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해야할운동

신사도 운동의 장군기도

신사도 운동의 장군기도
정이철목사  캔톤한인교회
자료출처
http://www.cantoncrc.com/bbs/zboard.php?id=column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은 중보기도에 강하다. 동시에 그들의 중보기도의 스타일은 좀 유별나고 염려스럽다. 좋은 믿음이라면 뭐든 예수님과 닮아야 한다. 꼭 닮지는 않아도 분위기는 비슷해야 한다고 본다. 과연 중보기도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을까?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 승귀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위해 친히 길게 중보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장은 떠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망을 두고 지상에 남겨두는 연약한 제자들은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다.
   “천군천사들은 이제부터 나의 연약한 제자들을 지킬지어다!”, “베드로를 시험에 빠뜨리려는 영은 떠날지어다!”, “아버지여! 사탄의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회복할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주소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빌라도 ... 이스라엘의 유력한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어둠의 권세들은 이제 결박을 풀고 떠날지어다!" ... 이런 유형의 기도의 패턴은 예수님의 마지막 중보기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중보기도에 관하여 가장 많은 가르침을 제시했고, 자신의 사역 속에서 자주 강력하게 중보기도를 Practice하신 또 한분이 있다. 늦게 예수님을 알았으나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사도였던 바울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위해, 그리고 아직 복음을 전하지 못한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위해 자주 중보기도했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마게도냐지역에 왕 노릇하며 영혼들을 사냥했던 어둠의 영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굴복할지어다!”, “이제 아테네의 땅과 영혼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의 어린 영혼들을 사냥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통해 일하는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 이런 전투, 대결, 점령, 패배, 승리가 압도적인 특징이 되는 중보기도 패턴은 바울에게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신사도 운동가들의 중보기도는 그간 교회가 보고 경험하고 실습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중보기도이다.
   기도는 믿음의 최고봉이다. 아름답게 성숙해진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보기 좋은 기도의 봉우리가 솟는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서 신령한 기도의 봉우리가 솟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기도는 그 사람의 믿음과 영혼의 건강을 잴 수 있는 정확한 Barometer이다. 어떻게 기도하는가? 얼마나 기도하는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는 곧 그 사람의 영혼의 질이요 향기요 무게이다. 그래서 좋은 성도는 신령하게, 바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기도하는 성도이다.
   기도의 분위기가 매우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약한 것도 아니고, 게으르게 믿는 사람도 아닌데, 기도가 별스럽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의 영이 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이 진리의 말씀을 먹고 자랐다면 그럴 수가 없다. 하나님의 건전한 영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였다면 그 사람의 기도가 건강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기도만큼 그 사람의 영혼의 성품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은 없다.
   남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한다. 과연 보통의 인간이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다. 내가 속한 한국의 교단에서는 인간의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참된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주신 특권일 뿐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물하신 은혜이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남을 향하여 봉사하고 섬기도록 주신 은총이다. 
   나도 중도기도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100% 옳고 바르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말로서 그 보다 더 익숙하고 좋은 말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말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와 섬김의 행동으로서 단순기도이다.
   신사도 운동의 심각한 해악이 바로 여기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분야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중보기도 운동을 전개한다. 중보기도 스쿨, 중보기도 세미나, 중보기도 학교 등의 프로그램이 많이 발달해 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바로는 그들의 중보기도를 통하여서도 매우 강력한 사탄의 장난이 일어난다. 매우 효과적으로 성경이 유린되고 있다. 그들의 중보기도 사역을 통하여 일어나는 복음의 변질은 정말 심각하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중보기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간추려보겠다.
   첫째,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는 이미 수상한 경지에 도달한 “기도장군”들만의 특수기도이다. 내가 그들을 “기도장군”이라 부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는 독립되고 고정된 영적능력과 권세로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돌파한다. 기도장군들이 정말 그러한 능력을 가졌는지? 기도장군들의 그런 자세가 성경과 일치하는지? 에 대한 논의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나는 다만 그들이 그런 요상스런자세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기도이건, 남을 위한 기도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다. 우상종교에서는 기도하는 인간이 더 중시된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도가 극에 달하면 하늘도 뚫린다! 는 사상은 기독교의 기도와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우리가 1년 365일 동안 목이 터지도록 기도한들 꼭 그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게 하셔야 한다는 의무를 지신 적이 없다.
