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비성경적인 관상예배는 ‘불법’
한국 교회, 비성경적인 관상예배는 ‘불법’
2006년 1월 15일자 기독교신문 하단에 L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예배안내 광고가 게재되었다.
그 교회는 주일예배 1부 순서에 ‘관상예배’라는 것을 집어넣었는데,
예배 중에 로마카톨릭과 이교도들의 ‘관상 기도’를 잠깐 끼워넣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성경적 종교 실행이다. 그렇다면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는 3세기 수도사들이 사막의 수도원들에 갇혀 지내며 발견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자칭 복음주의 교회라는 곳들에서 이것을 수행하고 있다. 브라이언 플린(Brian Flynn)은 이 ‘사막의 교부들이 동양에서 온 누군가와 접촉하여 이 수행법들을 공유했거나 그들 스스로 우연히 (관상기도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것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이교적 실행은 우리의 교회에 아무런 실제적 반발도 받지 않고 들어와 있다.’고 했다(Brian Flynn, Running Against The Wind, p. 137-138). 또 브라이어크레스트 신학원(Briercrest Bible College, Saskatchewan, Canada)에서 “신흥 교회(emerging church)”에 관해 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신흥 교인들에게 영적 중요성을 지니는 듯 보이는 고대의 수행들은 종종 3세기에, 또는...중세의 경배극에서 발견된다’(Dr. Dale Dirkson, “Old Is New Again: The Emergent Church,” Passport Magazine, Fall 2005, Vol. 64 No. 2, p. 7). 이 기사의 저자 데일 더크슨은 신비주의 연구를 찬성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수행은 성경 밖의 동양에서 나온 것이고, 성경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관상기도를 창시한 교부들 가운데에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라는 자가 있다. 그의 저술들과 생각들은, 오늘날 기독교가 동양 종교에서 가져온 기도 테크닉을 끌어안자고 주창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머튼의 불교-힌두교적 신념들을 반영하는 다음의 글은 그의 마귀적 교리를 정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인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운명이다...이제 나는 우리 모두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환상이 범접하지 못한 무점(無點; a point of nothingness)이 있다...이 작은 점이...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이며, 그것은 모든 이들 안에 존재한다’(Ray Yungen, op.cit., pp.60,61, citing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1989, pp. 157-158). 이런 종류의 글은 비평이 거의 필요치가 않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이 개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 ‘죄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분명 사탄이 이브를 유혹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거짓말일 뿐이다. 죄인 안에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이 거하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그 죄인 안에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교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 자신도 신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중, 구루, 카톨릭 수도사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오늘날의 개신교회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의 신인 마귀에게 속아버린 것이다(창 3:15).
토마스 머튼은 관상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동양 종교의 기도 형식을 조사하기에 이르렀고, 아시아에서 온 선불교의 수도승들은 머튼에 대해 미국의 탁월한 관상기도 권위자로 평가했다(Richard Foster and Emilie Griffin, Spiritual Classics, San Francisco, CA: Harper, 2000, First Edition, p. 17.). 이 머튼의 제자 중 하나인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 복음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다)는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에 대한 고요한 관상으로, 우리는 영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인도(supernatural guidance)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divine guidance)가 아니다. 성경이 영적 세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영적 존재들에 다양한 서열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 중 얼마는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서 결코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시간 나는 여러분에게 보호의 기도(prayers of protection)를 배우고 실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모든 어둡고 악한 영들은 지금 반드시 떠나야 한다’ (Richard Foster,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CA: Harper, 1992, First Edition p. 157.)
‘복음주의자’인 포스터가 ‘보호의 기도’를 배우고 실행하라고 권하는 것은 관상기도 중에 악한 영들과 만나기 때문인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관상기도가 타락한 영들의 세계로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 않은가!
그리고 성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보호의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귀들을 만났을 때에 어찌해야 하는가! 그 마귀들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 당신과 교제해준다면 그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고후 11:14).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의 목적이 하나님과 더 조화를 이루는 것, 즉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라 한다. 그런 것은 성경이 아닌 동양 이교들의 경전들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현대의 기독교에 수용되어 점점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마지막 날들에 이와 같은 마귀의 교리들을 조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마저 부인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라. 그들은 탐욕을 품고 지어 낸 말로 너희에게서 이득을 취하리니, 이제 그들의 심판은 예로부터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졸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미혹당하고 속을 가능성에 대해 주의하고 경고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땅에서 관상기도를 실행하는 교회들은 이 점을 명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이 마귀와 접촉하는 데 사용했던 관상기도를 예배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마귀에게 경배를 드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배에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버린 ‘다원주의적 경배방식’의 흐름을 타고 이교도들의 전통 종교의식을 차용해 교회 내로 가져와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결코,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이 만든 ‘금송아지’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론과 이스라엘이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무슨 잘못을 했으며, 그들에게 진노하여 멸하시려 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오히려 부당하신 것 아니겠는가!
