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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9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신앙독서자료

출처: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34834198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7)
요약 권영배 (2008.06.29 ~ 07.22)

C O N T E N T S

글을 열며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 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 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글을 닫으며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1. 복음의 능력 회복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6) 복음 선포의 한 사례 : 바울의 아테네 전도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1. 복음의 능력 회복


(1)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의 회복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결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단단히 작정하시고 만드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믿는 것 외에는 결코 다른 길로는 믿을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말이 안되는 구원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기는커녕 도리어 너무 미련해 보여서 누군가가 그 십자가를 듣기 좋게 포장하려

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아직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간의 눈에는 아름

다울 수도 없고 믿어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를 누가 보아도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재포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 행위입니다.

(2) 복음에 대한 담대함의 회복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것이 분명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도 계속해서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그들은 분명 복음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담대

하라고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크리스천들을 순간순간 고개 숙이도록 하는 부끄러운 요소가

분명 복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인간의 눈에 어리석어 보인다는 사실, 복음이 전혀 말이 안된다는 사실이

인간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 인간의 모자람, 그리고 인간의 결핍 상태를 드러내는 증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담대해져야 합니다.

(3) 구원의 내세성의 회복


마케팅 교회 속에서 복음이 상품으로 인식되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복음의 가치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을 얻어 내는 데 필요한 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늘날 나의

현실에 유용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 속에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 현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복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하나님의 보복’으로 완성되도록 짜여진

철저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결코 복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부와 건강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하나

확실히 약속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핍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고난과 핍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 ‘하나님의 보복’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보복은 이 땅에서 고통받은 성도

들의 보복이며 핍박하던 성도들의 승리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땅에서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복음을 믿고 사용하는 순간 그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사탄이 우리가 복음이 주는 미래적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사탄은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좋은 것을 누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

귀에 속삭이는 가장 큰 두 가지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는 죽지 않아. 그리고 너는 신이야!”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속삭였던 말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바울에 대해 크게 놀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의 바울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는 중심

사상은 종말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신학은 ‘종말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준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날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는 복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바울과 같은 종말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속에 가리워진 미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4)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른 이해


오늘날 교회에서 실종된 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교회

에서 철저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은혜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상실된 복음은 결국 능력이 사라진 복음으로 교회 안에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 역사에서 두 번에 걸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처음의 진노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의 진노는 미래에 있을 심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는 한 우리에게 복음은 결코 복음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결코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거친 십자가, 인간을 모욕하는 십자가

를 부드러운 십자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십자가로 바꾸려는 마케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죄함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를 비추어 죄인 된 나의 실체를 바로 보는 데서

부터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갈망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죄의 대한 각성은 하나님을 향한 각성이어야만 합니다.
(로이드 존슨 - 율법의 선포를 통한 바른 깨우침의 중요성)


죄에 대한 교리가 없이는 바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단순히 “예수께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친구로 소개하며 놀라운 새 삶을 얘기하는 것은 복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의 핵심은 율법을 선포함으로 시작한다. 율법이 바로 전해지지 않는 복음 전도는 피상적 복음으로

흐르게된다…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인간의 죄성, 그리고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바로 보게 될 때 비로소 그는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

Iain H, Murray, The old evangelicalism, Banner of Truth, 2005, p.63

(5)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회복


왜 오늘날 마케팅 교회의 가르침이 통하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하는 회심에 대해 교회가

 ‘은혜’라는 단어 하나를 남발하며 피상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

으로 얻는 선물이지만,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회심의 특징)
   ①회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다
   ②회심은 단지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③회심은 내 자신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④회심은 행동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⑤회심한 자는 말씀의 진리를 사모한다
   ⑥회심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잡는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래도 하나님이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았습니다. 최소한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경계들을 그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케팅 교회의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에

빠진 오늘날의 사람들은 경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들. 하나님이 거룩해도 좋고 거룩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도와 주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위에 나온 사람의 경우 깜깜한 걸 싫어하니까

교회에서도 최대한 환한 방으로 인도해서 “천국은 환한 곳이네!”라는 찬양(노래)을 중심으로 전도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일단 마음이 열리고 나면, “사실은 말이야…천국에 좀 깜깜한 곳도 있어.”라는 진실을 털어놓을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어떤 종류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변함없이 거친 십자가를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회심하지 않았는데

회심한 줄 알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구원에 대해 겸허한 확신 대신 오만한 확신에 사로잡힌 경우로 철저한 자신에

대한 성찰 대신 ‘입으로 쉽게 하는 고백’과 ‘익숙한 교회 생활’을 구원의 가장 큰 증거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선한 삶이 아니라 의로운 삶임을 알 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6) 복음 선포의 한 사례 : 바울의 아테네 전도