   열심히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적은 기도하는 자신과 자신의 기도자체에 대한 착각이다. 중보기도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해 주신다는 그 위대한 사실이다. 기도응답의 기쁨이 힘써 기도한 사람의 열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중대한 믿음의 변질이 시작된다.
   남을 위해 기도하여 응답으로 그가 변화되고 구원 받는 것을 보는 기쁨이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쉬운 질문 같으나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 기쁨은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일치하는 기도를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대하여 주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령께서 바르게 기도하도록 도우심으로 인해 응답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의 비밀이며 특권이다. 그리고 모든 과정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과 마침은 언제나 겸손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사상에 고취되어 중보기도하는 분들은 독립된 영적권세를 소유하여 이미 큰 장군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자신이 기도해서 영적인 흐름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 하나님을 설득하여 원하는 상황을 임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위임한 권세로서 외치고 선포하면 항상 그대로 된다고 선언한다.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받드는 기도의 청지기라는 의식도 없다. 강조점은 오직 기도하는 자신과 자신의 대단스러운 중보기도 그 자체이다. 
   신사도 운동에 고취된 사람들의 중보기도는 대부분 이런 성향을 띠고 있다. 많은 중보기도학교라는 곳에서 이런 가르침이 전파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들을 때에 귀가 번쩍 뜨인다. “기도의 이런 신비한 능력을 왜 그 동안 몰랐을까?”, “우리 목사님은 도대체 그 동안 뭘 가르치는 거야?” 라며 기도에 본격적인 열성을 쏟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영혼을 변질시키는 메카니즘의 출발이다. 그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믿음의 성향이 나쁘게 변질되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이 신사도 운동의 색채가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여기저기에서 무성한 소문이 피어나고 있는 말썽 많은 어떤 선교단체가 있다. 그 선교단체가 시행하는 2달 일정의 단기 훈련 과정에 참여했었다. 때마다 다르겠지만, 그때에는 중보기도에 대한 강의가 별도로 있었다. 모임 때마다 선교 대상이 되는 종족들과 각 종의 중요 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뜨겁게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신사도 운동의 전형적인 중보기도 사상이 전파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어떤 여자 선교사님께서 하신 강의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고 ... 결코 우리의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하시지 않으시며 ...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 중보기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고  ... 이런 강의 내용을 들었었다.
   그 강의에 의하면 중보기도자들은 역사의 키를 가진 특수 비밀 엘리트 집단이다. 역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행위는 사실 이 땅의 중보기도의 결과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의 기도 없이는 일하시지 않으시기 않고, 중보기도를 따라서만 행하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망령된 사상인가? 얼마나 그럴싸한 사기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따라서 앉고 일어서는 꼭두각시이거나 종이라는 것인가? 그날 강사는 중보기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사역”을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날 밤 11:30분까지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아멘! 을 연발하였다. 성도들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나 아멘!을 연발했을까? 모르고 분위기를 따라 아멘!을 연발했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주체는 중보기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는 지상의 우주적인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가 증거하는 십자가의 복음이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즉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주체이다. 중보기도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행하는 많은 사역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중보기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라에 앉아서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하나님의 동반자 또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라고 가르쳤다. 중보기도하는 사람과 중보기도 그 자체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반열에 올려놓는 망령되고 황당한 사상이다.
   그런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교가 되었고,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강사라고 와서 성도들에게 밤이 맞도록 그런 소리를 하게 하는지 ... 그런 사람의 강의를 듣고 “000선교사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라고 감탄하는 성도들은 또 어떻게 된 것인지 ... 안타까울 뿐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진정한 중보기도의 능력은 천사들을 동원하고 부리는 것이라고 했다. 천군 천사들을 부리고 명령하여서 싸우게 하는 것이 중보기도자들의 영적전쟁의 본질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천군 천사들을 부릴 수 있도록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보기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천군천사들을 호령하고 부릴 수 있는 성경적인 원리에 대해서도 장시간 설명하셨다. 
