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정이철목사 캔톤한인교회
자료출처
http://www.cantoncrc.com/bbs/zboard.php?id=column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언어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신사도 운동으로 인해 널리확산되었고, 동시에 신사도 운동으로 인해 또한 극도로 왜곡되었다. “기름부음이 넘치는 찬양”, “기름부음이 가득한 설교”,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 ... 더불어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종이들도 번쩍인다. 기름부음은 이제 부흥과 영성을 이야기 할 때에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한약방의 감초같은 것이 되었다.
손기철장로라는 분으로 인해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기름부음에 대한 논란은 점점 더해지고 있다. 그의 치유집회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혼절한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로 쓰러지고,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혼절한 사람에게 속으로 흘러드러가고 ..." 라는 손기철 장로의 설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기름부음은 구약시대에 제사와 다양한 의식에서 행해졌던 실제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예식에서, 하나님이 친히 쓰실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시는 임직식에서 기름부음의 예식이 있었다. 신약의 보이지 않느 성령은 구약의 보이는 기름부음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다. 성령 안에서 구약의 기름붓는 행위의 이유와 목적이 다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기름을 붓는 예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의 신령한 역사하심을 표현하고 상기하기 위해 구약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라는 표현은 기름이 부어지듯이 임하시는 성령을 상상하게 하는 표현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은 대부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쓰여졌다.
기름을 붓는 행위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친히 선택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직분과 사명을 부여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는 소년 다윗을 장래의 왕으로 미리 선포하실 때에, 제사장이 제사 업무를 시작하도록 임직식을 할 때에 그 상징으로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쉬아" (또는 "메시야")가 헬라어 "크리스토스"로 바꾸어 표현되었고, 그것이 다시 영어로는 Christ, 한국어로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예수님의 실제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를 한국어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구원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 구원하여 낼 하나님의 사명자로 선택되어 지신 분이었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말하는 기름부음의 시작은 대략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에 사망한 존 윔버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빈야드 운동”, 또는 “거룩한 웃음운동”, “Toronto Blessing”이라고 하는 이단적인 성령운동으로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 빈야드 운동은 시작될 때부터 엄청난 논란을 동반했다. 집회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바닥에 벌렁 넘어져서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미친 망나니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떨고, 구르고, 뛰고, 그리고 바로 여기서 최초로 아말강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일도 발생했다.
마치 오늘 날 캔자스시티가 신사도 운동의 전진기지 IHOP 기도원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것처럼, 그 당시 토론토도 빈야드 집회로 인해 유명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능력을 받으려는 목사들이 줄을 이었고, 특히 한국의 목사들도 많이 토론토를 찾았다. 그러나 곧 예배 중에 일어나는 그 괴이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수년을 고민하다가 대부분의 건전한 교단들은 그 이상한 일들을 사탄의 장난을 간주하고 더 이상 참여하거나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80년대 말에 한국의 대부분의 교단들도 이 운동을 이단으로, 또는 이단에 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소속 교회의 목사들에게 참여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이후 떳떳하게 빈야드 운동, 존 윔버 목사, 토론토 축복을 언급하는 사람은 한국에서 거의 사라졌었다.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단사상에 감염된 수상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여전이 그 운동의 불을 끄지 않고 지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캘리포니아의 빈야드 교회의 담임목사 존 윔버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당시 Fuller Seminary에서 교회성장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였다. 존 윔버는 1978년 애너하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고, 일찌감치 빈야드 운동에 큰 매력을 느낀 인물이다. 그는 특히 빈야드 운동을 교회에도 도입하여 단시간에 개척교회를 6천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킴으로 크게 유명해진 목사였다.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연구하는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의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성령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서로 친분을 쌓기 시작하다가, 1982년에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를 공동강사로 초청하여 “기적과 교회성장”이라는 과목을 Fuller Seminary에 개설하였다.
이때부터 빈야드 운동의 거짓된 사탄의 이적이 버젓한 성령의 이적으로 각색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한차원 더 높이 추아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전 세계 교회들이 공인하는 실천신학의 전당 Fuller Seminary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결국 이 때부터 피터 와그너는 대다수 복음적인 신학자들의 공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동료교수들로부터 파문에 가까운 수모를 당하면서 일생을 명예롭게 봉사했던 그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훗날 그가 출판한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의 한 부분을 보면 그는 당시 죽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있는 플러를 개혁하기 위한 영적전쟁을 수행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탄으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당했지만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참된 교회개혁 운동인 신사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소망이 없는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셨고 했다.
모든 이단들을 정죄당할 때에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별의 별 소리를 다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한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죽은 사탄의 종들이 사탄에게 두통거리가 되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일치단결하였구나!” 피터 와그너도 그랬다.
당시 빈야드 부흥집회에서 일어나는 괴상한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단정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피터 와그너가 선택한 용어는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of Holy Spirit)이었다. 제 삼의 성령의 물결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은 190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운동과 빈야드 집회에서 나타난 괴상한 정체불명의 현상들을 같은 성령운동의 연장선 상에 두기 위한 음모였다.