관상기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형식을 가져다 쓰는 것, 또 지난 2005년 9월에 ‘성경적 관상기도’를 주제로 ‘L 목사의 열린 성경대학’을 열어서 성경에도 없는 ‘호흡기도’ 같은 것을 가르친 행위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하면, ‘늘상 하는 호흡에’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마음을 싣는 것이 “최고급 기도”이다. 그들에게는, 호흡을 강하게 하면 ‘영적 전투’이고, 깊이하면 ‘성품과 내면의 변화’이고, 배로 호흡하면 ‘영적인 파워’이고, 가슴으로 하면 ‘내면의 기도’이다. 그들은 ‘머리가 혼미하고 생각이 복잡하면’ 머리로 호흡하고(‘丹월드’의 뇌호흡인가?), ‘주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충전하려면’ 마시는 호흡 기도를 하며, ‘자신 안의 악한 기운을 배출하려면’ 내보내는 호흡 기도를 한다. 이런 기도가 과연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성경에 있다면 “관련 구절”을 제시해 보라.
관상기도는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알아서 채울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악한 영 여덟”이 채우면 어떻게 하나? - 마 12:45). 관상기도는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기도한다고 한다(마귀가 들어와 기도하면 어떻게 하나?). 관상기도는 전적인 침묵을 요구하며, 언어는 물론, 마음과 생각과 “의지”까지도 침묵을 요구한다고 한다(인간이 꼭두각시인가?). 인간이 생각도 않고 의지도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기도인가!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알려주신 속칭 ‘주기도문’이 관상기도였던가?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신 것인데, 그들은 그들이 사랑한다는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인격의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진 성도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한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차지도 덥지도 않은(계 3:15)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특징을 반영해 준다 하겠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카톨릭의 수도사들이 되어 가고,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것은 성경에 무지한 교인들이 목사를 우상화한 결과이다. 이러다가는 (결코 원치 않는 일이지만) 불교의 중과 힌두의 구루와도 ‘교리’를 공유하게 될 날이 이를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에 우리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로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출처:포항에스라
2006년 1월 15일자 기독교신문 하단에 L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예배안내 광고가 게재되었다.
그 교회는 주일예배 1부 순서에 ‘관상예배’라는 것을 집어넣었는데,
예배 중에 로마카톨릭과 이교도들의 ‘관상 기도’를 잠깐 끼워넣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성경적 종교 실행이다. 그렇다면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는 3세기 수도사들이 사막의 수도원들에 갇혀 지내며 발견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자칭 복음주의 교회라는 곳들에서 이것을 수행하고 있다. 브라이언 플린(Brian Flynn)은 이 ‘사막의 교부들이 동양에서 온 누군가와 접촉하여 이 수행법들을 공유했거나 그들 스스로 우연히 (관상기도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것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이교적 실행은 우리의 교회에 아무런 실제적 반발도 받지 않고 들어와 있다.’고 했다(Brian Flynn, Running Against The Wind, p. 137-138). 또 브라이어크레스트 신학원(Briercrest Bible College, Saskatchewan, Canada)에서 “신흥 교회(emerging church)”에 관해 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신흥 교인들에게 영적 중요성을 지니는 듯 보이는 고대의 수행들은 종종 3세기에, 또는...중세의 경배극에서 발견된다’(Dr. Dale Dirkson, “Old Is New Again: The Emergent Church,” Passport Magazine, Fall 2005, Vol. 64 No. 2, p. 7). 이 기사의 저자 데일 더크슨은 신비주의 연구를 찬성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수행은 성경 밖의 동양에서 나온 것이고, 성경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관상기도를 창시한 교부들 가운데에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라는 자가 있다. 그의 저술들과 생각들은, 오늘날 기독교가 동양 종교에서 가져온 기도 테크닉을 끌어안자고 주창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머튼의 불교-힌두교적 신념들을 반영하는 다음의 글은 그의 마귀적 교리를 정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인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운명이다...이제 나는 우리 모두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환상이 범접하지 못한 무점(無點; a point of nothingness)이 있다...이 작은 점이...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이며, 그것은 모든 이들 안에 존재한다’(Ray Yungen, op.cit., pp.60,61, citing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1989, pp. 157-158). 이런 종류의 글은 비평이 거의 필요치가 않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이 개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 ‘죄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분명 사탄이 이브를 유혹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거짓말일 뿐이다. 죄인 안에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이 거하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그 죄인 안에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교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 자신도 신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중, 구루, 카톨릭 수도사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오늘날의 개신교회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의 신인 마귀에게 속아버린 것이다(창 3:15).
