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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키를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는 사회복음주의

신앙강좌 / 한국교회의 신학사조 ④

방향키를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는 사회복음주의

복음(福音: Gospel)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영육간에 구원을 얻는 복된 소식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들에게 미리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것으로(롬1:2), 이는 구원받은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저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만을 위해 살게 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기독인의 삶은 분명한 BC와 AD가 있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방향키가 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이 표류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 ‘사회복음주의자’들이다.

1. 사회복음주의의 기원과 역사

사회복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개인의 구원에만 있지 않고 집합적으로서 ‘사회의 구원’에도 있다는 말이며, 사회복음주의는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 등의 구조적 악’으로부터 그 사회 전체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는 행동주의를 가리킨다. 사회복음은 19세기 말 미국의 도시에 빈민, 범죄, 빈곤, 질병의 증가가 사회문제로 나타나자 이에 대하여 기독교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가운데 발생하였다. 이 사회복음은 공업도시와 대 도시의 부패한 사회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당시 신학적으로 좌경화된 자유주의의 옷을 입고 근본주의에 대한 공격과 자기 변호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학문적으로 화(主義: -ism)하였다. 이 당시 사회복음을 주창한 학자로는 워싱톤 글래든, 쉐일러 매튜스, 월터 라우쉔부쉬, 라인홀드 니이버 등과 같은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로서, 이들은 교회가 정치 사회 개혁에 능동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저들의 새 이상은 “구원된 사회에 구원받은 인간”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중생에 의하여 변화되기보다는 사회 제도와 환경에 의하여 바뀌어진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경향들이 개인, 기업, 단체 등의 행위에 대해 강조되었고, 경제 이윤의 동기에 대한 비난으로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 사회복음주의는 1950년대 후반부터 건전한 사회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교회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결국 교회와는 분리된 이상으로 표류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복음주의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었다. 1970년대 도시산업선교라는 이름으로 도시 공장근로자들이 받는 비인간적 대우에 관심을 갖고 노동쟁의와 군사 독재에 대한 데모로써 그 운동이 표출되었다. 이 사상에 매료된 사람들은 급진주의적 문제 해결에 포로가 되어 무정부주의자나 좌익 용공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마치 체제 전복을 노리는 세력처럼 나타났으며, 결국 본래 기독교가 가지는 복음의 균형을 상실한 채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 사회복음주의의 폐단과 교회에 미치는 영향

기독교를 용서, 화해, 구제, 치료, 전도, 선교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사회복음 자체가 불완전한 메시지인 것만큼이나, 사회복음주의는 기독교를 오해하게 하고 기독교회로 그 본래적 사명에 소홀하게끔 하는 결과를 빚는다. 미국의 많은 유력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곧 감리교회, 회중교회, 유니테리언, 퀘이커 등의 여러 교회들이 사회 활동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제거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이제는 ‘전도’가 사회활동으로 대치(代置)되기에 이르는 불완전한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방향키를 상실한 표류(漂流)하는 배와도 같다. 한국 교계에서 사회복음주의는 그 설 자리를 찾지 못하여 왔으나, 근래에 들어와 교파들과의 연합과 대화의 움직임이 일면서 다시 고개를 들며 기독교회를 코너에 몰고 있다. 기독교가 그 사회적 책임을 못한다고 비난하며, 천주교와 타 종교를 추켜세우는 것이 바로 사회복음주의의 목소리이다. 저들은 환경, 빈곤, 부패의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간의 연합을 이루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이 ‘시대의 양심’으로 자처하고, 한편 정통 기독교는 그런 사이에 시대에 맞지 않는 집단으로 분류되고 오해를 받아 복음 전파에 크나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사회복음주의가 오히려 복음의 저해(沮害)가 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실상 기독교만큼 사회에 기여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종교도 없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집단적 조직의 변화보다는 개인 구성원들의 본질적(本質的) 변화를 추구하며 개별적으로 희생(犧牲)과 봉사(奉仕)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효과가 미미해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엄청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3. 사회복음주의의 본질과 개혁주의 교회

사회복음주의의 신학적 배경은 자유주의이고, 그 본질은 비기독교적이다. 메이첸은 일찍이 자유주의를 가리켜 ‘기독교가 아닌 적(敵)’이라고 규정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다. 가룟 유다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성경은 저를 주와 관계없는 도둑이라고 정죄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책임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다. 대개 문제의 본질을 덮어두고 쟁론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복음주의의 본질은 ‘사회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을 빙자(憑藉)한 기독교회 훼파의 은밀한 공작이다. 메이첸의 말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적(敵)인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더 이상 ‘사회복음’ 이란 말에 현혹(眩惑)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사회구제 단체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오직 영혼 구령의 단체이다. 이는 개인이 본질적인 심령의 변화를 통해 사회 속에 선행의 실천적 삶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먼저 영혼이 잘 되고 다음에 그와 같이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성경적 삶의 질서이다(요삼1:2). 그것이 바로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한 삶의 방향키이다(고전10:31). <고려신학교 연수원>
 
출처:경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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