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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8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신앙독서자료

출처: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34834198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7)
요약 권영배 (2008.06.29 ~ 07.22)


C O N T E N T S

글을 열며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 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 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글을 닫으며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1. 마케팅 교회의 최고 가치는 숫자다
2. 성경은 교회의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3. 숫자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

 
 

1. 마케팅 교회의 최고 가치는 숫자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

은 옳고 그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크고 작으냐의 문제는 가치 중립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마케팅이 교회에 도입되는 순간 가치 중립적던 숫자는 모든 가치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가

마케팅에 의존한다는 것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를 떠나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숫자 너머 존재하는 초월적

transcendence가치(말씀을 통해 드러나신 하나님을 더 알아 가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

니다. 한편으로 교회가 마케팅을 의지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의 효용성은 인정하나 오류가 없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의 성경 말씀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절대성에 대한 무시 또는 부정은 현대인에게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한 채 절대적 가치로 다가오는 각종 사상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킵니다.


우리가 21세기에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주관적 감성 또는 감정에 근거하여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무엇보다도 크고 많은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옳고 진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숫자가 주는 유혹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성공 여부가 이와 같이 사람의

숫자에 좌우될 때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놓고 본질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교회가 얼마나 매력적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복음을 가감없이 전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그 방법들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2. 성경은 교회의 숫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예수님은 숫자로 사역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성령 하나님을 기다렸던 사람은 120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모든 역사를 통해

남기신 사람 수가 120여 명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집도 가족도 없이 하루 24시간 전체를 투자하며 피땀을 쏟아

개척해 3년 동안 목회한 성적이 100명이 좀 넘는 교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때 아주 ‘성공적인’목회였다고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판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숫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교회와 관련해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의 중요성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기준은 교인 수의 증감이 아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바라보실 때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우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 단 한 마디의 칭찬도 없이 오로지 책망만 듣는 교회는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심각한 자기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는 죽었는데 살아 있는 줄 알고 있고 한 교회는 가장 비참한 상태인데 스스로 풍족한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보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결코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결코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 교회에서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아서 매우 잘 채워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교인들이 스스로 살아 있고 스스로 풍족한 줄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필요의 충족이 자기 만족은 가져

왔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바른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칭찬을 들은 교회도 교인 수가 늘어서 칭찬을 받은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생명을 걸고 지켜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하는 구절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교회는 양적으로 매우 큰 교회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고 중요한 것은 책망을 받은 교회들 역시 “왜 그렇게 수적으로 성장을

못 했니?”하는 책망은 전혀 없습니다.

책망의 이유는 자기 착각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거짓 가르침의 수용입니다.


참된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교회로 직접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교회에 더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각종 마케팅 기법을 써서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그 날 집회에서

불렸던 노래의 종류에 따라 10명이 되었다 100명이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숫자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


오늘날 세계가 다 주목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흥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의 잣대로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교회들을 보고 위기를 부르짖는 사람이 많습니다. 크고 많은 것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흥이 아닌

것을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열매를 보고 똑똑히 인식해야만 합니다.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왜

개혁이 필요했습니까? 교회가 슬럼프에 빠져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는

속된 말로 엄청 잘나갈 때였습니다. 십자가 전쟁으로 교황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새로운 성전 건축을 준비하며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을 중심으로 면죄부를 팔아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세며 세계를 정복하는 가톨릭을 꿈꿀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때 개혁이 필요했습니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가 성경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부흥과 위기를 가늠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부흥이냐 위기이냐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교회가 지금 말씀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말씀 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규모가 우상이 된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속에 파고든 가장 무서운 적은 숫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우상을 만들어 내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미덕은 소비이고 소비하지 않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죄인입니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사회 속에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설 자리는 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 시대를 향해 사고

팔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의 마케팅으로 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는 또한 많고 큰 것은 이제 진리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고 큰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있다고 여전히 선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500년 전

루터가 이룬 개혁을 꿈꾸게 하실 것입니다. 루터가 500전 이룬 개혁은 숫자를 늘린 개혁이 아니라 교리의 회복이었습니다.

숫자에 대한 유혹을 바른 가르침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진리는 숫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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