피터 와그너는 1900년대 초에 일어난 최초의 오순절 운동을 성령의 제 1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때의 중심이슈는 성령세례와 방언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70년에 다시 한 번 강하게 나타난 은사주의 운동을 성령의 제 2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때의 은사주의 운동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아닌 성공회에서 최초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때의 부흥운동에서는 방언과 성령세례에 대한 관심이 이전의 오순절 운동 때보다는 매우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의 이상한 현상들을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라고 부르면서 그 연장선상에 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이전의 성령운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빈야드 부흥회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방언이나 성령세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현상들만 일어났다.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 이전의 어떤 성령운동에서는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는 성령의 제 3의 물결에서는 성령세례나 방언이 아닌 기름부음이 모두에게 나타난다고 했고, 그래서 전혀 이전과 다른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기름부으심”(Anointing)이라는 언어가 빈야드 운동의 상징어가 되었고, 기름부으심의 결과는 “능력”(Power)이므로 능력이라는 단어도 빈야드 운동의 핵심언어가 되었다.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능력치유”(Power Healing), “능력축사”(Power Encounter)와 같은 용어가 전면에 등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서 “기름부음이 가득한 예배”, “기름부음이 넘치는 설교”,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 “기름부음 받은 찬양” ... 이런 Anointing ministry가 대단한 능력의 사역인 것처럼 각광 받으면서 급속히 세계 교회에 확산되었다.
이것이 요즘 여기저기에서 홍수를 이루는 기름부음 사역의 시작이다. 토론토의 그 무당스러운 일들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전 세계 교회에 빨리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거대한 신사도 운동의 거대한 물줄기 중의 하나이고, 사탄의 영들이 그 운동에 합류하는 교회들 속으로 빨리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 둔갑되어 섬김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영적전쟁이었는데, 복음주의 교회들이 너무나도 둔감했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런 웃기는 기름부음 운동에 합류하지 말아야 하고, 함께 외치지도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그 분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빈야드 부흥집회에서 나타난 그 이상한 현상들과 성령님이 과연 상관이 있기나 한가? 하는 의혹에 대해서 아무도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예배 중에 나타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라는 비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배 중에 타나나는 일은 모두 성령의 선물이고, 그것으로 인해 기쁨과 행복이 있으면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이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교회 안에서 심지어 예배 중에서도 미혹의 장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귀가 성령을 가장하여 영혼을 속이고 노략질할 수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성경은 분명하게 사탄의 영들이 성령을 가장하여 교회에 침투할 수 있으며, 더욱이 각종 이적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그 가르침을 좇아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역사하는 그 영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영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열매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그리스도를 높이며 더욱 말씀안에 견고히 세워지는 믿음이 되어가는 열매가 있어야 이적을 드러내는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 말씀에 그다지 신경쓰지 쓰지 않는다. 자신들과 교회에서 나타나는 일은 모두 성령의 이적이라는 단순하게 믿는다. 그래서 보이는 모든 환상과 들리는 모든 예언을 다 버리지 않고 귀중히 여긴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의 근원이다. 환상과 예언과 이적으로 그 즉시 기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삶에 힘이 생기면 성령의 역사라고 더욱 분명하게 믿는다. 그러니 쉽게 마귀의 밥이 되지 않을 길이 있겠는가?
그들에 의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그 신령한 언어가 사실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더러운 영들의 장난질을 포장하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동일하게 그들과 함께 그 기름부으심을 사모한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당시 그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때문이라고 정의했던 현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예배 중에 주체하지 못하고 끝없이 낄낄거리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기고, 구르고, 뛰고, 괴성을 지르고, 금이빨로 변하고 ... 이런 현상을 기름부음의 증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인터넷 You Tube가 발달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 실상을 몰랐다.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는데 ... 빤히 벌어지는 일을 안 믿을 수도 없고 ... 하면서 복음적인 교회들은 분별하지도 못했고 바르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내가 속해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CRC 교단의 Lake Errie 노회에서도 미국 목사들이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돌아보니 성령의 능력, 성령의 임재, 기름부음 ... 이런 그럴싸한 단어들만 거론되었지, 그 집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실상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으로 내 세워지는 멋있는 단어들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You Tube가 발달해서 인터넷에서 쉽게 그 망측한 현상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면, 그런 것을 가지고 세미나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목사들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대유행이 되고 있는 기름부음 운동의 시작은 마귀가 벌이는 지저분한 미혹의 장난들을 성령의 역사로 격상시키는 음모였다. 사탄이 교회를 공략하는 미혹을 성령의 거룩한 기름부음이라고 각색한 피터 와그너를 과연 천국에서 볼 수는 있을까? 지금 기름부으심이라는 말에 신비감을 느끼면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내막을 알고나 있을까? 그 낄낄대고, 기고, 구르고, 비틀고, 뛰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그 현상이 이제는 불교, 이슬람, 힌두교 ... 지구상의 대부분의 유력종교들의 수련장에서 다 나타나고 있는 장면을 직접 본다면, 그래도 그런 기름부음을 더 사모하고 싶을까?