   도대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왜 천사를 신경써야 하고, 왜 그럴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천사를 무데기로 보내시던지, 백사(White serpents)를 수 천마리씩 몰아 보내시던지 ... 뭘 보내시던지, 무슨 방법을 쓰시던지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다. 결코 우리가 해부하고 분석하고 끼어들 일이 아니다.
   하물며 감히 천사를 운운하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조종하면서 하나님 노룻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 여자 선교사는 실제 중보기도를 실습하면서 "여기에 있는 천사들은 이 자리를 지킬지어다!"라고 수 차례 마이크를 붙들고서 고함치고 명령했다. 그것도 모자랬는지 여전히 마이크를 붙들고서 한참 동안을 "엘렐렐레 우알라스데..." 유창하게 하셨다.    
   이런 현상은 신사도 운동에 빠저 허우적거리는 명망 높으신 기도장군님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귀신을 잘 분석하고 쫓아내기로 유명한 베뢰아라는 이단의 수장 김기동과 그에게서 파생된 한만영, 이초석, 유광수 등의 특징이다. 이 선교단체의 수장이 초년시절 김기동의 교회에 출석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력 때문인지 그쪽 출신들이 그 선교단체에 많이 소속해 있다는 소문은 있으나 공식적인 통계로 확인 된 바는 없다.
   한국의 이 이단들의 영적전투와 중보기도 스타일이 미국의 신사도 운동가들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의 신학적 뼈대를 정립한 변질된 신학자 피터 와그너가 김기동의 교회를 자주 방문하면서 그의 사상을 많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김기동의 이단적인 귀신추방 이론과 중보기도 사상이 부흥하는 교회의 비밀을 연구하는데 열심이었던 피터 와그너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미국과 세계의 신사도 운동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귀신분석과 추방에 대해서 일가견을 보유하였다는 한 부류의 한국의 이단이 세계로 널리 뻗어나간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없는 이단은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이 없어 사지가 근질거리는 이단사냥꾼들이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이단을 이단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도 바른 목사의 도리가 아니다. 이단은 신앙을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핍박자이다. 이단은 그릇되게 믿도록 말씀을 변질시켜 적용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과연 그런 변질된 중보기도를 가르치는 그런 곳이 이단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악날한 이단인가에 대해서는 정도를 논하는 것은 가하지만, 문제 될 일이 아니라고 할 일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 불건전한 강의에 대해 지적하는 지역의 목사들의 말에 대해서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없이 그대로 넘어가는 그 선교단체의 대표를 우리는 함께 복음을 섬기는 믿음의 형제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일까?   