마케팅 교회들은 복음이 세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전도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9장 20절과 사도행전 17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아테네 전도를 자주 인용합니

다.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바울은 철학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던 다소 출신답게 자신이 갖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해박함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등장하는 주요 세 단어, 삶, 기동, 존재는 그리스 철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 중에서 가장 적절한 위치에 이 세 단어를 배치함으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이 그의 말에 더욱더 빨려들어가도록 합니다. 바울이 당시의 유행했던 철학에 얼마나 정통한지를 잘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접근 방법과 관련한 해석의 두 가지>
   ①바울이 그리스 철학을 근거해 전도를 시작했듯이 우리도 세상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
   ②듣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바울이 필요 이상으로 철학적인 내용들을 설교에 포함

       시킴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입장.
그렇다면 사도행전 17장에서 당시의 철학적 접근으로 시작하는 바울의 전도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비판했던 마케팅적 사고에 젖은 희석된 복음이 아닌가요?

 

  <결론1>

새로운 사상에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오늘날의 구도자 해리를 많이 닮았습니다.

머릿속에 뭔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충족이 되지 않아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던 그들이나 물질적으로는

풍요해도 마음은 항상 텅 빈 해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그들의 언어로 접근하는

것과 오늘날 마케팅 교회가 해리들을 향해 접근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마케팅 교회는 해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고

해리가 갖고 싶은 것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철학적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사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접근

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결론2>

많은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 후 조롱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바울이 자신들

보다 더 많이 알면 알지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지적 권위는 그가 사용한 단어들과 논리로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영합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한 손에 분명 신문을 들고 그 신문을 다른

손에 든 성경에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한 손에 들어야 할 신문을 두 손으로 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신문만을 보게 될 때

교회는 진리가 사라진 뜬 구름 같은 영성만을 좇는 이상한 곳이 됩니다.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을 말하여 거룩이 없는

친절한 하나님을 소개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마저도 세상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자기 계발과 자기 치료의 메시지만이

넘쳐나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성경을 신문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성경에 비추어 조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에 분명 누군가의 마음을 열어 믿음을 갖게 하실 하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마케팅 열풍의 원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망각입니다. 비록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마케팅에 열중하는 교회는 부담스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담 없는 하나님의 친근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 인간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 주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 마케팅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더 친근해지고 만만

해졌던 성경 속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점점 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아

집니까?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거룩하신 하나님』에서 시간이 갈수록 변하는 바울의 정체성에 대해 관찰합니다.

바울은 그의 초창기 서신서에는 자신을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로 소개하다가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전서에 가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누구 말대로 자아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를 바로 보게 된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보면 볼수록 더 크게 벌어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간격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자신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바울은 더욱더 커지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실종시키지 않는 한 마케팅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필연적으로 예배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절한 하나님으로 바뀐 마케팅 교회의 예배는 단지 단어만 예배일 뿐 사실상 공연에 불과합니다.

마케팅이 원하는 예배는 나와 하나님 간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간격을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감정의

고조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난 은혜는 단지 공허한 용어로 전락하여, 죄인들이 자체적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현대적 에티켓으로 장식된 창구가 되었다. 우리의 복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났으며 수많은 대안적 자구론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의 공공 도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나 경쟁하는 사사로운 이익 사이의 흥정으로 전락

하고 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떠나 그저 단순한 오락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실재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반기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분출이자 승리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

하심을 안다는 것은 삶을 진정 있는 그대로 아는 열쇠이며, 그리스도를 본래 모습 그대로 알고, 그리스도가 왜 왔는지를

알며, 인생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를 아는 열쇠이다.

데이비스 웰스 지음, 김재영 옮김, 『신학실종』, 부흥과개혁사, 2006, pp. 438~439.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복음의 실종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종은 가장 무서운 시대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하나님의 거룩’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경계’도 하나씩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마케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사탄의 도구입니다. 마케팅은 고객이 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표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끊임없이 인간이 하나님 되도록 하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탄은 그 목표를 위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냈습니다. 바로 동양의 세계관을 서구 사상과

혼합하는 것입니다.


서구는 원래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흑과 백’을 단호하게 구별화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상은 ‘무경계’를 특징으로 한 각종 동양사상들입니다. 이 동양적 무경계의 세계관이 서양의

마케팅과 만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조차도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 중심의 가르침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심리학이 교회속에 이토록

깊이 자리잡은 것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사탄의 거짓말도 ‘믿음’

이라는 단어로 포장만 하면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연합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

성숙으로 사라져 버린 우리에게 필요한 경계를 긋기 위해 거룩한 분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심리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우리 형상의 본질인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교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로 선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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