지금도 인터넷 상에는 빈야드 집회의 불온한 영적인 일들을 담고 있는 수 많은 You Tube 영상들이 많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중에 몇 개를 다운 받아 우리 게시판에 올려놓았다. 어느 틈에 한국에까지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기름부음을 받고자 하는 분들은 이 영상들을 직접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기름부음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내 가문의 자손만대까지 그것과 상관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장차 나의 사돈이 될 가문의 자손만대까지, 그리고 그 사돈의 팔촌까지 그런 기름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기를 바란다.
둘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사역(Anointing ministry)이 “성령충만”이라는 고귀한 깃발을 짓밝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상태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육체와 정신의 모든 질서와 기능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인도되어지고 조절되어지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보다 더 사모해야 할 더 아름다운 것이 또 있는가? 이보다 가치있고 아름다운 은혜가 또 어디에 있을까? 성경은 어디에서도 성령충만으로는 부족한 영역을 보충하는 별도의 성령의 역사, 기름부으심에 대해서 말하는 곳이 없다. 성령의 임재를 구약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는 하지만, 영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분은 오직 한분 성령님이다. 성령 안에서도 다른 기능과 특화된 분야를 담당하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성경은 성령님이 충만히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는 상태인 “성령충만”외에 성령의 또 다른 모양의 임재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와 신사도 운동가들은 능력을 타나내는 별도의 성령의 임재인 “기름부음”를 구별하여 말한다. 성령충만으로는 역부족인 부분을 보충하는 특별한 성령의 임재를 가정하고서, 그것을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려면 기름부음의 대가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능력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성령충만하여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를 닮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고 해도 귀신과 병과 각종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좀 약하다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구별하고 선별하여 기름부음을 주시어 특화된 권능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성품에서, 인격에서, 비젼에서, 인생의 목적에서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강하지 못하다! 이런 논리가 성경과 공존할 수 있을까? 성령충만할지라도 귀신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라니 기름부음 받아야만 귀신을 이길 수 있다! 이런 이론이 성경과 함께 교회에서 설파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기름부음은 바로 이런 이야기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열광하고 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답게 동행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이미 죄, 귀신, 고난, 각종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저항력을 받은 존재이다. 아무 노력이나 힘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자신도 노력하고 힘을 다하면 다 될 수 있다. 만일 안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참기름, 콩기름, 공업용 기름 ... 어떤 집회에서 무슨 특이한 기름부음을 더 받는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믿음과 삶이 아닌가?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의 사역은 성도들도 하여금 성령충만의 귀한 가치를 외면하게 한다. 성령충만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의 향기가 진정한 성도의 능력임을 망각하게 한다. 그 대신 무쇠팔을 가진 마징가 제트 같은, 우람한 근육으로 무지무지한 기관총을 특수부대 요원 람보 같은 힘쓰고, 굴복시키고, 무너뜨리는 전투적 영성만 강조해버린다. 이것이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중대한 왜국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성령님과 성도의 신령한 교제를 이상하게 변질시켜 버리는 것이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의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이다.
그들의 Anointing ministry로 인하여 성도들의 변질된 신앙의 모습은 이제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관련된 분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조심스럽지만, 내가 직접 본 실상을 이야기하자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해 인터콥의 비젼스쿨에 청강하면서 1박2일의 정해진 수련회에 갔었다. 비젼스쿨은 모든 훈련 때마다 30분정도 뜨겁게 찬양하면서 시작하는데, 그 시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날 밤 초저녁에도 뜨겁게 찬양했다. 내 앞의 두 여성도들이 특히 더욱 열정을 다해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그 두 분은 손으로 특이하고 숙달된 솜씨로 춤을 추며 찬양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나 다른 집회에서 통상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금 유별낫고, 요란스러웠고, 민망하였다.
각자의 감정이고 스타일이려니 ... 하고 찬양하는 데에만 신경썼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분이 요란한 손춤을 추며 찬양하다가 그대로 스르륵 넘어졌다. 무척 놀랬다. 어떤 조치를 빨리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옆에서 손춤을 추며 찬양하는 그 분은 다 지켜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있었고 태연했다. 놀라는 나만 촌스러웠고 그 순간 나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었다. 서서 찬양하시다가 앉으시더니 한 손으로 넘어진 분을 안고 다른 손으로 더 열심히 유난스러운 그 춤을 추며 여전히 찬양에 열중하고 계셨다.
한 분이 쓰러지고서 상당한 지난 후에 간신히 기회를 얻어 “괜찮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그때 나는 그 분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만져주고 계십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정말 황당스러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쁜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참 요란스럽고 민망한 손 춤, 너무나도 깊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찬양, 그리고 쓰러져 축 늘어진 육신 ...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하셨다. 성령의 만져주신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기가 이런 모임이었던가 ..." 그때 처음 약간의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는 그런가 했을 뿐이다.
내 말은 이런 현상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일상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건강한 일인지에 대한 우리의 차분한 생각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것이다. 사실 누가 이런 일이 마귀가 하는 일이라고 100% 단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자신있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장담하겠는가? 말 그대로 그 속에서 역사하는 그 영과 그리고 그 영과 교제하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관적이고 신비한 일이다. 이런 현상이 무당의 굿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타종교의 신비적인 집회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그리고 대다수 복음적인 교회들이 우려하는 이단성있는 집회에서는 유독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에 조심하자는 것이다. 그런대 신사도 운동 그룹은 이런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일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높이고 추켜세면서 온통 기독교의 물을 흐리고 소란을 피운다.