토마스 머튼은 관상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동양 종교의 기도 형식을 조사하기에 이르렀고, 아시아에서 온 선불교의 수도승들은 머튼에 대해 미국의 탁월한 관상기도 권위자로 평가했다(Richard Foster and Emilie Griffin, Spiritual Classics, San Francisco, CA: Harper, 2000, First Edition, p. 17.). 이 머튼의 제자 중 하나인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 복음주의자로 ‘정평’이 나있다)는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에 대한 고요한 관상으로, 우리는 영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인도(supernatural guidance)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divine guidance)가 아니다. 성경이 영적 세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영적 존재들에 다양한 서열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 중 얼마는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서 결코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시간 나는 여러분에게 보호의 기도(prayers of protection)를 배우고 실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모든 어둡고 악한 영들은 지금 반드시 떠나야 한다’ (Richard Foster,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CA: Harper, 1992, First Edition p. 157.)
‘복음주의자’인 포스터가 ‘보호의 기도’를 배우고 실행하라고 권하는 것은 관상기도 중에 악한 영들과 만나기 때문인데,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관상기도가 타락한 영들의 세계로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 않은가!
그리고 성경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보호의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귀들을 만났을 때에 어찌해야 하는가! 그 마귀들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 당신과 교제해준다면 그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고후 11:14).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것의 목적이 하나님과 더 조화를 이루는 것, 즉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라 한다. 그런 것은 성경이 아닌 동양 이교들의 경전들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현대의 기독교에 수용되어 점점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마지막 날들에 이와 같은 마귀의 교리들을 조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마저 부인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라. 그들은 탐욕을 품고 지어 낸 말로 너희에게서 이득을 취하리니, 이제 그들의 심판은 예로부터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졸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미혹당하고 속을 가능성에 대해 주의하고 경고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땅에서 관상기도를 실행하는 교회들은 이 점을 명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이 마귀와 접촉하는 데 사용했던 관상기도를 예배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마귀에게 경배를 드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배에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버린 ‘다원주의적 경배방식’의 흐름을 타고 이교도들의 전통 종교의식을 차용해 교회 내로 가져와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결코,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이 만든 ‘금송아지’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론과 이스라엘이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무슨 잘못을 했으며, 그들에게 진노하여 멸하시려 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오히려 부당하신 것 아니겠는가!
관상기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형식을 가져다 쓰는 것, 또 지난 2005년 9월에 ‘성경적 관상기도’를 주제로 ‘L 목사의 열린 성경대학’을 열어서 성경에도 없는 ‘호흡기도’ 같은 것을 가르친 행위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하면, ‘늘상 하는 호흡에’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마음을 싣는 것이 “최고급 기도”이다. 그들에게는, 호흡을 강하게 하면 ‘영적 전투’이고, 깊이하면 ‘성품과 내면의 변화’이고, 배로 호흡하면 ‘영적인 파워’이고, 가슴으로 하면 ‘내면의 기도’이다. 그들은 ‘머리가 혼미하고 생각이 복잡하면’ 머리로 호흡하고(‘丹월드’의 뇌호흡인가?), ‘주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충전하려면’ 마시는 호흡 기도를 하며, ‘자신 안의 악한 기운을 배출하려면’ 내보내는 호흡 기도를 한다. 이런 기도가 과연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성경에 있다면 “관련 구절”을 제시해 보라.
관상기도는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알아서 채울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악한 영 여덟”이 채우면 어떻게 하나? - 마 12:45). 관상기도는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기도한다고 한다(마귀가 들어와 기도하면 어떻게 하나?). 관상기도는 전적인 침묵을 요구하며, 언어는 물론, 마음과 생각과 “의지”까지도 침묵을 요구한다고 한다(인간이 꼭두각시인가?). 인간이 생각도 않고 의지도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기도인가!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알려주신 속칭 ‘주기도문’이 관상기도였던가?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신 것인데, 그들은 그들이 사랑한다는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인격의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진 성도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한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차지도 덥지도 않은(계 3:15)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특징을 반영해 준다 하겠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카톨릭의 수도사들이 되어 가고,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것은 성경에 무지한 교인들이 목사를 우상화한 결과이다. 이러다가는 (결코 원치 않는 일이지만) 불교의 중과 힌두의 구루와도 ‘교리’를 공유하게 될 날이 이를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에 우리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로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출처:포항에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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