 소진시키고 나면 다시 물질적 존재 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열정에 의해 탐닉될 수 있는 여지는 늘 도사리고 있다. 이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 스스로 이전의 아스트럴 삶에서 그와 같은 열정을 이미 표현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답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아, 즉 진정한 인간은 가혹한 교훈을 얻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낮은 측면이 현현되어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또 다시 추락하고 마는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내부에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르고 현명한 부모를 얻어 선한 측면을 개발하고 악한 측면을 억제해서 씨앗이 발화하지 않도록 퇴화시킨다면, 다음의 생에서는 악의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인간은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그 자리에 선을 대신한다.
반면, 지성을 겸비하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존재 상태를 이해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상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곤란을 감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유용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넓고 광활한 기회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조잡한 체를 벗어 던진 삶이야말로 생동감에 넘치고 활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러한 삶의 즐거움은 세속적인 지상의 즐거움에 비한다면 햇빛의 밝기에 대응하는 달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명확한 지식과 고요한 확신을 통해 얻은 끝없는 삶의 힘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밝게 비춘다. 비록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중심이 되며 불과 몇 년의 아스트럴 존재로서도 물질계의 생활을 통해서 이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을 구현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 앞에 또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것과 이처럼 아름다운 상위의 삶이 보다 광활한 세계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욕망과 낮은 차원의 상념들로 인해 아스트럴 삶이 좌우되는 것처럼, 고상한 상념과 고귀한 열망은 천상의 세계를 제공한다.
천국은 꿈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광의 실체이다. 또한 별들 너머 먼 곳에 있는 진주의 문과 황금 길로 치장된 어떤 도시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장차 거주하게 되는 곳으로, 이 지상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때 누구나 거쳐갔던 특정한 의식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는 없지만 영원토록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온 축복의 상태라는 관점(비록 여기에 천국을 설명하는 가장 지고하고 영적인 모든 개념의 기초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 다양한 종교를 배출하기는 했지만)으로 밖에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자연의 영역으로 지금 영위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광대하고 훌륭한 삶의 세계이며 동시에 육체로 화신하는 중간 중간에 영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베일에 드리워져 가장 지고한 천상의 모든 영광을 완전하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개발이 완전하지 않은 까닭이며 우리 자신의 제한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로부터 오는 영향은 우리에게 흘러들어 온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오컬티스트에게 있어서는 가장 평범한 사실이다.
아직도 이러한 기본적인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교 고승의 가르침을 제시할 뿐이다.
"불평하지 말라. 울지도 말고 기도하지도 말라. 단지 눈을 뜨고 보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떼어내기만 하면 빛은 온통 그대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놀라우며 그 어떠한 사람이 꿈꾸고 기도하던 것 이상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The Soul of a People, p.163.)」
저차원적인 생각과 욕망의 매체인 아스트럴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뒤에 남겨지게 되면, 사람들은 멘탈체라고 부르는 더 미세한 매체로 이루어진 보다 고차원적인 매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매체를 통해 우리들은 이와 대응되는 질료(멘탈계의 질료)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그 곳의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연옥의 시간은 지나고 나면 낮은 측면의 본성은 사라지고 지상 생활동안 힘쓰고 노력해서 얻은 고상한 상념과 열망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무리가 되어 주변을 감싸며 외부의 껍질을 형성한다.
이 껍질이 매체가 되어 사람들은 보다 섬세한 질료로 이루어진 특정한 종류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고상한 생각들은 천국의 부를 축적한 것이다.
이 멘탈계는 신성한 마음의 반영이며 물질 육체의 생이나 아스트럴 생에서 품은 생각과 영감의 힘에 비례하여 천국의 기쁨을 무한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창고이다.
모든 종교가 천국의 지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이 천국의 지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이는 천국에 대한 개념의 주요한 사항이다).
모든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신의 상념에서 스스로의 천국을 골라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보낸 생을 근간으로 하여 천상의 생활의 길이와 양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특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성격과 양의 기쁨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천국이란 그곳에서 가졌던 바로 그 의식으로 인해 최고의 영적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또한 이 세계는 열망에 대응하는 세계로서 오로지 열망의 역량에 의해서만 제약받는다.
아스트럴 생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고자한다면 「아스트럴계(The Astral Plane)」를, 천상의 생에 대해서는 「데바챤계(The Devachanic Plane)」를 참조하라.
「죽음과 그 이후(Death and After)」와 「죽음의 다른 측면(The Other Side of Death)」에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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