그 현란한 손 춤이 바로 '성령춤"이라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언찬양"과 더불어 상당한 영성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신령한 현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높은 경지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그토록 근심했던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였다. 신비스런 황홀경에 빠져보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대단한 영성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명하게 높이 세우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에 대한 즐거운 순종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람직하고 건강한 믿음의 활동과 생활태도이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흔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사도 운동가들은 상시적으로 천사를 보거나, 아무데서나 유창하게 방언을 하거나, 다양한 영적인 신비체험과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을 높은 수준의 영성으로 이야기 한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근심하고 바로 잡고자 애썼던 고린도교회의 문제거리들은 그들은 사모하고 전파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러니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교회의 그런 현상들은 이미 근처의 이방신전에서 늘상 나타나는 일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방신전의 영들이 천사로 가장하여 분별없는 성도들을 장악하고 고린도교회까지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의 능력은 그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다는 점에서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주시는 분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은혜에 기초하여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성도에게 나누어 주신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 기초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령을 부어주신다. 물론 우리의 소원과 신앙과 간구를 그리스도는 아시고 들으신다.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임재, 성령충만, 성령의 권능 ... 어떻게 표현하건 간에 성령의 은혜를 수여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사람이 이를 행한다는 발상은 엄청난 변질의 시작이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어떤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서 그대로 따라가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도 운동에 투신한 교회들에게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다. 과연 성령의 역사를 어떤 프로그램으로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어떤 교회에게 성령이 그렇게 종속된다는 것일까?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은 나무 말뚝에라도 정성을 들이고 절을 하면서 이적을 바라면 그곳에 신이 임하는 법이다. 오래 묵은 큰 나무, 큰 바위 ... 우리 조상들을 얽어맸던 모든 잡신들과 미신들의 패턴이 다 그랬다. 그 일들과 신사도 운동가들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과 꼭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귀신들이 일하기 좋은 멍석이 따로 없을 것이다.
또한 신사도 운동가들은 기름부으심의 능력이 사람으로부터 직접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다. 우리말로 하면 “능력의 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먼저 기름부으심을 받아 능력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전달한다. 손으로 안수하고, 어떤 물체를 대어서 전달하는 시늉을 하고, 중국 무협영화처럼 손으로 공기를 밀고 쏘는 모양을 취하고 ... 이는 모두 기름부으심을 먼저 받은 자가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전이하는 임파테이션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들의 집회에서 이런 행위가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를 금방 알수있다.
빈야드 집회, IHOP 계열의 집회, 알파코스, G12 ... 신사도 운동의 성향을 가진 모든 곳에서 임파테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한는 임파테이션의 성경적 근거는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서 바울이 손수건을 던져 귀신을 내 쫓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시대의 특수상황에서 일어난 단 한 번의 기적을 오늘 날의 상황에서 일반화시키는 억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임파테이션을 시행할 때에 바로 그 현상들이 흔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순간 쓰러지고, 넘어지고, 울고, 기고, 환상을 보고 ... 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기쁨과 환희를 맛본다. 바로 그것 때문에 미쳐가고 더 중독되고 거기에 몰입되는 것이다. 그 기적과 감정의 경험이 없다면 사람들은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의 장난이라고 한다.
기름부음의 전도사이신 한국의 손기철 장로도 당연히 임파테이션을 인정하고 반대하지 않는 분인 것 같다. 그 분이 미국의 대표적인 신사도 운동가인 릭 조이너에게 두 번이나 안수(임파테이션)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강의와 책들에서는 존 윔버, 피터 와그너, 릭 조이너 ... 이런 빈야드와 신사도 계열의 사람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과 대가들로부터 그는 강력한 영감을 얻었고 그들의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아 먹으면서 신사도운동의 영성가로 성장한 분이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늘 날 한국교회에 그들의 기름부음의 능력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신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임한다. 소원하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주께 간구해야 한다. 누가 안수할 때에 권능이 임할지라도 능력을 부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권능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가 아니라 먼저 받은 사람으로부터 직접 받을 수 있다는 발상이 성경의 어디에서 눈꼽만큼이라도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 그들끼리의 임파테이션에서 나타나는 그 능력이 과연 성령의 능력이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안수와 교회에서 행해지는 안수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임파테이션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의 임파테이션 사상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무서운 일이 있다. 서열과 계보가 자리잡는 다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임파테이션을 받으면 그 사람 아래로 들어가는 서열이 정해진다. 임파테이션을 통해 능력을 전달한 사람이 전달 받은 사람에 대해서 영적인 지배권과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임파테이션을 통해 자신에게 쓰러짐, 진동, 입신, 환상 ... 등이 나타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대항하거나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기름부으심”이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신사도 운동가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변질되었고, 그 practice도 변질되어 버렸다. 만일 복음주의자들이 계속 사용한다면 확실하게 성도들에게 그 바른 의미를 주지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같은 분위기에서 쓸려갈 뿐이라면, 그 용어를 거부하고 오직 “성령충만”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를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정이철목사 캔톤한인교회
자료출처
http://www.cantoncrc.com/bbs/zboard.php?id=column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언어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신사도 운동으로 인해 널리확산되었고, 동시에 신사도 운동으로 인해 또한 극도로 왜곡되었다. “기름부음이 넘치는 찬양”, “기름부음이 가득한 설교”,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 ... 더불어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종이들도 번쩍인다. 기름부음은 이제 부흥과 영성을 이야기 할 때에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한약방의 감초같은 것이 되었다.