   "또 이 목사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구만! 기도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겠다는데, 왜 못 건드려서 안달이지 ..." 하시는 분들에게 다시 말씀드린다. 기도의 본질은 전능자를 향한 연약한 인간의 겸손한 간구이다. 용감하게 사탄을 때리고 누루고 앉은 자리에서 다 끝내고 해결하는 신사도 운동의 늪에 빠진 기도장군들의 장군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호소하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와 너무나도 다르다. 그 위대한 분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인기도, 묵상기도, 통성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침묵기도, 24시간 연속기도, 행진기도 ... 그리고 중보기도까지 모든 기도의 근본자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구하는 것이다. 호령하고, 명령하고, 선포하는 자세는 결코 일반적인 성경의 기도의 패턴이 아니다. 설령 그 대상이 더러운 귀신이라 할지라도 늘상 그리하면 우리가 무당하고 뭐가 다르겠는가? 그래서 원색의 색동 한복입고 방울 흔들며 이쪽 저쪽을 향해 "물러가라아~앗!"하는 그 사람들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겸손히 은혜를 구하면 다 된다. 소리치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선포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일하신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임으로 화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고정된 영적권세를 주시지 않는다. 그런 것은 도토리를 가지고 놀도록 한다는 인터넷 게임 싸이트에서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진실하게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예수님도 매우 종종 하셨던 특이한 기도를 확대하고 부풀려 적용하여 모두가 별스러운 기도장군 되도록 하는 그런 가르침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둘째, 신사도 운동에 미친 사람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 되지를 못한다. 그들은 “지성소”라는 단어를 엄청 즐겨 사용한다.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그들이 얼마나 강조하는가? 구약 시대 성전의 성소에서 항상 피어나는 향처럼 중보기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지성소의 향이라고 그들은 한 없이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피워대는 그 연기의 속성이다. 그들의 기도의 연기는 하나님께 전혀 합당하지 못한 매연이다.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드는 매콤한 연기이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위 믿음의 행동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그처럼 많이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오직 우리의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최상의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의 당연한 본분인 것이다.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하는 요인은 남들의 무관심이다. 불행하다고 호소하고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친구”, “애인”, "변심" ... 이런 단어가 핵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글에 악의적인 댓글이 올라오는것을 보면 싫어한다. 그러나 “악플”은 차라리 낫다. 더 무서운 고통은 “무플”이다. 어떤 연예인은 자신에 관한 기사에 아무 댓글이 올라오지 않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기사에 댓들을 달다가 망신을 자초했다. 찾는 이가 없으면,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리면 돈도, 집도, 명품도 ...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도 인격성을 가지셨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왔다가 가면 그만인 사람보다는 자주 기도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고 더 마음에 두시게 된다. 그래서 즐거이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더욱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들어 호감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말을 걸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즐겁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모처럼 전화를 하고서 나사 빠진 사람처럼 정신없는 말만하면 어서 끊고 싶지 않겠는가? 모처럼 전화한 사람이 시종일관 다른 사람을 욕만 해대면 참 불쾌하지 않겠는가?
   기도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도 그렇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가 하나님께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인격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신다. 그래야 그 기도가 지성소에 상달되는 영혼의 향연이다. 중보기도이건 무슨 기도이건 우리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인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의 기도에는 인격성이 너무 빈약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가 중보기도이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의 영에 세례 받은 사람들의 중보기도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방탕하게 방황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그를 향하여 진실히 중보기도도 하다면 어떠해야 할까? 중보기도자의 입술과 가슴은 가장 먼저 그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을 생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영과 심장으로 그를 위해 중보기도한다고 하겠는가? 기도 속에서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여 소망없이 죽음과 지옥을 향하여 다가가는 그 영혼의 비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움이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바른 중보기도의 가장 성경적인 요건이다. 그 대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먼 곳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호소하는 것이 중보기도이다.
   하나님은 중보기자의 마음과 기도 속에 흐르는 눈물과 연민과 탄원과 사랑을 보고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바와 그 중보기도자의 기도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시고서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중보기도자 속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렇게 하신다. 드디어 하나님은 응답하시어 그 방탕한 사람이 허무와 죄악을 깨닫고 진리 속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 과정에서 거짓의 영이 권세를 잃고 떠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고취되어 있는 사람들의 중보기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직통으로 말씀을 잘 맏는다더니 기도도 직통으로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기도할 때에 직격적으로 영들(Spiritual Power)을 겨냥한다. 중보기도의 대상에 영향을 미치거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영적인 힘을 향하여 정밀 기도폭탄 퍼붓는다. 대적해야 할 영에게 기도의 대포를 정조준하여 쏘아버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차하면 "나가라! 떠나라! 결박을 풀어라! 이제 끝이다! ..." 기묘한 싸움질을 기도의 앉은 자리에서 다 해버린다. 너무나도 비 인격적이다. 그 모양이 꼭 무당이다.  