손기철장로라는 분으로 인해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기름부음에 대한 논란은 점점 더해지고 있다. 그의 치유집회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혼절한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로 쓰러지고,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혼절한 사람에게 속으로 흘러드러가고 ..." 라는 손기철 장로의 설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기름부음은 구약시대에 제사와 다양한 의식에서 행해졌던 실제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예식에서, 하나님이 친히 쓰실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시는 임직식에서 기름부음의 예식이 있었다. 신약의 보이지 않느 성령은 구약의 보이는 기름부음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다. 성령 안에서 구약의 기름붓는 행위의 이유와 목적이 다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기름을 붓는 예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의 신령한 역사하심을 표현하고 상기하기 위해 구약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고”라는 표현은 기름이 부어지듯이 임하시는 성령을 상상하게 하는 표현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은 대부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쓰여졌다.
기름을 붓는 행위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친히 선택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직분과 사명을 부여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는 소년 다윗을 장래의 왕으로 미리 선포하실 때에, 제사장이 제사 업무를 시작하도록 임직식을 할 때에 그 상징으로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쉬아" (또는 "메시야")가 헬라어 "크리스토스"로 바꾸어 표현되었고, 그것이 다시 영어로는 Christ, 한국어로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예수님의 실제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를 한국어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구원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 구원하여 낼 하나님의 사명자로 선택되어 지신 분이었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말하는 기름부음의 시작은 대략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에 사망한 존 윔버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빈야드 운동”, 또는 “거룩한 웃음운동”, “Toronto Blessing”이라고 하는 이단적인 성령운동으로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 빈야드 운동은 시작될 때부터 엄청난 논란을 동반했다. 집회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바닥에 벌렁 넘어져서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미친 망나니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떨고, 구르고, 뛰고, 그리고 바로 여기서 최초로 아말강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일도 발생했다.
마치 오늘 날 캔자스시티가 신사도 운동의 전진기지 IHOP 기도원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것처럼, 그 당시 토론토도 빈야드 집회로 인해 유명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능력을 받으려는 목사들이 줄을 이었고, 특히 한국의 목사들도 많이 토론토를 찾았다. 그러나 곧 예배 중에 일어나는 그 괴이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수년을 고민하다가 대부분의 건전한 교단들은 그 이상한 일들을 사탄의 장난을 간주하고 더 이상 참여하거나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80년대 말에 한국의 대부분의 교단들도 이 운동을 이단으로, 또는 이단에 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소속 교회의 목사들에게 참여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이후 떳떳하게 빈야드 운동, 존 윔버 목사, 토론토 축복을 언급하는 사람은 한국에서 거의 사라졌었다.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단사상에 감염된 수상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여전이 그 운동의 불을 끄지 않고 지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캘리포니아의 빈야드 교회의 담임목사 존 윔버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당시 Fuller Seminary에서 교회성장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였다. 존 윔버는 1978년 애너하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고, 일찌감치 빈야드 운동에 큰 매력을 느낀 인물이다. 그는 특히 빈야드 운동을 교회에도 도입하여 단시간에 개척교회를 6천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킴으로 크게 유명해진 목사였다.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연구하는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의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성령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서로 친분을 쌓기 시작하다가, 1982년에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를 공동강사로 초청하여 “기적과 교회성장”이라는 과목을 Fuller Seminary에 개설하였다.
이때부터 빈야드 운동의 거짓된 사탄의 이적이 버젓한 성령의 이적으로 각색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한차원 더 높이 추아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전 세계 교회들이 공인하는 실천신학의 전당 Fuller Seminary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결국 이 때부터 피터 와그너는 대다수 복음적인 신학자들의 공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동료교수들로부터 파문에 가까운 수모를 당하면서 일생을 명예롭게 봉사했던 그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훗날 그가 출판한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의 한 부분을 보면 그는 당시 죽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있는 플러를 개혁하기 위한 영적전쟁을 수행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탄으로부터 무수한 공격을 당했지만 승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참된 교회개혁 운동인 신사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소망이 없는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셨고 했다.
모든 이단들을 정죄당할 때에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별의 별 소리를 다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한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죽은 사탄의 종들이 사탄에게 두통거리가 되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일치단결하였구나!” 피터 와그너도 그랬다.
당시 빈야드 부흥집회에서 일어나는 괴상한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단정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피터 와그너가 선택한 용어는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of Holy Spirit)이었다. 제 삼의 성령의 물결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은 190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운동과 빈야드 집회에서 나타난 괴상한 정체불명의 현상들을 같은 성령운동의 연장선 상에 두기 위한 음모였다.
피터 와그너는 1900년대 초에 일어난 최초의 오순절 운동을 성령의 제 1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때의 중심이슈는 성령세례와 방언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70년에 다시 한 번 강하게 나타난 은사주의 운동을 성령의 제 2의 물결이라고 했다. 이때의 은사주의 운동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아닌 성공회에서 최초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때의 부흥운동에서는 방언과 성령세례에 대한 관심이 이전의 오순절 운동 때보다는 매우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의 이상한 현상들을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라고 부르면서 그 연장선상에 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이전의 성령운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빈야드 부흥회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방언이나 성령세례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현상들만 일어났다. 낄낄거리고, 뱀처럼 기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 이전의 어떤 성령운동에서는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는 성령의 제 3의 물결에서는 성령세례나 방언이 아닌 기름부음이 모두에게 나타난다고 했고, 그래서 전혀 이전과 다른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기름부으심”(Anointing)이라는 언어가 빈야드 운동의 상징어가 되었고, 기름부으심의 결과는 “능력”(Power)이므로 능력이라는 단어도 빈야드 운동의 핵심언어가 되었다.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능력치유”(Power Healing), “능력축사”(Power Encounter)와 같은 용어가 전면에 등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서 “기름부음이 가득한 예배”, “기름부음이 넘치는 설교”,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 “기름부음 받은 찬양” ... 이런 Anointing ministry가 대단한 능력의 사역인 것처럼 각광 받으면서 급속히 세계 교회에 확산되었다.
이것이 요즘 여기저기에서 홍수를 이루는 기름부음 사역의 시작이다. 토론토의 그 무당스러운 일들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전 세계 교회에 빨리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거대한 신사도 운동의 거대한 물줄기 중의 하나이고, 사탄의 영들이 그 운동에 합류하는 교회들 속으로 빨리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 둔갑되어 섬김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영적전쟁이었는데, 복음주의 교회들이 너무나도 둔감했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런 웃기는 기름부음 운동에 합류하지 말아야 하고, 함께 외치지도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그 분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빈야드 부흥집회에서 나타난 그 이상한 현상들과 성령님이 과연 상관이 있기나 한가? 하는 의혹에 대해서 아무도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예배 중에 나타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라는 비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배 중에 타나나는 일은 모두 성령의 선물이고, 그것으로 인해 기쁨과 행복이 있으면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이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교회 안에서 심지어 예배 중에서도 미혹의 장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귀가 성령을 가장하여 영혼을 속이고 노략질할 수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성경은 분명하게 사탄의 영들이 성령을 가장하여 교회에 침투할 수 있으며, 더욱이 각종 이적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그 가르침을 좇아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역사하는 그 영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영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열매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그리스도를 높이며 더욱 말씀안에 견고히 세워지는 믿음이 되어가는 열매가 있어야 이적을 드러내는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 말씀에 그다지 신경쓰지 쓰지 않는다. 자신들과 교회에서 나타나는 일은 모두 성령의 이적이라는 단순하게 믿는다. 그래서 보이는 모든 환상과 들리는 모든 예언을 다 버리지 않고 귀중히 여긴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의 근원이다. 환상과 예언과 이적으로 그 즉시 기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삶에 힘이 생기면 성령의 역사라고 더욱 분명하게 믿는다. 그러니 쉽게 마귀의 밥이 되지 않을 길이 있겠는가?
그들에 의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그 신령한 언어가 사실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더러운 영들의 장난질을 포장하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동일하게 그들과 함께 그 기름부으심을 사모한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당시 그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때문이라고 정의했던 현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예배 중에 주체하지 못하고 끝없이 낄낄거리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기고, 구르고, 뛰고, 괴성을 지르고, 금이빨로 변하고 ... 이런 현상을 기름부음의 증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인터넷 You Tube가 발달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 실상을 몰랐다.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는데 ... 빤히 벌어지는 일을 안 믿을 수도 없고 ... 하면서 복음적인 교회들은 분별하지도 못했고 바르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내가 속해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CRC 교단의 Lake Errie 노회에서도 미국 목사들이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돌아보니 성령의 능력, 성령의 임재, 기름부음 ... 이런 그럴싸한 단어들만 거론되었지, 그 집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실상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으로 내 세워지는 멋있는 단어들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You Tube가 발달해서 인터넷에서 쉽게 그 망측한 현상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면, 그런 것을 가지고 세미나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목사들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대유행이 되고 있는 기름부음 운동의 시작은 마귀가 벌이는 지저분한 미혹의 장난들을 성령의 역사로 격상시키는 음모였다. 사탄이 교회를 공략하는 미혹을 성령의 거룩한 기름부음이라고 각색한 피터 와그너를 과연 천국에서 볼 수는 있을까? 지금 기름부으심이라는 말에 신비감을 느끼면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내막을 알고나 있을까? 그 낄낄대고, 기고, 구르고, 비틀고, 뛰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그 현상이 이제는 불교, 이슬람, 힌두교 ... 지구상의 대부분의 유력종교들의 수련장에서 다 나타나고 있는 장면을 직접 본다면, 그래도 그런 기름부음을 더 사모하고 싶을까?