   그들의 기도를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라! “000를 결박하여 저주 속에서 살게하는 악한 영의 권세가 깨어질지어다!”, “서울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의 영들을 물리칠 하늘의 군대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00대학 캠퍼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음란의 영들을 도말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소집되여 악한 이슬람의 거짓 영들과 배교의 영들을 대적하는 거룩한 전쟁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감동과 열매를 달고 사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실한 사랑과 희생과 섬김과 눈물과 순교를 통하여 확장된다. 이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 전도학, 선교학, 교회성장학 ... 그 모든 것은 가짜이고 사기이다. 우리 시대의 부흥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그런 유치하고 사이비적인 쌈박질 기도를 통하여 확장되겠는가? 그들의 이런 기도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그 기도의 대상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게 하는 연민과 사랑이 생겨나시겠는가?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얼굴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고서 칼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자기들의 신의 힘과 권세가 그 대상에게 그렇지 강력하게 미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헝겁으로 저주하고 싶은 사람과 같은 인형을 만들고 송곳으로 찌르면서 자기 신의 권능이 그렇게 미치기를 탄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그런 사악한 종교인들의 기도와 신사도 운동에 미친 사람들의 중보기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합당한 인격성이 결핍되었다는 면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
   신사도 운동에 미친 사람들은 어떤 특정 지역을 자기 나와바리로 삼고 우거하고 있는 “지역의 영”(Territory Spirit)을 의식하면서 “000 지역에서 왕 노릇하는 어둠의 영은 이제 땅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굴복할지어다! 이제 이 땅을 떠날지어다!”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이 같을까? 지리산에 우거하는 신령님! 태백산에 우거하는 신령님! 동해바다의 용왕님! ... 그 종교가 우리 조상들을 그렇게 붙들었다.
   그들은 어떤 선교지역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그 땅을 밝고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이 땅을 다스리면 이 땅의 영혼들을 사냥하는 사탄의 통치는 이제 종식되었다! 이제부터 이 땅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땅임을 선포한다!”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너무 비슷하다. 능력이 센 큰 무당이 만든 비싼 부적이나 유사한 물건을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집에 은밀하게 갔다두거나, 은밀히 자주하는 주문을 외우면 그 집을 몇번 돌고 가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7일 도안 돌았던 사실에서 자신들의 행동의 성경적인 근거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근거일 수가 없다. 여러면에서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은 무당스럽다. 
   그들은 또 어떤 도시의 가장 높은 빌딩이나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내려 보면서 “하나님의 영들이 가득한 거룩한 도성이 될지어다!”, “죄악과 음란과 탐욕의 영들은 다 물러갈지어다!”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 행진하면서 기도하면 사탄의 권세가 흔들린다고 믿는다. 그런데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굿하고 제사하면서 그 나라와 마을에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그들도 땅을 밝으면서 영적인 세력을 정복하고 제압한다고 믿는다. 우리 조상들을 지배했던 샤마니즘 종교가 그랬다. 정월 보름 무렵에는 요란스럽게 굿판을 벌이면서 열을 지어 행진하며 악신을 추방했고, 각 가정의 마당과 온 집의 땅을 발로 밟지 않았던가? 그것이 바로 "지신밟기" 또는 "마당밟기"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 이래서 신사도 운동이 기독교의 무당 종교로의 변질이라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고무된 혼탁한 집회에서는 큰 깃발들을 흔들면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깃발이 찬양하면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군대의 깃발이라고 한다. 마귀는 그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때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친다고 한다. 얼마나 비인격적이고 미신적 믿음인가? 이것도 너무 샤마니즘과 유사하다. 무속인들의 굿과 그들이 신성시하는 장소에 가면 가지가지 추하고 원색적의 깃발 듯이 바람에 나부낀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이라면 그분에게 드리는 기도도 인격적이어야 한다. 기도라고 해서 다 귀한 기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의 방식을 드러내는 중보기도가 진실한 중보기도이다. 많은 부분에서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의 중보기도는 정말 미신적이고 비인격적이다. 신사도 운동은 크리스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도를 효과적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신사동 운동을 마귀의 변질운동이라고 한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