지금도 인터넷 상에는 빈야드 집회의 불온한 영적인 일들을 담고 있는 수 많은 You Tube 영상들이 많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중에 몇 개를 다운 받아 우리 게시판에 올려놓았다. 어느 틈에 한국에까지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기름부음을 받고자 하는 분들은 이 영상들을 직접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기름부음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내 가문의 자손만대까지 그것과 상관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장차 나의 사돈이 될 가문의 자손만대까지, 그리고 그 사돈의 팔촌까지 그런 기름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기를 바란다.
둘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사역(Anointing ministry)이 “성령충만”이라는 고귀한 깃발을 짓밝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상태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육체와 정신의 모든 질서와 기능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인도되어지고 조절되어지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보다 더 사모해야 할 더 아름다운 것이 또 있는가? 이보다 가치있고 아름다운 은혜가 또 어디에 있을까? 성경은 어디에서도 성령충만으로는 부족한 영역을 보충하는 별도의 성령의 역사, 기름부으심에 대해서 말하는 곳이 없다. 성령의 임재를 구약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는 하지만, 영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분은 오직 한분 성령님이다. 성령 안에서도 다른 기능과 특화된 분야를 담당하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성경은 성령님이 충만히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는 상태인 “성령충만”외에 성령의 또 다른 모양의 임재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와 신사도 운동가들은 능력을 타나내는 별도의 성령의 임재인 “기름부음”를 구별하여 말한다. 성령충만으로는 역부족인 부분을 보충하는 특별한 성령의 임재를 가정하고서, 그것을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려면 기름부음의 대가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으심>이라는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능력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성령충만하여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를 닮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드러낸다고 해도 귀신과 병과 각종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좀 약하다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사모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구별하고 선별하여 기름부음을 주시어 특화된 권능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성품에서, 인격에서, 비젼에서, 인생의 목적에서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강하지 못하다! 이런 논리가 성경과 공존할 수 있을까? 성령충만할지라도 귀신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라니 기름부음 받아야만 귀신을 이길 수 있다! 이런 이론이 성경과 함께 교회에서 설파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기름부음은 바로 이런 이야기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열광하고 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답게 동행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이미 죄, 귀신, 고난, 각종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저항력을 받은 존재이다. 아무 노력이나 힘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자신도 노력하고 힘을 다하면 다 될 수 있다. 만일 안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참기름, 콩기름, 공업용 기름 ... 어떤 집회에서 무슨 특이한 기름부음을 더 받는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믿음과 삶이 아닌가?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의 사역은 성도들도 하여금 성령충만의 귀한 가치를 외면하게 한다. 성령충만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믿음의 향기가 진정한 성도의 능력임을 망각하게 한다. 그 대신 무쇠팔을 가진 마징가 제트 같은, 우람한 근육으로 무지무지한 기관총을 특수부대 요원 람보 같은 힘쓰고, 굴복시키고, 무너뜨리는 전투적 영성만 강조해버린다. 이것이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중대한 왜국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성령님과 성도의 신령한 교제를 이상하게 변질시켜 버리는 것이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의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이다.
그들의 Anointing ministry로 인하여 성도들의 변질된 신앙의 모습은 이제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관련된 분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조심스럽지만, 내가 직접 본 실상을 이야기하자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해 인터콥의 비젼스쿨에 청강하면서 1박2일의 정해진 수련회에 갔었다. 비젼스쿨은 모든 훈련 때마다 30분정도 뜨겁게 찬양하면서 시작하는데, 그 시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날 밤 초저녁에도 뜨겁게 찬양했다. 내 앞의 두 여성도들이 특히 더욱 열정을 다해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그 두 분은 손으로 특이하고 숙달된 솜씨로 춤을 추며 찬양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나 다른 집회에서 통상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금 유별낫고, 요란스러웠고, 민망하였다.
각자의 감정이고 스타일이려니 ... 하고 찬양하는 데에만 신경썼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분이 요란한 손춤을 추며 찬양하다가 그대로 스르륵 넘어졌다. 무척 놀랬다. 어떤 조치를 빨리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옆에서 손춤을 추며 찬양하는 그 분은 다 지켜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있었고 태연했다. 놀라는 나만 촌스러웠고 그 순간 나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었다. 서서 찬양하시다가 앉으시더니 한 손으로 넘어진 분을 안고 다른 손으로 더 열심히 유난스러운 그 춤을 추며 여전히 찬양에 열중하고 계셨다.
한 분이 쓰러지고서 상당한 지난 후에 간신히 기회를 얻어 “괜찮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그때 나는 그 분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만져주고 계십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정말 황당스러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쁜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참 요란스럽고 민망한 손 춤, 너무나도 깊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찬양, 그리고 쓰러져 축 늘어진 육신 ...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하셨다. 성령의 만져주신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기가 이런 모임이었던가 ..." 그때 처음 약간의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는 그런가 했을 뿐이다.
내 말은 이런 현상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일상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건강한 일인지에 대한 우리의 차분한 생각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것이다. 사실 누가 이런 일이 마귀가 하는 일이라고 100% 단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자신있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장담하겠는가? 말 그대로 그 속에서 역사하는 그 영과 그리고 그 영과 교제하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관적이고 신비한 일이다. 이런 현상이 무당의 굿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타종교의 신비적인 집회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그리고 대다수 복음적인 교회들이 우려하는 이단성있는 집회에서는 유독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에 조심하자는 것이다. 그런대 신사도 운동 그룹은 이런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일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높이고 추켜세면서 온통 기독교의 물을 흐리고 소란을 피운다.
그 현란한 손 춤이 바로 '성령춤"이라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언찬양"과 더불어 상당한 영성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신령한 현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높은 경지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그토록 근심했던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였다. 신비스런 황홀경에 빠져보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대단한 영성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명하게 높이 세우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에 대한 즐거운 순종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람직하고 건강한 믿음의 활동과 생활태도이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흔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사도 운동가들은 상시적으로 천사를 보거나, 아무데서나 유창하게 방언을 하거나, 다양한 영적인 신비체험과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을 높은 수준의 영성으로 이야기 한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근심하고 바로 잡고자 애썼던 고린도교회의 문제거리들은 그들은 사모하고 전파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러니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교회의 그런 현상들은 이미 근처의 이방신전에서 늘상 나타나는 일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방신전의 영들이 천사로 가장하여 분별없는 성도들을 장악하고 고린도교회까지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로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의 능력은 그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다는 점에서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주시는 분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은혜에 기초하여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성도에게 나누어 주신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 기초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령을 부어주신다. 물론 우리의 소원과 신앙과 간구를 그리스도는 아시고 들으신다.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임재, 성령충만, 성령의 권능 ... 어떻게 표현하건 간에 성령의 은혜를 수여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사람이 이를 행한다는 발상은 엄청난 변질의 시작이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어떤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서 그대로 따라가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도 운동에 투신한 교회들에게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다. 과연 성령의 역사를 어떤 프로그램으로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어떤 교회에게 성령이 그렇게 종속된다는 것일까?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은 나무 말뚝에라도 정성을 들이고 절을 하면서 이적을 바라면 그곳에 신이 임하는 법이다. 오래 묵은 큰 나무, 큰 바위 ... 우리 조상들을 얽어맸던 모든 잡신들과 미신들의 패턴이 다 그랬다. 그 일들과 신사도 운동가들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과 꼭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귀신들이 일하기 좋은 멍석이 따로 없을 것이다.
또한 신사도 운동가들은 기름부으심의 능력이 사람으로부터 직접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다. 우리말로 하면 “능력의 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먼저 기름부으심을 받아 능력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전달한다. 손으로 안수하고, 어떤 물체를 대어서 전달하는 시늉을 하고, 중국 무협영화처럼 손으로 공기를 밀고 쏘는 모양을 취하고 ... 이는 모두 기름부으심을 먼저 받은 자가 다른 사람에게 능력을 전이하는 임파테이션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들의 집회에서 이런 행위가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를 금방 알수있다.
빈야드 집회, IHOP 계열의 집회, 알파코스, G12 ... 신사도 운동의 성향을 가진 모든 곳에서 임파테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한는 임파테이션의 성경적 근거는 사도행전 19장 11,12절에서 바울이 손수건을 던져 귀신을 내 쫓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시대의 특수상황에서 일어난 단 한 번의 기적을 오늘 날의 상황에서 일반화시키는 억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임파테이션을 시행할 때에 바로 그 현상들이 흔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순간 쓰러지고, 넘어지고, 울고, 기고, 환상을 보고 ... 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기쁨과 환희를 맛본다. 바로 그것 때문에 미쳐가고 더 중독되고 거기에 몰입되는 것이다. 그 기적과 감정의 경험이 없다면 사람들은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의 장난이라고 한다.
기름부음의 전도사이신 한국의 손기철 장로도 당연히 임파테이션을 인정하고 반대하지 않는 분인 것 같다. 그 분이 미국의 대표적인 신사도 운동가인 릭 조이너에게 두 번이나 안수(임파테이션)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강의와 책들에서는 존 윔버, 피터 와그너, 릭 조이너 ... 이런 빈야드와 신사도 계열의 사람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과 대가들로부터 그는 강력한 영감을 얻었고 그들의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아 먹으면서 신사도운동의 영성가로 성장한 분이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늘 날 한국교회에 그들의 기름부음의 능력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신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임한다. 소원하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주께 간구해야 한다. 누가 안수할 때에 권능이 임할지라도 능력을 부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권능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가 아니라 먼저 받은 사람으로부터 직접 받을 수 있다는 발상이 성경의 어디에서 눈꼽만큼이라도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 그들끼리의 임파테이션에서 나타나는 그 능력이 과연 성령의 능력이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안수와 교회에서 행해지는 안수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임파테이션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의 임파테이션 사상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무서운 일이 있다. 서열과 계보가 자리잡는 다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임파테이션을 받으면 그 사람 아래로 들어가는 서열이 정해진다. 임파테이션을 통해 능력을 전달한 사람이 전달 받은 사람에 대해서 영적인 지배권과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임파테이션을 통해 자신에게 쓰러짐, 진동, 입신, 환상 ... 등이 나타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대항하거나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기름부으심”이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신사도 운동가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변질되었고, 그 practice도 변질되어 버렸다. 만일 복음주의자들이 계속 사용한다면 확실하게 성도들에게 그 바른 의미를 주지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같은 분위기에서 쓸려갈 뿐이라면, 그 용어를 거부하고 오직 “성령충만”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를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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